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0 14:46
30 ● 야밤 중에 총소리
괴로운 날들이 15일 간 계속되었다. 잡혀 들어갈 때는 그래도 여름 기운이 남아 있어서 밤에 청할 때 추운 줄 몰랐는데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느낌이 피부에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이젠 완연한 가을이었다.
1950년 9월 28일.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뒤쪽 창살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이다. 새벽부터 감방 밖이 소란스러웠다. 소위 정치 공작대라 불리는 이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서성거리고 있고, 항상 평상복차림이던 간수들도 그 날은 군복을 입고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감방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오늘 아침 동무들을 모두 석방시켜 주기로 간부 회의에서 결정했으니 그리 알고 시키는 대로 질서 있게 따라 주기 바란다.
석방? 그 소리에 감방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석방이지만, 기다리다 지쳐 도저히 가망 없는 일로 치부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이다. 죽었던 자가 살아 돌아왔다 한들 이보다 기쁠까? 짧은 환호성과 기쁨을 감출 수 없다는 탄성, 성급하게도 서로 그 동안의 고생을 위로하는 소리들로 감방 안은 아연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란을 제지하는 간수들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눈을 부릅뜨고 감방을 감시했을 간수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달라고 애원해도 주지 않던 물도 마시고 남을 만큼 충분히 떠다 주고, 담배도 피우게 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고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감방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버지 옆에 앉아 있던 김창수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는 듯 조용히 물었다. 목사님, 정말 저들이 석방을 시켜 줄까요?
석방이 문제가 아니라네. 최후의 승리가 문제지. 그러니 기도를 많이 하게. 영혼이 멸망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간절히 기도해야 하네.
아버지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손을 힘껏 잡아 주며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했다. 두 오빠가 하얀 옷을 입고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했다.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은 자꾸만 흘러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갑자기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배식을 하려나 하고 내다보았더니 무장한 간수들과 폭도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각 방 앞에 나열해 섰다. 배식을 하려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면 드디어 석방일까?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간수들에게 눈을 모았다.
잡범들이 수용되어 있던 1, 2감방 문이 열렸다. 그들은 아마 석방되는 듯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간수들은 나머지 감방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방이 아니다. 간수들은 감방 사람들을 차례차례 밧줄로 묶었다. 묶고 나서는 강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 중 감독으로 보이는 한 명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에, 동무들 잘 들으시오. 지금 이곳 여수엔 미군 폭격이 심하니 잠시 동무들을 순천으로 압송하겠소. 그리고 폭격이 잠잠해지면 다시 올 것이오. 동무들은 동요하지 말고 우리들의 지시대로만 행동하시오. 동무들을 죽이려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소. 그러나 우리는 동무들을 죽이지 않겠소.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 미국 놈들의 종으로 만들지도 않겠소. 그러니 안심하고 우리와 행동을 같이하시오.
연설하는 사람은 그들의 지도자인 듯 했는데, 허리에 권총을 차고 일본도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단도, 일본도, 따발총 등을 들고 있는 무장폭도들이 눈들을 번뜩거리며 둘러 있어서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약 150명쯤 되는 우익 애국지사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순천에 도착하면 동무들을 교육시켜 모두 반성할 시간을 줄 것이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입을 열어 말을 한다거나 옆을 본다거나 도망가려 한다면 즉석에서 총을 쏘아 죽일 것이니 명심하시오. 라며 마지막으로 그는 아주 위엄 있게 일장연설을 마쳤다.
석방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순천에서 석방시켜 준다고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짓말을 밥먹듯하는 그들이 아닌가. 억지와 궤변과 술수에 능한 그들이 아닌가. 때는 인민군에겐 불리한 때다. 각 지방엔 연합군이 유리하게 되어 1950년 9월 28일에 완전히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인민군들은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민군들은 이 주체스러운 존재들을 미리 처치해 없애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묶인 밧줄을 꼼꼼히 확인하고 다신 단단하게 묶었다.
이때 김창수는 아버지와 함께 묶이려고 아버지 곁에 바싹 다가섰으나 어찌된 일인지 갈라졌다. 먼저 양손을 쥐로 돌리게 하고 한 사람씩 묶은 다음 옆 사람과 줄을 연결해 묶었고, 다시 앞이나 뒷사람과 줄을 연결했다. 그러니까 네 사람이 같은 조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마늘 엮듯이 엮어 가지고 무엇이 두려운지 10시가 넘어서야 순천을 향해 출발했다.
무장을 한 빨치산들이 양옆에서 총을 겨누고 감시하며 따라왔다. 아버지는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신발까지 잃어버리는 바람에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가야 했다. 이것을 본 김창수는 마음이 아팠다. 여수에서 순천까지 1백 리 길, 게다가 자갈길인데 어떻게 맨발로 걸으시려는지...... 빨치산들은 여수 시내를 빠져 나오기까지는 얌전히 잘 데리고 나왔으나 일단 시내를 빠져 나온 후엔 야수처럼 변해버리고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자 이때부터 끌려가는 이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 새끼, 넌 뭐해 처먹던 놈이야? 하며 한 마디도 저항 못하는 이들에게 고함치고 욕설을 퍼붓고 총구로 얼굴을 쑤시고 개머리판으로 등짝을 후려쳤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공연한 화풀이요, 심심풀이다. 그들은 아무나 붙잡고 시비 아닌 시비를 걸면서 두 손이 묶여 대들 수도 없는 사람들을 흡사 장난감 가지고 놀 듯했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발에 채여 가다가 넘어지고 엎어지고, 한 사람이 엎어지면 최소한 네 명은 자동으로 넘어지게 되어 있었다. 때리는 소리, 비명 소리가 아수라장이 된 이동 현장이었다.
그때가 추석날,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쯤이라 달이 유난히 밝았다. 도중에 가끔 총성이 들려오면 어떤 놈의 개새끼가 도망치다 총 맞는 구나! 하면서 이들도 도망치면 그렇게 된다는 듯 위협했다. 그들의 화풀이, 심심풀이 대상에 아버지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 당시 아버지보다 앞줄에 묶여 끌려가던 김창수는 아버지에게 가해지는 욕설과 구타를 직접 보고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들에게조차 전도를 하더라는 것이다.
동무는 직업이 무엇이오? 신경질적인 음성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굳이 직업이라면 그저 목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라, 네가 바로 감방 안에서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한다는 그 손 목사로구나. 도대체 왜 그렇게 전도를 하는 거냐? 이유가 뭐야?
예수 믿고 천국에 가자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삶은 잠깐이지만 천국의 삶은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그러니 당신도 이런 무도한 짓 그만두고 예수를 믿으시오.
하, 이런 괘씸한 놈을 봤나. 그래, 네게도 전도를 해보겠다 이 말이지? 정신 나감 놈. 천국이 어디 있어?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룰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믿고 천국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그래, 당신이나 천국 가서 잘 살아. 우리는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이야. 죽어 육신이 없어진 천국은 당신이나 믿으라고. 그 따위 허무맹랑한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천국 갔다 온 사람 본 적 있어?
사람은 보이는 것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큰 진리가 있습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사탄의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진리가 없으니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시끄럽다. 건방지게 누구에게 전도야. 보자보자 하니까...... 그리고 갑자기 총대로 치는 듯한 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버지는 윽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반동의 목사 새끼.
넘어진 아버지의 등이고 머리고 가리지 않고 무수히 발길질이 날아왔다. 옆에서 다른 빨치산까지 가세하여 마구 때리고 짓밟았다. 마지막 발악인 듯 후퇴하는 그들에게는 오직 악만 남은 듯했다. 순천 간다던 그들은 순천은커녕 여수를 조금 벗어난 미평지서 앞에 도착했을 때 일단 행렬을 정지시켰다.
동무들 잘 들으시오. 지금 달이 대낮처럼 밝으므로 미군 폭격을 피하기 위해 다 같이 갈 수 없고 10명씩 나누어 이동하기로 하겠소. 가다가 옆을 보거나 말을 하거나 도망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시오. 만일 그런 사람이 있으면 즉석에서 쏘아 죽이겠소. 얌전히 순천까지 동행해 주기 바라오.
예의 그 권총을 차고 일본도를 든 사람이 굵은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그들은 끌고 온 죄수들을 10명씩 10명씩 모두 짝을 지어 분대를 만들었다. 사람들 얼굴 위로 어쩐지 불안한 기운이 스쳐갔다.
1분대 출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앉아 있게 하고 앞줄의 10명을 먼저 출발시켰다. 그리고 한 10분쯤 지났을 무렵 갑자기 고요한 밤중에 따발총 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을 때렸다. 따따따따! 이들을 모두 죽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서늘한 가슴 위로 섬득 스친다. 극도의 공포가 찾아왔다. 그러나 폭도들은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다.
개새끼들, 어떤 놈이 또 도망치려 했구먼. 그런 놈은 총 맞아 죽어도 싸지.
도망자가 있어서 총을 쏘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도 사람들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불안해지는 마음이었다. 또 다시 이번에는 간격을 두고 탕, 탕하고 한 발씩 겨냥하고 쏘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확인 사살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불길한 예감을 담고 사람들의 고막을 울렸다.
김창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죽음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진 그 시간에도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안간힘을 다해 옆 사람에게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이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쉬지 않고 목이 터지라고 전도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때가 이르렀음을 직감했는지 몰랐다. 얼마 남지 않는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렇게 더욱더 전도에 열을 올렸는지 모른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갑자기 저 동무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하며 폭도 한 명이 쥐고 있던 총대로 아버지의 입을 후려쳤다. 이가 모두 깨지고 입안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2분대 출발.
총소리가 멎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두 번째 줄의 열 명을 출발시켰다.
아아, 그 급박한 상황, 생과 사의 기로에 서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도저히 글로 묘사해낼 자신이 없다.
1950년 9월 28일. 이날은 아버지가 순교한 날이다.
이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서울이 수복되었다고 기뻐 날뛰고 있었던가? 오랜만에 안심하고 드러누워 보는 방이라 세상모르고 쿨쿨 잠만 자고 있었던가? 아버지는 지금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데, 어째서 내게는 아무 예감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일까. 미련한 짐승처럼 잠이나 자고 있었으니. 아아, 이 죄를 어찌해야 할까. 이 불효를 어찌 갚을까.
다음은 김창수씨가 들려 준 당시 상황을 그래도 옮긴 것이다.
2분대가 출발하고 10분쯤 지나니 역시 같은 식으로 따따따 하는 따발총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멀리서 귀청을 찢는 듯했습니다. 이젠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남김없이 죽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일어서시면서 나를 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수 군, 기도하게. 어떠한 순간에도 기도를 잊지 말게. 하나님께서 힘주실 것이네. 자, 우리는 천국에서 만나세.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손 목사님 마지막 말씀이 자꾸만 귓전을 울렸습니다. 이젠 다 틀렸다, 비굴하지 않게 죽음을 맞을 준비나 하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삶의 욕망이 가슴 가득히 끓어올랐습니다.
나는 손에 묶인 포승줄을 풀어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손을 놀리고 발을 버둥거렸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하자 기적처럼 한쪽 손이 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쪽 손은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를 않았습니다. 드디어 내가 묶여 있는 3분대가 끌려갈 차례가 되었습니다. 나는 끌려가면서도 나머지 한쪽 손을 풀어내려고 바삐 손을 놀렸습니다.
대략 20˜30미터쯤 갔을 때 그들이 우리들을 과수원 길로 인도했습니다. 저들이 이유를 말하기를 지금 달이 너무 대낮같이 밝아서 미군폭격을 피하기 위해 지름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수원 길로 접어들자 바람결에 피비린내,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숲 속에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서로 줄에 엉키고 포개진 채로 고꾸라져 있었습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는 듯 가느다란 비명과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 앞을 보았을 때 주위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빨치산들이 나무숲 속에 기립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앗! 이것이 죽음이구나! 나의 손놀림은 더욱 바빠졌습니다. 그때 나는 맨 앞 왼쪽에 서 있었습니다. 저 총알이 날아오면 맨 앞의 나부터 맞고 지나가겠지. 고개를 숙이면 피할 수 있을까? 총알이 날아오기 직전이었습니다.
나는 젖 먹던 때까지의 힘을 동원해서 죽으라고 묶인 손에 힘을 주니 줄이 탁 하고 터졌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악 우리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였습니다.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앞으로 뛰어 달아났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밭두렁을 타고 어둠을 향해 달렸습니다.
뒤에서 한 놈 튀었다. 하는 소리가 날아왔습니다. 그보다 먼저 귓전을 스치며 총알이 날아왔습니다. 수 없는 총소리와 함께 나는 요란한 따발총 소리를 들으며 밭두렁에 푹 고꾸라졌습니다. 맞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 이어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허망함이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온몸을 만져보았지만 총알에 맞은 자국이 없었습니다. 다만 총알이 귀 옆의 볼을 스쳐간 듯 피가 약간 만져질 뿐이었습니다.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총소리에 놀라 다리에서 힘이 빠졌기 때문에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 반 팔 소매의 흰색 셔츠인 하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나는 흰색이 눈에 잘 띌 것 같아 교복을 벗어 던지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있는 힘을 다해 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기어갔는지 모릅니다. 온몸이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나는 산꼭대기까지 기어서 올라갔습니다. 더 이상 추격해 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바위 밑에 쭈그리고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자니 그제서야 함께 끌려갔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특히 손 목사님의 안부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내려갈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내려가다니요? 내 몸은 악몽에서 금방 깨어난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이가 맞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내려가 확인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서워 떨었고, 추워 떨었고, 기뻐서 떨었습니다. 여전히 총성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손 목사님 댁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벅철벅 개울을 지나고 뻘밭을 지나고 논밭을 가로지르며 밤길을 달려 나는 비로소 새벽에야 목사님 집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김창수씨가 말하기를 그 당시 내가 살아남은 것은 당시의 일을 증언해 줄 사람으로 하나님께 미리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가지만 해도 우리 식구와 애양원 식구들은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끌려간 이후 여기저기 갔다 오는 사람마다, 다른 이는 다 죽일지라도 손 목사만은 무사히 석방될 것이다. 손 목사는 두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자기 아들 삼았기 때문에 아무리 빨갱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감동하여 무사히 석방 될 것이다 라고 온 신풍리 애양원 근처에 소문이 쫙 나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아침에 어머니는 공교롭게도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는 불과 몇 시간 차이로 유복자를 면하게 된 셈이다. 전세(戰勢)는 시간이 지날수록 인민군에게 불리해지고 있었고,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이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에 바람결에 날아들곤 하던 무렵 이다.
9월 24일 아침부터 어머니는 애타게 아버지를 기다렸다. 갇혀 있던 사람들이 그 날 전원 석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사였다. 25일 날도 따뜻한 밥을 차려놓고 아침부터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26일도 안타까움 속에 하루가 졌다. 27일은 꼭 돌아오겠거니 했으나 역시 아버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28일, 어머니는 아들을 낳은 것이다.
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들을 안고서 여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 가닥 불길한 마음을 떨쳐 버릴 길이 없어 가슴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밤이 지나 새벽이 되었는데, 잠결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혹시나 아버지인가 싶어 정신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는 겨우 팬티만 걸친 학생이 볼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고 온몸에 흙칠을 하고 서있었다. 그가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김창수였다.
아이고, 동신이 친구 창수가 아니냐?
깜짝 놀란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희소식을 전하러 온 줄만 알았다. 어머니는 그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옷을 갈아 입혔다.
사모님, 어서 미평과수원으로 가보세요. 목사님이 목사님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순교하셨구나. 드디어.
어머니는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그래, 우리 목사님이 과수원에서 어찌 됐단 말인가?
저도 자세히는 모르나 어젯밤에 순교하셨을 것입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 하게 하시고, 자신이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애양원에 퍼졌다. 몇몇 청년들이 미평과수원에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올 시간이 되었을 때 천여 명이 넘는 나환자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애양원 긴 둑길로 몰려와서 아버지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아! 저 먼 곳에서 남자 네 명이 들것에 무엇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오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시체가 아닌가.
분명 16일전엔 살아 계시던 아버지였는데...... 8.15 해방을 맞아 청주감옥에서 석방될 때에도 바로 이 둑길로 오셨는데, 그 때 그 길이 신앙투쟁의 승리의 길이었다면 오늘 죽어서 돌아오는 이 길은 천국을 향한 개선장군의 길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아버지는 죽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 시체에는 한 알의 씨앗이 남아 있었다. 그 씨는 장차 이 세상에 무수한 열매가 맺힐 억만 개의 싹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우리 목사님이 들것에 들려 오시다니......
온 애양원 나환자들은 땅을 치기 시작했다. 살아 돌아온다고 믿었던 기쁨은 삽시간에 슬픔으로 변해버렸다. 들것에 실린 아버지의 시신은 애양원 뜰 한복판에, 2년 전 두 오빠의 시체를 내려놓았던 바로 그곳에 눕혀졌다. 덮었던 이불을 열어 보니 전도하다가 맞은 듯 입은 이미 으깨어져서 하얀 이가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고,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순교한 것이다.
어머니는 애양원을 걱정말고 눈을 감고 가시오 하며 아버지의 눈을 감겨 드렸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 조용히 기도 드렸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를 데려가신 후 여호수아를 준비하셨던 하나님이여! 애양원 목자를 데려가셨으니 다음 목자를 주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는 48세에 순교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애양원 식구들은 아버지 시체를 부둥켜안고 볼을 비비며 오열했다. 가슴을 치고 자기 옷을 찢으며 눈물의 소나기가 시작되었다. 시체는 피투성이였다. 죽음의 순간까지 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일까? 두 손바닥에는 총알이 관통해 지나간 듯 구멍이 나있었다. 어깨에도 커다란 총알 자국이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은 깨끗이 씻겨지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혀진 후 학교 교실에 안치되었다가 입관시켰다. 아버지를 모신 관은 집에서 사흘을 보낸 뒤에 일단 가매장되었다가 다시 파내어 영결식을 올리고 영원히 묻혔다. 아버지는 두 오빠가 먼저 잠들어 있는 곳 바로 뒤에 당신의 영원한 쉼터를 마련하셨다.
온 애양원 1천 여 명의 나환자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앞에 놓고 애곡 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그들의 곡성은 부모 잃은 고아와도 같고 남편 잃은 아내와도 같았다. 이제 그들을 위로할 목자는 순교의 제물이 되어 돌아왔으니 마지막 보내는 서러움을 통곡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2년 전 두 오빠의 시체를 놓고 눈물의 바라를 이루던 그때와 똑같은 광경이었다. 그 중에서도 더욱 더 슬피 통곡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철민 오빠였다.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 죽을 목숨인 나를 살려놓고서 아버지가 먼저 가시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아버지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서럽게 통곡하던 그는 두건을 쓰고 삼베옷을 입고 영결식이 끝날 때까지 두 오빠 대신 맏아들 노릇을 충실히 했다. 하늘이여 보아라. 땅이여 들어라. 동도섬 앞 바다에 터져 나오는 곡성을. 저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땅을 치며 터져 나오는 통곡은 저 하늘까지 사무쳤고 저 먼 산까지 메아리쳤다. 그 날에 뿌린 눈물은 저 깊은 바다 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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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19 거지 취급받고 설교하던 아버지 | 선지자 | 2016.01.10 |
| 20 | 18 일본이 손을 들었다 | 선지자 | 2016.01.10 |
| 19 | 17 엄마! 고아원에 안 갈래요 | 선지자 | 2016.01.10 |
| 18 | 16 산산조각난 가족 | 선지자 | 2016.01.10 |
| 17 | 15 종신형을 선고받은 아버지 | 선지자 | 2016.01.10 |
| 16 | 14 신사참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 선지자 | 2016.01.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