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에 쓴 한상동 목사 편지 공개

기독교보 2006-03-10 09:54:25

  선지자선교회

해방 직후와 고려신학교 설립 상황 보여줘

 

고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이상규 교수(신학과)가 최근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한상동 목사가 60년 전에 직접 쓴 친필 서신을 공개해, 해방 직후의 한국교회 상황에 대한 한 목사의 인식과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관련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소상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교계와 교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고려신학교가 설립되던 19461224일자로 해군용 편지지에 쓰여진 이 편지는 한 목사가 호주장로교회 소속의 여선교사 허대시(Miss D. Hocking) 선교사에게 한글로 써서 보낸 것으로, 이 편지에서 한 목사는 아무리 하여도 조선교회의 장래를 생각할 때 목사가 목사다운 목사라야 되겠다 어떤 난관이 있을지라도 신학교를 하고야 말 것이다. 그 이유는 서울에 있는 신학교는 우리가 믿는 신앙하고는 다른 까닭이다 과거에 일본 정치 때 춤추던 무리들이 당을 지어 우리를 밀어내어 우리를 방해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본정치 때에 춤추고 덤비던 그들이 또 미국에 붙어 춤추고 있다 우리 조선교회는 우리의 책임이 있음을 깊이 생각한다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 해방 직후 혼란한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한 한 목사의 생각들과 신학교 설립에 대한 한 목사의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한상동 목사의 이 친필 편지는 이상규 교수가 호주 유학 중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1987년에 멜버른의 한 연합교회 고문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발견해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고신대 설립 60주년을 맞아 이 교수가 고신의 인물에 대한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공개된 것이다.

 

 

이 편지에 대해 이 교수는 고려신학교 초기의 상황과 호주선교부와의 관계에 대한 한 목사님의 인식, 특히 새로운 신학교육에 대한 강한 의지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한상동 목사의 60년 전 편지를 발굴해 이번에 공개한 이상규 교수는 고신대 설립 60주년을 맞아 고신의 인물들에 대한 글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할 계획인데, 이 편지와 함께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편지내용

 

60년 만에 공개된 한상동 목사의 서신

 

필자가 호주에서 유학하던 1987년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자료를 섭렵하던 중 멜버른의 연합교회 고문서관에서 한상동 목사가 쓴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호주장로교회 소속의 여선교사 허대시(Miss D. Hocking)에게 한글로 쓴 이 편지는 고려신학교 초기의 상황과 호주선교부와의 관계에 대한 한 목사님의 인식, 특히 새로운 신학교육에 대한 강한 의지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신학교가 설립되던 19461224일자로 해군용 편지지에 쓴 이 편지는 호주 선교사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우선 서두의 사적인 인사를 제외한 이 편지 전문을 소개한다(맞춤법은 되도록 현대어로 고침).

 

....... 항상 위하여 기도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이렇게 편지하여 소식을 알려 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지요.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시는 줄 아옵니다. 팔십이 넘으신 어머님 모시고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어머님께 문안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남동생 내외분께 문안합니다. 큰 조카 둘 다 전쟁에 나갔다가 큰 고생하였으나 주님의 은혜로 잘 돌아왔으니 참 감사합니다. 진실로 누님 보내주신 성경말씀대로 어지러운 세상이외다. 어서 주님 오시면 참 좋겠습니다.

 

이곳 동생 명동은 부산 영도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습니다. 지금 경남에서는 제일 재미있게 은혜롭게 나갑니다. 매일 새벽기도회 때 4,50명이 모이고 주일 예배시는 예배당이 좁아서 새로 지어야 되겠는데 물자가 없어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교생은 작년 817일 밤에 평양감옥에서 나와 평양 산정현교회(주기철 목사님 계시던 교회) 목사로 시무하다가 금년 3월에 경남으로 왔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불행이도 내가 옥에서 나온 지 1개월가량 되어 어머님 얼굴도 뵈옵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된 나로서는 너무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다시 평양으로 가야 될 사정입니다만 38선이 가로 막혀 잘 가지 못하고 임시로 부산 초량교회에 시무하고 있습니다.

 

평양 있다가 경남으로 와서 형편을 보니 아무리 하여도 조선교회의 장래를 생각할 때 목사가 목사다운 목사라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부산진 일신학교를 장소로 정하고 전에 평양신학교 교수 선생 되신 박형룡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과 미국 가서 8년 이상으로 공부하고 온 명신홍 목사님과 김진홍 목사님을 모시고 고려신학교라 이름한 신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9월부터 박윤선 목사님을 모시고 개교식을 하고 개학 중 공부를 하여 왔습니다. 내년부터는 박윤선 목사, 명신홍 목사, 김진홍 목사, 한부선이란 미국선교사, 이자익 목사 이렇게들 다 모아서 신학생 한 50명 되는 학생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금일 호주선교사의 선교한 결과로 경남에 신학교가 설립됨은 호주선교사의 영광이요 우리의 기뻐할 것인데, 호주선교사인 안다손, 라례인 두 선교사는 우리의 하는 일을 반대하여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빌려줄 수 없다 함으로 우리는 무례함을 생각하고 내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시작한 신학교를 그만 두겠느냐 아니올시다. 아무런 난관이 있을지라도 하고야 말 것이외다. 왜 그런고 하니 조선 서울에 있는 신학교란 우리가 믿는 신앙하고는 다른 까닭이외다.

 

전라도와 대구에 가서 미국선교사들과 이야기할 때에 그들은 벌써 미국에서부터 우리 고려신학교의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환영하여 조선으로 가면 이 신학교를 도우리라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선교본부에서 허락만 하면 우리 신학교에 교수까지 올 마음이 간절한 선교사도 있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우리 경남에 설립되는 신학교를 반대하는지요. 아 참 답답합니다. 물론 우리의 유치함이 많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아무리 하여도 우리 신학교를 하고야 말 것이외다. 물론 경남로회가 지금 반대합니다. 이는 김길창 일파가 과거에 일본 정치 때 춤추던 무리들이 당을 지어 우리를 밀어내어 우리를 방해하지만 우리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조선교회는 우리의 책임이 있음을 깊이 생각합니다.

 

누님 한번 우리 조선으로 다녀오실 수 없을까요? 편지로는 자세한 사정을 다 말 못합니다. - 참 세상은 불의가 이렇게 동하는 세상인지요.

 

일본정치 때 춤추고 덤비던 그들이 또 미국에 붙어 춤추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의 살아계심에 고독의 생활에서 진리로 더불어 싸우려 하나이다. 많이 기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신학교는 집도 없고 설비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다만 내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로 시작하였으니 기도로 성공할 줄 믿고 나갑니다.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우리 신학교가 쫓겨나올 때 나의 가슴 심히 아픕니다.

 

 

나는 새벽마다 내 주님 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합니다. 누님도 필연코 안다손 목사님 말씀 들으시고 우리를 오해하겠지요. 오해하시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염려하여 하시는 줄 우리는 알고 감사할 것이외다. 할 말이 많사오나 우선 이만 그치나이다. 잘못된 것 용서하옵소서.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한상동

 

나는 성공하리라. 나는 성공하리라. 주님이 같이 하여 주시니 나는 실패하나 주님은 성공하리라.

 

19461224일 올림

 

 

그런데 이 편지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허대시 선교사와 안다손 선교사의 불화로 발전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편지에서 허대시 선교사를 누님이라고 호칭한데서 보여 주듯이 두 사람은 친근한 사이였다. 반면 안다손 선교사는 한상동의 편지는 부정확하고, 사실과 다르며, 적어도 호주 선교사가 고려신학교를 반대한다는 한상동의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한 목사는 호주선교부와의 사전 의논이나 허락도 없이 일신여학교 건물을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상동 목사의 편지 수신인인 허대시 선교사는 1916년 내한하여 부산 마산 통영 등지에서 일했는데, 신사참배가 문제시되던 1935년부터는 부산에서 일했고, 1941년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1941년 한국을 떠났다. 그는 1919년 내한하여 1921년 이래로 마산지방에 사역했던 태메시(Miss Maysie Tate)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자들과 교분이 깊었고, 특히 한상동 목사와는 가까운 사이였다. 허대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일제의 종교탄압이라는 강제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지만 한국인의 신앙적 투쟁을 높이 사고 있었고, 특히 부산 경남지방에서 신사참배 불참배자들의 정신적 후원자가 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41년 한국에서 인퇴(引退)한 후 호주 빅토리아 주 하이델베르그에서 살다가 84세를 일기로 오스틴병원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1971년이었다.

 

필자가 그의 가족들을 만났을 때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을 통해 허대시의 한국에서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한국인에 대한 동정적인 마음을 가진 이었다. 허대시 선교사는 한상동 만이 아니라, 한명동 이주원 등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이런 인간적 친분 때문에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 설립 후의 사정을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허대시 선교사에게 편지로 보내게 된 것이다. 이 때 한상동 목사는 자신의 편지만이 아니라 동생 한명동 목사의 짧은 편지와 이주원 전도사의 편지도 함께 보냈는데, 이 편지도 언젠가 기념이 될 만할 때에 공개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주 기독교보(938)에 소개한 편지 전문에서 보여주듯이 해방 후 출옥한 한상동 목사는 새로운 신학교육에 강한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는 적어도 신학교육의 쇄신없이는 한국교회를 쇄신할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출옥 후 주남선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것은 노회나 총회 등 치리회의 주관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소명으로 시작된 사설 신학교였다. 이 점은 필자가 다른 글에서 늘 주장해 왔듯이 한상동 목사는 자유주의적인 조선신학교에 한국교회(특히 한국장로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신학교 설립을 서둘렀고, 진해에서의 신학강좌를 시작으로 하여 1946920일 부산진의 일신여학교 교실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경남노회와의 관계에서나 호주선교부와의 관계에서 불편한 점이 있었고, 성탄을 하루 앞 둔 날 저녁 착착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늘 가깝게 지내던 허대시 누님에게 그간의 사정을 토로했는데 이것이 이 편지의 내용이다.

 

그런데 한상동 목사는 이 편지를 우편으로 발송한 것이 아니라, 해방 후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본 후 19461월 호주 멜보른으로 돌아가는 호주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인 안다손(Rev. G. Anderson)목사 편으로 보낸 것이다. 안다손 목사는 1922년 내한하여 부산 마산 진주 등지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였고, 1937년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에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로 일했다. 1952년부터 54년까지는 다시 내한하여 부산에서 선교사로 일한 바 있고, 1954년 은퇴한 후 1976년 사망했다. 그는 비교적 잘 교육받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안다손 선교사는 귀국 편에 한상동 목사가 전해 준 편지를 가지고 멜보른으로 돌아가 멜보른 근교 하이델베르그에 살고 있던 허대시에게 이 편지를 전달했다. 허대시는 이 편지를 읽은 후 이 원본 편지와 자신의 영역본을 안다손 목사에게 보내면서 한상동 목사의 편지 내용에 대한 전후 사정을 알고자 했다. 이 때 안다손은 호주선교부와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그 한상동 목사의 편지를 귀국 길에 자신이 소지하고 온 편지임을 알게 되었다.

 

한상동의 편지를 접한 안다손는 194743일자로 허대시에게 보낸 회신에서 한 목사의 편지 내용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편지내용이 전반적으로 부정확하며, 특히 호주선교부가 반대했다고 말한 점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 목사의 편지에 대해 4가지 사실을 반박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일신여학교에서 신학교를 시작하려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안다손은 이들은 진해의 해군기지 건물을 사용하도록 노회의 허락을 받았는데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부산 일신여학교 윗층으로 옮겨왔고, 그리고는 구 건물 전체를 기숙사로 점거했다.고 말하고, 우리가 한국에 도착한 후 호주장로교 건물을 허락없이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대표 한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해 말까지 일신여학교 건물을 사용하도록 요청했기에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을 뿐이다고 했다. 그런데도 호주선교부가 반대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했다.

 

둘째, 한상동 목사는 호주선교부가 고려신학교를 반대했다고 말하지만 그런 일이 없고, 한 목사에게 반대하는 것처럼 비쳐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려신학교 설립에 있어서 누가 그 학교를 운영하는지, 교회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호주선교부에 그 신학교 운영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받은 일도 없고 그곳을 방문하도록 요청받는 일도 없는데 이제 와서 호주선교부가 고려신학교를 반대했다고 말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셋째, 한상동 목사는 호주선교부가 고려신학교를 일신학교 건물에서 나가라고 말한 것으로 쓰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나가라고 몰아 낸 적이 없고 그들의 건물사용 허락을 거절하지도 않았다.고 반박했다. 안다손은 실제로 누가 고려신학교 책임자인지 헷갈린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이름을 쓰지 않고 그들(they, them)이라는 3인칭 복수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 아마도 한상동 목사인 것 같다고 말하고, 그가 지혜롭지 못하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안다손은 지난 1월에 여러번 일신학교 건물이 필요한지를 물었으나 그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아무런 회신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는 아마도 신학교 운영에 있어서 위원회를 구성하고 신학교의 필요성이나, 신학교 운영의 가능성 등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는 노회의 지시를 따르려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넷째, 한 목사는 노회가 반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 말도 정확하지 않다고 말한다. 안다손은 그 근거로 1946년 임시노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인정했고, 앞에서 말한 진해의 건물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도 한 목사는 고려신학교와 관련하여 노회에 아무런 보고도 한바 없다고 지적했다. 노회가 신학교를 하겠다는 한 목사에게 그 신학교가 어떤 학교인지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요구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일부의 개인이 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가? 그리고 졸업생들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대책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노회가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안다손은 노회장이나 노회원을 무어라고 비난하든가와 관계없이, 치리회로서는 고려신학교 문제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안다손은 고려신학교에 관여하는 이 가운데 믿음 지키려고 고난당한 일에서 결코 한상동 목사에게 뒤지지 않는 주남선 목사 같은 이는 새로운 신학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의 연합을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한상동 목사의 편지 내용에서 오해될 수 있는 점을 허대시에게 설명한 내용인데, 안다손은 한목사가 이런 식으로 바르지 않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주 섭섭한 일이라고 했다. 특히 안다손은 한국을 떠나는 바로 그날 같이 초량으로 걸어갔고, 그동안 풍성한 교제(rich fellowship)를 나누는 사이인데, 한상동 목사가 이런 식으로 곡해하는 문서를 보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섭섭해 했다. 이 편지를 접한 허대시의 응답 또한 우리의 관심을 끈다. (계속)

 

이상규 교수(고신대 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