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3:32
● 9. 부산교회 창설과 재건운동
감사기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부산에 온 최덕지 선생은 자기 친정인 최달구씨 집에서 첫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부산을 위시하여 경남 일원에서 사모하는 성도들이 모여 왔다. 그 기쁨과 감격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동안 피신한 성도들도 자유와 해방과 함께 차차 나타나게 되었다. 출옥한 성도들이라도 사상과 노선이 같을 수 없었다. 일부는 고신측이요 일부는 재건이다. 왜 이렇게 분리되었을까? 잠깐 밝혀두고자 한다.
출옥성도의 엇갈린 신앙사상
일반은 옥중성도라 하면 무조건 동일시하나 사실은 신앙에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이 신앙사상에 따라 투쟁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즉 평양형무소의 출옥성도 13명 중 1명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모교회로 돌아갔다.
최덕지 선생, 박신근 집사, 이광록 집사 등은 신사참배는 물론 동방요배(황거요배라고도 함) 청국신사, 위령묵도까지 전부를 죄악으로 인정했다. 거부반대 투쟁을 한 자와 이를 추종하는 자는 재건교인이 되었다.
기타는 신사참배가 죄이나 동방요배, 묵도, 국기배례는 양심문제로 삼았다. 그들은 동방요배란 산 임금에게 절하는 것으로, 평민이 황제를 대할 수 없으니 다만 거리관계로 가까이서 하나 먼 곳에서 하나 하여간 산 임금에게 절하는 것이다.
우리의 진리만을 위해 싸우는 민족적 관념에서 안 된다는 해석이다. 그런고로 이는 죄 아니라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하다 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최덕지 목사는 이는 죄 되는 이유로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본 임금은 사람이나 그들의 국체에 의하면 천조대신을 현인신으로 위하고 있다. 즉 사람이라도 사람으로 섬기라 함이 아니고 사람을 신으로 경배하라는 것이니 이는 곳 제1, 2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도 사람을 신이라고 할 때에는 절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이고 우리도 그를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장 5-6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요한계시록 20장 4절)
이리하여 옥중에서도, 같은 동료 중에서도 최덕지 선생을 고집쟁이로 생각했고, 일제에는 다른 사람은 동방요배하는데 너는 왜 아니하는가고 형벌을 더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출옥 당시까지도 최덕지 목사는 여자라고 해서 그 신앙과 사상에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고려신학의 교수이던 한부선(미국인 선교사) 목사가 이를 죄로 규정함에 따라 비로소 고신측도 굴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신앙과 영지에는 따를 수 없고 선교사의 성경해석이라야 순종한단 말인가.
재건노선의 차이점
최덕지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월남하여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경남노회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 방법에 있어서 재건운동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대하여 최 목사는 밖에서 불러내자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안에 들어가 건지자는 방법이었다.
최 목사가 본 한국교회는 전부 사탄의 회로 화하고 그들의 지도자는 해방이 되었으나 신사참배 죄악을 회개하지 아니했고 악의 세력이 강하니 먼저 구분부터 하고 죄악을 경책하여 양떼들의 생명을 구하자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상동 목사는 이제 우리가 들어가면 저들은 물러가고 말 것이니 안에 들어가자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상동 목사는 이제 우리가 들어가면 저들은 물러가고 말 것이니 안에 들어가 일해 보려고 몇 번이고 기도하고 주의 뜻을 기다렸으나 종내 허락 없어 결국은 밖에서 회개운동을 일으킨 것이 재건교회를 설립하게 된 동기이다. 한상동 목사가 들어가 건지려던 그 결과는 과연 어떠했던가.
그가 출옥성도의 자랑을 무시해 가며 관대하게(?) 그 노회 안에 들어가 일해 본 보상은 무엇이었는가. 마침내 1946년 12월 3일 경남노회, 제48회 진주노회 때에 진리의, 승리의 종으로서 최대의 모독을 당하고 자신의 입으로 탈퇴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고신측 교단이 생긴 것이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같이 물에 빠져 건지려할 때 두 사람 함께 익사하는 실례를 보임이다.
만일 이때 한상동 목사가 최덕지 목사의 노선대로 처음부터 구분하여 하나가 되었다면 한국교회는 완전 재건하여 세계적 사명을 완수했을 것이다.
최초의 부산교회는 1946년 2월 당시 약방을 경영하시던 전상옥씨 집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모인 교우로는 작고한 박부준 장로, 박열순 장로, 조복희 장로를 위시하여 하수봉 집사, 유사덕 집사, 강선희 집사, 장봉기 집사 등으로 이분들이 재건교회 창설 때 대표적인 교인들이다. 이때부터 최덕지 목사님의 회개운동이 한국교회에 전개되었다.
최초의 재건교회 부흥집회가 시작된 곳은 경남 창원군 하구지교회다. 강사로는 최 목사와 이광록 집사였었다. 이 집회에 경남노회 원로 목사이던 마산 강상은 목사가 재건하고 재건운동에 가담하였다. 따라서 진해교회 장로였던 이성출 장로가 회개 재건하였고 하구지교회 이용실 전도사가 회개 재건하였다.
1947년 1월에는 경남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교회에서 재건부흥 집회를 가졌다. 이때 조용술 장로 일가가 모두 재건하였다. 당시 조용술씨 백씨되는 조용화 집사가 전적으로 회개하고 일제시 범죄한 교회를 회개의 표상으로 불태우고 신축성전을 위해 자기 거처하는 가옥, 전답, 소 한 마리까지 재산 전부를 송두리째 바쳤다. 전국 각지에서 은혜를 사모하여 모여든 성도들이 과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과 충성하지 못한 것과 배신배도한 모든 범죄를 회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동래군 기장면 대변에서 왔던 장봉기씨는 크게 은혜를 받아 조용화 집사가 자기 재산 전부를 주께 바침에 감동입어 그 재산을 다시 사서 주께 바치고 그 소와 그 전답으로 농사 짓게 한 일화도 있었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하는 사랑의 세계를 보여준 것이다.
우상 섬긴 교회를 버리다
계속하여 경남 함안군 강명리교회에서 재건부흥집회를 가졌다. 이곳에서도 불같은 은혜가 충만했다. 회개의 눈물과 통곡은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이 곳은 조용덕 영수(다음 재건교회 장로)가 피신, 성도와 사자들을 숨겨 섬겼다. 이 집회에 크게 은혜를 받았다.
강명교회 건물은 일제 때 문을 닫아서 더럽히지 아니하였음으로 그대로 쓰기로 하고 거기에서 집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 선생이 예배인도 시간만 되면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어 이광록 집사로 인도케 하였는데 조금 몸이 나은 듯하여 다음 시간 강단에 서게 되면 또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몇 번 되풀이하는 동안 기도를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단 문제인 듯하여 그 교회건물에 대하여 물어보니 일제 때 문은 닫았으나 빈집이라 하여 동리에서 이용하면서 일본 가미다나를 차려 놓고 절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즉시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마당에다 자리를 깔아 예배장소를 옮겼다. 그리고는 우상섬긴 곳을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리 사람들은 그 집을 버리면 자기들이 사용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의논하여 그 집을 헐어서 불태웠다. 이 집회 때 함안교회 박또석 목사가 회개 재건하고 조광제 장로가 재건하였다. 1947년 2월은 김해군 진례면 담안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집회과정에서 새벽예배는 십계명을 강의하였고 낮 공부는 계시록의 소아시아 7교회를 해석하였다. 구구절절 그의 설교는 생명력이 있었고 말의 설교가 아니라 생명을 걸고 진리를 위해 투쟁한 산 체험이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심령 골수를 찔러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과연 하나님의 사자로서 권위를 실감케 하였다.
누가 과연 저토록 한국교회의 죄를 책망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저만큼 조국을 위하는 열렬한 애국충정을 외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누가 죄에 물든 가련한 심령을 구원하고자 이토록 사랑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집회에 참석하여 성일관과 십일조에 대한 신앙을 확립하였고 죄를 철두철미 책망하는 능력에 감화되어 회개하고 재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집회에서 삼일금식을 처음 시작하였다. 이때 출옥성도 염애나 조사도 함께 고신측에서 회개 재건하였고 또한 진해의 주상수 목사가 참석, 은혜를 받았고 자기 교회의 집회를 청한 것이다. 1947년 3월말 진해에서 재건부흥집회가 개최되고 주상수 목사 일가가 재건되었다. 당시에 장로였던 주상수씨는 일찍이 오산고보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만주 전도를 위해 만원(현 화폐가치로 일억원 상당)을 헌금한 분이다.
1947년 4월 18일에는 마산교회에서 재건부흥 집회를 가졌다. 마산은 과거 일제시 강상은 목사님의 가정을 중심한 구별된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다. 1946년 11월 22일 마산시 회원동 340번지 정우순씨 집에서 마산, 석전, 중리, 용담 등지 교인 18명이 합하여 예수교재건 마산교회를 창설한 것이다. 이 마산 집회 당시 특이한 것은 현실교회 목사의 고발로 외암과 광명 두 교회를 불태운 것에 대해 방화죄로 몰아 최덕지 목사와 광명교회 조용덕 장로, 외암교회 집사 등 7, 8명이 구속되어 마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재판을 받고 무죄석방된 것이다.
성경시대에도 예수님과 그 외 사도들에게 죄를 씌우려하고 처벌하려 한 자가 다름 아닌 교권가진 자 종교인 자신이 아니었던가. 일제시 진리를 파수하고 교회를 지키는 충성된 주의 종인 순진한 양들을 잡아준 자들도 권세와 야욕에 불타던 거짓 목사들이 아닌가.
해방된 오늘에도 성경대로 살고 진리를 사랑하는 재건교회나 교인들을 이단시하고 또는 반국가적이라고 악선전하고 고발하는 자는 다름 아닌 자기 출세만, 자기 교권만 위하여 권력에 아첨하는 거짓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일본제국 때 범했던 죄악을 지금도 그대로 범하고 있으니 참으로 누가 국가의 번영과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는 자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 진리대로 행하며 국가를 위해 하루 4차례 기도하는 재건교회와 재건성도들이 아닌가. 당시 법관들도 참 기독신자와 거짓 기독신자를 그 지도자의 생활과 모습에서 판단하고 최덕지 목사를 존경하였다.
석방된 최 목사가 마산집회를 이끌 때 은혜가 넘쳤다. 이때 많은 사람이 재건하였다. 그 중에서도 정학진 장로는 이때 회개 재건하여 오늘까지 마산교회에 충성을 다 바치고 있다.
부흥의 불길은 타오르고
이리하여 부흥의 불길은 방방곡곡 번져 나갔다. 계속하여 부흥집회는 제단마다 불붙기 시작했다. 부산집회에서는 김갑진 집사와 최 의사가 돌아오고, 모산집회에서는 최달석 목사, 윤석천 장로 등이 재건하였고, 부목집회에서는 윤의섭, 김판동 두 장로가 돌아오고, 진영집회에서는 박용대 장로와 김태금, 신우 두 집사가 돌아오고, 통영집회 때에는 방 집사 가정, 조필연, 윤갑득, 황또순 집사 등이 재건하고, 남해집회 때 최일구 목사 가정, 이상철 장로, 강덕순, 강주천 장로 등 여러 가정이 재건하고, 삼천포집회에서는 김수성 조사 자매들, 최종범 선생 등이 재건하고, 여수집회에서는 김기성씨 가정, 홍정희씨 가정 등이 재건하였다.
이렇게 하여 50여처 교회가 허물어진 제단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속화된 한국기독교를 재건하기 위해 진리운동은 더욱 뜨겁게 전개되고 전국 방방곡곡 집회 때마다 신앙으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평신도도 일제시대 범행을 뉘우치고 잘못된 과오를 회개했다. 진리의 사자, 신앙의 참목자들 우러러 보며 앞을 다투어 나아왔다. 그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재건 노선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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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반석 | 2016.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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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반석 | 2016.01.0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