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3:30
● 5. 평양 여자신학교 입학과 생활
유치원 경영
동부 유치원에서 최덕지 선생의 희생적인 봉사와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안겨주었다. 이를 도우고 싶어 하는 선교사가 한 분 있었다. 호주 여선교사 신애미씨다. 1930년 4월에 진명 유치원으로 최덕지 선생을 다시 초빙하였다.
동부 유치원에는 마산에 있던 최봉선 선생을 모셔왔다. 이 분은 박순천 여사의 제자이다. 의신학교 고등과를 나와 일본 히로시마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수재이며, 모든 일에 열성이 있는 처녀였다.
최덕지 선생은 그녀를 청빙하여 자기 후임으로 동부유치원을 맡겼다.(이 분은 3/1운동 만세사건으로 옥고를 당했고 해방 후 의신여학교를 재건하여 교장으로 봉직하다 정년퇴직하고 마산 문화동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계심)
최봉선 선생은 유치원을 경영하면서 유치원 교육의 중대성을 깨달았다. 다시 동경여자 보모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통영 동부유치원을 이론과 실제에 있어 한국 유수의 유치원으로 이끌었다. 이 유치원은 일제 말기에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으나 해방과 더불어 다시 재건했다.
올해는 34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졸업생 102명을 내보냈다. 한국의 수난과 함께 한 유치원이요, 한국의 발전과 함께하는 유치원으로 그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최덕지 선생을 진명유치원으로 청빙한 신애미 선교사는 그의 신앙과 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사는 그를 가리켜 최선생은 보통 여성이 아니오, 비범한 인물이오, 주를 위해 크게 일해야 할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최덕지 선생을 평양여자신학교에 추천하였다. 신애미 여선교사는 통영에서 장래성 있는 인물에게는 교육의 길을 열어 주었다 한다.
신학교 교수가 된 공덕귀 여사
그러한 분 중에 공덕귀 여사도 있다. 이 분도 두뇌가 우수해 동래 일신여학교에 보내주었는데 졸업반 때 송창근 목사 부흥회에 참석하여 그 신앙을 인정받았으며, 이로 인해 일본 횡빈여자신학교에 유학하여 졸업하게 되고 졸업과 동시 김천의 송창근 목사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 후 송창근 목사는 한국신학대학 설립과 동시 학장이 되고, 공덕귀 선생은 이 신학교 교수직을 맡았다.
1932년 4월 최덕지 선생은 평양여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나이 33세 때다. 가슴이 뛰었다. 마치 병사가 전쟁을 위해 부름받아 입영하는 감회였다. 33살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속을 십자가로 완성하였고, 최덕지 선생은 그 나이에 예수의 뒤를 이어 십자가 전선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최덕지 선생이 신학교 입학하기 전해인 1931년 7월에 만주 만보산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군인이 비적을 소탕한답시고 우리 한국인을 사살한 것이다. 집과 재산을 불태운 사건이다. 그리고 1931년 9월 18일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한국을 침략한 그들은 만주마저 침략한 것이다. 1932년 9월 일만의정서에 조인하였다.
일본은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 실상은 평화를 교란했다. 동양 전체를 침략하려는 악마의 나라였다. 바로 세기의 사탄이다. 최덕지 선생은 이 사탄과 싸우기 위해 신학교에 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학은 신앙을 조직하는 것, 신앙을 체계 세우는 것,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신교의 신학은 성경말씀을 토대하고 그 위에 세우는 것이다.
말씀은 곧 검이라 했다. 좌우의 날센 검이다. 그는 이검을 잘 갈았다. 일본국 사탄과 싸우기 위해서다. 한국인의 신앙은 이 말씀을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다른 피선교국보다 발전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선교사가 들어가서 그 다음 성경을 번역했으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처음 만주에서 이루어졌다. 다음은 일본 요꼬하마에서다. 만주 것은 1880년에 만주 목단에 와 있던 죤 맥킨타이어(스코틀란드의 연합장로교 선교사)와 존 로스가 있었다.
이분들이 서상륜과 이응찬에게 복음진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1881년). 서상륜이 두 선교사에게 우리말을 배워주었다. 1883년 1월에 존 로스는 한국의 글자는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문자라고 경탄했다. 그래서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했다.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고
최초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1882년에 나왔다. 1883년에는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3,000부가 간행되었다. 1884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1887년에 이르러 예수교성교전서라 하여 신약 전부가 번역 간행되었다. 서상륜은 성경을 만주 동포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는 압록강을 건너서 본국에 전한 것이다. 일본 번역은 이의 수정 번역이라 한다. 이 수정은 일본 수신사 박영효 사절단의 수행원이다.
이 분이 동경 외국어학교의 한국어 교수이다. 본래 통리외무 아문의 협판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기독교인 쯔다 센(일본 농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을 만나 친교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그의 집 병풍에 한문 산상보훈을 보고 감탄했다. 이분에게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다. 다음 동경에 있는 야스가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때 일본 주재 장로교 선교사 조지 녹스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목사와 함께 성경연구에 정진했다.
그는 일본어가 유창했고 시에도 능했다. 이로 인해 이 수정은 선교사와 일본인 사이에서 적지 않은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성경을 보고 이 겨레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부르짖었다. 성경 번역의 뜻을 세웠다.
때마침 녹스 목사의 친구인 헨리 루미스가 그를 방문했다. 이 분은 일본주재 영국 성서공회 총무였다. 복음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맡아달라고 했다. 흔쾌히 수락하고 번역을 시작했다.
1884년 한한신약성서에 토를 달아 영국 성서공회에서 출간했다. 다시 1885년 마가복음이 미국 성서공회를 통해 1,000부가 출판되었다. 한국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1월 동경에 왔다. 한국엔 갑신정변으로 입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3월까지 머물면서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을 보고 놀라와 했다. 그리하여 번역된 이 마가복음을 가지고 4월 25일 입국한 것이다. 우리 겨레는 진리에 대한탐구심이 강했다. 우리의 한글이 우수했다. 복음을 준비하고 선교사를 맞이했다.
최덕지 선생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 학비는 대여장학금을 받았다. 기숙사에 있기로 했다. 한국에서 유일한 신학교였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기숙사에는 한 방에 두 사람이 합숙하였다. 최덕지 학생은 김택정 학생과 동거하였다.
그는 평안도의 의주 출신이었다. 합숙과 동거는 지역간 감정과 생활습성을 이해시켜 주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남과 북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동과 서의 파벌을 융화시켰다. 학업에도 정성을 다했다. 당시 쟁쟁한 교수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도 교회사의 윤필성과 선지서의 김인준 두 교수에게 감화를 많이 받았다.
기독교 박해사를 배우며
기독교 박해사를 배울 때는 가슴이 뛰었다. 로마시대 박해는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로마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바울로 인해서다. 기원 3,000년까지는 박해에 박해가 거듭되었다. 기독교회사는 로마의 십대 박해라 한다.
네로 황제는 자신이 로마시에 방화하여 그 책임을 기독교도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로 인해 교도들이 네로 자신의 생일연에 촛불을 대신하는 화형을 당했다. 베드로와 바울도 순교를 당했다. 그뿐 아니라 나라 안에 딴나라 만든다. 비밀결사를 한다. 황제 예배를 안 드린다. 사람을 잡아 먹는 놈들이다(성찬식 때 예수님 말씀 떡을 내 몸이라, 포도즙 잔을 이는 내 피라한데 대한 오해). 지진과 흉년이 기독교로 인함이다라고 미워하며 모함했다.
그들은 교도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관직을 박탈했다. 고문하고 투옥케했다. 맹수의 밥이 되게 했다. 투기장에 몰아 넣고 사자에게 찢기는 것을 로마시민의 구경거리로 삼았다. 못을 박아 숨지게 하고 불로 태워 죽였다. 먼 섬에 유배시키기도 했다.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 그 중에서 트라야노 황제 때(97-117) 맹수밥이 된 익나디오가 남긴 말에는 깊은 감명을 받고 고이 간직했다. 침묵하고 진실한 신자는 변호하고 진실치 못한 신자보다 낫다 검을 두려워 않는 자는 하나님과 가깝고, 맹수와 같이 있는 자는 하나님과 같이 한다 철주같이 굳게 서라 상함을 받으면서도 승리를 얻는 것은 진정한 무사의 본분이다.
또한 라틴교부터 툴리안(160-234)의 말도 잊을 수가 없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다 기독교는 풍속이 아니라 진리다 진리는 외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다 이성에 불합한 고로 믿음이 있다.
김인준 교수는 원어(히브리어 헬라어)에도 능통하였다. 그리고 선지서를 가르침에도 권위가 있었다. 더욱 다니엘서에 크게 은혜를 받았다. 바빌론 제국이 큰 세력을 가졌다. 유다를 멸망시키고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등도 포로였다. 이들은 우상국에서도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뜻을 세웠다. 느부갓네살왕은 자신의 신상을 상징하는 금우상을 만들었다. 이를 두라 평지에 세워 그 제막식에 모든 국민을 참배케 했다.
그러나 유다에서 잡혀 온 세 소년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절하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 그들이 믿은 그대로였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다니엘 3장 17-18절. 이렇게 구원되었다.
다니엘과 같이 승리하리라
또 다리오 왕 때다. 우상국 갈대아가 망하고 메데가 대신한 것이다. 127도로 방백을 세우고 그 위에 세 총리를 두었다. 다니엘은 그 중에 하나다. 악한 자들이 다니엘의 정직과 진실을 시기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알았다. 악법을 만들었다. 한달을 정하여 다리오 왕만 섬기게 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했다. 이 법령이 공포되고 다니엘은 동방 예루살렘을 항하여 문을 열고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다.
이 법을 어긴 죄로 사자굴에 던져 넣었다. 사자는 무죄한 다니엘을 해하지 아니하였다.(다니엘 6장 참조)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자신도 뜻을 굳게 세웠다. 내 몸이 불 가운데 들어가도 우상 섬겨서는 안 된다 내 몸이 사자굴에 던지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풀무 불이 바벨론 두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땅에 있다. 일본은 바로 로마제국과 같다. 우상국 바벨론과 같다. 언제 어디서 시험의 풀무와 사자굴이 닥쳐올지 모른다. 교회사에 나타난 교부처럼 싸우리라. 다니엘과 같이 승리하리라. 세 소년과 같이 풀무불을 견디어내리라.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배움이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확신이 섰다. 용기가 솟았다.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맞이할 불시험을 이길 힘을 달라고 빌었다.
주여 내게 지혜를 주옵소서. 배우는 학과를 감당케 하옵소서. 주여 내게 능력을 주옵소서.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게 하옵소서.
학교 생활하는 동안 유명한 산정현교회로 파송받았다. 장년반 주일학교를 담당하였다. 주일 오전 예배드리기 앞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매사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라는 교훈을 그대로 지켜 충성하였다.
그의 열심은 주일학교에 출석치 아니한 이를 반드시 예배 후에 심방하는 정도였다. 어떤 부인이 있었다. 이 부인은 심방을 가도 잘 출석하지 않는 부인이었다. 어느 주일날 그가 자진 출석하자 너무 반가와 물었더니, 그 집에 일하는 이가 있었는데 최 선생이 열심히 심방해 주심에 감동을 받아 주일이 되면 신까지 깨끗이 씻어주고 밥까지 시간 전에 지어주고 교회 가도록 독촉하여 이렇게 출석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최덕지 선생은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맡으나 최선을 다했다. 남보다 앞섰다. 그의 기질의 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1933년 4월 신학기가 되었다. 2학년 때다. 그의 신앙의 철저함이 교수들에게 인정받았다.
생활의 진실함과 실천성이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2학년임에도 학우회 회장이 된 것이다.
학우회 회장이 된 후에
최덕지 회장은 학우회를 잘 통솔해 갔다. 기도하는 일, 전도하는 일, 봉사하는 일, 제각기 자기 위치에서 본분을 다하도록 이끌었다. 학생들의 기질도 지방마다 특성이 있었다.
평안도는 열성이 대단하고 함경도는 억세고, 황해도는 아담하고, 강원도는 대범하고, 전라도는 영리했다. 충청도는 얌전하고, 경상도는 무뚝뚝하면서도 끈덕지다. 서로 돕고 사랑하고 학원은 평화롭고 은혜로왔다.
그러나 때 아닌 회오리 바람이 불어왔다. 고요한 바다에 노도광풍이 휘몰려 왔다. 다름아닌 이용도 목사 이단사건이다. 또 하나는 동료학생 퇴학 사건이다. 그 진상은 이러하다.
동료 학생의 퇴학 사건
어떤 신학생이 있었다. 평양 출생이다. 용모가 아름다웠다. 이 학생에게 먼 친척되는 청년 한 사람이 있었다. 학교에 종종 찾아왔다. 허물없이 만났다. 하루는 모든 학생이 다 수업을 받고 있는데 이 학생은 학생실에서 청년과 단 둘이서 지냈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 후에 배가 아프다고 며칠 결석을 하였다. 이 일을 학생들이 문제를 삼은 것이다. 수업시간에 신학생이 청년을 만나다니 수업을 받지 않고 그 시간 단둘이서 무슨 짓을 했느냐. 왜 배가 아프냐. 왜 결석했느냐 등으로 동료 학생을 정죄하고 학교당국에 퇴학을 요구했었던 것이다.(학생들은 아기를 잉태했다고 주장함)
이에 학우회장 최덕지는 어찌하여 동료를 그렇게 의심할 수 있으며 정죄할 수 있느냐고 변론했다. 보지도 못하고 추측으로 퇴학을 요구하는 무정함과 잔인함을 성토한 것이다. 진상을 조사했으나 하등 의심할 것이 없었다.
가정상 피치 못할 일이 있어 청년과 의논한 것을 신학생이 부정하다, 불륜하다고 논란한 것이다. 많은 학생은 동료를 동정하지 않았다. 다들 분노했다. 학교 당국도 학생편에서 해결코자 했다.
이에 대해 최덕지 학우회장은 신학교가 잘못 가는 학생이라도 선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잡힌 음행한 여인도 용서했다. 죄를 주지 아니했다. 많은 학생을 진정시키고 설득했다. 그러나 군중심리에 휩싸여 많은 학생들이 더 발악하고 계속 소요 사태를 벌이자 학교당국은 그 학생을 결국 퇴학시키고 말았다. 많이 울었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저희들이 동료를 억울하게 돌을 들어 친단 말인가.
이용도 목사 이단사건
이용도 목사는 감리교 출신이다. 협성신학교(현 감리교 신학대학)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25세 때) 폐병으로 고난을 겪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체험을 지녔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킨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킨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라고 그는 고백했다.(변종호씨 이용도 목사전에 의함)
그는 시무언이라는 호를 가지고 전국을 석권한 대부흥사다. 당시 교회는 형식화되어 가고 사랑이 메말라 있었다.
이용도 목사는 교권에 대해 무서운 비판과 공격을 했다.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했다. 최덕지 선생도 이 부흥회 때 크게 은혜를 받았다.
그는 항상 검은 무명 두루마기와 검은 동정을 달아 입었다. 거리에 헐벗고 굶주린 아이를 보면 자기 숙소에 함께 데려와 먹이고 재워주었다. 최덕지 선생이 이용도 목사님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된장국과 비지장으로 잡수셨다. 저명한 부흥사의 식탁이 그렇게도 초라함에 놀랐다. 그의 청빈에 목이 메었다. 그뿐 아니다. 이 목사의 부인은 감기로 아파 누워 있었다.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약도 사주지 않았다.
찬물 한 대접을 떠 와서는 눈물로 기도하였다. 오 주님이시여. 사랑의 주님이시여. 능력의 손길로 나의 처를 어루만져 주소서. 이 찬물을 마시고는 일어나게 하소서. 오 긍휼의 주님을 믿고 구합니다. 이 기도로 사모님이 일어나심을 보았다.
하나님의 종이요, 주님의 사자임을 믿었다. 또한 겸손한 목사였다. 그가 지나간 곳마다 은혜가 폭포같이 쏟아졌다.
회개의 눈물은 강물 같았다. 기도소리는 하늘에 사무쳤다. 산을 찾는 기도꾼이 늘어났다. 다른 목사는 욕심쟁이로 보였다. 싸움꾼으로 보였다.
이용도 목사 집회에 참석하고부터 탕아는 성자가 되고 탕녀는 성녀가 되었다. 그 반대로 목사, 장로 당회, 노회, 총회 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드디어 한국교회가 돌을 들어쳤다.
감리교회나 장로교회에서 금족령을 내렸다. 집회를 금했다.
드디어 1933년 9월 22일 총회 때에 이단으로 단정하고 말았다. 이 바람이 평양여자신학교에 닥쳐왔다. 모든 학생이 이용도 목사를 의심하고 이단을 단죄할 때 최덕지 회장은 싸웠다.
한국교회가 그의 주님을 향한 절대적 사랑과 실천을 이해 못하고 시기하여 이단으로 몰았다고 변호했다.
그의 신비주의를 단죄했다. 설움 당한 민족을 위해 함께 울어준 자가 누구인가. 한국의 양떼들이 어디에서 이 좋은 풀을 먹을 수 있겠는가. 누구의 생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는 이용도 목사의 사랑과 실천에서만 얻어진 것임을 최덕지 학우회장은 역설했다. (물론 뒤에 여러 사람으로 인해 잘못된 점이 있었으나) 옳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일에 자신이 믿는 사람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다.
대중에 따르지 않았다. 세력과 다수의 편에 치우치지 아니했다.
오직 공의만을 따랐다. 이런 일들의 경험과 싸움이 한국교회가 모두 일본에 가담할 때 오로지 혼자의 몸이나마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었다.
전도의 용장 최봉석 목사
최덕지 학생은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최봉석 목사이다. 그는 1870년 정월 5일 평양 장경문 안에서 출생하였다. 16세까지 한문을 공부하였다. 자기 집에 귀신당집들이 많이 있었다. 부모 없는 틈을 타 그 곳에 오물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부모에게 매를 맞고 원두우 목사에게 찾아가 예수를 믿었다. 26세 때 하늘에서 불덩이가 가슴에 떨어져 기절하였다.
후에 열심히 전도하게 되었다. 평북 만주 등지로 다니며 73개 교회를 세웠다. 여러 번 죽을 자리에서 기사와 이적으로 살아났다.
별명을 최권능 목사라고 불렀다. 벽동목회시대 때 천장절(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에서 천황사진에 대한 경례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국경수비대에 잡혀가 뭇매를 맞고 기절한 몸을 메어왔다. 얼마 후 소생하였다.
이 사실은 윤산온 선교사가 미국 신문에 발표하여 전 세계에 전해졌다. 그러나 1944년 4월 19일 그는 신사참배를 거절, 평양감옥에서 순교했다. 최덕지 선생은 많은 감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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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2. 배움과 슬픔을 함께 하며 | 김반석 | 2016.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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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가계와 출생
| 김반석 | 2016.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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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를 이긴 출옥성도 최덕지 선생님
| 김반석 | 2016.01.0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