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03
● 평양신학교의 입학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5)
우리는 지금 일제 강점기의 견디기 어려운 압력에 맞서서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실천하고자 애를 쓰는 한 인간의 모습을 살피고 있다. 타협만이 살 길이고 생존이 유일한 삶의 이유인 시대에 결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길을 택한 귀한 인물, 이인재는 편안한 삶이 보장된 면서기직을 사면하고 평양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된다.
1.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
1938년 3월, 이인재는 평양으로 갔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매주일 당시 평양의 대표적인 교회인 산정현 교회에 출석하였다. 당시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는 주기철 목사(1897.11.25~1944.4.20)였다.산정현 교회는 일제시대때 일본귀신 앞에 절하는 것을 거부함으로 인해 수 많은 탄압과 희생을 겪으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과 한국기독교 역사의 맥을 이어 온 대표적 교회이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의 거두(巨頭)라고 할만한 수다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고당 조만식 장로(1922년, 장로로 장립됨)와 같은 비범한 인물들이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여 민족의 대표적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1928년에는 당시 산정현 교회를 맡고 있던 당회장 강규찬 목사가 연로(年老)함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 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朴亨龍)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부목사로 취임하여 담임목사를 보필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 9월, 박형룡 박사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전임하여 갔다. 그후 1936년 박형룡 목사는 임시당회장의 자격으로 당회를 열고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 할 것을 결의하였고, 동년 8월에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神社)참배 반대에 있어 한국개신교 목사의 대표격인 평양신학교 제19회 전기(1925년)졸업생으로 그는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여 8년 간 시무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192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부산 초량교회를 첫 목회지로 하여 시무하였으며,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로 임지를 옮겼다가,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것이다. 오산학교의 은사(恩師)이기도 했던 조만식 장로는 직접 마산으로 내려가 자신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자신이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셔왔다. 때는 바야흐로 평안남도 지사였던 야스다께가 기독교학교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한 이듬해이어서 주목사는 이미 일제와의 투쟁을 각오하고 평양성에 들어섰다. 그로 인해서 산정현교회는 민족주의 교회의 총본산으로 더욱 무장하게 되었는데 신앙 진리의 사수(死守)를 위하여 한국 교회가 크게 단합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다음 해인 1937년 3월 7일 당회와 제직회에서 새로운 예배당 건축안을 결의 하고 그해 9월 5일, 250평의 새 교회당을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이때 주기철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이 교회는 일본 우상에 대항하여 절대로 신사참배를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당시 일제는 교회당 안에 일본 국기(國旗)를 달게 하였고 일본 귀신이 들어 있는 가미다나(神棚)를 벽에 걸도록 강요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이 강단에 어떠한 간판도 달지 못하며 못자국 하나도 낼 수 없다고 교회당의 절대 신성(神聖)을 강조하였다.
1938년 2월 8일, 산정현교회 헌당식(獻堂式)이 거행된지 얼마 후에 주목사는 경찰에 검거(檢擧)되었다.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고 이에 흥분한 평양신학교 학생 한 명이 평북노회장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여기에 관련시켜 주기철 목사를 검거한 것이었다. 주목사는 얼마 후 석방되기는 하였다.
바로 이때에 이인재는 평양으로 이사를 갔고 평양신학교를 입학하게 되어 주일마다 산정현 교회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설교는 이인재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로 작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사참배의 문제는 점차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산정현 교회에서 주기철 목사의 설교는 신사참배는 어떠한 경우에도 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인재는 예배 후에 주목사를 만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목사는 젊은 전도사인 인재에게 신사참배와 왜 잘못된 것인가에 대해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2.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일제의 36년간 식민지배가운데 신사참배 강요는 그들이 한국교회를 괴롭혀온 마지막 수단이었고 가장 견디기 어려운 박해였다. 1935년, 11월 14일, 당시 평안남도 도지사였던 야스다께는 자신의 집무실에 평남도내 각급 공, 사립학교는 물론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교장도 참석하는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 자리에서 도지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평양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60일간의 유예기간을 주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이 소용돌이 속에서 대다수의 학교들이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평남도지사를 찾아가 신사참배할 뜻을 전했다. 종교단체들도 마찬가지 였다. 안식교를 비롯해서 대다수 종교단체들과 일부 기독교 교단들도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이에 굴복했었다. 천주교도 1936년 5월 25일 교황 비오(Pius) 12세가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이를 용허한다고 밝힘으로, 이를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국 기독교 교파가운데서 최대 교파였던 장로교회는 이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였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1938년 2월 아래와 같은 시정 방침을 전 한국교회에 시달했다.
1. 시국 인식의 철저를 위해 기독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여 지도 계몽에 힘쓸 것.
2. 시국인식의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시설.
1) 교회당내 국기 게양탑을 건설할 것.
2) 기독교의 국기 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 서사 제창을 실시할 것.
3) 서력연호의 사용을 삼갈 것.3. 찬송가, 기도문, 설교에 있어서 내용이 불온한 것을 엄중 취체할 것.
4) 당국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신자는 법적 조치를 취할 것.5. 국체에 맞는 기독교의 신건설은 이를 적극 원조할 것.
이와 같은 시정방침이 시달되자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피난처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오라 는 찬송을 위시해서 몇몇 찬송가사에는 먹칠을 해서 부르지 않았고, 교회 마당에는 국기 게양대를 세우는가 하면,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하는 한편 심지어 예배당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완강히 반대하는 자는 한국내 최대 교파인 장로교였다. 일제는 이를 미리 짐작하고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다.
즉 1938년 9월에 있을 총회를 대비하여 각 노회별로 신사참배 결정을 적극 강요한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했다. 당시 경남노회장은 함태영목사였고 경남노회에서 이 거부안이 통과되자 당시 부산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집요한 공작으로 1938년 9월 총회 전에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에서는 신사참배 찬성을 가결시켰고, 같은 해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당에서 개최된 제27차 조선장로교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수백 일본 경찰의 위압 하에 떨리는 목소리로 가(可)만 묻고 부(不)는 묻지도 않은 채 신사참배 만장일치를 가결해 선언을 하고 말았다. 1938년 9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 안이 가결되자 주기철목사와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본격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교회가 패쇄되고 순교를 당하면서까지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3. 평양신학교의 폐교
참으로 힘들게 평양으로 이사와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했던 이인재는 밀양에서와 똑같은 신사참배반대로 인해 1학기 수업만 받고 2학기 수업에는 아예 참여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얼마나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던가? 공무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평양으로 왔는데 더 큰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된 이인재는 이제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아주 중요한 시대적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인재가 입학을 하게 된 평양신학교는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교였다. 이 학교는 1901년에 개교해서 1907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1938년 9월 20일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그만 폐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인재는 평양신학교의 마지막 배를 탄 셈이었다.
1938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명령 시달에 평양신학교 내에서도 교수와 교수, 학생과 학생 사이에 부단한 논란이 있었다. 학생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하며 논의를 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은 라부열 박사(Slacy L. Robert, 1881~1946) 였다. 초대 교장이었던 마포 삼열 박사에 이어 1925년 10월 1일에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라부열 교장은 당당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일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들 중에는 더러 요동(搖動)이 있었다. 몇 분의 교수들은 신사 참배 문제를 크게 생각지 않았다.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교수들이 있었다. 교수들의 확고한 태도가 보이지 않을 때 학생들은 흔들렸다.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1938년 여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종강 일이 다가옴에 따라 신사참배 문제는 더욱 강하게 부각되어 졌다. 이미 지난 봄 노회 때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사나 장로들이 총대로 뽑히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주기철 목사도 예비 검속이 되어 총대가 되지 않았다.1938년 9월 총회시에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여져 가결될 것이란 소문도 돌고 있었다. 만일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어지면 평양신학교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검속 되기 전 어느 날 학생 기도회 시간에 설교를 한 일이 있다. 그 때 주기철 목사는 학생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였다. 신학생 여러분, 앞으로 큰 시련이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 그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베드로와 같이 말만으로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고 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학생 여러분은 산 속으로 들어가든지 바닷가로 나가든지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능력받지 않으면 실패합니다.시국이 험악해지자 학생들은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기억하였다.
이인재도 주목사의 말씀이 하나님의 예언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1학기 종강이 되었다. 종강 예배시간에 라부열 교장은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를 읽고서 강하게 설교하였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결단코 흔들리지 말고 넘어지지 않도록 하세요. 우리 학교는 신사참배를 하면서까지 학교문을 열지 않습니다.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가결하여 신사참배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학교는 문을 닫습니다. 신사참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히 문을 열지 않습니다. 학기말 시험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마음은 불안하였다.
이인재는 학우들의 후원으로 경남 함양군 휴천면에 개척교회를 세울 사명을 뛰고 내려왔다. 경남 함양군 휴천면에 두 달간 머물면서 이인재는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리고 개척교회 기초를 닦아놓은 후에 고향인 밀양 상남면으로 돌아왔다. 그때 당시 밀양마산교회는 교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인재는 고향교회인 마산교회에 전도사로 시무 하게 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그해 9월 9일부터 평양성문 밖 교회당에서 모이게 된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하도록 가결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이 일로 인하여 문을 닫게 되었고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이인재는 교회 일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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