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결혼의 즐거움과 사별의 쓰라림

  선지자선교회

동경 유학생의 구혼을 받고

 

최덕지 보모는 그의 나이 20세 때 결혼하였다.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김정도씨가 그의 남편이다. 이 분은 아버지 김명광씨, 어머니 정찬영 씨의 장남이며 김정실씨(동아일보 논설위원 단국대학장, 국회의원 역임)의 형님되는 분이다.

 

김정도씨는 당시 일본 동경 명치대학 법과에 재학중이었다. 이 분은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거쳐 동경에 유학하였다. 고성군에서는 대학진학을 제일 먼저 한 분이라고 한다.

 

시아버지 김명광씨는 은월교회 영수이시고 어머니되는 정찬영씨는 집사였다.

 

당시 일본 왕래 교통은 이러하다. 고성-통영까지는 버스나 배를 이용했고, 통영-부산은 배편이 있었다.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라는 하관까지 소위 관부연락선을 운행했다. 김정도씨가 방학 때 통영을 드나들게 되면서 그 당시 교회와 사회에서 소문난 처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단지의 효성을 다한 소녀, 철저한 신앙 처녀, 억세게 일 잘하는 처녀, 애국심이 강한 처녀 이런 이야기가 향학열과 애국심에 불타던 유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명유치원을 찾아갔다.

 

김정도씨의 첫눈에 비친 최덕지 보모는 의지적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특출한 여성이었다. 처녀의 눈에 비친 김정도씨도 준수했다. 당시 드문 사각모에 끌렸다. 많은 여성들이 흠모하는 동경 유학생이었다.

 

마주 바라보는 사이에 말없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통영, 고성, 거제, 순회 전도사인 강상은 조사를 통해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

 

그해 여름 방학 때 통영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호주 선교사 마산 창신학교장 맹호은 목사가 주례를 맡았다. 많은 성도들이 축하 속에 에워쌌다.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외로웠던 최덕지 보모는 부군을 의지하고 사랑했다. 부모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편에게받았다. 나날의 생활이 기쁨과 은혜로 충만했다. 시댁이 있는 고성은 아름다웠고, 은월리 산과 들이 정다웠다.

 

그러나 신혼의 즐거운 꿈이 깨기도 전에 부군은 유학의 길을 떠나야 했다. 부산까지 따라갔다. 연락선의 고동소리와 함께 고요히 머리 숙인다. 주여 부군과 함께 하소서.

 

당시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감시가 심했다. 부산 부두에는 한국의 형사들이 조사가 심했다. 일기장, , 소지품 등 샅샅이 뒤졌다. 의심나면 경찰서로 연행했다. 일본 시모노세키 부두에 내리면 감시를 또 받았다.

 

일본 헌병 형사들이 두 줄로 서서 감시의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이상하면 손끝으로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한다. 말을 묻고 말이 막히면 소지품 조사나 몸을 수색한다. 동경이나 일본 유학생 치고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은 학생은 없다. 잘못 걸리면 유치장 신세를 져야 한다.

 

본국에 소환되기도 한다. 혹은 본집에 형사진들이 들이닥쳐 수색을 한다. 부모를 불러 괴롭게 한다. 사상 불온, 불온한 책 소지 등 온갖 트집을 잡았다. 일경의 가시가 바로 유학생이다.

 

한 아기를 주신 기쁨 속에

 

연락선 선체가 시야에서 안보일 때까지 서 있다. 눈물을 닦는다. 멀리 오륙도가 보인다. 갈매기의 울음소리. 남편의 뱃전으로 달려가는 마음, 사모하는 마음은 너무도 애틋하기만 했다.

 

여름이 가면 겨울방학을 기다린다. 겨울방학에 만나면 또 헤어져 그리움에 사무치게 되고 다시 봄방학을 기다리게 된다.

 

과거 일제학제는 4-71학기, 9-122학기, 1-33학기이며 여름방학은 현재와 같고 겨울방학이 12월 초순 2-3주간정도였다.

 

해가 거듭할수록 사랑은 깊어만 갔다. 김정도씨도 아내를 참으로 사랑했다. 그의 열성, 그의 정성, 자기에 대한 애정과 섬김이 나무랄 데 없는 부인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들 사랑에 한 선물을 주셨다. 최덕지 선생 24세 때 첫 딸이 출생했다. 192471일이다. 이름을 혜수라 지었다.(하나님의 은혜에서 빼어 내었다는 뜻)

 

부군이 출산 전에 한국에 나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방학에야 나왔다.

3주 후에 어린 딸을 본 아빠의 기쁨 비길 데 없었다. 혜수는 아빠와 엄마를 골고루 닮았다. 시부모님도 기뻐했다. 온 교우들도 축복해 주었다. 보는 이마다 행복한 부부라 했다. 이상적인 가정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앞길을 누가 알리오. 그 가정에 검은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통영(전국적으로)에 장질부사 휩쓸었다. 7월이다.

 

김정도씨가 그해 방학에 왔다가 고성본가에도 미처 가지 못했다. 어린 딸이 너무 귀엽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아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학창에 시달린 몸 휴식도 제대로 못한 탓인가, 장질부사에 전염되어 눕게 되었다.

 

최덕지 선생에게 청천벽력이었다. 하늘같이 의지하는 남편이 아닌가. 당황하고 염려했으나 시댁에 병고를 알리면 부모님의 심려가 클까보아 감추었다. 한편 본가에서는 방학이 다 지나도록 소식도 없고 오지도 않기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다.

 

병원에 갔다. 열이 많다고 얼음으로 치료하고자 했다.

장질부사 치료는 경험적으로 이열치열로 다스려야 한다. 한약국보다 신의를 믿었다. 경험도 없었다. 8월 더운 염천이다. 열이 40도가 넘었다. 아우성을 치고 밖을 뛰쳐나오기도 했다.

 

나 먼저 간다는 말을 남기고

 

당국에서는 전염병이라고 통영 피병막으로 옮겼다. 장질부사는 여자가 간호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남편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정성을 다바쳤다. 백약도 아무 효험이 없었다.

 

열이 해소되지 않았다. 1924924일 아내의 손을 잡고 그는 말했다.

나 먼저 가오. 미안해 혜수를 부탁해.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가. 행복이 이렇게 깨어지다니. 놀람이 너무 커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본가에서는 뒤늦게 알고 안타까와 했다.

일찍 연락했으면집에서 치료했으면한약을 썼으면땀을 내어 주었더라면 죽음을 건지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명이 재천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하랴. 어릴적 부모 잃은 한이 있더니 또다시 부군을 잃은 한이 사무침을 어이할 것인가.

 

동양 성인의 말에도 하늘이 대임을 맡기려 할 때 먼저 그 심지를 괴롭게 한다하였다. 인생의 삶이 뜻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최덕지씨를 장차 일본제국과 싸우기 위해 일찍 그 심신을 연단하심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전심전력 주의 일에 충성했다. 신앙에는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언제죽을지 모르는 인생, 나의 본분을 다하자 굳세게 섰다.

 

통영읍 장로회 대화동교회에서 유치원을 경영코자 했다. 사람이 필요했다. 김 장로란 분이 사람을 찾고 있었다. 변두리 도천리에 도천리 유치원이 있었다. 이 유치원을 설립한 이가 최덕지 선생이다.

 

19254월이다. 이곳에다 기도실을 설치하고 예배를 인도했다. 목동들을 대상으로 밤에는 간이학교까지 운영했다. 부군 잃은 아픔을 농촌 계몽에 전념했다.

 

나라 빼앗긴 백성들은 고아같이 불쌍했다. 기름진 옥토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 농사마저 자유가 없었고 자기들의 정책에 이용되었다. 쌀이 없었다. 농촌은 가난했다. 많은 아이들이 굶주렸다.

영양실조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구마로 끼니를 이었다. 갯가에 나가 해초를 뜯고 조개를 잡아 연명했다.

 

사내아이는 7-8세 때 쯤이면 산에 갔다. 풀을 베거나 죽은 소나무가지를 주웠다. 낙옆을 긁어(갈비라고 함) 오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온돌방에는 이 땔나무가 필요했다. 이나무들을 지게에 지고 시장에 팔아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농민이 많았다.

 

헤어진 옷에 떨어진 고무신짝을 끌고 학교를 찾았다. 그래도 배워야 한다는 신념 이것이 한가닥 바람이었다.

최덕지 선생은 우리가 가난해도 몸마저 더러워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아이들의 때묻은 손발을 손수 씻어주었다. 청결부터 가르치고 기도를 가르쳤다. 한글을 가르쳤다.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은 먼저 실천했다. 해야할 일은 어떻게 하든지 실천하도록 훈련시켰다.

 

아이들의 손발 씻어주며

 

가난한 농촌의 기도실, 그 뜰이 언제나 깨끗했다. 유치원 아이들도 손과 발이 깨끗했다. 옷들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야학에 오는 학생도 손발을 깨끗이 하고야 교실에 들어왔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교실을 깨끗하게 정돈해놓고 집에 돌아갔다. 차츰 도천리 유치원과 야학교가 읍내에 알려졌다. 그리고 여러 마을에도 알려진 것이다.(지금은 이곳에 훌륭한 교회가 세워져 있음)

 

이리하여 김장로가 최덕지 선생을 만났다. 교회가 유치원을 운영코자 하는 뜻을 최선생에게 설명했다. 이를 추진할 인물이 최선생 밖에 없음을 말했다. 자신이 자란 모교회를 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주일학교에 저축해 둔 헌금이 있었다. 이것을 기금삼아 동부유치원을 설립했다. 192710월이다. 도천리 유치원이 서쪽이라 명칭을 동부유치원이라 하였다. 설립과 동시 보모가 되었다.

 

한편 19289월에는 통영근우회 회장에 피임되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권위 있는 두 단체가 있었다. 남자들의 모임으로는 신간회요, 여자들의 모임으로는 근우회를 손꼽을 수 있다. 근우회는 1927527일에 창립되었다.

 

발기인은 황신덕, 최은희, 유영준 등 여러분이다. 이 회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단결을 위해 조직된 것이다. 비종교적 여성계몽 단체인 것이다. 그 행동 강령을 보면 다음과 같다.

1.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차별 철폐 2.일체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타파 3.조혼방지 및 결혼의 자유 4.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5.농촌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6.부인노동의 임금차별 및 산전산후 임금지불 7.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폐지

 

근우회는 한국여성사에 있어 대표적인 단체다. 또는 기독교적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색채를 포함하고 있다. 그 구성원은 언론인, 교육가, 의사 등 범여성적이라 하겠다.

 

그 사상은 근대적 여성관에 토대하고 있다. 최덕지 선생은 이 근우회의 여성지위 향상에 앞장선 분이시다. 자기는 여성임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과부가 되었다고 비관한 적이 없다. 딸자식만 가졌다고 기가 꺾인 때가 없었다. 딸자식을 천대하는 그 시대에서 천금같이 소중이 여겼다.

 

여권신장에 앞장을

 

그는 여권신장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봉건적 인습타파와 미신타파는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인신매매 공창폐지는 그의 임종 때까지 기도 제목이었다. 남녀의 차별 대우는 철저히 반대하며 투쟁했다. 연후 그가 출옥 후 재건교회를 세우고 여성직(여자 장로, 여자 목사)을 확립시킴은 이때 받은 사상의 영향이라고 믿어진다.

 

이때 교회로서는 큰 시련이 닥쳐왔다. 다름아닌 1225일 탄일송을 당국에서 금지하도록 했다. 이는 19261225일 일본의 대정천황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1879831일 소위 명치천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이후는 대정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26년 이후를 소화천황 시대라 한다.

 

1927년 구주성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세력이 점점 강해갔다. 교회가 늘어가고 교인이 불어났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기독교인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이다.

 

로마시대 박해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진리에 강한 자들이다. 그러나 한 번 시험에 보자는 그 의도가 바로 한국 기독교회에 성탄송을 금한 조처였다. 1225일이 바로 대정천황의 붕어일이니 근신하라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반대할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이다. 한국 기독교가 했다. 그래서 탄일새벽송을 부르지 아니했다.

 

이것을 본 최덕지 선생은 가슴이 아팠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일본 대정 천황이 죽은 날은 일본 국가의 근조일이다. 그러나 예수탄일은 온 우주의 축일이다. 전 세계적 경축일이다. 온 교회는 이 탄일송으로 교회의 존재를 인식시켜 왔다. 불신자들도 이 날만은 기뻐했다. 죄악에 잠든 영혼들이 이 새벽송을 듣고 깨어났고 살아났다. 만백성이 맞이할 구주 나셨음을 알리는 새벽송이다.

 

, , 분하다. 한국교회가 병들었다. 한국교회가 죽었다. 이 작은 일하나 반대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랴. 이 적은 시험하나 이기지 못하고 큰 시험을 어떻게 하랴.

 

작은 시험 이겨야 큰 시험도

 

이렇게 부르짖고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일본 당국은 쾌재를 불렀다. 강한 것 같으면서 약하군. 목숨을 걸고 반대할 줄 알았지. 인간은 비겁해. 예수쟁이들 큰소리쳐도 별거 아니군. 이리하여 차츰 자기들 마음대로 기독교를 요리해 갔다.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국기배례를 시켰다. 마침내 팔백만 잡신 천조대신 우상당에 한국 교회를 굴복시키게 된 것이다.

 

여기 최덕지 선생은 일어섰다. 내가 죽은 한국 교회를 살려야 한다. 병든 한국교회를 치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성이다. 약한 자다. 에스더를 보라. 그는 금식하고 조국을 구하지 않았느냐.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자.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 말씀대로 뜻을 정하였다.

 

최덕지 선생은 보모 일을 보면서 금식기도하였다. 처음엔 3일간 금식했다. 물도 마시지 않고 밥과 과일은 물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한국교회 죄를 용서하소서. 할 일을 안 한 비겁함을 불쌍히 여기소서. 연약한 나에게 힘을 주소서. 불쌍한 내 동포를 건져 주소서.

 

주를 사랑하는 간절한 그 심령은 살아 울부짖었다. 한국교회의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장래를 내다보았다. 역사를 지배하고 섭리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인간을 그 역사의 기관으로 삼으신다.

 

최덕지 선생의 금식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많은 남자교회 지도자들이 교권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마음은 탐욕과 지배욕에 눈이 어두웠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일본의 군벌을 본 그들은 비겁했다.

 

몇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금식으로 준비한 최덕지 선생을 하나님은 택하셨다. 우상국 일본하고 준비한 너가 가서 싸우라하는 소명감을 받았다. 다음 한국 3,000교회와 50만 신도가 일본 신사당에게 굴복할 때 신사당은 물론 동방요배(궁성요배), 국기배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도 등 일본의 사상과 의식에 철두철미 반대하고 투쟁하여 완전 승리를 한 이는 오직 최덕지 선생 한 분이다. 이 승리가 이때 준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