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3:30
● 6. 경남노회 여전도사 시절
마산지방 부인 전도사
세월은 흘러갔다. 신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대개 신학교는 입학하고 계속 공부하는 이가 적었다. 그러나 최덕지 학생은 계속 공부하였다. 새봄이 왔다. 졸업 때가 되면 일할 목장을 구하기 여념이 없었다.
최덕지 학생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있었다. 청빙이 왔다. 마산지구 미순회 여선교사 태매시 선교사가 불렀다. 졸업과 동시 전도사로 일해달라는 부탁이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허락하였다.
1935년 4월 평양여자신학교 제22회 졸업생으로 교문을 나섰다. 새로운 임지 미순회 마산지방 전도사가 되어 마산으로 부임했다. 당시 노비산(속칭 제비산)은 선교사들의 거주지역이다. 마산 합포만이 굽어보이고 뒤에는 상남천이 흐르고 있었다.
풍광명미한 곳에 미순회 본부가 있었다. 의신학교가 아래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기숙사에 최덕지 전도사는 혜수 따님과 거처하였다.
미순회 마산지구는 그 산하에 83개교회가 있었다. 함안군, 창원군, 김해군, 의령군 일대에 산재해 있는 교회들이다. 미순회 소속으로 함께 일한 전도사는 윤도일, 염애나, 이복순, 이술연, 김택정, 박경애 등이 있었다.
복음의 사자로서 일선에 나왔다. 양떼들을 잘 먹이고 잘 가르쳐야 한다. 또한 파수꾼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파수꾼은 경성하고 있어야 한다. 경찰해야 하고 경고해야 한다. 마치 나라에 징집된 병사가 교육을 다 마치고 일선에 배치된 것과도 같다.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보람과 긍지와 감격이 함께 했다.
순회할 때는 태매시 선교사와 함께 다녔다. 보통 토요일에 가면 교인들 가정을 심방하고 전도하며 가정예배를 인도하고 주일예배의 설교를 맡았다. 또한 주간학교를 운영하였다.
이는 학교에 못가는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는 임시학교였다. 최 전도사가 가는 교회마다 많은 일거리가 생기고 많은 성도들이 모여 들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한 신앙의 고백이요. 생활 속에 우러난 간증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감화케 하였다.
가여운 할머니의 시중을 들고
이러한 일화도 있었다. 어떤 가엾은 여노인이 한분 있었다. 몸이 불결해 악취가 났다. 방바닥에는 청소를 안해 변이 말라 붙었다. 이를 보고 매주일 찾아가서 물을 데워 노인을 목욕시켜 드리고 방바닥변(똥)은 칼로 긁어 깨끗하게 청소하여 주었다. 남이 할 수 없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다.
순회가 끝나면 몸이 몹시도 피곤했다. 의신학교 기숙사에는 마산교회 교인 중 한글을 모르는 부인들이 언제나 찾아오고 있었다. 이들에게 애써 한글을 가르쳐 주고 이분들이 모두 성경을 읽도록 이끌었다. 많은 분이 집사가 되었다.
이 무렵 마산 경찰서장 초청으로 교회 목사, 전도사, 장로 그 외 각 학교교장 등 지도자의 모임이 있었다. 소위 종교 간담회라는 것이다. 서장의 인사와 시국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신사참배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안식교, 각 목사, 장로 조사 중 문창교회 한상동 목사에게 감상을 물었다. 성경상으로 신자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이 모임은 끝났다. 여기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교회가 수난을 당하기 앞서 많은 학교들이 수난을 당했다. 그럼 과연 신사란 어떤 것인가.
일본은 신도로서 설명된다. 일본의 국체는 개국신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과 800만 야호요로주노가미로 성립된다.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태양신을 중심한 다신국가이다. 이는 미개한 나라들이 다 가지는 원시종교에 불과하다. 즉 원시신이며 자연신이며 인간신이다. 그리고 역대 천황은 현인신(아라비도가미)이라 하여 신으로 올려받든다. 이 신들은 생산신이요 수호신이었다.
일본에서 대표되는 것이 이세신궁이고 한국에는 조선신궁이다. 일본에서 전쟁을 하다 죽으면 다 수호신이 되어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일본에서 참배하는 것은 호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이것을 한국에 실시코자 한 자가 바로 제6대총독 우가끼다. 그는 조선을 일본화하기 위하여 한국 방방곡곡에다 신사를 짓게 하였다.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고 우겨대는 교회 지도자가 있는데, 분명 일본 국신이니 우상이고 참배는 바로 계명을 범하는 죄다.
수난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1936년 8월에 제7대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로 인해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가 표면화되었다.
학교에 대한 강요
1932년 평양서 춘기황영제의 제례에 각종 학교의 참석을 요구한 데서부터 시작된다.(이는 만주사변 전몰 장병위령제임) 학교 책임자는 기독교 교리에 있어 제례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때 일본 관리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제2단계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한 교활한 계획을 서서히 굳혀갔다.
당국은 전국 각급학교에 신사참배 여행 명령을 시달하였다. 학교는 교리신조와 관계됨으로 상회지시가 있기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장로교 총회 학무부에 자문을 요청하였다. 1932년 9월 제21회 총회는 교회학교 학생이 신사 및 여러 제식에 참배할 수 없다는 것을 총독부 당국에 교섭할 것을 결정했다. 차재명, 유억겸, 마포삼열 세분을 교섭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총독부에 교섭위원을 보냈으나
그러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1933년 전북 노회장이, 1934년은 황해 노회장이, 기독교학교의 신사참배문의서를 제출하였다. 평남 순천 자산교회 목사의 지방관청의 신사건축비징수문제 문의서도 제출되었다. 1934년 12월 6일 총회장 이인식 목사가 전 총독부 교섭위원과 함께 재청원키로 했다.
총회 산하에 있는 유치원, 간이학교, 보통학교, 중학교, 전문학교, 신학교, 성경학교의 생도 및 학생의 신사불참배 허용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기 총독부는 아무리 교회경영의 학교들이라도 조선총독의 교육령에 의하여 운영되는 학교들이다. 반드시 총독의 교육정책에 따라야 한다. 참배를 부인 불원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들의 이름을 지명하여 청원하라. 이것이 총독부 종교과장의 엄명이다. 청원서는 또다시 퇴각되고 말았다. 결국 신사참배 문제는 각 학교 당국의 신앙양심에 맡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신사참배를 기독교 학교에 강요한 최초의 사람은 평남도지사 야스다께였다. 1935년 11월 14일 도내 공사립중등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했다. 개최벽두 참석자 일동에게 평양신사 참배를 명령했다.
이 자리에 숭실중학 윤산온 교장, 숭의여중학 정익성 교장 대리는 명령에 불응했다. 교장회의가 끝난 후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의 요건이므로 금후 참배에 응하지 않을 때는 단호히 처치한다는 공문이 야스다께 지사 명의로 발송되어 왔다.
12월 20일까지 회답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했다.
윤산온 교장은 1935년 12월 13일 미북장로교 선교실행위원회(회장 허대전, 위원 소열도, 위원 로해리)와 의논한 바, 참배 거부키로 결정했다. 동년 12월 14일 총독부는 외사과 촉탁인 김인옥을 새벽에 윤산온 교장댁에 보내어 그 결정을 내사하였다.(김인옥은 윤교장과 사제지간이었음) 윤교장은 제자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답서를 야스다께 지사에게 보냈다.
신사의 제식에 있어서 종교적인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또한 신사에서 신들을 경배하고 있는 사실이 확실함으로 기독교 신자인 나로서는 신앙양심상 신사에 참배할 수 없음.
여기 평남지사는 다른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이 사건의 처리를 총독부 학무국에 의뢰하였다. 총독부는 그 뒤 독 전국 지사 경찰부장 및 경찰서장 회의를 소집하고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당국의 태도를 결정했다.
1936년 1월 16일 야스다께 지사는 숭전교장 윤산온 박사와 설립자 마포삼열 선교사를 도에 불렀다. 신사참배 문제에 최후 확답을 요구했다. 18일까지 태도를 결정하되 불참시는 사표 제출을 지시했다.
윤산온 교장과 마포선교사는 평양선교사회 숭전이사회, 평양교역자회를 소집했다. 신사참배 문제를 검토했다. 신사참배 불가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각 학교 이사들의 의견은 학교 존폐문제를 고려했다. 학교 전체가 아닌 대표자 참배로 당국에 응하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학교 전체 참배 거부와 대표자의 파견은 교장의 재량에 일임키로 하였다.
신사참배 학교 대표자는 반드시 교장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학감이나 과장 중 한사람이 희생됨으로써 학교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역사 깊은 교육기관은 폐쇄를 면케 되었다. 이렇게 생각한 윤산온 교장은 대표자의 신사참배를 용허하는 답서를 도지사에게 내기로 작정했다.
답서를 제출하기 앞서 신사참배 문제에 관심이 많은 박형룡 박사, 주기철 목사에게 찬부를 문의했다. 그들은 대표자 참배 역시 기독교 학교 전체의 굴종을 의미하므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강하게 내세웠다. 윤산온 교장은 드디어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그 답서를 난로 속에 던져버렸다.
윤산온 교장의 결심
18일 야스다께에게 신사참배를 거부할 뿐 아니라 교장직 사면도 불응한다는 답서를 제출했다. 이에 야스다께는 곧 숭실전문학교장 인가를 취소하였다.
총독부에서 윤산온 선교사는 교육자로 부적당하니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을 취소해달라고 상신했다. 1936년 1월 20일부로 총독부는 그의 숭전교장직의 인가를 취소하였다. 1월 21일 숭의여중학교장 스누크에게도 같은 조처를 내렸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폐교를 각오했다. 그러나 교회지도자 및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폐교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선교부는 폐교를 일단 보류하고 다음과 같이 후임을 총독부에 보고했다. 2월 26일이었다.
3월 4일, 숭전교장 마우리선교사, 부교장 이훈구 박사(농과과장) 3월 5일, 숭중명예교장 마우리선교사, 교장 정두현(숭전 교수) 3월 12일, 숭의여중교장(사무취급) 김승섭 교사. 1936년 3월 21일 윤산온 교장은 귀국하였다. 귀국 후 신사참배 부당성 논문을 선교부에 제출했다. 학교정책에 남장로교와 보조를 같이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 미 남장로교 외지선교국 총무인 훌톤 성명이 나왔다. 1937년 2월이다.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남장로계 기독교 학교는 일제이 폐교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전주선교총회를 소집하여 발표한 것이다.
1937년 9월 4일 전남북도 지사들은 학교장을 소집하고 애국일 행사 사전협의를 하였다. 남장로교계 남녀중고등학교 교장은 애국일에 궁성요배 행사는 참여할 수 있으나 신사참배는 교리에 위반되므로 시행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한편 학교 직원, 생도에게도 이 뜻을 발표했다. 9월 6일이 애국일로 정해졌다. 각급학교에 신사참배 시행을 요구했다. 이날이 지난 후 각 지역의 여러 학교에 폐교명령을 내렸다. △광주=숭일남자중학교․수피아여자중학교△목포=영흥남자중학교․정명여자중학교△순천=매산학교△전주=신흥학교․기전여학교(폐교 명령이 내리기 전 자진 폐교함)△군산=영명학교 그 외 10여학교 모두 폐교.
당국은 폐교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아국의 신사는 황실의 조선 혹은 국가의 원훈을 제사하는 곳인데 여기에 참배하는 것은 제국 신민된 자의 당연한 의무이다. 고래로 경신숭조는 아국교육의 근본 방침이다. 하물며 이번 애국일 당일의 참배는 황국의 융창과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중요한 국가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 학교장들은 용허할 수 없는 태도를 취하였고, 학생들에게까지 비국민적 행위를 강요한 것은 제국교육의 근본을 교란하는 것으로 절대로 묵과할 수 없어 도로서는 단호한 처분을 내리게 되었다.
이 성명은 신사가 종교이건 아니건 일본국민된 자는 신사에 참배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신자는 죽음으로 항거하는 외에는 딴 도리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훌톤 성명과 남장로교 처사에 용기를 얻은 북장로교 선교회본부는 1937년 다음 결정을 내렸다.
1. 동선교회가 경영하는 학교들은 매각 또는 양도하지 않는다. 2. 숭전․숭중․숭의여중은 폐교원을 내고 폐문함.
그 후 대구의 계성, 신명, 재령의 명신, 선천의 신성, 보성, 강계의 영실 등 여러 학교가 차례로 문을 닫았다. 이와 같이 학교를 폐쇄시킨 여세를 몰아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웠다. 총독부가 각도에 시달한 교회에 대한 시정방침은 다음과 같다. 1938년 2월이다.
1. 시국인식 철저를 위하여 기독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여 지도계몽에 힘쓸 것. 2. 시국인식의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시설. (1)교회에 국기게양탑을 건설할 것. (2)기독교인의 국기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제창을 실시할 것. (3)일반신도의 신사참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여행에 힘쓸 것. (4)서력년호의 사용을 삼갈 것. 3.찬송가 기도문 설교에 있어 내용 불온한 것은 엄중 취체할 것. 4. 당국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신자는 법적 조치를 취할 것. 5. 국체에 맞는 기독교의 신건설운동은 이를 적극 원조할 것.
이상과 같이 5개 시정방침을 세우고 서서히 신사참배를 강요할 태세를 취하였다. 그러면 신사참배 강요의 의도는 무엇 때문인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민족으로 하여금 일본신들에 대한 봉제와 민족 정신의 말살에 있었던 것. 2. 일본의 식민정치의 기본책인 정치의 실현을 위한 것. 3.신사참배로서 민족 정신을 유린하고 해체시켜 한국인을 소위 일본황국 신민으로 만들려 하는 것. 4. 한국교회의 신앙생명을 송두리째 말살해 버리는 것.
평북노회가 맨 먼저 무릎을 꿇고
여기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성도가 신사에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다. 민족 정신을 지키려는 애국지사들로서 이 신사 앞에 굴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어 최초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평북노회다. 1938년 2월 9일이다. 한국장로교 23노회 중 17노회가 평북노회의 전철을 밟았다. 비록 강요했다 할지라도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고 체념했다.
한편 당국은 장로교의 유력한 지도자를 몇 사람 선택했다. 이들을 일본에 보내 신사참배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시켜 교회를 유도하도록 했다. 신사참배 반대자 이승길 목사를 포섭했다. 5월 24일 오문환, 김응순, 장운경 목사 등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다음 6월 29일 평양기독교친목회(친일 단체)의 초청으로 일본기독교 대회장 도미다 목사를 소치했다. 그의 강연을 통해 신사참배의 종교성 부인과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민의례임을 역설케 했다.
이 자리에 많은 교역자들 불러 모았고 경관이 수십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주기철 목사가 일어나셨다. 우리는 도미다 목사의 강연을 듣고 그 풍부한 지식을 흠모하는 바이나, 성경에 비추어 신사참배하라는 말은 용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반박하였다. 원래(遠來)의 도미다씨는 의외의 반박에 얼굴이 붉어졌다. 경관은 독한 눈초리로 주목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청중은 놀라고 또한 통쾌하였다. 주최자는 무색하였다.
1938년 9월 9일은 장로회 제27회 총회가 개최되는 날이다. 당국은 각지 경찰서장에게 총회 총대로 선정된 노회대표들에게 다음 3조 중 택일을 강요했다.
1. 총회에 출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을 지킬 것. 3. 전기 양조를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이외에도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은 검속 투옥할 것도 아울러 지시했다. 총회 개회 전일 평양 경찰서장은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대표를 불러 다음과 같이 각본을 짰다.
평양노회장-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제안할 것. 평서노회장-신사참배 결행을 동의하고 안주노회장-재청을 강요하여 허락을 받는다.
본래 총회 장소가 신의주에서 평양 서문밖 교회로 옮겨졌다.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역사적인 제27회 총회가 막을 올렸다. 그 익일 오전 9시 30분 총회 속회날 수백명의 사복경관으로 교회가 완전 포위되었다. 강대상 아래는 평남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경관 수십명이 긴 검을 차고 앉았다. 총대들의 좌우에는 지방경찰관 2명씩이 끼어 앉았다.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00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당시 저들의 압력에 끌려온 27노회(만주의 4노회 포함) 대표는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합 206명이었다. 9월 10일 10시 50분 총독부가 짠 각본대로 평양노회장이 신사참배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제안을 했다. 평서노회장과 안주노회장이 동의와 재청을 했다. 총회장은 전신을 떨면서.
협박속에 신사참배는 가결되니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묻자 제안자 재청자 10여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하고 전원이 침묵을 지켰다. 이는 신사참배 부당성을 표시한 것이다. 이때 수백명 경관이 일제히 일어나 일대 위협을 표시했다. 당황한 총회장이 부를 묻지 않고 그대로 만장일치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는 회무처리상 불법이다.
이때 선교사 30여명 전원이 일어나 불법이요 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이때 봉천노회 한부선 선교사는 무술경관에게 옥외로 축출까지 당하였다. 이 소란 속에 서기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를 솔선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 12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홍택기
이때 평양기독교 친목회원 심익현이 총회원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였다. 부회장 김길창의 안내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한국 보수교단을 자처하는 장로회 총회가 불법 강요 앞에 비참히도 굴복하고 말았다.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 신앙의 정조를 보전함이 생명보다 귀한 것이다. 동일 하오 1시에 선교사들은 따로 모여 다음의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1.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 말씀에 위반이요. 2. 장로교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3. 일본구법인 종교 자유헌장에 위반이요. 4. 이번 처사는 보통 회의법의 위반이요.
동월 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의 연서로 총회에 다음과 같은 항의서들을 제출했다.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반될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집행한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요지다. 그러나 이것마저 경찰의 강압에 각하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신사참배 문제는 자진굴복의 치욕 속에 일단락을 고하였다. 여기 잠간 다른 교단의 신사참배 결의를 살펴보자.
1. 천주교회 1936년 5월 25일 성명
한국천주교 장정에는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느니라고 명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태리와 일본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황청포교성의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는 성명에 따라 신사참배, 수난을 면했다.
2. 감리교 1938년 9월 3일 성명
총리사 양주삼 목사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성명서를 발표, 다음과 같이 굴복하였다.
연전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신사참배에 대하여 조회한 바를 인쇄배부한 일이 있거니와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할 국가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잘 인식하였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의 위반이나 신앙의 구애됨이 추호도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소화 13년 9월 3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사 양주삼
3. 안식교회 1936년 12월 신사참배 승인 가결.
4. 성결교회 1943년 12월 29일.
강압에 못 이겨 성결교회 해산, 신사참배 승인하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신구교 모든 교파가 공격적으로 다 범죄했고 여기 신앙투쟁사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많은 신사불참배운동이 일어났다. 숨겨진 역사를 밝히면서 최덕지 목사의 본격적인 투쟁을 알아보자.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
| 19 | 18. 그의 인격과 생활 | 김반석 | 2016.01.03 |
| 18 | 17. 참된 애국심 | 김반석 | 2016.01.03 |
| 17 | 16. 우상 타파 사상 | 김반석 | 2016.01.03 |
| 16 | 15. 예배를 생명으로 | 김반석 | 2016.01.03 |
| 15 | 14. 그는 웃고 성도들은 울고 | 김반석 | 2016.01.03 |
| 14 | 13. 한국최초의 여자 목사 장립 | 김반석 | 2016.01.03 |
| 13 | 12. 6․25와 신앙활동 | 김반석 | 2016.01.03 |
| 12 | 11. 재건교단 창설과 조직 | 김반석 | 2016.01.03 |
| 11 | 10. 최덕지 목사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 | 김반석 | 2016.01.03 |
| 10 | 9. 부산교회 창설과 재건운동 | 김반석 | 2016.01.03 |
| 9 | 8. 검속과 투쟁 | 김반석 | 2016.01.03 |
| 8 | 7. 경남 여성경학교 시절 | 김반석 | 2016.01.03 |
| » | 6. 경남노회 여전도사 시절 | 김반석 | 2016.01.03 |
| 6 | 5. 평양 여자신학교 입학과 생활 | 김반석 | 2016.01.03 |
| 5 | 4. 결혼의 즐거움과 사별의 쓰라림 | 김반석 | 2016.01.03 |
| 4 | 3. 진명 유치원 보모 시절 | 김반석 | 2016.01.03 |
| 3 | 2. 배움과 슬픔을 함께 하며 | 김반석 | 2016.01.03 |
| 2 |
1. 그의 가계와 출생
| 김반석 | 2016.01.03 |
| 1 |
신사참배를 이긴 출옥성도 최덕지 선생님
| 김반석 | 2016.01.0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