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해와 같이 빛나리

선지자선교회

1.신앙의 동지가 그리워

이인재 전도사가 제2문창 교회에 집회 인도 차 왔다. 이인재 전도사는 집회 주간에 시간만 있으면 주 목사님께 들렸다.

주 목사님은 이 전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조사님, 이번 집회시 철야기도를 좀 못하더라도 내 곁에 와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전도사 역시 주 목사님 곁에 있고 싶었다. 주 목사님 옆에 있으면 세상의 염려나 걱정이 일지 않았다.

집회를 끝마친 이 전도사는 돌아가지 않고 며칠을 주 목사님 곁에서 지냈다. 주 목사님은 주경순 집사 댁에서 한 달 가까이 지냈다.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회복의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가야 하겠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어야지???????

주 목사님은 불현듯 거창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교회가 그리웠고, 돌보던 지방 교회 교인들이 보고 싶었다. 거창에서 사모님이 오셔서 거창으로 올라가실 준비를 갖추었다.

2. 거창으로 올라가는 날

부산에 자동차 연락을 하였다.

박병호 전도사가 차를 몰고 왔다. 박병호 전도사는 자동차 면호증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재건 교회 전도사 일을 보았으나 고려신학교에 입학하므로 교회 시무를 옮겼다.

초량 35번지에 소재한 은혜 교회를 맡았다. 한부선 선교사가 6?25사변으로 본국에 들어갈 때, 그의 자동차를 고려신학교에 맡기고 갔다. 교단적인 급한 일이 있을 때 박병호 전도사를 통하여 이 자동차를 이용하곤 했다.

자동차를 몰고 박 전도사가 주경순댁으로 왔다. 자동차에서 한상동 목사님과 한명동 목사님이 내렸다. 두 한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감사합니다. 원로에 와 주셔서??????

주 목사님의 얼굴에 괴로운 미소가 지나갔다.

주 목사님은 부축되어 자동차에 올랐다.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회복되어 다시 만나 뵙기 바랍니다.?

두 한 목사님, 조수옥 집사와 아는 얼굴들을 뒤로 하고 자동차는 서서히 미끄러져 나갔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는지 모를 그리운 얼굴들. 보내는 사람들은 한 사람을 보내지만 떠나는 사람은 모두를 두고 떠나간다. 보내는 사람은 한 사람을 잃는 슬픔이지만, 떠나는 사람은 모두를 잃어버리는 슬픔에 젖는다.

주 목사님의 눈시울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양볼을 흘러내렸다. 딸의 집이 점점 멀어진다. 이제는 영영 다시 들릴 수 없을지도 모를 딸의 집을 한 번 더 눈에 담아보는 주 목사님이었다.

자동차는 신마산 역을 지나 시외로 빠지는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자동차에는 사모님과 딸 주경순 집사가 합승하고 있었다.

주 목사님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병호 전도사에게 말을 던졌다.

?박 조사님, 수고가 많습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먼 거리를 자동차를 몰게 되었으니 참 고맙군요.?

박 전도사는 계면쩍게 웃어 보이면서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뿐인걸요. 하여튼 목사님 몸이 빨리 회복되셔야 하겠는데 걱정입니다.?

?나는 이제 틀렸어! 하지만 박 조사님은 몸이 건강해서 참 좋습니다.?

주 목사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통증이 오는지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다시 얼굴을 펴고 눈을 떳다. 그의 눈길이 운전대를 쥔 투박한 박 전도사의 팔목에 멎었다.

?박 조사님, 건강이 보뱁니다. 무리하면서도 뛰는 것만 잘하는 건 아니야. 쉬는 것도 주님의 일이란 걸 이제야 나도 알았어! 쉬는 것도 주님의 일이야.?

느릿느릿 목에 힘을 넣어 말했다.

자동차는 함안으로 들어갔다.

군북으로 해서 의령으로 빠지려는 것이다.

목사님을 위해서 비교적 좋은 길을 택하였다. 장거리 여행이었다.

주 목사님은 음성을 낮추어 말을 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순교를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은 순교도 되지 않았어. 순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되지??????? 나는 원하고 원해도 허락지 않으시니 안되더군, 결국 내가 원치도 않은 약사발을 들고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니 섭섭하다면 이보다 더 섭섭한 일이 어디 있을까??????

주 목사님은 다시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자동차는 의령으로 들어섰다. 의령을 지나 삼가에 이르렀다. 사막에서부터는 주 목사님의 시찰구역이다. 수 없이 다닌 낮익은 길이었다. 교인들의 집을 차장 심방한 길이었다.

차를 멎게 하고 교인들을 불러오게 하여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 길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신앙의 격려를 했다.

합천에 들어가자 날이 저물었다. 다시 올 수 없는 합천이었다. 그 밤을 합천에서 쉬었다.

죽음이 눈앞에 가까워 질 때, 생에 대한 애착은 이렇게 짙어지는 것인가? 모든 것이 아쉽고, 그리움으로 가슴에 밀려왔다. 주 목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접견하고 기도하며 격려하였다.

아침이 되어 다시 자동차는 출발하였다. 묘산에 들어가 교인들의 안부를 묻고 만날 수 있는 분들을 다 만났다.

바울이 밀레도를 떠날 때, 장로들에게 권면하듯, 만나는 성도들을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고 석별의 눈물을 삼켰다.

자동차는 거창으로 들어가 죽전 사택 문 앞에 멎었다. 주 목사님은 사택 방으로 들어가 눕게 된 것이다.

3. 찾아드는 교역자와 성도들

주 목사님이 거창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삼 군 각 교회에 알려졌다.

매일처럼 교역자와 성도들이 죽전으로 몰려들었다. 귀찮을 정도로 사람들은 몰려왔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찾아오는 문안객들에게 조금도 언짢은 기색 없이 친절로 대변하였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염려하여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버지! 자꾸 편찮으신데 사람들이 올 때마다 일어나시어 말씀을 하시니 이래 가지고는 참말로 안되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두어라. 그분들이 찾아온 것은 내 한 사람 얼굴 볼려고 온 것 아니겠나? 내가 그 분들을 반가워하지 않으면 그분들의 섭섭함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허지만 아버지는 병중이 아니십니까??

?내가 내 병을 잘 안다. 내가 다시 회복될 것이란 걸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절망적인 말을 하시면서도 목사님의 얼굴엔 절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밝고 평화로웠다. 병 문안 온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오히려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

위천교회 백영희 전도사가 왔다. 그는 일제 수난시부터 주 목사님을 극진히 위한 분이다. 세상이 다 외면하고 적대시한 주 목사님의 가족들을 그는 음성적으로 도왔다.

승복을 입고 배낭에 쌀을 감추어 다니며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 노릇을 한 것이었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고 신앙의 선배로 우러러 보았다.

백 전도사가 머릿 쪽에 앉자, 주 목사님은

?백 조사님, 아래쪽에 앉으시오. 얼굴이나 좀 보게.?

많이 가늘어진 음성이 실낱같이 이어져 나왔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지난날의 얼굴이 그리웠던 것이다. 형편없이 여윈 주 목사님의 모습은 다시 옛 얼굴을 가져올 상 싶지를 않았다.

?아무데도 가지말고, 내 옆에 좀 있어 주시오.?

언제나 사랑과 정이 담뿍 담긴 주 목사님의 말은 울적한 백전도사의 마음을 따사롭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틀동안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 곁에 있었다.

백 전도사는 차마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상남교회 집회를 맡아 있었다. 그 날 밤부터 가지도록 된 집회도 연기하고 싶었다.

?목사님, 사실은 함양 상남교회 집회를 가지도록 되어 있지만 그만 두겠습니다. 사람들을 보내어 사정에 의해 연기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차마 목사님을 곁을 떠날 수가 없군요??????

백 전도사는 말을 흐렸다. 주 목사님은 백 전도사의 말뜻을 알아차리곤,

?안됩니다. 백 조사님, 가셔야 해요.?

말에다 힘을 넣었다.

?그렇지만 목사님께서 이렇게 편찮으신 모습을 보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백 조사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먼저 해야 되오. 주님의 일을 해야지????

주 목사님은 머리맡에 놓인 자신의 성경책을 내밀었다.

?백 조사님, 이걸 가져가시오. 난 이제 성경을 읽지 못하게 되었어. 이것은 백 조사님이 나보다 더 필요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성경을 받는 백 전도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격류처럼 쏟아져 내렸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빨리 가시오, 힘있게 주님의 일을 해야지요. 젊고 건강하니까. 열심히 해야지요.?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이 주시는 성경을 가슴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사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잡숫기 어려우시더라도 죽물을 좀 드십시오.?

?????????

목사님은 말없이 백 전도사를 바라보았다.

주 목사님의 후미진 눈언저리에 흥건히 물기가 고이는가 하더니 주르르 귓바퀴로 눈물은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백 조사님??????? 잘 가시오??????????

돌아선 백 전도사의 등뒤를 향하여 아련히 말을 보내는 것이었다.

4.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1951323, 오전.

주 목사님은 장로들을 불렀다. 장로들은 목사님 주위에 둘러앉았다. 주 목사님은 말할 힘조차 없지만 느릿느릿 입에 힘을 모으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납니다. 나에게 대한 기대와 미련을 다 잊으시고 교회를 신앙으로 잘 이끌어 가십시오. 나의 후임으로는 남 목사님을 보도록 하십시오.?

장로들은 모두 묵묵하였다. 주 목사님의 이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마음은 장로 중 아무도 없었다. 주 목사님의 그 순교적 신앙 산맥을 이어 줄 사람은 현재로서 남 목사뿐임을 장로들도 잘 알고 있었다.

?목사님, 그 문제에 대하여는 안심하십시오.?

장로 중 한 분이 입을 열었다.

그 날 오후. 주 목사님은 그의 곁에서 염려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앉은 남 목사에게,

?남 목사님, 예배 인도를 하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수요일인데????????

하고 말을 떼면서 눈을 껌벅거렸다.

?, 가야 하겠지만???????

?가세요. 교인들이 모여드는데 목사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빨리 가세요.?

?, 목사님. 예배 인도하고 바로 오겠습니다.?

남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남 목사는 하늘을 보았다. 찌푸린 날씨가 3월이라곤 하지만 쌀쌀한 바람이 아직 머물고 있었다.

해가 졌는지 벌써 안개처럼 어둠살이 깔리는 듯 했다.

남 목사는 교회를 향하여 발을 옮겼다.

남 목사를 교회로 보낸 다음 주 목사님은 둘러앉은 가족들에게 신앙을 격려하고 만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평화로운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

1951323, 오후 6.

평생 소원 순교이었는데, 순교 직전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 없이 넘기시다가 자택에서 가족 친지들이 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향년 64.

길지 못한 생애였지만 너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그 몸에 지니고 살다 갔다.

거창에서 태어나,

거창에서 자라고,

거창에서 예수 믿어 학습과 세례를 받고,

거창에서 집사 되고 장로 장립을 받고,

거창에서 전도사 되고 평양신학하고,

거창에서 목사 안수 받고,

거창에서 검속 되어 대구, 진주, 부산,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거창에서 6?25 수난을 겪고,

거창에서 숨지니 그는 거창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 그 어떤 위인들의 생애와 비교하여 모자람이 있을까?

한국이 낳은 세계적 위인, 누가 이 침묵의 성자를 존경하지 않으리!

그는 한국의 남단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

그가 보여준 하나님은 사랑이요, 긍휼이요, 자비요, 진실이요, 불변이었다.

순교는 죽는 것만이 아니고 살아서도 그 생활이 순교일 수 있다는 순교의 다른 의미를 보여 준 사람. 그는 이 땅에 와서 하나님만 보여 주고, 하나님만 증거 하다가 갔다.

그는 기도의 위력을 보여 준 사람이다. 평양 형무소에서 주야로 간절히 부르짖던 그의 기도는 다 이루어졌다.

특별기도 제목으로 정하여 기도했던 6개 항목이 그대로 다 이루어짐을 보고 그는 눈을 감았다.

첫째, 말세의 바벨론 우상 제국이 파괴되도록 기도하였는데, 우상 제국 일본은 원자탄 두 개로 파괴되었다.

둘째, 이 땅에 참 신앙의 자유를 달라고 기도하였더니 8?15해방으로 신앙의 자유가 왔다.

셋째, 조선의 자주 독립을 기도하였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완전 독립국이 된 것이다.

넷째, 이 땅에 세워진 모든 신사가 불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더니 그대로 신사는 다 불탔다.

다섯째, 조선 교회 지도자 교양을 위하여 수도원을 설립하고 새로운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기도하였는데, 1946920, 한상동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여섯째, 거창에 성경 학원 하나 설립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져 1950410일에 성경 학원이 설립되었고 거기에서 영광스럽게 배추달 집사같은 순교자가 나왔다.

주 목사님의 기도는 이 땅에서 그가 눈감기 전에 다 이루어졌다.

그의 일생에 한은 없다.

주 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 기도에 응답을 다 받은 복의 사람이었다.

남영환 목사는 수용일 밤 예배를 인도하시다가 주 목사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위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백영희 전도사는 집회 삼일 째 되던 날 부고를 받고 울었다.

?집회는 뒤로 미루어도 되는데?????

눈이 붓도록 백 전도사는 울었다.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지!?

주 목사님의 그 한마디가 가슴을 찡하게 때린다.

?주님의 일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시던 어른?????

백 전도사는 거창을 향해 달렸다.

5. 빛난 장례식

주 목사님의 별세소식은 부고에 실려 전국 교회에 배달되었다.

듣는 이마다 애석함에 눈시울을 적셨다.

장례는 7일장으로 경남 노회장으로 정하였다.

조문객들이 구름 떼처럼 밀려왔다. 하루 쌀 한가마니와 돼지 한 마리씩이 조문객들을 위해 제공이 되었다. 장례식까지 모든 금전 출납을 백영희 전도사와 조수옥 전도사가 맡았다.

노회 임원들이.

?노회장이니 조의금 들어오는 것은 모두 사모님께 드려 유족들의 생계를 돕도록 하고 장례식은 간단히 하자.?

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백영희 전도사는.

?아닙니다. 앞으로 유족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장례식을 거대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이 자녀들을 분명히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하거나 못사는 법은 없습니다. 이번 장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도록 합시다.?

말을 잘랐다.

조수옥 집사는 백전도사의 말에 덧붙여,

?그렇습니다. 조의금은 들어오는 대로 다 씁시다. 장례식을 빛냅시다.?

하고 찬성을 했다.

?옳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주경순 집사가 다시 말을 받았다.

노회 임원들은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장례식을 이끌어 가기로 하였다.

조수옥 집사는 마산 인애원에 있던 광목 여러 필을 가지고 왔다. 또 거창 박애원에서 광목을 가지고 왔다. 그 광목으로 수십 벌의 두루막을 만들었다. 삼베로는 두건을 수없이 만들었다.

1951329.

장례식 날이 왔다. 전국 각지에서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목사들은 흰 두루막을 입고 두건을 쓰게 했다. 전도사들은 두건만 썼다.

발인식 예배가 끝나고 상여가 나갔다. 동네를 빠져 들 길에 들어섰다. 구름이 꽉 끼어 있는 하늘에서는 3월 하순인데 진눈개비가 슬슬 뿌리는 것이었다. 먼 산 중허리에 전날 밤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초봄인데도 겨울을 연상케 했다.

찬바람이 벌판을 쓸었다. 상여 앞에서 만사를 든 청년들이 줄을 지었고 뒤에는 흰 옷 입은 찬양대원들이 섰다. 상여 뒤에 유족들과 흰 두루막을 입은 목사님들이 줄을 지었다. 다음은 두건만 쓴 전도사들, 그리고 뭇 성도들이 줄을 이었다.

긴 장례의 행렬이었다. 거창이 생기고 처음 있는 거대한 장례식이었다. 장례의 행렬을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고였다.

공동 묘지로 향하는 길이 사람으로 덮혔다. 이인재 전도사가 소리를 외쳤다.

?개선 장군이 들어가신다. 개선 장군이 들어가는 길이 휜히 트였구나!?

하관식 예배시에 이약신 목사는 독창을 했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찬송은 초봄의 싸늘한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참석한 성도들의 귓가에 따뜻한 인정처럼 감격으로 소록소록 담겨졌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 믿음 좋은 성도들의 장례는 그 장례식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법이다.

조객들과 거창 시민들로 산이 덮혔다.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산에서 마련한 음식만 해도 돼지 세 마리에 쌀 세 가마니가 불에 익혔다. 밥 그릇, 국그릇이 모자라 바가지를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거창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거창이 생기고 처음이다!?

그럴 수밖에.

주남선 목사야말로 거창이 생기고 처음 인물이었다. 이 이후, 또 다시 거창에 이런 인물이 태어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거창이 울고, 한국 교회가 소리내어 울어야 했다.

그 후 1973515, 자녀들의 정성에 의하여 거창 시내가 내다보이는 아담한 동산에 주 목사님의 묘소가 새로 마련되었다.

조각가 신춘범씨가 정성을 기우려 3개월 동안 파고 다듬어 십자가 묘비와 무덤을 덮는 돌판을 만들었다.

대리석 십자가 묘비 뒷면에는 다음의 성구가 새겨져 있어 묘소를 찾아오는 성도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준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13:13).

6. 그 뒷 이야기

한명동 목사님은 주 목사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한 주간이 지나도록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주 목사님의 별세는 그에게 너무나 큰 슬픔이었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주 목사님을 잃은 허전함은 시간이 흘러도 가시지 않고 오래토록 그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정말 아까운 분을 잃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한 주ks 동안 출입을 삼가고 주 목사님의 인간 됨을 되새김하면서 기도와 명상을 보냈다. 뒷날, 한명동 목사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너무 서운했어! 지금도 주 목사님 생각하면 무엇인가 주는 것이 있어요. 신학교 이사회 관계로 그 먼 길을 여비 한 푼 드리지 못하는데도, 통지만 하면 꼬박꼬박 참석하셨으니! 그 충성심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목탄차 타고 다니시며 너무 무리하셨어! 아무리 부산쪽으로 교회시무 이동하시라고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하시고 응하시지 않았으니????? 참으로 모범스러운 목회자요, 충성된 주님의 일꾼이였어!?

남영환 목사는 주 목사 별세 후, 주 목사님 유언대로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다.

그 해 710일에 위임식을 가졌다. 백영희 전도사는 고려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대단한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지금은 서부교회 목사로 큰 교회를 이끌고 있다.

백영희 목사는 주 목사 별세 직전에 유물로 받은 성경을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그 때 일을 종종 회상하고 있다.

주 목사님의 큰 들 주경중씨는 주 목사님께서 1946926일에 설립한 박애원 원장으로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19533월에는 거창 고등학교를 창설하고 재단 이사장이 되기도 하였다.

주 목사님의 둘째 아들 경도씨는 일찍이 일본에 들어가 있었고, 해방 후에도 일본에서 사업을 하였다. 지금도 재일 교포로 큰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

주 목사님의 딸 경순 집사는 부친 별세 후에도 동생들의 교육 뒷바라지를 위해 열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주 목사님 별세시 고등학생이던 아들 경효는 마산 고등학교 졸업하고 도일하여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나왔다.

그 후 주 경효씨는 서울 중앙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아 교회를 봉사하고 있으며, 무역진흥공사, 체신부, 재무부, 경제담당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지냈고, 동국대학에서 강의도 맡았다.

정부 부처와 학계에 머물던 그는 한국 조폐공사 이사도 지냈으며, 지금은 한국 화재보험협회 감사로 일한다. 그는 유독 모친과 함께 부친 투옥 후 고생을 많이 하였기에 지금도 그 때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경세 씨는 마산 호산나원 원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한국 화재보험협회 부산지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은씨는 의사 윤창동 씨와 결혼하여 의사의 부인으로 다복하게 지내고 있다.

한편 주 목사님의 사모님 남술남 여사는 그 후 자녀들의 지극한 효성을 받으며 평안히 여생을 보냈다. 자녀들은 장성하여 가정을 가지고 사업체를 이끌어가면서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자, 서로 어머니를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딸 주경순 집사가 혼자였기에 제일 만만히 지낼 수 있어 마산에 머물렸다.

일본에 있는 아들 경도씨가 돈을 보내어 어머니를 위해 아담한 2층 양옥집을 마련하였다. 그 곳에서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동경 올림픽대회 땐 경도씨의 주선으로 일본을 구경하였다.

육 남매 자녀들은 그들의 가정마다 ?어머니의 방?을 마련해 두었다. 언제나 어머니가 오시면 그 방에 모시는 것이었다. 자녀들은 어머니를 서로 모시려고 선의의 쟁탈전까지 벌였다.

주경효 장로는 어머니가 서울 오시자 ?어머니의 방?에 어머니를 모시고 안마도 해 드리며 노쇠하여 여윈 어머니 다리도 주물러 드리면서

?우리 어머니 세계최고 미인이다!?

하고 소리치며, 어린 자녀들과 함께 웃었다.

주 장로는 그의 자녀들이 보는 눈앞에서 어머니를 업고 이방 저방을 다니기도 했다. 이 광경을 본 주 장로의 중학생 아들이,

?아버지! 뒷날 우리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이 많아지면 아버지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해 드리는 것만큼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환하게 웃는 것이었다.

효자 효녀는 유전인가 보다. 남 여사가 마산에서 노병으로 눕자, 일본에서 아들 경도씨가 비행기로 날아오고, 거창에서 큰 아들 경중씨와 지방의 자녀들이 급히 모여들었고, 경효 장로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남여사는 서울 성심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했다.

남여사는 말년에 자녀들의 지극한 효성에 둘러싸여 호강을 하시다가 1973724일 아침,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726일 오전 9시에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주 목사님의 유골이 묻혀 있는 거창읍 묘소의 대리석 십자가 아래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의인은 죽어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고, 의인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

의인의 자손들은 땅위에서 오늘도 남기고 간 부모들의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자녀들까지 의롭게 사라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인생은 가고 역사만 남는다.

인생이 인생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근본 된 생을 살아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지구가 존속하는 한 남아있을 역사에 아름답고 흐뭇한 기록을 수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의롭게 살다가야 하지 않을까?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다.

그러나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상급은 의로운 생활의 결과인 것이다.

17

버릴 수 없는 이야기들

-낙수일화는 그 시기를 잘 측정할 수 없어 별도로 모았다-

1. 김중근 집사와 주일

거창읍 교회에 김중근 집사가 있었다. 그는 해방 후 트럭을 한 대 구입하여 운수업을 했다. 당시 거창군에서 트럭은 김 집사가 가진 것 한 대 뿐이었다.

어느 토요일, 김 집사는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거창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산 주 경순 집사 집에 들렀다. 주 모사님은 그 때, 몸이 편찮아 마산 딸 경순 집사 댁에서 좀 쉬고 있었다.

김 집사가 그 곳에 들렸을 때는 해가 기웃기웃 했다.

?목사님 가보겠습니다.?

김 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 목사님은,

?김 집사님, 아무래도 자고 가야 하겠습니다. 해가 다 됐는데 지금 가면 잘못하다가 주일 범하겠어요.?

하고 만류하였다.

?안됩니다. 하룻밤 자면 손해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목사님 봉급 3배나 손해를 보게 될 겝니다.?

김 집사는 퉁명스러히 대꾸했다. 주 목사님은 그런 김 집사에게 말했다.

?김 집사님, 그래도 주일을 범하면 안됩니다. 주일을 범하면 더 많은 손해를 봐요. 육적, 영적 다 손해 보는 거야. 그러니 주일을 보고 가시오.?

허나 김 집사는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김 집사는 거창으로 향하였다. 가다가 기어이 자동차 고장이 났다. 다음 날, 그러니까 주일 날 오후 늦게야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기어이 주일을 범한 김 집사는 주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후회를 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그 후 김 집사는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어 두고두고 주 목사님 이야기를 했다 한다.

2. 충성 겸손

임시노회나 정기노회는 부산에서 주로 모였다.

교통이 불편한 때인지라 거창에서 부산 나오는 일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불참한 일이 없었고, 별로 늦게 참석한 일이 없었다 한다.

손명복 목사님이 영도 교회에서 모인 임시노회에 일찍 참석했더니 벌써 주 목사님이 와 계셨다. 하도 놀라워,

?어떻게 이리 빨리 오셨습니까??

손 목사님이 물으셨다.

?도라꾸로 왔어요. 걸어 나오는데 용케 도라꾸를 만나서 태워 주길래 빨리 왔지요.?

그 겸손과 충성된 모습을 26년이 지난 지금도 손 목사님은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루는 손 목사님이 주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생활비를 얼마나 받습니까??

주 목사님은 피식 웃으면서,

?많이 받지요.?

말씀하는 그 입모습엔 무거운 자족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한번도 주 목사님은 자신의 생활비에 대하여 말해 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3. 심부름 다 해주고

주 목사님이 마산이나 부산으로 나가시는 날은 교인들과 지방 교역자들이 온갖 심부름을 다 맡겼다고 한다.

?목사님 성경 한 권 사다 주이소??

?나도 예.?

?나는 성경 찬송 한 질 사다 주이소!?

?신 한 켤레 사다 주이소.?버선, 양말, 비누, 옷까지 부탁을 했다.

무리한 부탁을 받고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맡아 주었다. 사 가지고 돌아오셔서는 장바닥 같이 사온 물건들을 펴놓고는,

?이것이 아무개 집사 것.?

?이것은 누구 것.?

낱낱이 이름을 적어 본인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4. 흉내내는 지방 교역자들

삼군 지방 전도사들은 주 목사님을 흠모한 나머지 그의 생활태도를 흉내 내기까지 했다 한다.

주 목사님은 가방을 항시 들고 다녔다. 가방을 오른편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는데 전도사들 중에는 그대로 본 받은 이들이 많았다.

주 목사님이 식사를 하시다가 밥을 남겨 놓는 날이면, 즉각 나머지 밥을 먹어치우는 전도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주 목사님의 신앙 인격을 그대로 소유하고 싶은 한 염원에서였다.

주 목사님의 걸음걸이, 앉는 모습, 심지어는 기도체까지 본받는 이들이 있었다. 이는 주 목사님의 은혜를 자신도 받아 보려는 사모의 정에서였다.

마치 엘리야의 은혜를 엘리사가 계승하려는 거룩한 욕심처럼, 지방 전도사들은 주 목사님의 뒤를 다투어 따랐다.

5. 대리 집회 인도

언제인가 그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거창읍 교회에서 삼군 교회 제직 사경회를 연 때가 있었다.

강사(이대영 목사인 듯 함)가 오기는 왔으나 갑자기 편찮았다. 통지서를 내었으니 삼군(함양?거창?합천)에서 교역자를 위시하여 제직들이 모여들었다.

강사가 자리에 누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주 목사님은 강사 목사님과 상의하였다.

강사 목사님은 주 목사님을 서시라고 부탁했다. 주 모사님은,

?그럼 제가 강사 목사님의 원고를 대신 전달하겠습니다. 준비 해 오신 설교 원고를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어색할 뿐입니다. 사울 왕의 갑옷이 다윗에게 거추장스럽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목사님의 것을 가지고 하십시오.?

강사 목사님의 말대로 주 목사님은 자신의 것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그 밤부터 한 주간을 금식 철야 기도를 시작했다. 금식으로 계속 집회를 인도한 것이다. 놀라운 은혜가 내렸다. 백영희 목사님은 그 때 받은 바 그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의 어린 신앙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강사를 오게 해 놓고, 대신 주 목사님을 세워 힘있는 증거를 하게 하셨을 것이라고요.?

6. 외유내강

주 목사님 사택에는 매일처럼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가난한 목사 생활 가운데서도 꼬박꼬박 대접을 했다.

어떤 땐 식량이 없어 밥을 짓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교인들이 알까봐 사모님은 빈 솥에 물을 붓고 물만 끓였다고 한다.

어느 목요일 오후, 강주선 전도사가 주 목사님 사택에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밤을 함께 지냈다.

옛 부터 시골에서는 잠을 잔 손님에게 아침밥을 먹여 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강 전도사는 일찍 떠날 것이었는데 실례가 될 것 같아 밥 때를 기다렸다.

밥상이 들어오는데 외 상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 목사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남에게 대하여는 한없이 부드러우신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7. 인내의 의미

안동에 집회 인도로 가시는 길이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탔다. 그러나 기차는 떠날 줄을 몰랐다.

아침 8시에 기차를 탔는데 옛날이라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기차는 죽치고 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함께 탄 한명동 목사님이 주 목사님께,

?목사님, 집으로 들어가십시다. 이 기차 하는 꼴 보니 언제 떠날는지 모르겠군요.?

하고 말하자,

?날 염려하지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타고 있으면 언제인가는 떠나겠지요.?

그냥 주 목사님은 앉아서 기다렸다.

기차는 밤 늦게야 떠나게 되었다.

종일을 기차 안에서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앉아서 견뎌낸 것이었다.

8. 저절로 머리고 숙여져

해방 직후 손양원 목사가 한참 부흥회를 인도하고 다닐 때의 일이다.

오종덕 목사는 어느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 한가지 있단 말입니다. 부흥사로 전국을 누비며 다니는 손양원 목사는 만나도 별 그런 생각이 없는데, 주남선 목사를 대면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야.?

9. 마산 문창교회 집회 때

해방 후 주남선 목사님은 마산 문창 교회에서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인도하신 일이 있다.

윤봉기 전도사는 통지를 받고 먼저 문창 교회에 갔었다. 아직 주 목사님은 오시지 않았다. 윤 전도사는 구마산 역으로 주 목사님 마중을 나갔다.

기차에서 내리시는 주 목사님을 보는 순간 윤 전도사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옥 후, 처음 대면이었다. 아직 옥고의 여독이 그냥 얼굴에 깔려 있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님의 가방을 받으면서,

?목사님!?

하고 울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 있었지만 나오지를 않았다. 주 목사님은 윤 전도사의 손을 꼭 쥐어 주시면서,

?윤 조사 참 반갑군!?말을 흐렸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윤 전도사는 겨우 이 말 한마디로 하고 싶은 그 많은 말을 대신하였다. 주 목사님의 눈시울에 눈물이 번졌다.

?윤 조사, 난 감옥에서 하루도 윤 조사를 빼고 기도한 일이 없었어요. 어떤 땐 하루에 세 번이나 윤 조사 위해 기도하였지요.?

주 목사님은 눈 가에 번진 눈물을 손수건을 꺼내어 닦았다.

문창 교회에서의 집회엔 은혜가 많았다. 낮과 밤 집회를 손양원 목사님과 교대로 인도하였다. 집회 중 주 목사님은 금식을 하였다.

금식을 하시는 걸 안 윤 전도사가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 감옥에서 고생을 하시고 아직 그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또 금식을 하십니까??

윤봉기 전도사의 말을 듣던 주 목사님은 빙그레 웃음을 얼굴에 담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한 마디도 설교를 할 수 없는게 내지요.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전적 하나님께만 매달립니다. 금식은 기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내가 금식하는 일에 과히 염려하지 마시오.?

주 목사님의 음성은 금식을 하는 사람 같잖게 처렁 처렁 맑았다.

집회에는 은혜가 넘쳤다. 마치는 날, 주 목사님의 얼굴엔 광채가 나는 듯 훤하였다. 금식을 한 표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윤 전도사는 혼자 생각하였다.

?이적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저럴 수가 없는 것이다.?

윤 전도사는 더욱 주 목사님의 신앙을 부러워하였고, 자신도 주 목사님과 같은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였다.

10. 승리자를 모셔와야 한다.

해방 후 한국 교회들은 어지러웠다. 신사참배 문제로 지도자들은 권위를 잃고 강단에 서기마저 주저 주저 하였다.

경주 지방에 양화성 목사가 있었다. 경주 제일 교회 목사였다. 경동 노회장으로 유능한 분이었다. 허나 시국 인식 문제로 해방이 되자 권위가 없어졌다. 양 목사는 윤 봉기 전도사를 만났다.

?지금에 와서 목회를 안 할 수도 없고 목회를 할려니 권위가 없고, 어쩔 수 없는 입장이외다. 허니 승리자를 모시고 와서 집회를 하므로써 모든 과거의 불미로움을 씻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오. 윤 존사님은 주남선 목사님과 친한 사이이니 부디 우리 경주 지방으로 좀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윤 전도사는,

?내가 모시고 올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가셔서 말씀을 해 보시지요.?

하고 양 목사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난 주 목사님을 모시고 올 면목이 없습니다. 윤 조사님이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양 목사는 윤 전도사를 세 번이나 찾아와 졸라댔다. 그 무렵 주남선 목사님은 영도 뒷산에서 집회를 인도하시고 거창에 돌아가 계셨다.

영도 뒷산에서는 십일간 집회를 인도하셨다. 교역자들과 장로들의 집회였다. 모두들 은혜를 받고,

?우리가 내려앉자. 목사 장로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한다.?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일 주일 집회를 끝내곤 장로들은 돌아가게 하고, 목사와 전도사들은 남아 계속 집회를 하였다. 마지막 삼 일 동안은 전체 목사와 전도사들이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주남선 목사님은 이 집회를 인도 하시면서도 전 기간을 금식하였다. 집회를 끝마치고 거창으로 돌아온 주 목사님을 윤봉기 전도사가 찾아왔다. 윤전도사는,

?목사님, 피로하시겠지만 경주 지방 집회를 한 주간 허락하여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하였다.

9월 중에 집회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경동 노회에서는 이 집회를 통하여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가 다 내려앉자.?

양화성 목사가 앞장을 섰다.

?두 달 동안, 강단에 서지말고 자숙합시다.?

이렇게 그들은 신사참배 한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 자복 하였다.

11. 궤변의 어느 장로

주 목사가 거창 경찰서 유치장에 구검되었을 때, 함께 구검된 장로가 있었다.

모진 고문에 견디지 못한 장로는 시국을 인식하겠다고 항복을 하고 석방이 되었다. 이 장로는 교회에 돌아와 교인들 앞에 설 면목이 없었지만 교묘한 말로서 자신을 변호한 것이다.

장로는 교인들 앞에서 비위살 좋게 말을 뱉았다.

?나는 교회를 생각하고 가정을 생각하여 시국을 인식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 목사는 달라요. 어떻게 되었든 말았든, 자기가 편하면 된다는 그런 심보였습니다. 여러분! 교인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아는 그가 목사입니까? 나는 주 목사의 신앙을 의심합니다. 어째서 자기 혼자만 생각하고, 유치장에서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까? 나는 교회를 위하고 가정을 위해서 이렇게 시국을 인식하고 나왔습니다. 신사참배 그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이라고 교회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천당에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사상이 아닙니까? 자기가 지옥으로 가드래도 다른 사람을 위하고 노력하고 격려해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기독신자의 할 일 아니겠습니까??

말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변호하는 기술에 따라 옳게 보이는 법이다. 장로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교인들이 그 말에 긍정을 하였다. 계속 이 장로는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이런 식으로 설득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으로 소유한 신자들은 그의 잘못을 꾸짖었다.

?왜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을 하고 다니는 거요? 시국을 인식하고 나왔으면 부끄러워 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지, 그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또 한가지 더 악을 행하는 일인 줄 모르십니까? 신사 참배는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하고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고난을 겪고 계신 주 목사의 신앙을 의심하다니, 당신이야말로 기독신자가 아닙니다!?

12.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

주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을 자기 자녀 이상으로 사랑하였다. 거리에 나갈 땐 항시 손수건을 들고 나갔는데, 길가에서 노는 어린이들의 코를 닦아주고 눈곱을 일일이 다 닦 주시는 것이었다.

어떤 땐, 손수건을 미쳐 준비하지 못하여 두루막 자락으로 아이들 코를 닦아주어 두루막 자락이 얼룩지기까지 하였다. 더러워진 손수건과 콧물로 얼룩진 두루막을 빨면서 부인이,

?세상에 남의 아이들 콧물까지 닦아주는 사람이 어디있담.?

하고 푸념을 토하면,

?미안하오.?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주 목사님이 거리에 나서면 장난꾸러기 어린이들까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주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을 그의 온유한 몸짓으로 교회에 인도하였다. 많은 어린이들이 주일이면 교회당으로 밀려와 말씀을 들었다.

13. 독립운동 유공자를 찾아서

마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경효가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아버지 주 목사님은 아들을 데리고 심방에 나서기도 하였다.

어느 겨울 방학 때였다. 경효는 주 목사님과 함께 심방 길에 동행하였다. 냇가를 건널 때 외나무다리에 올랐다.

옛날 시골의 시내는 보통으로 외나무 다리였다. 곡예사처럼 외나무를 밟고 건너야 했다. 경효는 뛰어가듯 다리를 건넜다. 허나 주 목사님은 몇 발자국 딛지 못해 그만 냇물에 빠지는 것이었다. 경효는 뛰어가 아버지를 부축하였다.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주 목사님의 하체는 극히 힘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일경들의 고문에 하체가 멍들었고, 오랜 형무소 생활로 잃은 힘이 되돌아오지 않아서 그러했던 것이다.

주 목사님은 함양군 서상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부자로 사는 어떤 분의 집에 들려 혈색 좋은 노인과 긴 시간 담소하는 거시었다.

그 분도 3?1운동 당시 주 목사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유지였다. 그 집에서 나와 오형선 장로의 집으로 갔다. 오 장로 부인이 자루에 밤을 한 되 가량 넣어 주어 경효는 가지고 오면서 신바람이 났다.

오 장로 역시 독립운동 유공자였다. 주 목사님은 시간이 나면 옛날이 그리워 독립운동 동지들을 만나서 담소를 나누곤 하였다.

14. 제비 같은 사람

주 목사님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있던 1943년도의 일이었다. 전국에는 가뭄이 심했고, 특히 거창에는 논, 밭이 뜨거운 태양열에 타들고 있었다.

이때, 거창 거리의 불신자들 입에는 이상한 말이 나돌고 있었다.

?곡식에도 해를 주지 않고, 사람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제비 같은 주남고 목사를 가두어 욕을 보이니 하늘이 노하지 않을 수 있나? 변고여! 이는 확실히 변고라고?????

?그러기 말이여, 이런 가뭄을 맞아도 싸지 싸!?

이렇게 가뭄을 주 목사님 박해로 인한 하늘의 노함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5. 죽도록 충성하라

주남선 목사님의 생활 표어는 ?죽도록 충성하라?였다. 목사님은 이 표어를 교회당 안에 써 붙였다. 주 목사님은 그의 표어대로 평생을 충성으로 사시다가 가셨다.

참으로 죽도록 충성한 주님의 종이다.

그 후, 이금도 목사님이 거창읍 교회를 시무 하시게 되고, 이 표어를 교회당 화단 돌 비에 새겨 넣었는데, 주 목사님 자녀들이 대리석 돌 비에 이 표어를 새겨 세울 것을 의논하여 일을 추진 중에 있다.

16.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신다

주 목사님이 일경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신 것을 친히 목격한 자녀들은 분한 생각으로 마음에 의분이 솟아올랐다.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

그 생각으로 가슴이 꽉 메었다. 경찰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업혀 나와 집에서 치료를 받을 때, 자녀들은 너무 아버지의 모습이 처참하여 모두 울었다. 주 목사님은 어린 자녀들을 달래면서,

?울지 마라. 이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다.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생이기에 값있는 고생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직 신앙이 어린 자녀들은,

?이렇게 안 믿으면 예수님을 못 믿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겼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던 주경순은 그곳에서도 조선 사람이란 이유에서 설움을 많이 받았다.

?나라 없는 설움은 이렇게 큰 것이구나????

가슴 깊이 맺혀졌다.

기숙사에 한국 학생 7명이 있었으나 고생을 견디지 못하여 5명은 되돌아가고 2명만 졸업을 하게 되었다.

주경순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비록 내가 여자의 몸이요, 너희 나라에서 공부는 할 망정 아버지의 원수는 꼭 갚고야 말 터이다!'

하고 굳게 다짐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원수는 그들 자녀들의 손으로 갚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셨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라고 하신 성경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17. 눈물의 사람

주 목사님의 기도에는 눈물이 있다. 언제나 그의 기도는 꾸밈이나 의식이 없고 눈물과 진실만이 있었다.

새벽기도 4시에 교회로 나가 아침 9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데 그의 기도자리엔 항상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 마루가 얼룩졌다.

교회당을 청소하는 사찰은 아예 주 목사님 기도자리 옆에 걸레를 준비해 두었다. 주 목사님의 눈물을 닦기 위한 특별 걸레였다.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그는 자신의 어떤 수단이나 꾀를 생각해 내지 않았다.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께 해결을 맡기는 것이었다.

밤을 밝히며 기도하였다. 금식을 하며 기도하였다. 금식은 간절히 기도 드리는데 좋은 효과를 주었다.

주 목사님을 바로 아는 성도들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주 목사님의 눈물을 선지자 예레미야 같다고 한 것은 과장된 말이 결코 아니다.

주남선 목사 약력

1888. 9.14. 거창 동동 28번지에서 출생

1897. 서당에서 한학 수학

1908. 5. 기독교에 입신

1911. 9. 진주잠업실습소 졸업

1912. 6. 맹호은(호주선교사)선교사에게 수세

1914. 1. 거창읍 교회 집사

1919. 2. 진주 경남성경학원 졸업

1919. 2.28. 거창읍 교회 장로장립

1921. 3. 평양신학교 입학

1921. 9. 거창읍 교회 전도사 시무

1922. 8. 신한보(지하독립신문) 사건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운동 사건으 로 검거, 대구?진주 형무소에 구금

1924.12.29. 진주형무소에서 가출옥

1925. 3. 권서일 시작

1930. 평양신학교 졸업

1930. 9.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

1931. 2.22.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

1940. 7.17.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구금

1941. 7.11. 평양형무소 입감

1945. 8.17. 조국해방과 함께 출옥

1945. 8. 경남노회 노회장 피선

1945. 9. 거창읍 교회 다시 시무

1946. 9.20. 고려신학교 설립초대이사장

1948.12. 고려고등학교 설립초대이사장

1950. 4.10. 거창성경학교 설립, 교장

1951. 3.23. 소천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3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시고 file 선지자 2016.01.07
22 주남선 목사님의 성경책 file 김반석 2016.01.03
21 신학교 졸업 사진 file 김반석 2016.01.03
20 신사참배를 이긴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님 file 선지자 2015.12.30
19 한국 교회사에서 찾는 좋은 목사님, 주남선 목사를 중심으로 - 이상규 교수 선지자 2015.12.30
18 주남선 목사의 생애와 신앙인격 - 강용원 교수 선지자 2015.12.30
» 해와 같이 빛나리 - 제 16장. 해와 같이 빛나리 선지자 2015.12.30
16 해와 같이 빛나리 - 제15장 선지자 2015.12.30
15 해와 같이 빛나리 - 제 14장. 생과 사의 길목 선지자 2015.12.30
14 해와 같이 빛나리 - 제13장. 살인 명부 선지자 2015.12.30
13 해와 같이 빛나리 - 제 12장. 기쁨과 슬픔의 사이 선지자 2015.12.30
12 해와 같이 빛나리 - 제11장. 살려 놓은 하나님의 뜻 선지자 2015.12.30
11 해와 같이 빛나리 - 제10장. 위로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 선지자 2015.12.30
10 해와 같이 빛나리 - 제 9장. 주여! 순교의 축복을..... 선지자 2015.12.30
9 해와 같이 빛나리 - 제 8 장. 목화 이삭 줍는 사모님 선지자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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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와 같이 빛나리 - 제 5장. 맹물 솥에 불때는 사택 선지자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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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와 같이 빛나리 - 제3장. 선동자 삼형제 선지자 2015.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