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3월 다시 경남지방으로...다시 평양으로 (10)

321, 봄이 오고 있었다. 혹독하게 춥던 그해 겨울의 두꺼운 껍질들도 함께 벗겨져가고 있었다.

  선지자선교회

이인재 전도사는 다시 밀양으로 내려갔다. 상남면 마산리로 가서 한상동 목사를 만났다. 이날 밤 이인재는 한목사에게 만주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황을 보고 하였다.

만주에서는 한부선(韓富善, 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반대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일들의 근황에 대해 들려주었고, 특히 신사참배 반대 이유서를 인쇄하여 배포하며 신사 참배 반대운동을 펼치는 일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하였다. 한편 평양에서는 주로 산정현 교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진행 중이라는 것, 그리고 평양에 거주하고 있던 함일돈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운동 기금으로 일백원을 주었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 돈 일백원을 한목사 앞에 내어 놓았다.

 

한상동 목사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인재 전도사를 칭찬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님,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 운동자금이 생겼으니 경남지방 운동을 다시 합시다.

323, 이인재 전도사는 한목사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좌천정(좌천동)에 살고 있는 호주선교부 여 선교사 허대시(許大是, D. Hocking)를 방문하였다. 북쪽지방과 만주 등지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경남에서의 반대운동 방법을 설명하였다.

324, 영주정(영주동)에 거주하는 손명복 전도사를 찾아갔다. 손명복 전도사(孫明福, 경남 마산 태생,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 1973년 고신총회장 역임)는 산리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이인재는 손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함께 운동할 것을 동의 받았다.

325, 영국인 태매시(太邁是, 원래 이름은 테이트이다. 호주장로회 소속 선교사이며 한국명은 태매시이며 지트 혹은 지도라고도 불리웠다) 선교사를 방문하였다. 이곳에는 최덕지 전도사와 함께 여성으로 신사불참배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던 김묘년(金妙年), 박경애(朴敬愛) 등도 와 있었다. 여기서 이들은 비밀히 기도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인재 전도사는 힘써 동지들이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이 민족을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에 대해 강조하였다.

 

우리들이 일치단결해서 하나가 되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치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의 파수꾼이 되어 싸웠던 것처럼 우리도 조선의 파순꾼이 되어 이 어려운 때 우상숭배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키나갑시다. 그럴려면 우리의 믿음을 신실하게 고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신자로서의 책임을 다합시다.

327,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진주로 갔다. 봉래정(봉래동)에 사는 황성호(黃聖浩, 27, 황원택의 아우) 전도사의 집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이현속 전도사와 주남선 목사(朱南善, 1888.9.14~1951.3.23, 58, 경남 거창 태생, 거창에서 목회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함)를 만났다. 그리고 함께 기도회를 가지고 서로 격려하였다. 주님선 목사가 거창 경찰서에서 당한 고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향후 어떠한 탄압과 핍박을 받더라도 믿음으로 맞서 싸워 신사 참배반대운동을 펼쳐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함께 서덕기 선교사(J.M. Stuckey, 徐德基. 진주 봉래정에 거주하고 있었음, 지난 194012,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와 이미 한차례 만난 적이 있음)의 집을 방문하였다. 앞으로 펼쳐나갈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활동방향에 대하여 서덕기 선교사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328, 황성호의 집에서 주남선 목사와 작별하였다. 이때 이인재 전도사는 주남선 목사에게 40원을 신사참배 반대운동 자금으로 건네주었다. 그리고 진부 봉래정 배돈병원 부근의 노상에서 최덕지 전도사 (崔德支, 이미 11, 이인재 전도사, 한상동 목사와 이미 만난 적이 있음)를 만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자금으로 40원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는 함께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로 돌아와 한상동 목사의 자택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확산방안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이전도사님,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본인 측에서 볼 땐 반국가적 항일 운동으로 간주될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경남지방이나 평양지방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국적으로 실시하여야 합니다. 목적달성을 위하여 전국적인 조직망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지금 주기철 목사가 검속되어 유치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아마 몸이 쇠약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될 것 같습니다. 그때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의논함이 어떻겠습니까?

그것 좋은 생각이오

그럼 제가 평양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주기철 목사님이 석방되면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평남북 지방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에게도 연락하여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합시다.

좋아요. 그럼 꼭 연락하시오.

329, 이인재 전도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로 경남지방 동지들과 의견을 모은 후 한상동 목사와 작별하고 평양으로 올라갔다.

2. 또 다시 평양으로...

 

당시 밀양과 평양을 왕래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요즈음처럼 고속철도 K.T.X를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평양에서 서울까지, 서울에서 밀양으로... 그렇게 쉽게 오갈 수 있는 길이 결코 아니었다. 이인재 전도사의 여정은 갖가지 장애물을 피해가야 하는 그야말로 험난함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재 전도사는 사명감에 젖어 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또 다시 평양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평양 귀환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운동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420일과 21일의 회합(會合)이다. 이틀 동안 장소를 바꿔가며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모임을 가졌는데 채정민 목사, 최봉석 목사, 오윤선 전도사, 김인희 전도사, 김지성, 김의창 목사 등 기존의 평양의 지도자들 외에 만주지방에서 온 안동의 김형락과 봉천의 박의흠 전도사, 평북 선천의 김인희 전도사, 경남의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이들이 함께 한 것이었다. 평양과 평북, 경남과 만주 지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지휘하는 지도급 인사들의 회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틀간의 회합에서

1) 각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수감자 현황을 점검하고,

2) 향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특히 운동의 방향에 대해 421일 오후 이인재 전도사의 방(폐교(廢校)된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모인 참석자들은 신사불참배(神社不參拜) 교회급(敎會及) 신사불참배 노회(神社不參拜 老會) 재건(再建)을 기()하고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로 맹서(盟誓)하였다. 이 같은 결의를 이끌어내는 데 경남지방 대표인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420~21일 회합은 422일에 열릴 회합의 준비 모임 정도였다. 422. 평양 장별리 채정민 목사 사택에서는 가장 많은 13명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이 모임의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 바로 주기철 목사였다.

이들은 방금 석방된 주기철 목사를 위로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주기철 목사의 정확한 석방일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평양지방법원 예심종결서에 나타난 한상동 목사 조서에 동년(1940) 430일경 주기철의 석방의 보()를 듣고 내양(內壤)하여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1940420일 이전에 석방되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아마도 한상동 목사가 평양에 들른 것도 주기철 목사의 석방 소식을 듣고서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인재 전도사가 밀양을 떠나오기 전 주기철 목사가 가석방이 되면 연락을 주기로 했고, 이때 평남북 지도자들과 함께 활동하는 동지들의 회합을 약속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