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재의 기독교 입문과 면서기 시절 (3)

생존 그 자체가 문제였던 일제 강점기, 하지만 결코 생존만을 위해서 현실과 타협하며 살지

않았던 귀한 사람 이인재. 그의 끊임없는 학구열과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면서 새롭게 시작되어지는 그의 제2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사춘기와 성인군자 인재가

18세가 되던 해, 그는 소년으로서 다른 여늬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눈의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웠고, 자라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

기에 비록 소년이었지만 공자의 도덕훈을 배운 사람으로 자기 스스로는 도덕군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러기에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점잔을 빼고 얌전하였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러하지 못했다. 처녀들을 보면 마음이 움직였고 안아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처녀를 만나면 공연히 처녀의 손목을 잡아보는 것이었다. 처녀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면 멀거니 바라다보고 서 있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 자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것을 하는가? 아직 군자가 되지 못해서 그런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이 있는 것일까? 그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알 수 없는 유혹을 물리칠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2. 마산교회

그 무렵, 밀양 마산리에는 이미 교회당이 서 있었다. 인재가 살고 있던 마산리 교회는 1986

8월경에 시작된 교회이다. 역사가 아주 깊은 교회였다. 일찍이 그곳에 살고 있던 박건선

과 박윤선이라는 두 형제가 복음을 받아 들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들의 자택에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1908년 초가 삼간 한 채 구입해서 교회당으로 개조하였다. 마산교회는

1908년 김응진 전도사가 교역자로 시무하면서 교회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손종도 하나 구입해서 새벽마다 종()을 쳤다. 주일 낮과 밤, 수요일 밤 예배 시간에도 시작을 알리는 종을 쳤다. 어느 주일이었다. 인재는 교회당 옆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도 교회당에서는 종을 쳤다. 창문 밖으로 손종을 심하게 흔드는 것이었다. 작은 마을에 종소리가 진동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선지자선교회

인재는 호기심이 생겨 교회당 주변을 서성거렸다. 교회당은 초가삼간의 방 세칸으로 되어 있었다. 두 칸은 벽을 터서 남자들이 앉았고, 한 칸은 벽을 남겨둔 채였다. 그 쪽에는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벽으로 남녀석을 구분한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예수를 믿지만 아직 남녀칠세 부동석의 관습이 깊게 인식된 때였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설교를 하는 강대상은 비둘기 집 같은 판자 통을 각목 네 개가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앞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 모습을 본 인재는 웃음이 나왔다. 저게 무언고?그리고 앉아있는 사람 중에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남녀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인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욕하였다. 세상에 남녀가 예의도 없이 함께 노래를 부르다니 순전히 상놈들이야.인재의 마음 속 깊이 뿌리 내려있는 공자의 사상이 기독교를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 인재가 살고 있던 마산리는 양반 동네가 아니었다. 이곳은 역마(驛馬)를 기르고 관할 하

는 곳이었다.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상사람들이고 이러한 연유에서 마산이란 동네명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코 마산리는 인재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랑스러운 동네는 결코 아니었다. 명색에 그는 왕손의 후예요, 양반 중에 양반이었다. 공자의 도덕훈을 배워 도덕군자로 행세하는 처지였다. 인재의 조부(祖父)에게 있었던 일화다.

 

읍네에서 마산리로 걸쳐 외산리 라고 하는 동네로 어떤 부자가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었다. 인재의 조부는 왕손의 긍지가 가득하신 분이었다. 마산리 입구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이 부자에게 호통을 쳐서 기어코 말에서 내려 마산리를 지나가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만큼 인재의 가문은 자긍심이 대단하였다. 인재의 모친도 시집올 때 몸 종 둘을 거느렀을 정도였다. 그런 가문의 의식 속에 자란 인재가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기적이라고나 할까?

3. 기독교 입문

그런 그가 교회당에 한번 발을 디딘 이후로 그만 마음이 교회로 쏠리고 만다. 그 다음 주일

에 또 교회당에 간 것이다. 밖에서 보니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그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밀양 박씨 문중의 사람이었다. 이름 박수민(朴秀敏)씨였고 교회에서는 영수(領袖)라 했다. 박수민 영수는 양반 출신이었다. 모든 생활면에서 모범스러웠다. 도덕군자를 자처하는 자기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에 비하여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분이었다. 어쩌면 인재는 그들보다 훨씬 훌륭한 양반으로 박수민 영수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분이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상놈이니 하며 우습게만 볼 처지가 아니었다. 교회당 안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상놈도 많았지만 양반도 적지 않았다. 인재는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심각히 관찰하였다. 박수민 영수가 전하는 말씀도 공자의 가르침 못지 않았다. 새롭고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교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예배 후 교회에서는 인재를 환영하였고 그에게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그것은 한 쪽 거죽이 떨어져 나간 국,한문 성경책이었다. 교회에서 그에게 국-한문성경책을 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인재는 그 동네에서 제일 한문을 많이 알기로 소문 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 이름 대신에 서당총각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 있었다. 박수민 영수는 이인재의 출현을 놀랍게 생각하며 관심을 기울였다.

 

인재는 비록 한 쪽 거죽이 없는 성경이었지만 그것이 책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기뻤다. 인재는 성경책을 좋은 선물로 여기고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열심히 읽었다. 그는 한글은 조금 서툴렀지만 한문은 자신이 있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사서삼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살아있는 교훈을 접하였다. 그는 성경에 취미를 붙여 교회 출석에 열심을 내었다.

4. 공무원이 되어

인재는 밤에는 야학교(夜學敎)를 열어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한문과 한글을 가르쳤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는 의미도 되고 또 마을 사람들의 눈을 띄운다는 의미에서 열심히 가르쳤다. 마을을 위해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낮에는 학교에 나가면서 저녁엔 야학에서 늦게까지 글을 가르치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재는 그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했다.1926년 이인재는 밀양농잠학교를 졸업하였다. 진학을 해서 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가정형편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더 배우려면 경성으로 가든지 일본으로 가든지 마을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가난한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다. 돈이 드는 일인데 그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가정형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는 진학을 포기하였다.

 

우선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이 그를 더 염려해 주었다.인재야, 너는 배운 것도 있고 머리도 좋고 하니 관공소에라도 들어 가도록 해 보거라.그런 곳에 쉽게 들어갈 수 있냐, 어디.강기수에게 한번 부탁해 보거라. 강기수는 면사무소 직원이었다.내가 말하기가 쑥스러워서...그런 인재의 말에 친구들이 대신 강기수에게 부탁을 하였다. 어느날 강기수가 인재를 만나 말했다.인재야, 내가 면사무소에 추천을 해 볼 것이니 이력서를 한 통 만들어 다오.고마운 일이었다. 인재는 이력서를 강기수에게 건네 주었다. 이인재는 강기수를 통하여 면사무소 서기가 되었다.

 

첫 월급 18원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큰돈이었다. 어려운 집안에 굉장한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인재의 마음은 무거웠다. 영영 진학의 꿈은 사라지고 면서기로서 여생을 마칠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5. 면서기 업무

인재는 잘 준비되어진 사람이었기에 면서기로서도 여러 가지 일을 맡게 되었다. 사실 그 때만 해도 면사무소의 업무가 요즈음처럼 세분화되어 있지 못한 시절이었고,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많은 분야의 일을 맡아서 일할 수 밖에 없었다. 세무 관계며 호적관계, 산업관계의 일들을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인재는 농민들의 산업을 장려하는 일을 탁월하게 감당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농민들의 삶이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저 한끼 밥만 먹을 수 있어도 다른 걱정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상남면에서 농민들이 살 길은 땅을 가지는 일이었고, 농사지을 수 있게 주변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상남면의 가장 큰 문제는 낙동강 물이 범람해서 매해 여름마다 농토를 잃게 되는 일이었다. 그는 여기 저기 도움을 받아서 강둑을 쌓는 일에 전념을 하였다. 예림 뿐만 아니라 마산리에 둑을 쌓아 강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사실 이일은 단순히 강둑을 막는 일 뿐만 아니라 수 많은 농토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면민들을 잘 살펴 주었고,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농토 를 확보하고 또 나눠주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는 한편 당시 상남면과 현 가곡동 사이를 잇는 예림교 착공을 계획 추진해서 준공하였다(얼마전에 철거된 옛 예림교, 사진 참고). 이 예림교 개통으로 인해 상남면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밀양읍으로 나르는데 결정적인 편리함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인재는 머리가 명석하고 근면 착실해서 어떤 일이든 능률적으로 잘 감당하였다. 그러기에 면민 가운데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면민들 뿐만 아니라 상사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훗날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면서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1938).

 

그 일은 그가 그토록 하고 싶은 학문탐구의 길이기도 했고, 느즈막하게 들어선 길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3년간의 공무원 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가 면서기직을 사직하기 위해서 사표를 제출했을 때 그는 밀양경찰서에 붙잡혀가서 하루 종일 갖은 술수로 회유를 받게 되었다. 일본 순사는 그에게 다시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면 면장직을 주겠다고 했다. 인재는 기로(岐路)에 서게 되었다. 그에게는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면장이 되면 큰 명예와 함께 그 지방의 유지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생활도 보장이 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 큰 결심을 하였다. 순간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그는 미련 없이 수석 면서기직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