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8:40
제15장
1.꿈과 현실의 사이
9월 14일 밤이었다.
주 목사님은 발목을 삐은 이후 심방을 별로 하지 못했다. 보행이 부자유스러워서였다.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날 밤도 주 목사님은 교회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 현장엔 바닥이 눈물로 흥건하였다. 그의 기도는 주 앞에서 드리는 진실과 간절함이 있었다.
며칠 째 계속되는 기도에 그는 피로해 있었다. 밤은 소리 없이 깊어갔다. 자정이 지나고 시계는 두 시를 육박하고 있었다.
기도를 드리던 주 목사님은 정신이 몽롱하게 흐려옴을 어렴풋이 느꼈다. 겹친 피로와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수렁으로 빨려드는 것이었다.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혼자 뿌연 안개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분별할 수 없는 어떤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개구름이 그를 덮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키가 유독 큰 미군 장성이 하늘로부터 상장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두 팔이 안개구름 속에 나타나 이 키 큰 미군 장성에게 상장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그 키 큰 장성은 맥아더 장군이라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주 목사는 눈을 떴다 그는 텅 빈 교회당 마루에 어두움을 깔고 자기 혼자 앉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꿈이었구나!?
?맥아더 장군이 하늘에서 상을 받다니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주 목사는 계속 맑은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의 승리적 투쟁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시간에 미 제10군단 원정대는 함포사격 지원부대와 로켓함, 상륙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가지고 인천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때가 9월 15일 새벽 2시였다.
하늘에는 짙은 안개구름이 꽉 끼어 있어,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처음 격파 지역은 월미도였다. 새벽 5시 정각에 월미도에 폭격이 가해졌다.
5시 30분에 제3대대는 17척의 상륙정에 올랐고, 9대의 탱크가 3척의 상륙정에 실려졌다. 상륙시간은 5시 30분이었다. 공중 폭격이 시작되었고, 함포 사격이 동시에 가해졌다.
6시 25분에 맥아더 장군은 매킨리호 지휘대에 나타났다.
오전 7시 50분에 월미도는 완전히 점령되었다. 월미도에는 북괴군 제226 독립 해병연대 제 3대대와 제918포병 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살육 당하고 1백36명만 포로로 잡혔다. 오후 5시 30분 인천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인천상륙 작전은 기적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2. 환란 때의 교역자 생활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되자, 북괴군은 한풀 꺾였다. 남부 전선의 적은 보급로가 끊어졌고, 완전히 오합지졸이 되었다.
9월 23일, 미 제 23연대와 제38연대는 철수하는 북괴군 4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괴군 제9사단과 2사단과 4사단이 합천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미23연대와 38연대는 진주와 김천 가도를 막고 적을 봉쇄하였다. 미 F15 전투기는 합천과 거창에 흩어진 적병 머리에 폭탄을 퍼부었다.
9월 25일, 미 제38연대는 합천에서 거창으로 들어가면서 북괴군 패잔병 소탕전을 가했다. 북괴군은 차량과 중장비를 합천과 거창 사이에 버리고 도보로 도망하였다. 산을 타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거창 시내로 들어가 민간인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이날 오후 늦게 미 공군은 거창을 맹렬히 폭격하므로 파괴시켰다.
북괴군은 이날 제 2, 4, 9, 10사단이 거창에 집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미 제2사단의 반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특히 미 공군의 폭격은 극심한 타격을 가해 주었다. 적은 거창 시내를 점령하고 온갖 힘을 기울였지만 무모한 일이었다. 9월 27일 밤까지 버티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엔군의 우수한 전투력은 그들의 사기를 여지없이 꺾고 말았다.
적은 트럭 17대, 오토바이 10대, 대전차포 14문, 야포 4문, 박격포 9문, 탄약 3백톤을 유엔군에게 노획 당했고, 4백50명이 생포되었으며, 2백 60명이 사살 당했다.
거창 시내는 북괴군의 시체가 흉측하게 깔렸다. 북괴군 사단장 최현은 나머지 잔병들을 데리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2천 500명의 북괴군은 거창 시내를 빠져 27일 밤에 산을 타고 줄행랑을 치게 되었다.
9월 28일 아침, 해가 돋자 미 제38연대는 거창에서 전주로 행군을 시작하였고, 제28사단도 남원을 거쳐 전주로 올라갔다. 미 제28연대와 제9연대는 고령?삼가 지역을 소탕하였다.
무서운 전쟁이 휩쓸고 간 거창 시내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시민들이 나와 폭격을 당한 집을 일으키고, 파괴된 길을 손보았다. 흩어진 시체들을 산으로 옮겨 매장하였다.
남영환 전도사는 개평 지방을 순회 심방하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주 목사님과 남 전도사는 폭격이 심한 그 전쟁 중에서도 지방을 나누어 순회를 하였던 것이었다.
주 목사님은 함양 지방을 순회하였고, 남 전도사는 거창 일대와 합천 지방을 돌아보았다. 남 전도사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떠날 때, 식량이 없는 것을 보고 떠났다.
평화시에도 식량이 모자라 어려움을 당했는데, 전시에는 오죽하겠나 싶어 염려를 하면서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집에 들어서니 가족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가족들은 무사했다. 얼굴은 보니 배고픈 상이 아니었다. 제법 얼굴에 기름끼가 돌고 있었다.
?굶어 죽지는 않았군!?
남 전도사는 신통한 생각이 들어서 허공을 향해 말을 던졌다.
?굶어 죽기는요, 전보다 더 부요하게 된 걸요. 년 말까지는 식량 걱정 안 해도 됩니더.?
부인 박명순 여사가 반색을 하며 남 전도사의 가방을 받았다.
너무나 생각 밖의 일이어서,
?어떻게 된거요??
하고 물었다.
?뭐가요??
?식량이 없었을 터인데??????
?염려 말아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셨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을 굶기시겠어요? 교인들이 전보다 사랑이 더 많아져 교역자 가정 도우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어요.?
남 전도사는 말없이 부인의 말에 정신을 주고 있었다. 지방 교회에서도 식량을 가져왔다고 했다. 가조 교회에 전쟁 중인데도 식량을 지고 왔다 했다.
주 목사님은 가지고 오는 성도들의 정성어린 식량들을 감사히 받아 자신의 양식으로만 삼지 않고, 두 전도사의 가정에도 적당히 분배하여 준 것이었다.
모든 일에 세밀하고 자상하신 주 목사님이었다. 평화시대 보다 전쟁시에 주 목사님과 전도사들의 생활은 더 나은 편이었다. 환란이 올 때, 교인들의 신앙은 더욱 두터워지기 마련이다.
세상 것에서 신령한 면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다. 평화시엔 현세적이지만 전시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내세적이 된다.
사람이 내세적일 때, 신앙은 바른 궤도에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교역자를 섬기는 일이 신앙의 고저와 관계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을까?
3. 뜨거워진 청년들
괴뢰군이 북쪽을 향해서 퇴집 하자 거창은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주 목사님은 제직회를 열고 우선 급한 것부터 일하기로 의논하였다.
?파손된 교회당을 수리해야 하겠습니다.?
주 목사님 제의에 제직 중 한 분이 즉시 말을 받았다.
?교회당 수리도 문제이지만 사택부터 수리해야 합니다.?
주 목사님은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아무리 사택 수리가 급하지만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교회당을 수리해야 합니다.?
결국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운 경제사정에서도 교회당 수리를 말끔히 했다. 그 다음 사택을 손봤다. 유치원 건물이 폭격으로 불타 버렸기 때문에 다시 육간 목조 건물로 세우고 기와를 덮었다.
12월이 저물어갔다. 신년도 예산을 세워야 했다. 예산위원이 정해지고, 예산을 세우게 될 때, 예산안을 목사님께 상의하였다.
주 목사님은 예산위원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못해 사면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영환 전도사님은 곧 목사 안수를 받게 될 것이니, 남 전도사님을 원 교역자로 세워 일 할 수 있도록 예산을 세우십시오.?
예산위원들은 의외의 말에 당황하였다. 허나 주 목사님은 자신의 앞날을 대강 짐작하시듯 담담히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좀 휴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 전도사님을 원 교역자로 세우도록 주선을 하십시오.?
그러나 당회원들과 예산 위원회에서는 여전히 주 목사님의 생활비를 책정하여 예산을 세웠다.
그 날 밤, 청년회 임원회가 모였다. 회장 원영봉 집사는 임원회 석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내놓았다.
?우리는 다 죽었다가 살아 난 사람들이 아닙니까? 전과 같은 태도를 버리고 뜨겁게 일해야 하겠습니다.?
원 집사는 전쟁시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 와보니 집은 불타버리고, 구둣방을 하고 있었는데 가죽도 다 타고, 구두 두 켤레 만들 가죽만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주 목사님과 남 전도사의 구두를 맞추어 드렸다.
원 집사는 전쟁을 겪고 나서 과거의 미온적 교회 봉사가 부끄럽게 느껴져 임원회를 열고 열심히 쏟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만 살기 위하여 피난을 간다. 숨어 다닌다 했지만 우리 목사님과 전도사님은 생명을 내어놓고 난 중에서도 주님을 위해 일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목사님이 말씀이면 무엇이나 순종해야 됩니다. 또 목사님의 계획이 실행되도록 힘을 모두어야 합니다.?
회원들은 모두 원 집사의 뜨거워진 가슴을 이해하는 듯,
?옳습니다. 우리가 힘을 냅시다.?
의견을 모두었다.
1951년 1월. 청년회 단독 사업으로 지산 교회에 전도사를 파송하였다. 월천 교회를 개척하고, 이백원 전도사를 보내어 일하게 했다.
교회는 은혜가 흘러 넘쳤고, 청년들의 열심은 교회를 더욱 뜨겁게 하였다. 청년회장 원영봉 집사는 3년 후인 1954년 1월 5일, 장로로 피택되어 장립을 받았다.
4. 진찰을 받고
1951년 새해로 접어들자 주 목사님의 몸은 눈에 뛰이게 초췌해 보였다. 그래도 목사님은 좀체 누우시지 않고 계속 심방과 기도 생활에 힘을 쏟았다.
2월 1일 밤, 부산 영도 교회에서 임시노회가 모인다는 통지가 1월 30일 오전에야 전달 되었다.
주 목사님은 남영환 전도사의 목사 안수를 생각하였다. 안수 받는 몇 분이 있어 같이 안수를 받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날, 남영환 전도사는 서산 교회 집회인도를 위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남 전도사는 안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길을 떠났다.
얼마를 가다가 남 전도사는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등뒤에서 날아오므로 몸을 돌려 바라보니 추국원 집사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추국원은 당시 거창읍 교회 집사였다.
?조사님, 목사님이 부르십니다.?
?뭐 할려고??
?임시 노회시 목사 안수를 받으시랍니다.??빨리 갑시다.?
남 전도사는 돌아서서 추 집사의 자전거에 몸을 담았다.
죽전 사택에 들어가니 목사님께서 노회 가실 준비를 하고 남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 조사님 같이 부산으로 갑시다. 비상시에는 비상법으로 노회가 목사를 안수를 할 수 있으니 내일 밤에 안수 받도록 합시다.
남 전도사는 멍멍 할 뿐이었다.
?전보를 쳤습니다. 가시면 됩니다.?
남 전도사는 선걸음에 주 목사님 뒤를 따랐다. 거리에 나왔지만 자동차는 없었다. 날씨는 몹시 쌀쌀하였다. 찬바람이 귓부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거창 시내를 빠져 마산 쪽으로 난 길을 그들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군용 트럭이 한 대 오고 있었다. 장작을 가득 싣고 있었다. 손을 들었더니 시원스럽게 태워 주었다.
겨울 해는 짧았다. 그들이 마산에 들어섰을 땐, 밤이 이슥했다. 따님 주경순씨 사택에 들려 밤을 쉬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오후 늦게야 기차가 출발하였다.
영도 교회에 들어서니 임시노회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목사 안수식만 남아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는 예정한 안수일보다 일년 늦게 안수를 받은 것이다.
다음 날. 2월 2일. 주 목사와 남 목사는 복음병원 차로 부평동에 있는 큰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최의선 선교사의 소개로 가게 된 것이다.
최의선 선교사는 전직이 의사였다. 그는 처음 한국에 나와서 선천 미동병원 원장일 보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해 주었고 자선에서 힘썼다.
어느 날, 싸움을 하여 심한 부상을 입고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최원장은 친절히 치료를 해주고 퇴원할 때,
?앞으로 싸움하지 말고, 착한 사람 되시오.?
하고 타일러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리는 소문은 그 청년이 나가서 살인을 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최 원장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육신 병, 고쳐주어도 영혼 병 고쳐주지 못하니 불행한 일 생깁네다.?
최 원장은 자리를 내어놓고 본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였다.
해방이 되자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는 고려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이 최의선 선교사의 소개로 주 목사와 남 목사는 진찰을 받았다. 남 목사는 폐와 심장이 좋지 못했다.
?한 1년 간 요양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사의 말이었다. 주 목사님에게는 위장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의사의 심각한 표정으로 봐 심상찮은 병세인 듯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주 목사의 병은 간암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남 목사는 거창으로 돌아가고 주 목사는 쳐졌다. 주 목사는 부산의 뜻 있는 목사들을 찾아 만나 상의하였다.
자신은 더 큰 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남 목사를 염려하고 동정을 바랐던 것이다.
목사는 십만 환을 마련하여 가창 남 목사 앞으로 우송하였다.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말고, 이 돈으로 약을 사 가지고 쉬면서 일하시오.?
돈과 편지를 받아 쥔 남 목사는 주 목사님의 따뜻한 인정과 자신보다 남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애에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주 목사님은 마산으로 가서 주경순 집사의 집에서 머물렀다. 얼마간 요양을 하면 회복이 될 거라는 생각에 휴식을 가졌다. 그러나 며칠을 쉬었지만 몸은 더욱 피로하였고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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