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08
●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에 대한 일제 검속과 검찰 기소 (12)
1940년 5월 13일, 이인재 전도사는 폐교된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광주에서 올라온 강순명 목사와 만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평양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경찰서로 연행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이와 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일제의 검속은 9월 20일까지 전국에서 193명에 이르게 되었다.
1. 1940년 9월 20일, 일제의 검속
일본 경찰 당국은 1940년 9월 20일 실시한 일제 검속 에서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 혐의자 193명을 체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경찰의 연행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시간(長時間)에 걸쳐서 그리고 지역별로 시차(時差)를 두고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추론 할 수 있는 근거는 경찰측이 작성한 피의자 조서에 나타난 지도자들의 마지막 활약 시점이다. 피의자 조서에 의하면 채정민을 비롯한 평양 지도자들은 4월 22~24일 행적으로 끝나며, 이기선을 비롯한 평북의 지도자들은 5월 중순, 한상동을 비롯한 경남의 지도자들은 6월 말까지 활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평양의 오윤선 전도사의 경우엔 9월 11일 수안에 가서 설교한 상황까지 언급되고 있어 그는 다른 평양의 지도자들과는 별도로 9월 말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경찰 당국은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을 추적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래서 이 운동의 거점인 평양지역을 필두로 평북과 경남지역 운동 지도자들을 검거하였다. 즉 제일 먼저 1940년 5월에 채정민, 이인재, 이광록, 안이숙, 방계성, 김인희 등 평양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6월에는 이기선, 고흥봉, 김형락, 서정환, 장두희 등 평북지방에서 활동하던 지도자들을, 그리고 7월에는 한상동, 주남선, 최덕지, 이현속 등 경남지방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다만 손명복 목사만은 평양의 오윤선 전도사의 경우와 같이 9월초에 검속되었다.
경찰 당국은 조사과정에서 그동안 이들 지도자들과 접촉했던 교회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 대한 신상 정보를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전국에 퍼져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 조직망(network)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일제의 검속은 총독부 경무국과 법무국, 고등법원 검사국의 합동작전으로 추진되어 마침내 9월 20일 새벽,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에 대한 일제 검속을 단행하게 되었고 193명이 체포되었다. 물론 이 숫자는 이미 5월부터 검속된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을 포함한 숫자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일제의 검속은 비밀 작전으로 단행되었기에 일반인들은 사건 이틀 후, <매일신보(每日新報)>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검거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번 지나사변 이후 각 종교단체에서는 신앙보국(信仰報國)으로 총후(銃後)의 정성을 다해왔는데 최근 기독교의 일부 신자 중에는 이 비상시국에 용납 못할 불순한 행동과 반국책적인 결사를 조직하는 혐의가 있어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각도 경찰부를 동원시켜 전조선적으로 다수한 교역자(敎役者)들을 검거하고 취조를 개시하였다. 이 검거는 주로 장로교(長老敎) 계통의 교역자가 거의 전부인 모양인데 이십일 새벽 네 시를 기해서 일제히 검거를 착수한 것이며 한편으로 기사 게제를 금지하였던바 이제 이십일일 오후 별항과 같은 담화로서 이번 사건의 일단을 발표하였다. (<매일신보>, 1940.9.22)】
이어 <매일신보>는 총독부 경무국 명의로 발표된 담화문을 소개하여 총독부 기관지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하였다.
【최근 조선 야소교도중의 일부 불량분자가 비밀결사(秘密結社)를 결성하고 이것을 모체로 해서 전조선적으로 불온한 획책을 하였을 뿐 아니라 천황(天皇)과 황대신궁(皇大神宮)에 대하여 불경한 언동 혹은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造言蜚語) 총후국민(銃後國民)에 대한 반관(反官)과 반국가적(反國家的)인 기운을 만드는 등 악질적인 범죄를 감행한 것이 판명되었다. 그래서 시국하의 전시체제를 문란케 하는 이러한 비국민적 행동에 대해서는 총후치안확보를 생각해서 21일 전조선 일제히 검거를 단행한 것이다.
그러니 당국으로서는 이번 검거로 말미암아 종교의 선포(宣布), 기타 행위에 대하여 방해압박같은 것은 절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럼으로 야소교도들중의 불순한 분자를 일소함으로서 종래 조선에 특수한 경향하에 가져오던 야소교도로서 이번 일을 계기로 순화갱생(純化更生)하여써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을 새롭게 하고 종교보국으로 매진하기를 절실히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매일신보>, 1940.9.22)】
경무국의 담화문을 요약하면, 불량한 일부 기독교인들이 반국가적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천황 및 신궁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였을 뿐 아니라 군사(전쟁) 관련 유언비어를 퍼뜨림으로 전시 총후보국(銃後報國) 체제를 문란케 했다는 혐의로 전조선에 걸쳐 일제 검거를 단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기독교인 검거가 종교의 선포 행위에 대한 박해나 압박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이 사건이 종교박해 사건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일제 당국이 총독부 차원에서 이 사건을 다룬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반국자적인 비밀결사 조직으로 연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2. 1941년 5월 15일, 검찰의 기소
1940년 9월 20일 일제 검속으로 전국에서 193명을 체포한 후 각 지역 경찰서별로 혐의자를 8개월 동안 기소조차 하지 않은 채 조사하였다. 혐의가 가볍거나 신사 참배를 수용하겠다고 서약한 피의자들을 석방하고 1941년 5월 15일, 남은 86명의 피의자 명단과 함께 사건 자체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때부터 사건은 평양지검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지방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들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이것은 1938년 이후 평양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 거점이 되었던 관계로 각 지역별로 진행되던 조사를 평양으로 통합하여 단일사건, 즉 전국 단위의 비밀결사 조직 기도사건으로 처리하려는 경찰당국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그리하여 이기선 목사를 비롯한 고흥봉, 서정환, 장우희, 양대록, 김화준, 박신근 등 평북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1939년 영변에서 검속된 후 신의주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박관준 장로도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주남선, 최상림, 이현속, 조수옥 등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도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과 평북지역 지도자들과 함께 조사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자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전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다시 평양에 모이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 석방 위로를 겸하여 열렸던 1940년 4월 22일의 평양 채정민 목사 사택 회합 이후 15개월 만의 일이었다. 평양경찰서 유치장에서 주기철 목사를 다시 만난 한상동 목사의 증언이다.
『내가 부산에서 검속된 지 1개월이 지난 1941년 7월 10일에 평양으로 옮겨 갔다. 평양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주님의 은혜로 뜻하지 않게 지금은 (1953년) 순교하시고 안 계신 주기철 목사님이 갇혀 계신 방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나는 너무도 반가왔다.
나는 그 방을 참으로 잊을 수 없다. 주 목사님과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했다. 주 목사님과는 마지막 말씀할 기회라 생각하고 이미 나는 각오하고 있었다. 연로하신 어머님을 두고 나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시고 다음은 말씀하시지 못하였다. 간수가 주 목사님 말씀 다 했지요 하고 방해하였다. 부산과 다름없는 평양 간수였다. 그러자 주 목사님은 눈물에 잠기어 침묵하셨다.』
검찰 조사가 진행되면서 피의자들은 경찰서에서 형무소로 옮겨졌다. 8월 25일 평양시내 여러 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피의자들이 평양형무소로 이감된 것이다. 주기철 목사도 이 때 서성리 창광산 아래 있는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전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들의 관심은 가장 오랜 기간,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킴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부각된 주기철 목사에게 쏠려 있었다. 한상동 목사와 함께 경남지역 반대운동을 이끌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주남선 목사의 증언이다.
『1941년 8월 25일 갑자기 우리 일행을 불러내어 형무소로 데리고 갔다. 문 앞의 차에서 나섰을 때 최상림 목사가 주기철 목사를 향해보고, 주 목사는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하여 그 말을 듣고 서로 밝은 기쁨이 충만하였다. 다시 나오지 못할 옥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교자의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하였던 것이다.』
평양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1년 가까이 주기철 목사와 무언의 손가락 대화를 나누었던 안이숙도 같은 내용을 증언하였다.
『사무실에는 성도들이 모두 제각기 소지품을 간수에게 맡기고 자기의 이름을 대신할 번호표를 받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자세히 보았다. 주 목사의 조각상같이 희고 아름다운 얼굴, 안질로 인한 빨간 눈에는 눈꼽이 아직도 끼었었다. 나는 쏟아질 듯한 설움을 꾹 참고 절을 했다. 그도 절을 하고 미소를 띠었다.』
이로써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혐의로 기독교인들이 구속되어 고난 당한 예가 없지 않았지만 수감자의 규모(68명)나 혐의 내용(비밀결사 조직음모)에서 평양형무소 수준을 따르지 못하였다.
평양이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듯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한국 교회 수난의 대표적 현장이 되었다.
(매일신보)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한국어 일간신문이다. 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 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통합, 《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이 집권하여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하였다.
(지나사변)
1937년 7월부터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국토에 전개된 중일전쟁(中日戰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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