2016.01.10 14:37
16 ● 산산조각난 가족
아버지가 종신형을 선교 받은 이후, 1944년 1월에 큰오빠가 19세 때 청주구금소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면회 갔다. 그 동안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았을 뿐이고, 오빠가 면회를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간 길이다. 설레임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면회를 신청하는데, 보도과장이 오빠를 불렀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은근한 목소리로 느닷없이 물었다.
신사참배 하겠나?
큰오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못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보도과장은 오빠의 반응에 별로 화를 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장황한 설득의 말을 늘어놓았다. 말하는 도중 그의 얼굴에는 시종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젊은 사람이 사고방식이 그렇게 꽉 막혀서야...... 네 아버지야 구식 사람이라 그렇다 치고, 지금 조선 교회 지도자들을 보아라. 아무렴 그들이 네 아버지보다 학식이 없겠느냐, 신앙이 부족하겠느냐? 그들과 너의 아버지 차이가 무엇인 줄 아느냐? 그들은 현실을 바로 볼 줄 아는 현명한 이들이다. 생각해 보아라. 신사참배가 어찌 종교의식이란 말이냐? 만약 종교의식이라면 왜 내무부 종교국에서 지휘, 감독하지 않고 문교부에서 주관하겠느냐?
보도과장은 계속 오빠를 설득했다.
이것만 보아도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국민의식을 거역한다는 건 그 마음속에 일본을 미워하고 조선을 독립시키려는 민족의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선일체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냐? 시국을 인식하지 못하고 종교의 가면 아래 민족운동을 하는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종교인이기 이전에 사상범인 까닭이다. 너야 네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잘못 받은 허물 밖에 더 있겠느냐.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신사에 절 한 번 하는데 깊이 생각할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 깊이 생각한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개만 숙이는 단순한 행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라. 자, 한번 해보아라.
보도과장은 오빠를 얼르고 달래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궤변 속에 도사린 음모를 여지없이 부서 버리고 싶지만 큰소리 내봐야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그 날은 아버지를 만나 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자리가 사상 논쟁이나 신앙 논쟁을 하는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오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인데 이 정도 말도 못 참아낸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빠는 보도과장을 너무 과소평가했고, 그 뱀 같은 보도과장은 오빠의 속마음까지 읽고 있었는지 모른다.
오빠의 간절한 소망을 간파하고 그것이 오빠의 약점이라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아무런 대답 없는 오빠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허참, 사람 말을 그리 못 알아듣나. 딱 한 번만 해보라는데도. 정 그렇다면 나도 아버지 면회 못 시켜 주겠으니 그리 알아.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는 것 아니겠나?
그 말은 오빠에게 청천벽력이다. 벼르고 벼르다 찾아온 천리 길이다.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뵈러 올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다음에 또 시간을 내어 찾아온다고 해도 이 보도과장이 버티고 있는 한 아무 조건 없이 면회를 시켜 줄 리도 없다. 오빠의 마음속으로 수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어쩔 것인가. 아버지를 만나 뵙기 위해 딱 한 번 불의를 범할 것인가, 비록 먼 길을 왔지만 깨끗이 되돌아갈 것인가.
아버지를 만나 뵙자니 신앙이 양심이 허락지 않고, 돌아서자니 아버지의 얼굴이 삼삼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제일로 싫어하는 금기 사항이 아닌가. 그러나 옥에 갇히고 나서 한 번도 뵙지 못한 아버지다. 오빠는 아버지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결국 아버지를 면회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이겼다.
오빠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형식일 뿐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니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실 것이다. 보도과장을 따라 신사가 있는 곳으로 간 오빠는 보도과장이 딴전을 피우는 동안 어물어물 고개도 숙이지 않고 돌아서 나왔다. 그러나 보도과장은 그런 오빠의 행동을 못 보았는지, 아니면 실제 행동보다 참배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만을 중시했기 때문인지, 아무 말 없이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오늘 신사참배 했다는 확인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그러면 바로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오빠는 지장을 찍었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하여 어렵게 어렵게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창백하고 깡마른 모습이지만 형형한 눈빛만은 여전했다. 오랜 옥중 생활로 인해 육신은 상할 대로 상했으나 그 영혼은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져 있었다.
큰오빠는 면회실에서 아버지를 보자마나 아버지! 하고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그런 오빠에게 울지 마라. 동인아. 우리가 이 땅에서 못 만나면 나중에 하나님 보좌 앞에서 만나면 되지 않느냐? 하며 울고 있는 오빠에게 이로의 말씀을 해주었다.
너무나 짧은 면회 시간이었다. 면회가 끝날 때 아버지는 미리 써두었던 편지를 오빠의 손에 몰래 쥐어 주었다. 그 편지를 들고 오빠는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큰오빠는 돌아오는 기찻간에서 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며 제 1,2계명을 범하는 것이니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하지 말 것,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가정예배, 새벽기도를 빼먹지 말 것, 성경 읽기에 힘쓰고 십일조를 실행할 것,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잘 봉양하고 말씀에 복종할 것 등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오빠는 그 편지를 읽으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이 확연히 깨달아지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고생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데 그러한 아버지를 만나고자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거부하는 신사참배를 하다니, 비록 형식적으로 어물어물 넘어가긴 했지만, 무슨 자랑이라고 그 사실에 지장을 찍어 남겼을까? 혹시라도 그 글을 아버지가 읽게 된다면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얼마나 쓰리고 아프실까? 갑자기 꿈을 깬 듯 오빠는 정신을 차렸다. 회한이 오빠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보도과장의 능글맞은 웃음이 떠오르고, 그에 겹쳐서 아버지의 비통해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오빠는 자신이 마귀의 시험에 빠졌으며 순간일망정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어떻게 하나님을 대할지 눈앞이 캄캄해오고 사지가 떨렸다. 하나님의 음성이 번개처럼 오빠의 머리를 쳤다. 오, 하나님! 오빠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아무리 만나고 싶은 아버지라 하더라도 신사참배만은 거부했어야 했다. 그 일로 인해 설사 아버지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만은 지켰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이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했다니...... 기차는 세차게 달려갔다.
창 밖의 숲과 새들, 아름답게 보여야 할 삼라만상이 이제는 무서운 눈초리로 자기를 노려보는 듯했다. 오빠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죄인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들어 우상에게 절을 한 죄인입니다. 하나님께 불의를 저지르고 뻔뻔하게 하나님의 이해를 구한 죄인입니다. 그 때 제 눈에 무엇이 씌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눈이 밝아지게 도와주옵소서. 그 때 무엇을 택해야 옳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빠의 회개 기도는 숫제 울음이었다. 그 때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이동 경관이 다가와 무슨 연유로 그렇게 슬피 우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오빠 옆 좌석에 앉았다. 갇혀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고 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그런데 아버지를 만났으면 만났지 울긴 왜 울어? 흥미가 당긴다는 듯 일본인 경관이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는 또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아버지가 감옥에 가게 된 이유는 신사참배 거부 때문이라고 숨김없이 털어놓고,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 신사참배에 응한 사실과 아버지의 신앙 사상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오빠는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거참,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아직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감옥에 가도 싸지. 너도 시국을 똑바로 인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네 아버지 꼴 난다.
일본 경관의 힐난에 가까운 대꾸였다.
오빠는 낮에 자신이 저지른 미욱하기 짝이 없는 죄를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시고 이 기회를 만들어 주셨거니 생각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신사참배는 죄입니다. 그것은 국민의식이 아니라 종교의식이며, 하나님 교리에 위배되므로 응하면 불경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본에서 국민의식이라고 합리화시켜도 진실은 가리워 지지 않습니다.
오빠는 그제서야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진작 청주구금소 보도과장 앞에서 했어야 할 말이다. 두려움은 피하면 피할수록 커지는 법,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겁내지 않고 당당히 죄악과 맞서는 것이 최상의 퇴치법이다. 그 사실을 오빠는 잠깐 동안 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앞서서 오빠는 그만 그 교활한 보도과장에게 속고 만 것이다. 그 일본 경관은 이런 맹랑한 녀석을 봤나 하는 시선으로 한참 동안 오빠를 노려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집 주소와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오빠에게는 이제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경찰에 잡혀간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았고 아버지처럼 감옥에 갇힌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오빠는 솔직하게 주소와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일본 경관은 수첩에 받아 적은 후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결국 그 일이 우리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동기가 된 걸 그 당시엔 오빠도 미처 알지 못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큰 상처를 입고 얼마동안 집에 편지도 안 하고 금식기도만 하셨던 것이다.
큰오빠가 청주에 다녀오고 시일이 좀 흘렀는데 북부산경찰서에서 징병을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왔다. 일본 경찰은 군대에 가면 매일 신사참배를 해야 할 터이므로 골치 아프게 어린 녀석을 오라 가라 할 필요 없이 징병 통지서를 보내버리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그 통지서는 우리 집안을 산산이 깨뜨리는 폭탄이 되어 떨어졌다.
징병에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일본 경찰이 생각한 것처럼 일본 군인이 되면 동방요배나 신사참배를 거부할 길이 없었다. 백이면 백 꼭 아침마다 절을 해야 한다. 무슨 재주로 빠질 것인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곳이 군대가 아닌가.
큰오빠는 신체검사에서 갑종을 받았다. 확실한 군 입대 예정자가 된 것이다. 몸에 병이 없고 신체가 건강하니 당연한 결과지만, 당시엔 건강하다는 사실조차도 행복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디가 한 군데 병신이 되는 게 낫지 멀쩡한 육신으로 군인이 되어 신사참배를 행하는 게 낫겠는가. 그래서 어머니는 날마다 어린 우리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기도드리곤 했다.
하나님, 우리 동인이가 징병에 끌려감으로 인해 범죄케 될 것인데 차라리 문둥병에 걸려서라도 범죄 할 기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근심과 걱정 속에 날이 지고 밝았다.
그 당시에 징병을 거부하면 바로 사형이다. 실제로 큰오빠는 목숨을 끊어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께 죄가 되는 일이니 할 수 없고 멀리 도망가 버릴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이 당할 괴로움을 생각하니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다. 큰오빠는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위해 어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작은오빠도 동참했다.
이들은 며칠 동안 밥을 굶은 채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에 매달렸다. 눈은 깊숙이 패어 들어갔고, 양 볼은 홀쭉해졌다. 기운이 다 빠져나간 육신은 흡사 무슨 허깨비 같았다. 그 때의 모습을 묘사하려니 펜이 떨려서 쓰던 글이 멈춰진다. 그 가엾고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지 않은 이는 알지 못하리라.
엄마와 큰오빠는 이러한 고통을 안고 오죽이나 괴로웠을까? 평소에 잘 먹고 잘 지낸 사람들이라면 또 모른다. 늘 부족한 식사였고 그나마 대부분의 끼니를 콩깻묵 죽으로 때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금식이라니......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 어느 날 큰오빠는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몸이지만 결연한 어조로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어머님, 제 생각은 죽어도 군대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건 바로 큰오빠의 회개의 열매가 아닌가 싶다. 거기까지 말한 후 오빠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오빠의 낮은 흐느낌의 소리만이 방안을 떠돌 뿐이다.
어머님......
오냐, 네 결심을 말해 보아라.
어머니가 먼저 침묵을 깨고 오빠에게 물었다. 그러나 오빠는 한참동안이나 대답하지 않는다.
......
말을 해보아라. 이 에미에게 못 할 말이 어디 있느냐?
불안과 긴장의 시간이 마냥 흘러갔다. 너무나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라 아무도 기침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눈치 챈 어머니는 결국 말을 꺼내었다.
알았다. 네 뜻은 식구들을 분산시키자는 것이겠지.
어머니 역시 오빠와 똑같은 결심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하긴 함께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께 매달렸으니 그 응답 역시 같은 내용일 것은 당연했다. 징병에도 끌려갈 수 없고 자해나 자살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선택의 길은 오직 한 길뿐이다.
우리 가족 각자 어딘가로 멀리 도망가 숨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길 밖에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런 의견들이 어머니와 오빠의 마음속을 오고 갔던 모양이다. 결론은 산산조각 이별이다. 고향과도 같고 낙원과도 같던 애양원을 떠나 부산 범냇골 판잣집에 정착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불평 없이 견디어 온 세월이었는데, 함께 살기는커녕 오히려 남아 있는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아버지 없는 집이지만, 비록 곤궁하고 허전한 살림살이지만 나름대로 성실히 신앙을 지키며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가족인데 이제 각각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될는지 아무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다. 어쩌면 영영 그렇게 헤어져서 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시는 못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큰오빠가 징병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고 판단했다. 오빠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한번은 속았지만 두 번 다시 안 속는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 가족을 고생시키는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길이 오히려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때 당시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나는 그런 결정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빠와 어머니의 그 결심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위대한 신앙의 산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웬만큼 굳은 믿음이 없고서는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임에 분명했다.
큰오빠를 끌고 갈 징집영장이 오늘 날아올지 내일 날아올지 모르는 판국이다. 이제 여유를 둘 시간이 없다. 기왕 결정을 한 마당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피신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고 형편에 따라 식구들을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만주 하얼빈에 사는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가기로 정해졌다. 아버지 바로 아래 작은아버지(손문준 목사)는 할아버지가 3.1만세 운동의 주동자가 되어 감옥에서 형을 살 때, 아들마저 잡아들이려는 일경에 쫓기고 쫓기다 만주 하얼빈에 정착했다.
그 작은 아버지 집으로 할아버지는 가기로 하고, 어머니와 막내는 부산 기장의 장부자 집으로, 작은오빠는 애양원에서 나온 일곱 명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옥종면 북방리 움막으로, 그리고 큰오빠는 남해 깊은 산골로 들어가 숨어버리기로 했다. 나와 내 밑의 동생은 부산 구포에 있는 애린원이라는 고아원으로 보내기로 각각 결정이 된 것이다.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곱이나 되는 식구들이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아무 대책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으니 그 저미는 가슴이 오죽했겠는가. 이제 우리 집안 공기는 어둠으로 가득 찼고, 움직이는 시계 소리도 마치 우리를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식음을 전폐했다. 초조한 시간이 자꾸만 흘러갔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별은 돌이킬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고, 슬픈 감상에만 젖어 있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이제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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