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3:29
● 3. 진명 유치원 보모 시절
105인 사건
1919년 9월에 덕지 선생은 통영진명유치원에 보모로 취임했다.
당시 나이 19세 때다. 이 유치원은 호주선교회가 경영하는 유치원인데 당시 원장은 신애미라는 여선교사다. 최덕지 선생이 선교회에서 신앙과 인격을 인정받아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보모가 된 것이다. 1919년 3월 1일은 잊을 수 없다. 역사적인 독립만세가 이 땅 방방곡곡에 메아리치던 때다. 돌이켜 보면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고 그 치욕의 조약이 공포되었다. 대한제국은 조선이라 호칭되고 일본의 통감부는 총독부로 개칭하였다. 헌병들의 무단정치가 시행됐다.
드디어 일본은 음모를 꾸몄다. 기독교 지도자를 탄압했다. 그것이 데라우지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날조된 105인 사건이다.
이는 당시 배일사상과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신민회와 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구실 삼아 안악, 정주, 선천 등의 민족지도자들을 체포 투옥시켰다.
이로써 민족지도자를 제거하고 독립운동을 발본색원하자는 것이다. 이때 체포된 인사가 일본인의 발표에는 1백57명이다. 곽임대씨는 480명, 독입운동사에는 6백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 고문으로 전덕기 목사를 비롯해 김근영, 정희순 등이 사망하였다. 1912년 6월에 105인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 9월에는 전원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5년-10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중 중요 지도자로서 윤치호, 양기택, 안태국, 이승훈, 유동열, 이명룡, 길진형, 양전백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인격자요, 신앙인들이었다.
3․1운동의 만세소리에
또한 우리 민족의 수난과 항쟁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은 3․1운동이다.
그 역사적 배경은 이러하다. 1914년 7월 28일 세계 제1차대전이 발칸반도에서 터졌다.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었지만,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8일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전후처리 14개항 중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1918년 11월 독일혁명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동맹군에 속해왔던 약소민족들이 독립했다. 폴랜드, 헝가리, 체고 등이다.
전승국인 연합국측은 그들의 속방을 독립시켜 주지 않았다. 영국에 있어 인도가 그러했다. 필리핀은 여전히 미국에 속해 있었다. 프랑스도 베트남을 해방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애국지사들은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믿었다. 일본 유학생들도 마찬가지로 활동했다.
더욱 1918년 12월 1일자 저팬 에드버 타이저(Japan Advertiser 일본 동경에서 발간하는 영문지) 발표는 큰 힘을 주었다.
1918년 12월 28일이었다. 동경 유학생들은 웅변대회를 열었다. 5백여명이 모여들었다. 민족자결 문제를 토론했다. 조국의 독립의 횃불이 가슴마다 타올랐다. 국내에도 이 불이 번져왔다. 간도에서도 비밀리에 전개됐다.
1919년 1월 21일이다. 고종황제께서 승하하셨다. 원인 모르게 덕수궁에서 운명하신 것이다. 국민 상하는 모두 비분강개하게 되었다. 1919년 2월 1일이다. 상해 신한청년단 대표들이 일어났다. 여운형은 러시아로 갔다. 김규식은 파리로 갔다. 장덕수는 일본으로 갔다. 김철, 서병호는 국내로 왔다. 각각 파견된 장소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2월 7일이다. 송진우, 최린 등이 기독교의 이승훈과 합류하였다. 1919년 2월 8일이다. 동경 유학생들은 YMCA에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서는 이광수씨가 집필했다.
동경 학생들의 거사는 국내지사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최남선씨는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1919년 2월 25일이다. 천도교에서 민족대표 15명이 결정되었다. 2월 26일에는 기독교 대표 16명이 결정되었다.
불교에서는 2명이 확정되었다.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보성사에서 인쇄하였다. 2월 28일은 손병희 집에서 거사를 위한 최종 계획을 세웠다. 3월 3일을 변경하여 3월 1일 거사키로 한 것이다.
1919년 3월 1일 하오 2시 태화관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이로서 3․1운동의 봉화가 전국 강토에 불붙게 되었다.
어린이에게 모세를 가르치며
경상남도의 만세시위는 3월 3일 마산과 부산에서 발단되었다. 통영에는 3월 14일 일어났다. 마산에는 의신여학교가 있었다. 최덕지 선생의 스승인 박순천 여사가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2월 28일 구마산역에서 이갑성이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최봉선(의신여학교 학생. 박순천 선생이 이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음. 父․崔道現) 집에서 인쇄하고 태극기를 준비했다. 3월 12일 장날을 이용 만세 시위를 했다.
최덕지 학생은 의신학교에서 철저한 독립정신을 배운 것이다. 진명유치원에서 어린이들에게 모세를 열심히 가르쳤다. 에스더를 들려주었다.
바로 보모가 독립투사였다. 자모를 모이게 했다. 민족자주의 정신을 함양시켰다.
우리가 독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열심과 독립정신은 부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19년 10월에는 통영 애국부인회 서기로 피임되었다.
이때부터 애국활동을 시작했다. 한영신, 김경희 등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1919년 6월이다. 이 회의목적이 독립사상 고취와 임시정부 자금조달이었다. 최덕지 보모는 이 사명을 위하여 열심을 다했다. 자신이 먼저 부모에게 받은 출가용 장농을 팔았다. 의복전부를 내놓았다. 통영 가가호호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여서 임시정부를 원조하였다. 그때 조직으로 남자들은 혈성단원으로 일하였다.
단원은 백여명, 주로 강상은, 최상림, 배익조 등이 활동하였다. 여성들은 상해독립단 통영원조회라고 했다. 크게 활동한 이들은 박열순(자유당 때 법무장관 서상환씨 부인), 이학이, 허장완, 김순이, 문복수, 최덕지 등이다. 모두 12조로 구성하였다 한다.
(예, 제1조 이학이․허장완, 제2조 김순이․문복수 등) 활동한 지역은 통영, 하동, 사천, 고성, 김해, 양산 등이다. 모금된 재정은 통영 김필애, 김해 이갑성 편으로 임시정부에 송금되었다.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있었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국제적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망명정부가 된 것이다. 젊은이의 가슴에는 희망이 넘쳤다. 자주독립을 위해 일했다.
오직 믿음, 오직 독립
밤에는 유치원에다 야학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문맹이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식 교육이었다. 일본말을 국어라고 하였고, 우리말은 조선어라고 하였다. 많은 부모들이 고의적으로 학교에 자식을 보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또 도덕적으로도 여자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리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최덕지 보모는 집집마다 방문하였다.
우리가 독립하려면 알아야 합니다.
여자가 글을 알아 무엇해요.
아닙니다. 앞으로 남녀평등입니다. 배워야만 삽니다.
죽도 제대로 못 먹는 주제에 학교가 무어람. 돈 걱정은 말고 오기만 해요. 월사금은 없어요. 당시 학교는 사립이건 공립이건 다 월사금(수업료)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모여든 학생은 10세 아가씨로부터 60세 노인까지였다. 가르친 과목은 한글, 산수, 역사, 노래 등이다.
그때 부른 노래의 한 구절.
들역에 비바람 불어와서 산위에 나무들 무너져도 오늘은 이동산 꾸며놓고 내일은 저동산 꾸며놓자. 조국을 생각하게 하였다. 애국지심을 불어넣었다. 피곤을 몰랐다. 여성도 알아야 한다. 여성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외쳤다. 1922년 1월에는 교회에서 집사로 피임되었다. 오지 믿음, 오직 독립 그에게는 믿음이 애국심과 직결되었다. 하나님이 독립을 주어야 한다, 조선 사람은 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요, 애국심이었다. 1922년 4월에 통영교회 여전도회 회장에 피임되었다. 그의 신앙은 날로 깊어갔다.
새벽마다 교회에서 기도하며 부르짖었다. 2천만 동포를 구원해달라는 기도였다. 유치원 어린이들은 장차 다 애국자가 되고 독립투사가 되라고 간구했다.
유치원아의 지도가 끝나면 가정방문이다. 자모들에게 전도하고 애국심을 함양시키기 위함이다. 또한 밤에는 야학지도를 계속하니 실로 새벽에서 밤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믿음으로 다해냈다. 대하는 청년들에게는 용기를 주었다.
1925년 4월에는 통영교회 기독청년회장에 피임되었다.
교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다. 통영사회에서는 애국청년이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여자는 약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일이 없어 논다고 할 수 없었다. 당시 퇴폐적이고 무기력한 남녀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목표를 보여주고 빛이 있는 길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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