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4 02:36
■ 교회쇄신 운동가 한상동목사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교수)
1901년 7월 30일 경남 김해군 명지(鳴旨)에서 출생한 한상동목사(韓尙東, 1901-1976)는 1916년 부산 다대포의 실용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1921년 5월 김차숙(金次淑)과 결혼했다.
1924년 박창근(朴昌根)전도사의 전도로 입신하여 1925년 세례를 받았고, 호주장로교선교부(APM)의 배려로 진주 광림학교 교사(1927-1928)로 일하던 중 목회의 소명을 받았다.
교사직을 사임한 그는 피어선 고등성경학교(1928)를 거쳐 평양신학교(1933-1936)에서 수학하고 1929년 하동 진교리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 후 부산초량교회(1936)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 1937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마산문창교회(1937-1939)에서 목회했으나 당시 한국교회에 강요되기 시작하던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를 사면하고, 일시 밀양 마산리교회(1939)에서 봉사했다.
한상동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한 이유로 1940년 7월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해방과 함께 1945년 8월 17일 석방됐다. 석방된 그는 주기철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부름을 받고 일하던 중 모친 배봉애여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1946년 5월 남하했으나 38선이 고착화됨으로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경남 일우(一隅)에서 신학교 설립을 구상하고 출옥성도인 주남선목사와 함께 1946년 6월 23일 진해에서 하기 신학강좌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일 고려신학교의 시원이 된다.
그해 7월 30일에는 부산의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즉 그는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는 한편,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교육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의견 대립과 고려신학교 인준건, 그리고 학생 천거문제로 총회적 문제로 제기되고 이 학교를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한상동목사는 초량교회의 명도를 요구받고, 1951년 10월에는 초량교회를 사임했다. 그는 곧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삼일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가 고신측 교회의 중심교회가 됐다. 그는 이 교회에서 1972년까지 목회하고 퇴임했다.
목회활동과 동시에 고려신학교의 운영과 교수에 참여해 온 그는 1954년에는 훼이스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받았고 1971년에는 고려신학대학 초대 학장으로 봉사하다가 1974년 1월 정년퇴임했고, 2년 후인 1976년 1월 6일 별세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생애 여정을 정리해 볼 때 그의 4가지 측면에서 논구될 수 있다.
첫째,일제 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과 반대운동(1936-1945),
둘째,해방 후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교회쇄신운동(1945-1952),
셋째,초량교회삼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목회활동(1946-1972),
넷째,고려신학교 설립과 신학교육 활동(1946-1974)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의 생애와 신학, 그리고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상의 네 가지가 그의 삶의 영역에서 논구될 수 있지만 이 모든 사역은 한마디로 '교회 건설을 위한 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상동목사는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신교(信敎)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고, 해방 후에는 일제 하에서의 배교행위와 친일 청산을 주창하며 교회 쇄신을 위해 일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정통신학'만이 교회를 위한 참된 신학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1946년 당시 장로교회의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은 조선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는 남부총회에 의해 총회직영 신학교육기관으로 가결된 상태였다. 한상동은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적 색채가 짙다며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됐다.
그는 일생동안 성경중심적인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신전 의식으로 살았다. 그는 결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자 했던 겸허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의 생의 모든 자취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추구하는 교회 건설을 위한 일관된 봉사였다. 한상동목사는 한국교회사에서 과소평가 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은 교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상동목사에 대한 논구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1차 사료의 결핍이다. 한 목사는 자신의 생애 여정에 대한 기록에 무관심했다. 비록 그가 쓴 옥중기와 설교집이 출판됐으나 거의 대부분은 다른 이들의 대필이다. 그의 설교집에는 한 목사의 정신과 사상이 나타나 있으나 내용에는 상당한 첨삭의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이 한상동의 생애와 신학적 편모를 헤아리는 데 난제가 되고 있다. 물론 그의 설교 속에는 그의 신앙과 신학이 드러나 있지만 그의 신학전반을 논구하는 데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 (2003. 2. 15. 한국기독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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