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지 8. 검속과 투쟁

2016.01.03 23:31

김반석 조회 수:

8. 검속과 투쟁

  선지자선교회

1차 구속

 

박인순이란 처녀가 있다.(이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로 해방후 부산 영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 현재 미국에 가 있음) 진주 여성경학교에 가기 위해 마산에 왔다. 당시 성경학교에는 신사참배 찬반 두 세력이 있었다.

 

마산의 최덕지 선생도 진주에 갔다. 당국에서 성경학교를 인가없다는 구실삼아 수업을 못하게 하였다. 최덕지 선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에 사람의 방해를 받을 수 없다 했다. 이렇게 하여 19404월 초순 경남여자성경학교는 개학을 하였다. 주일이 되었다. 박인순은 진주 옥봉교회를 가고자 했다. 마산지방 학생과 함께 가기 위해 기숙사에 들렸다. 그러나 최덕지 선생은 타협한 교회에 가지 말고 기숙사에서 예배드리게 했다.

박인순 자신이 인도하였다. 성경을 펴니 크게 능력이 나타났다 한다.

 

기숙사는 보통 밤 10시에 소등하고 새벽 6시에 기상함이 규칙이다. 기숙사엔 학생이 없었다. 전에 기도하던 옥봉 뒷산을 가 보았다. 이곳에는 최선생과 30여명의 학생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의 제목은 경남노회가 해운대 예은배 선교사 기념관에서 회집한다. 이 때 신사시종이 결정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 간절히 기도함이다.

박인순의 증언에 의하면 노회 때 동래경찰서 형사 세 사람이 참석했으나 노회 다 마치도록 졸다가 돌아갔다 한다.

 

당국에서 진주여성경학교를 그대로 두지는 않았다. 경찰서에서 선생과 학생을 송환해 갔다. 기숙사에 있는 모든 소지품을 가져가 개인별로 챙겨 고향집으로 압송했다. 최덕지 선생은 마산경찰서에서 49일 검속해 갔다가 426일 석방시켰다. 이것은 제1차로 당하는 경험이다. 왜정 말기에 민족적 탄압이 극심하였다.

 

앞서는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민족지도자들을 검거하여 투옥시켰다. 또다시 평양산정현교회를 폐쇄하고 평양신학교를 폐쇄하고 아울러 전국 각 도시 200여 교회의 문을 닫게 했다. 2000여 성도를 구속하고 50여 순교자를 내었다. 전시 하 한국교회의 수난이 막심하였다.

 

검속중 최덕지 선생은 금식기도로 싸웠다. 처음 경찰서가 사람을 구속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문답에 의하여서다.

1. 신사참배가 국민의식이냐, 종교의식이냐. 2. 천조대신이 높으냐, 그리스도가 높으냐. 3. 국가가 제일이냐, 종교가 제일이냐. 이 물음에 대하여 자기네에게 만족한 대답을 하지 않는 성도는 가차없이 구속, 투옥시켰다.

 

2차 구속(진주 유치장에서)

마산경찰서에서 풀려나와 동월 27일 박경애씨의 초대에 참석했다. 위로를 위한 만찬회다. 이곳에는 태매시 선교사, 이술연, 이복순 전도사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감사예배를 드렸다.

여러분! 최선생 입을 열었다. 죄를 짓지 맙시다. 눈을 감고 경찰서 유치장을 연상한다. 나는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도움을 구합시다. 끝까지 승리합시다. 이 간단한 예배시간에 은혜와 감명이 넘쳤다. 최 전도사는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 유치장 속에 갇혀있는 군상을 보았다. 만일 우리가 약하여 신사참배를 했을 때 지옥갈 것을 생각했다.

 

모진 고문 금식 기도로 이기고

 

최덕지 전도사가 경찰에서 당한 고문 내용을 다 기록하지는 못한다. 너무도 잔인하고 혹독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말기 왜경의 단말마적인 광란이 증오의 대상인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에 맡긴다. 이 무서운 고문과 포악을 최 전도사는 오직 하나의 무기 금식기도 이것으로 종국에 승리를 얻었다.

 

모이는 곳이면 이 기도를 부탁했다. 석방이 되면 금식기도를 준비하였다. 검속이 되면 금식기도로 항거하였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한목숨 주를 위해 다부어 바친 결사적 기도-여기 힘이 솟았다. 주님이 지켜 주었다.

 

1940623일 진주에 왔다. 이곳에서모 김성심씨와 동생 최달구씨가 있었다. 그 동안 통영읍 조봉연 집을 순방하였다. 통영 성도 십여명을 모았다. 가정기도회를 개최하여 신사불참배 운동을 전개하였다.

 

525일이다. 6월 초순에는 창원 북면 신촌교회를 순방했다. 창령군 영산면 학포교회를 순방했다. 창원군 대산면 모산교회를 순방했다. 김해군 진영면 사산교회를 순방했다. 신사참배는 바로 우상예배다. 가만이 집에 피해 있을 수가 없었다. 태양신과 싸워야 했다.

 

이것이 진리의 전쟁이요, 신앙은 곧 싸움이다를 증명한다. 이 모든 지방을 거쳐 드디어 진주 자기집 어머니와 형제를 위해서 온 것이다.

최선생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주변성도들이 모여 들었다. 박내복, 강신애, 문경업 등 십여명이었다. 예배를 드렸다. 예수를 사랑합시다 주제로 설교했다. 우리가 신사에 절하고 계명을 범치 아니하려면 예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방안에는 사랑의 열기가 감돌았다. 하늘에는 은혜의 문이 열렸다. 가슴마다 뜨거웠다.

 

이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모두 긴장했다. 예배를 마쳤다. 보이는 얼굴은 바로 진주경찰서 고등계 형사 김을도였다. 최덕지 선생을 위시해서 예배드린 전원을 진주경찰서에 구속했다. 이때 구속된 것은 김을도 형사와 의형제를 맺은 목사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다.(이분은 현재 서울에서도 큰 교회의 유수한 목사로 재임하고 있다)

 

최 선생이 이 때 당한 고문은 전 감옥생활을 통해서도 가장 혹독했다 한다. 그 중에도 더 가슴아프게 한 일이 있다. 교인들이 당하는 고문이다. 그 고문보다 더한 아픔이 있었다. 이는 고문당한 교인들이 신사참배하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면서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변절함이다.

 

이 아픔을 이기기 위해 드디어 21일 장기간 금식기도를 하였다. 현대 많은 교단과 교인이 금식(단식)을 한다. 그 일수에 있어 40일 금식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 물을 마시고 과일즙을 마신다.

 

최덕지 선생은 전연 물 한모금 삼키지 않았다. 21일은 구약성경 다니엘서 다니엘이 조국을 위한 21일 금식에서 본받은 것이다. 금식도 성경대로 모든 것이 주님 뜻 안에서가 그의 신앙의 기본태도다.

 

김을도 형사 배후를 목사가 조종한 고로 더 악독했다. 낮에는 XXX목사에게 성경을 배워 밤에만 고문했다. 유치장 안에서 주는 밥에다 소독약을 뿌려서 가져왔다. 최 선생은 금식기도할 때 소독약 뿌린 저들이 삼계탕 가지고 와 먹게 하소서 했다.

 

잔악무도한 김을도 형사

 

21일의 장기금식을 보고서 포악한 일경도 잔악한 김을도 형사도 이 위력 앞에 자신들이 굴하고 말았다. 가족들을 소환, 최선생을 석방하여 진주 공의집에 머물게 하였다. 죽을까 두려워 저들은 삼계탕까지 가져와 먹게 하고 회복을 빌었다.

 

몸이 회복되자 19411월 중순 재차 구속하였고 도경찰국 감방으로 이송되었다.(추기=김을도 형사는 해방과 동시 진주 시민에게 맞아 죽었다 한다)

 

3차 구속(도 감방으로)

 

12일 금식한 몸을 5일 휴식한 최덕지 선생은 진리싸움을 다시 계속했다. 그의 활동상황을 간추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기도와 투쟁 조목

 

1.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할 것. 2.전 조선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3. 옥중동지가 진리를 증거하고 승리하여 석방되도록 4. 이 나라가 기독교국이 되도록 5. 천황과 위정자가 회개하고 기독교도에게 자유를 주도록.

 

(2)증거한 말씀 제목

 

1. 신앙은 만능이다. 2. 예수를 사랑하라. 3. 자녀의 명분을 중시하라. 4. 안식일을 존종하라. 5. 신은을 감사하라. 6. 아무 염려하지 말라. 7. 복 받는 길 8. 흩어진 바벨탑 9. 재림을 준비하라.

 

(3)순방한 교회들 20여교회

 

그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있어 여러 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통영은 자기의 출생지요, 고성은 시댁이 있는 곳이요, 진주는 새어머니와 성경학교 까닭이요, 마산은 바로 자기의 목회지역인 이유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상과 같이 활동하였다.

 

19428월이 왔다. 최덕지 선생은 자기의 시가인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교회에 와 있었다. 이 기회가 한때나마 가족이 단란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의 하나뿐인 혜수따님과도 사랑의 정을 나누었다.

 

태평양 전쟁이 치열해 갔다. 정권에 가담한 노회가 신사참배 반대자를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드디어 노회가 신사참배 반대성도를 일제구속케 한 것이다. 최 선생에게는 삼천포에서 노회원이 피하도록 권면의 편지가 왔다.

 

그러나 피할 것이 아니라 옥중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혜수(19)를 숙부되는 김정수씨께 맡기려 했다. 부산에 있었다. 고성을 떠나 부산가는 길에 통영에 들렸다. (2006. 6. 8. 크리스천신문)

 

조봉련 선생 댁이다. 주일이 되어 최선생 오셨다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 예배를 드렸다. 이때 구속이 되었다. 함께 구속이 된 사람은 송복득, 윤갑득, 김조금, 김순연, 정모열, 황의조 등이다. 이 날로 통영에서 도감방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구속한 죄목은 비밀결사죄. 항상 비밀리에 기도회를 가진 까닭이다.

 

경남 도경 감방에서(4차 구속)

 

이때 도감방에는 모두 6감방이 있었다. 1감방에는 최덕지, 송복덕, 박인순, 배학수 등이 수감되었다. 2감방에는 최달석, 강말식, 3감방에는 김영숙, 염애나, 이술연, 조복희, 강성화, 김야모, 4감방에는 김수영, 5감방에는 이약신, 6감방에는 손명복이 있었다.

 

최덕지 선생은 예배를 신앙의 생명으로 삼았다. 신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마귀에게나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고로 그는 유치장이나 형무소나 어디에서나 하루 4차 예배를 드렸다.

 

새벽, 오전 11, 오후 3시다. 그런데 최덕지 선생이 11시에 드린 것은 12시는 일본인이 죽은 귀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므로 이를 피해 앞당겨 11시에 드린 것이다. 정식 고문 당한 것 외에 유치장이나 형무소에서 예배로 인해 맞은 매와 당한 수모는 이를 헤아릴 수 없다.

 

최 선생이 처음 도 감방에 오자 그날 11시 제1감방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다.

예수의 이름 권세여 엎디세 천사들 금 면류관을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금 면류관을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여기에 맞추어 3감방에서 찬송이 흘러 나왔다.

 

주께서 당한 고생을 못잊을 죄인아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삼세.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삼세.

 

간수가 야까마시하면서 제지하고자 했다. 시끄럽다면서 격검막대기로 최 선생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배를 다 마치기까지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감방에서는 규칙을 어기면 밥을 안 주거나 벌을 가하거나 매를 때린다.

 

벌 중에는 변기 소제하는 것, 작업하는 것 등 온갖 일이 많았다. 최 선생은 6, 7개 성상 그들이 정한 벌이나 고문을 아니 당해본 것이 없었다. 어느 추운 대한을 앞둔 날이었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에 힘을 써 궤휼과 권세로 제군물 삼으니 천하에 적수 없도다. 하고 찬송이 나왔다.

 

간수는 야까마시하고는 물을 퍼부었다. 1감방에도 3감방에도 찬송이 계속되고 물도 계속 들어왔다. 예배를 다 마치기까지 두 방에 모두 33통의 물을 퍼부은 간수는 드디어 포기했다. 얼마나 차가왔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예배를 꺾이지 않은 승리의 기쁨은 그 고통을 참게 한 것이다.

 

3감방에 있던 강성화 집사(이 분은 해운대 교회 구재화 조사 부인이다. 구재화 조사는 경남노회 15교회를 개척설립하고 그 둘째 아드님은 서울대 수학과를 거쳐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미국의 대학교수로 있음)는 그 물에 세탁을 하며 찬송하기를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내 죄를 씻으신 주이름 찬송합시다. 하였다.

 

이 때도 최덕지 선생은 장기 금식을 하였는데 12일간 하였다. 공의의 진단이 병보석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렸다.

 

석방 권유도 거부하니

 

이때 도 형사로는 강낙중 부장과 하판낙 부장이 있었다. 이들이 취조하였다. 194251일이다. 도 당국이 최 선생에게 다음 요건을 제시했다. 석방조건은 이러하다.

 

1. 석방하되 박열순 집사 집에 머물 것(이분 남편은 서상환 변호사로 해방 후 법무장관이 됨.) 2. 다른 사람과 면접하지 말 것. 3. 전도하지 말 것.

 

여기에 대해서 최덕지 선생은 첫째, 나는 다른 사람과 면접해야 하고, 둘째, 전도해야 하고, 셋째, () 감방에 있는 모든 성도를 다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석방을 거부했다. 내가 석방되면 나를 만나는 사람까지 고통을 준다. 고로 이곳이 편하니 나갈 필요없다. 또 나가면 재차 구속할 것이니 나갈 필요없다는 것이다.

 

당국은 죄인 아닌 이 억센 죄인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최 선생과 당시 친한 한상동 목사 부인 김차숙씨가 모시러 왔다. 한상동 목사는 도 감방에서 평양으로 압송되어 가고 이미 없었다.

 

사모님께 최 선생을 부디 모시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최 선생에게는 면회를 왔다 하고서 내어 보냈다. 박열순 집사가 차로 모시러 왔다.

 

죄인이 마치 귀인처럼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닌가. 석방된 최덕지 선생은 우선 김차숙씨 댁에 와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원근 각지에서 많은 성도의 위로가 있었다. 정성을 다하여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준해 온 그 고마움 앞에 모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옥중에 남긴 이야기들

 

평양으로 옮기기까지 몇가지 일화를 적어 본다. 최 선생은 예배할 때 너무도 부동의 자세라 하부장(취조 형사)이 말하되, 너희는 벼룩도 없느냐. 물로써 씻어주니 없어요. 마산서 김야모 씨가 도 감방으로 오자 아베느고 오신다(이는 최 선생이 구약에 불 가운데서 승리한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베느고와 같이 승리한 종을 가르침.)

 

최 선생이 공판정에서 심문받으면 감방에 함께 있던 죄수들이 11시가 되면 지금은 예배시간입니다 하였다. 또한 옥중의 소식을 이 예배기도 시간을 통해 방청석 사람에게 연락하였다. 하부장은 동방사람을 보내 최선생 옥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다.(이는 바벨론 제국을 동방의 고레스 왕이 멸하고 유다를 석방시킨 역사의 기도를 듣고 조롱한 말) 이 때도 최 선생은 기도의 무기를 들었다.

 

마침내 22일 장기금식을 하였다. 이도 본래 작정은 20일이었다. 20일을 마치고 당국이 해금을 원했다. 당시 3감방에 수감되어 있던 김영숙 전도사를 자기 방에 오게 하면 해금하기로 하고 김영숙씨를 오게 하였다. 예배를 인도케 하였으나 두려워 사랑함으로 해금을 연장했다. 드디어 최 선생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였으므로 2일이 연장되어 결국 22일의 장기금식을 마치게 된 것이다. 당시 감방에서 예배인도는 많은 매와 벌을 각오하지 않으면 인도할 수 없었다. 이때 같은 남감방에 최범술이란 분이 수감돼 있었다.(해방 후 동래지구 국회의원으로 당선) 최 선생의 신앙과 투쟁을 보시고 불교에서는 석가를 위해 저렇게 싸울 자 없다. 기독교 역사에도 장기간 저렇게 굳세게 싸울 자 없다.하고 자기에게 차입된 과일 등을 몸소 가져와 도왔다 한다.(간수 및 같은 방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에서)

 

이제 도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인 진리의 용사 하나님의 종을 인식했다. 이는 도에서 취급할 위인이 아니야 평양으로 보내야 한다하고 당국에서 결정했다.

 

평양으로 이감

 

1943년 정월 초순도 감방에서는 소문이 나돌았다. 내일 모레면 최 선생 평양 간다는 말을 듣고 최 선생은 기도했다. 주를 위해 바친 몸 주님 뜻대로 하소서. 주일이 왔다. 예배드리기 위해 옷을 입으라 했다. 최선생 나오시오 했다. 평양 갑니다 하부장의 말이다.

 

오늘은 주일이니 여행 못합니다 최선생의 말이다. 그러나 강제송환이다. 머리 푼 그대로 버선 벗은 대로 속옷차림 그대로 평양행 열차에 강제승차되었다. 종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종일 앉지 않고서 그대로 갔었다. 이때 인솔하던 형사들도 종일 식사를 안했다고 한다. 최선생 생애에 있어 이 때처럼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함께 이감되는 남조사 한 분이 있었다. 최선생 모습을 보고도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사식을 주니 굶주린 몸이라 최선생분까지 다 먹어 치웠다. 그리고 형사에게 또 사달랬다. 이를 본 형사들도 양심이 있소 욕심많은 개라고 욕하였다.

 

3장 달려갈 길을 다가고

 

주일날 평양으로 끌려 온 슬픔

 

평양형무소에 최 선생이 수감될 때 앞서 와 있던 성도들이 많았다. 그 중에 안이숙 선생, 조수옥 선생 등이 있었다. 조수옥의 눈에 비친 최 선생의 속옷차림 모습은 몹시도 초췌하여 저분에게 영양을 도와야겠다고 느꼈다.

 

최 선생이 평양형무소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5감방에 수감되었다. 모든 사람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다. 최 선생은 고함을 쳤다. 지금 우리 다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립시다.

 

찬송을 우렁차게 불렀다. 모든 감방에 있는 자가 놀랐다. 그 보다 당황한 자는 지키던 간수였다. 멈추라, 멈추라 고함쳤다. 그 소리보다 찬송은 힘 있게 온 감방에 울려퍼졌다. 이렇게 하여 평양에서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최 선생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배는 빼앗기지 않았다. 시간도 어기지 않았다. 그 예배형식은 찬송, 신앙고백, 성경(요절암송), 기도, 주님기도로 마친다. 이 예배가 출옥 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평양에서 간수가 교체될 때마다 최 선생은 온갖 매질과 욕설을 다 당하였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진실이 인정되었다. 변치 않은 신앙의 충절을 존경하였다. 당시 사상범을 다루는 무서운 모리검사가 있었다.

 

최 선생 예배는 이 모리 검사에게 취조를 받다가도 예배는 허용되었다. 그 때 판사는 가마다였다. 평양형무소의 많은 사상범 성도를 다루던 분이다. 이 분이 증언하기를 최덕지 선생만은 그 신앙이 참되고 그 사상을 존중한다고 하였다. 그의 사위되는 김진택씨가 면회갔을 때 당신은 훌륭한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면서 예배 시작 전 면회를 허락하였다.(판사 허락이 있어야 사상범 면회가 되었음)

 

형무소에서 일어난 일 몇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한 번은 간수장이 순시하러 감방에 왔다. 당번인 간수가 5감방 최선생 앞에 와 똑바로 앉았다. 최 선생이 예배드리려는 시간이다. 간수가 그의 기질을 알고서 3분만 허용하니 빨리 마치라고 했다.

 

최 선생도 간수의 입장을 고려하여 빨리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예배시간을 침해 받을 수 없다는 양심의 가책이 있어 정상적인 예배를 드렸다. 간수장이 당도했을 때 예배가 계속되었다. 예배 후 당한 고문, 맞은 매는 평양형무소에서는 가장 혹심한 것이라 하였다.

그는 결국 뒷고랑을 채우고 찬송을 못부르게 고무 마스크를 씌웠다.

 

그리고는 최 선생을 더욱 괴롭게 하고자 정신이상 여자를 최 선생 방에 함께 있게 했다. 방해하고자 보낸 이 여자가 예배를 도왔다. 입에 씌운 마스크를 풀어 변기에 던졌다. 다음 간수가 왔다. 변기통에 있는 마스크를 주어 씻어 다시 최선생에게 씌웠다. 이 여자가 또 다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후에는 고무 마스크를 씌우지 않았다.

 

어떤 날 예배로 인해 옷이 모두 찢겨 홑저고리만 입은채 시멘트 바닥의 독방에 가두었다. 조수옥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그날 밤은 영하 36도로 내려갔다고 했다. 다음 간수장이 최 선생을 향해 독방에 온 감상을 물었다.

 

내가 일본천황의 법을 어겼다고 이곳에 넣었으니 만일에 만유의 신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는 얼마나 더 무서운 벌을 받겠는가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더욱 굳어집니다라고 했다. 고문이 약해서 산 것이 아니요 명이 길어서 산 것이 아니라 대일본제국에 진리의 증언자로 삼았으므로 살아남은 것이다.

 

이러한 일도 있었다. 주일이다(성일). 자기 감방에 변기를 소제하려고 했다. 그의 신앙은 주일에 일하는 것은 성일을 범하는 것이므로 금하고 있다. 변기를 들어내려 하자 할 수 없이 변기통을 안고 누워 스제 못하도록 막았다 한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범죄나 실수를 하지 않았다 한다.1945815,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 일본은 반드시 이긴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미군이 필리핀을 되찾을 때 겁이 났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일본천황 히로히도(유인)815일 정오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제의 36년 그 포악과 탄압의 정치도 종말이 왔다. 어둡고 슬펐던 밤이 지나고 찬란한 아침이 찾아왔다. 818일 일제는 옥중성도 최덕지 선생을 죽이려 했다.

 

817일 밤, 옥문이 열리고 출감했다. 꿈 같은 일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누가 막으랴. 그 비밀을 누가 알았으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여러 옥중 성도와 함께 출영 나온 성도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많은 옥중 성도 중 순교하거나 병보석이 되고 최후까지 남은 자가 평양은 14명이었다. 이 분들이 안이숙씨 모친 집으로 안내되었다. 오랜만에 진수성찬을 대했다. 밤 예배는 은혜와 눈물과 감격의 도가니가 되었다. 멀리 고향의 신앙동지들을 생각하며 한밤을 지냈다.

 

그러나 그때에 아직 일본군이 무장해제를 하지 아니하였음으로 무기를 가지고 난동을 부리며 사람이 모인 곳에 와서는 행패를 부린다고 예배는 드리되 찬송은 하지 말자고 제의함으로 그 뜻 깊은 출옥 감사예배 때 찬송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엉겁결에 예배를 마치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쇠고랑을 차고 물을 둘러쓰고 매를 맞아 가면서도 찬송을 빼앗기지 아니하였는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찬송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분하고 괴로워 밤잠을 자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영지가 혼미해졌는가 반성하며 가슴 아파했다.

 

돌이켜 보면 최덕지 선생은 부산에서 평양으로 이감된 후 신사참배 거부는 물론이고 비신앙적이요, 비진리적인 궁성요배도 반대했다. 야수구니진자(청국신사) 위령 묵도까지도 생명을 걸고 항거했다.

 

시종일관 투옥된 지 7개 성상 그 능욕 그 고초를 감수했다. 이 나라 기독교 진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초지일관 신앙정조를 지켰다. 수절한 그는 해방과 함께 승리의 개가를 부른 하나님의 사자이다.

 

철저한 투쟁 완전한 승리

 

일제에 항거한 종교인이 없었다 하겠는가마는 완전하고 철두철미 반대투쟁한 자는 최 선생밖에 없다. 완전 승리는 그를 제외하고는 없다. 이는 함께 투옥된 이나 일본관헌이 함께 공인하는 바다.

 

종국에 그들은 최덕지가 믿는 신이 참신이다고 말하고 증거했다. 나는 분명히 믿는다. 하루도 빠짐없이 14차 기도가 정의는 살고 진리가 종국적으로 승리함을 믿는 최덕지 선생의 충정이 그를 살린 것이다.

 

이때 영남에서는 손양원, 김영숙, 염애나, 이술연, 김야모, 김두석 등이 출옥하였다. 평양의 출옥성도들은 순교제단 산정현 교회를 중심하여 집회를 가졌다. 강사는 최덕지,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박신근 등이었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성도들이 나와서 회개의 눈물을 흘린 줄 안다. 최덕지 선생을 황주에서 초청하여 그곳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최 선생은 평양 이귀연씨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 분은 숭의보육을 졸업하고 유치원 보모로 일했다. 신앙을 지켜 온 그는 최 선생의 신앙과 투쟁을 흠모하여 초빙한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평양에서 큰 여관을 경영하는 옛 친구가 찾아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이 분은 다름 아닌 평양여자신학교 때 누명으로 어려움 당할 때 도움받은 사람이다. 정의는 살아있고 외롭지 않은 것이다. 해방의 자유와 광란 속에 한 해가 기울었다. 1946년 정월이었다.

 

남한에서 잊을 수 없는 김영숙 동지와 서모 김성심씨가 찾아왔다. 이 땅에는 해방과 함께 또 하나의 비극이 생겼다. 바로 38선이다. 종전 6일 앞서 즉 89일 소련군이 일본에게 선전포고했다. 미국은 일본군벌을 해체하기 위해 소련군이 필요한 줄 알았다. 드디어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에 침입한 것이다.

 

최 선생은 월남 길에 올랐다. 이북의 재건은 이북인에게 맡겼다. 밤을 틈타 야행 길에 올랐다. 험하고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뉘 알았으리요. 가고보니 소련군 사령부로 간 것이다. 최 선생은 기도하였다.

 

주님이 일제에서 구하심은 무신자 공산주의 소련인에게 복음증거 하라심인 줄 알았다.

 

소련인은 그의 담대함과 그의 신앙에 놀랐다. 조사해 보고 나서 일제 때 투사임을 알고 38선 이남으로 안내해 주었다. 무사히 월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