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배움과 슬픔을 함께 하며

  선지자선교회

통명진명학교

 

당시 통영에는 두 계통의 학교가 있었다. 하나는 사립학교이고 하나는 공립학교였다. 공립학교는 당시 일본이 한국을 합방하고 일본식 교육제도로 시행되는 학교로서 통영공립보통학교라 불렀다.

 

사립학교는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계통의 학교인데 통영진명학교이다. 덕지 소녀는 신앙과 애국심에서 19124월에 통영진명학교에 입학하였다. 덕지 소녀는 부모의 슬하에서 한문을 읽다가 4년제 국민학교에서 현대식 학교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이 학교에서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예배를 드렸다.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모든 학과에 앞서 성경시간이 제일 좋았다. 십계명을 배웠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았다. 그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인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심을 마음 속 깊이 믿었다. 우상을 섬기면 복 받지 못하고 화 받을 것을 어린 가슴에 고이 명심했다.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참으로 귀했다. 나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해야지.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평생 위로 하나님 공경 아래로 부모님께 효성하며 살겠다고 기도하며 맹세했다.

 

이 결심과 이 믿음이 후일 대일본제국이라는 우상국과 한 여성의 몸으로 능히 싸울 수 있는 뿌리가 된 줄 안다.

 

어머니와 헤어지는 슬픔

 

마냥 즐겁기만 한 어린 가슴에 뜻하지 않은 인생의 슬픔을 맛보게 되었다. 그가 4학년 졸업반이 된 해의 이른 봄 어머니의 죽으심이다. 덕지 소녀의 나이 15세 때다. 학교에서 봄소풍(당시 명칭으로는 원족이라 함)을 학부모님과 함께 가기로 했다.

 

덕지 소녀의 어머님 김처녀씨도 딸의 귀여움과 사랑을 잊지 못해 함께 가기로 했다. 통영에서 명승지인 미륵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용화사에 도착했다. 벚꽃이 만발하고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416일 학생과 어머니는 손에 손을 잡고 넓은 들을 지나고 흐르는 시내를 건너서 산곡에 올랐다. 모두들 찬송이 흘러 나왔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별들이

망망한 바다와 늘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며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알 듯 하도다.

 

이 곳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에덴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어머님이 덕지 소녀를 보고 말했다. 너 아버지 사랑하지?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럼 사랑하지 않고. 의아한 대답이었다.

 

천국은 얼마나 좋은 곳일까? 어머님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어린 딸은 이상한 예감이 번개처럼 번쩍 스쳤다. 어머니는 머리에 열이 나고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셔서 계속 자리에 누웠다.

 

한 주일 후에 그대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35세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덕지 소녀는 산에서 하신 어머님 말씀의 의미를 알았다.

 

나는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앞서 간다. 너는 굳세게 살아라. 아버지를 나대신 잘 모셔라는 부탁을 은밀하게 남긴 것이다. 어린 소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많이 울었다. 난생 처음으로 당하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아니다. 내가 울면 어머님 없는 아버지를 누가 위로한담. 이제부터 오로지 믿음만으로 아버지를 섬기리라고 다짐하고는 굳게 일어섰다.

 

의신여학교로 진학하고

 

그의 나이 16세 때 통영진명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의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했다. 몸은 마산에 있어도 홀로 계신 아버지를 잊을 수 없었다. 아내 잃은 남편은 아내만을 사모했다. 믿음 깊고 부지런하며 매사에 민첩한 부인, 실로 그는 현처양모였다.

 

지금까지 지식만의 신앙이 천국을 더 확신케 하는 체험적 신앙이 되었다. 교회에서 권면하기를 남자는 혼자 살면 안 된다고 했다. 친척들의 독촉도 성화같았다.

 

홀애비 누가 돕나요. 딸도 객지 공부가고 없잖아요. 이러한 강요에 부득이 재혼하게 된다. 아버지 나이 43세 여름이었다. 서모님은 역시 김해김씨인 김성심씨, 통영 출신으로 23세의 처녀였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 정신으로 최 집사를 섬기려고 결심하고 결혼한 것이다. 노 홀아비가 꽃다운 처녀아가씨를 아내로 영접하여 사랑의 기쁨이 넘쳤다. 꿈같은 세월이 흘렀다.

 

노 홀아비가 꽃다운 처녀아가씨를 아내로 영접하여 사랑의 기쁨이 넘쳤다. 꿈같은 세월이 흘렀다. 드디어 한 아들을 얻었다. 달구라고 이름을 지었다.(이 분은 진주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 명치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조흥은행 부산 흥아타이어 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다 작고함.)

 

그러나 아버지는 재혼한 지 3년 만에 재혼을 후회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딸을 생각했음였다고 짐작된다.

 

앞서간 부인을 사모한 지도 모른다. 우울함을 느끼던 아버지는 477월경에 별세하였다. 상심 끝에 병상에 누운 아버지에겐 백약이 무효였다. 덕지 소녀는 아버지의 병 때문에 의신학교 졸업을 반년 남긴 채 중퇴하고 집에 돌아왔으니, 실로 마음이 안타까웠다.

 

아버지를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옛사람 말씀에 약이 효력이 없을 때 피를 드리면 산다함을 기억했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자기의 무명지를 부엌에 가서 도마 위에 놓고 잘랐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나의 피를 죽어 가시는 아버지께 드립니다. 살려주세요. , 꼭 일어나게 해 주세요.

 

손가락 자른 눈물의 효성

 

사랑하는 딸의 봉양 받았으나 4일간 그 생명이 더 연장되었을 뿐 결국 천국으로 가셨다.

마지막 딸의 단지의 효성도 무심하였다. 덕지 소녀는 생의 슬픔을 두 번째로 맛보았다. 이때부터 덕지 소녀는 이 한 목숨 주를 위해, 나라 위해, 겨레 위해 다 바치리라 결심을 굳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