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0 14:43
25 ● 용서를 넘어선 사랑
생략
그런데 제민 오빠가 숨을 헐떡이며 급히 뛰어왔다.
아버지, 아버지. 강철민을 팔왕(八王) 카페 술집 앞으로 데려갔어요.
제민 오빠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덩달아 나 목사님의 목소리도 급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 팔왕 카페 앞이에요. 곧 사형 시킬거예요.
뭐라고? 그렇담 이것 큰일이 아니냐. 어서 가 보자.
나 목사님은 제민 오빠를 앞세우고 담당 대령을 만나려고 팔왕 카페라는 곳으로 부리나케 뛰어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 목사님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군인은 한 명도 없었다. 나 목사님은 안타까움에 속이 바짝바짝 탈 지경이다.
저 학생을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는 내 뜻이 아니오, 두 아들을 저 학생에게 잃은 동인, 동신이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뜻입니다.
죄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결정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어서 돌아 가십시오. 이제 곧 사형장으로 갈 트럭이 올 것입니다.
나 목사님은 더욱 다급해졌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담당 대령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그러나 나 목사님은 단념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아버지의 부탁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제 건성으로 대꾸해 주던 대령도 지쳤다. 지치기는 나 목사님도 마찬가지다. 이 바쁜 시기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나 목사가 귀찮아져서 대령은 정색을 하고 군무집행 방해자, 국가치안 방해자, 좌익가담 옹호자 운운하며 엄포를 놓았다.
이 말에 점점 어려움을 느낀 나 목사님은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물러난 것은 아니다. 어떤 방법을 써야 저 돌처럼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놓을 수 있을까를 마음속으로 궁리하고 있었다. 오! 하나님 어찌합니까. 손양원 목사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있도록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옵소서.
그 때 다른 군인 한 명이 들어와서 거수경례를 하더니, 지금 사형장으로 갈 트럭이 고장이 나서 한30분쯤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통보해 왔다. 이것이야말로 두 번 다시없는 마지막 기회다. 이때 나 목수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동희를......
나 목사님은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지막 카드를 내놓았다.
내 말을 실없는 소리로 받아들이는 모양인데, 지금 내 집에는 손 목사님의 장녀인 동희 양이 와 있소. 그 아이를 불러 직접 물어 보면 내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밝혀질 게요.
더 이상 말대꾸하기에 지쳤던 것일까. 아니면 트럭이 먼저 와서 속히 강철민을 사형장으로 보내버리려고 한 것일까. 담당 대령은 심드렁하게, 그러나 선선히 어디 한번 불러와 보시오 하고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팔왕 카페 앞과 집과는 5분 거리. 나 목사님은 옳다, 이때다!라고 생각하고 즉시 나를 데려가기 위해 달려왔다. 그때 나는 목사님 댁 마루에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나 목사님의 손에 붙들려 엉겁결에 팔왕 카페로 향했다. 목사님은 가는 도중에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대충 해주며 이렇게 다짐을 하는 것이다.
거기 가서 딴 소리 하면 안 된다. 꼭 아버님이 시키신 대로 말해야 한다.
이때부터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 했다.
이 놈을 죽일까, 살릴까, 죽일까, 살릴까?
열두 번도 더 변동이 왔다.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망설인 걸로 기억한다. 내 말 한 마디면 그 살인자는 별수 없이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그를 살려야 할까? 아니면 눈 딱 감고 오빠들을 죽은 그 자를 죽게 내버려둘까? 나는 뛰어가면서 수없이 갈등을 겪었다. 내 생각대로라면야 무조건 그를 죽이는 쪽으로 말을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그렇게 신신 당부를 했는데. 가슴은 터질 듯이 벌떡거렸고, 좀처럼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팔왕 카페 앞에 도착할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십 개의 눈들이 모두 나와 목사님을 주시했다. 크기는 학교 교실 만했는데 의자며 테이블 따위가 군데군데 놓여있고, 한복판에 취조를 하는 담당 대령은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나 목사님이 나를 담배 피우는 대령 앞으로 데리고 가서 의자에 앉혔다.
이 아이가 바로 손양원 목사의 큰딸이며 죽은 동인, 동신의 여동생입니다 하고 나를 소개했다.
나 목사님이 소개말이 있자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도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략 예닐곱 명쯤 되는 군인들과 학생들이 있었는데 다들 상기된 얼굴들이다. 그런데 나는 저쪽 구석을 쳐다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밧줄로 두 손이 묶인 채 학생 차림의 남자 한 명이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눈은 쭉 찢어져 위로 올라갔고 유난히 흰자가 많았다.
군인과 학생들로부터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만신창이가 된 얼굴이다. 입술이 터져 흘러내린 피가 턱 밑까지 적시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힐끔 곁눈질을 했는데 그 순간 그의 눈이 내 눈과 딱 마주쳤다. 나는 악! 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한 그 눈! 등줄기로 소름이 끼치고 온몸이 떨렸다. 그 눈은 살인자의 것이다. 나는 누구의 귀띔 없이도 직감으로 그가 강철민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강철민이다. 그는 살인자다. 내 두 오빠를 죽인 살인자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거센 분노가 내 몸을 지배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야, 이놈아, 너는 어떤 놈이기에 이 세상 태어나서 사람을 둘씩이나 죽였냐? 하며 달려들어 물어뜯고 내 오빠들을 살려내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싶었다. 무슨 죄가 있어서, 무슨 권한으로 내 오빠들을 죽였느냐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싶었다.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앞을 스쳤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안으로 안으로 삼키고 그의 눈을 피했다. 몸이 떨리는 분노를 어느 정도 가라앉혀 준 것은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의 말씀 때문이다. 그렇게 내게 애걸복걸 사정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나. 나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딸로서의 어떤 한계 같은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강철민은 그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어쩌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 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불과 10여 분만 지나면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갈 운명이다. 그런 그에게 내가 구세주로 비쳤을까? 자기가 총살한 두 학생의 여동생인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오나 내 입만 쳐다보고 있다. 어쩌면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갑자기 방만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다. 취조하는 대령이 나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실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네 이름이 뭐냐?
손동희 입니다.
죽은 손동인과 손동신이 네 오빠들이냐?
네, 그렇습니다.
지금 몇 학년이냐?
순천 매산여중 1학년입니다.
그래,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서 여기까지 왔니?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놓았다. 그제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주루룩 뺨 위로 흘러 내렸다. 내가 왜 이런 데까지 불려 다녀야 하나? 나의 마음은 설명할 수 없는 갈등을 가지고 왔다. 아버지와 딸자식 사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신앙을 고스란히 받아 소유할 수는 없었고 또 그처럼 성숙한 나이도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신앙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였다.
나는 쓰러지듯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 내 말이 끝나고, 내가 울음을 터뜨리자 강철민을 죽이려고 돌 같은 마음을 가졌던 대령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냈다.
강철민 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나 목사님도 나도 그리고 그 외에 살기 등등했던 학생들도 울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이것이 원수와 한 덩어리가 된 순간일 것이다. 이 광경이야말로 몇 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 눈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다.
이렇게 하여 강철민은 죽음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사형장에서 구출되었고, 다른 사형수들은 차에 태워져 사형장으로 갔다. 그는 기어이 우리 오빠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했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의 앞을 봐도 미웠고 뒤를 봐도 미웠고 걸음조차 꼴 보기 싫었다. 난 항시 중얼대며 아버지를 원망하고 다녔다.
네 이놈, 왜 죽였어? 왜 죽여? 내 두 오빠 살려내든지 아니면 네 놈이 자결해라. 아버지도 두 오빠가 죽고 나서 정신이 홀딱 나갔지, 저런 살인자를 살려 아들 삼겠다 하시니...... 저런 놈 죽어 지옥을 가도 더 지독한 뜨거운 지옥으로 갔으면......
몇 십 년이 흘러갔지만 새삼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앞에 전개된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며 두 아들 죽인 원수를 아들 삼겠다고 사정하던 아버지! 손 목사가 부탁한다고 해서 친구의 두 아들을 죽인 강철민을 살리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나 목사님! 국군은 국군대로 법을 주장하며 강철민을 죽이려고 했고, 두 오빠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받고 달려갔던 필자! 사랑과 법과 권리가 서로 얼키고 설키어 그야말로 이 세상을 거꾸로 돌며 걸어갔던 사람들 같다.
허나 비정상적인 사람들 같은 이들의 이면에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진리가 숨어 있다. 당시 철부지였던 필자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했지만 아버지가 던진 사랑의 폭탄은 용서를 모르는 완악한 인간사회에 죄악으로 뭉친 근원을 뿌리 채 파괴시키는 사랑의 폭탄이리라. 양식 없어 기근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 기근인 이 사회에 복수만이 최대의 승리인양 끝장을 보자는 이들에게 사랑의 폭탄이 되어 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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