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12
● 평양 종로경찰서 유치장 생활 (13)
1. 이인재 전도사의 체포와 유치장 감금
1940년 5월 13일, 이인재 전도사는 폐교된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평양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두 사람에게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이 때 이인재를 체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유부장으로 이미 이인재와는 낯이 많이 익은 고등계 형사부장이었다. 당시 종로경찰서에는 사상범들을 잡아들이는데 활동하는 고등계 형사가 40명, 일반 잡범들을 잡는데 뛰는 형사가 40명, 도합 80여명의 형사가 있었다. 고등계 형사가 나타났다 하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부들부들 떨 정도로 그 기세는 대단했다. 그런 때에 이인재를 체포하기 위해 형사 부장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유 부장은 이인재를 보자 대뜸 손에 포승을 지웠다. 그리고 곧바로 평양 종로경찰서로 연행해갔다.
그 날, 오후 3시가 지나서 유부장은 이인재를 불러냈다. 3층 고등계 형사실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이인재가 형사실에 들어서자 유부장은 느닷없이 뺨을 갈겼다.
이 미친놈!
눈앞에 불길이 튀었다. 구둣발로 아래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형사실에서 흔히 있는 취조의 시작이었다. 이인재는 유부장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흥미가 있었다. 이 미친 놈!
이 말에 이인재는 조용히 대답했다.
여보시오 형사부장 나으리, 내가 참으로 미쳤으면 좋겠소!
이인재의 뜻밖의 말에 유부장은 발길질을 멈추고 빤히 바라보며 반문하였다.
뭐라구? 미쳤으며 좋겠다구?
그래요. 내가 우리 예수님으로 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미치지 못하여 한(恨)이 될 뿐이요.
그 말에 유부장은 어이가 없는 듯 빤히 이인재를 바라보다가 자기 자리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정말 미쳤군! 완전히 돌아버린 거야!
유부장은 책상 위에 종이를 펴고 펜을 잡았다. 취조문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순간 이인재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부장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미친 놈! 그렇다. 그 말이 이인재 자신에게 맞는 말일런지 모른다. 세상 사람이 볼때는 완전히 미친 일임이 분명하다. 순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면 서기 시절, 자신이 몸담고 있던 면사무소에서 13년동안 근면하고 착실하게 일했다. 집에서 면사무소까지 십오리 길이지만 하루도 결근한 일이 없었다. 밀양 상남면사무소의 민형식 면장 뿐 아니라 모든 직원 심지어 면 산하 모든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다. 심지어 면장으로 추대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를 마다하고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큰 딸 정희와 자신의 동생 이희재를 밀양공립학교인 상남초등학교에서 퇴학시키고 평양으로 데려왔다. 모범생으로 학교에서 칭찬 받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빈민학원에 넣었다.
일본 경찰들과 맞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고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비밀리 학생들을 모으고 교수들을 찾아다닌 일들, 이런 모든 것들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편에서 볼 때는 미친 놈의 짓인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취한 행동이나 생활자체는 하나님의 역사로 되어진 것이 아닌가?
이인재는 유부장의 말에 오히려 희열(喜悅)을 느꼈다. 성령님이 이인재의 마음속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육신은 이제 매인 몸이 되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는 종달새처럼 한없이 자유롭고 기뻤다. 유부장은 묻기 시작하였다. 본적, 주소, 성명, 학력, 그리고는 신사참배 불참의 동기와 이유, 반대운동을 하러 다닌 배경과 행로 등등.
이인재는 유부장이 묻는 것에 하나 숨김없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되니 유부장도 평온을 찾은 듯 조용조용 얘기하기 시작했다.
취조가 끝나자 그를 지하 유치장 3호 감방에 구금시켰다. 유치장 신세를 지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다른 죄를 지어서가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구금(拘禁)된 되었기에 그의 마음은 평온(平溫)하였다.
2. 유치장 3호 감방
유치장은 지하였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낮인지 밤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이인재는 잡혀올 때 입고 있던 춘추복 양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여섯 평 정도의 작은 방에 잡범(雜犯)들 20명 정도와 함께 기거(寄居)하였다.
유치장 감방은 복도를 중간에 두고 좌우에 같은 크기의 방이 이어져 있었다. 감방이 10개 정도였다.
오후 5시가 되니 저녁식사가 나왔다. 낡은 백철 도시락 그릇에 콩과 좁쌀로 된 잡곡밥이 조금 담겨있었다.
감방에 새 죄수가 들어와서 반가운 이들은 앞서 들어와 있던 죄수들이었다. 그 이유는 처음 들어온 죄수들은 유치장 식사에 길들여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 동안은 그 밥을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못 먹고 밀어내면 서로 나누어 먹는 재미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은 처음 끌려온 죄수들은 자신이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분함과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유치장 밥은 더욱 더 먹기가 힘들다.
이인재 전도사가 들어 왔을 때도 앞서 자리한 죄수들의 기대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인재는 첫날 저녁에 들어온 밥을 한술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는 자신의 형편을 살펴볼 때 빨리 나갈 수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장기간 갇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하여야만 했고 건강을 위하여는 맛이 있든지 없든지 주는 음식을 먹어 두어야만 했다.
그러니 앞서 유치장에 들어온 죄수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기들 몫 외의 밥을 한 술 더 먹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는데 그것이 완전히 무산되어 버린 것이었다.
3. 취조관들
몇 차례 불려나가 취조를 받았다. 이인재가 그 동안 쓴 일기장이 그들의 손에 있었고 일기장을 세밀히 검토하여 그 내용들을 물었다. 일기장에는 누구를 만나고 어디서 무슨 설교를 어떻게 하였는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인재에 대하여 별로 조사할 것이 없었다. 일기장에 기록된 것을 재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평안남도 경찰국 구가경부는 일기장을 다 검토하고 이인재에게 말하였다.
여기 기록된 설교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목적으로 작성된 설교가 아닌가?
목적을 그 한 가지에만 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순수한 목적은 복음을 바로 전하는데 있습니다. 진리를 바르게 증거 하려고 하다 보니 신사참배를 자연히 반대할 수밖에요.
순전히 신사참배 반대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설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되면 그렇게 인정하십시요. 그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구가경부와 둘러 선 취조관들이 기탄없이 말하는 이인재 전도사를 보면서 사뭇 놀라는 기색이었다.
구가경부는 평안남도 경찰국 고급관리였다. 그는 지금 검찰국에 조서를 넘기기 위하여 이인재와 대질 심문을 하는 중이었다.
예수가 재림을 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십니다.
무엇하러 오는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 때는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럼 대 일본 제국의 천황폐하께서도 해당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만!
구가경부는 이인재의 입을 막았다. 구가경부가 그의 담대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묻지 않겠어. 그만 가보시오.
이인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는데 옆에 서 있던 취조관들이 속삭였다.
이인재는 주기철처럼 외유내강(外柔內剛)이야.
4. 원수를 친구처럼
성령님께서 강하게 이인재 전도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았다.
취조를 받을 때마다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있었음을 자신도 알았고 취조관들까지 이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취조를 받고 돌아오면서 이인재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였다.
처음 들어오던 날, 그의 뺨을 때리고 발길질 한 유부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이인재가 미워 그런 것이 아니고 고등계 형사부장의 체면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선 사람으로 일본 상관들에게 잘 보여야 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인재의 마음속엔 일본 경찰이나 조선 형사들이나 모두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악역을 담당해야 하는 가여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가혹한 행위가 다 용서되었고 친구로 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특히 악명 높은 유부장까지도. 이런 마음이 생겨진 것은 이인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그가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5. 첫 면회
평양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지 3개월이 지났다. 그 때까지 면회는 일절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상부의 명령이었다.
1940년 8월 중순께 몹시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구니모도상 면회요!
간수의 외치는 말에 이인재는 귀를 의심하였다.
구니모도상 뭣해요, 나오지 않고.
간수 뒤에 유부장이 서 있었다. 이인재는 유부장의 지시에 따라 유치장에서 나왔다. 지하에서 지상 3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밟고 올라갈 때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렸다.
석 달 동안 유치장 안에서 콩과 좁쌀밥 만 한 웅큼씩 먹고 지냈기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었다.
피도 많이 부족하였고 게다가 햇빛을 전연 보지 못한 상태여서 얼굴과 수족이 창백하였다. 머리털은 길어 귀를 덮었고 여름이라 머리에서 이가 득실거렸다.
마실 물을 잘 주지 않아 목이 많이 탔다. 그 때마다 차라리 고문이라도 당하여 물을 좀 마실 수 있었으면 하기도 했다. 잡범들이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당할 때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먹인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목이 탔으면 물고문이 그립기까지 했을까?
지난 석 달 동안은 육체적으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힘이 아니었다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간신히 3층으로 올라왔다. 취조실이었다. 유부장이 면회 온 가족을 대면시켜 주었다.
사랑하는 부인이 와 있었다.
창백하고 여윈 이인재 전도사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부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 내렸다. 흐느끼는 것이었다.
울지 마시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여야지.
오히려 이인재가 부인을 위로하였다. 부인이 가지고 온 음식을 풀어 놓고 기도하였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소고기 국밥을 먹었다. 너무나 오래간만이었다.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으니 몸에 힘이 솟았다. 토마토를 먹었다. 붉은 토마토는 그대로 피가 되어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밝은 햇살이 거리에 깔려 있었다. 골고루 비추는 저 햇살도 유치장 안에서만은 누리지를 못한다. 인간사회에서 격리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평양 종로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간다. 저런 세계에 자신도 살았던가... 아득한 생각만 들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예수 따라가는 길이 이렇게도 험하고 좁은 것인가?
이인재는 생각을 추스르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많이 염려한 모습이었다.
부인,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마오. 그리고 아이들 잘 보살피시오.
집안 일은 염려 마시고, 당신이나 조심하시오.
다음 번에 올 때는 머리 빗을 하나 사 가지고 오시오. 참빗 말이오. 머리에 이가 득실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알았습니다. 다른 필요한 것은 없나요?
다른 것은 필요가 없어요. 유치장 규칙에 따라야 하니까요.
그렇게 첫 면회는 끝이 났다.
6. 두 번째 면회
첫 면회가 허락된 뒤부터 매주 한 번씩 면회가 가능해졌다.
일주일 후에 부인이 다시 면회를 왔다. 부인의 손에 참빗이 들려 있었다. 빗을 받아 머리를 빗는 이인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등계 형사과 차석, 사사기 경사가 입을 열었다.
흥, 이제 예수 다 되어 가는군!
빈정대는 말이었지만 듣기 싫지가 않았다.
머리가 길어 그 모습이 꼭 예수님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이인재는 겉모습만 예수님 같을 것이 아니라 마음도 예수님 같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하였다.
유치장 감방에 돌아온 이인재는 감방 안의 죄수들에게도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부인이 갖고 온 눈깔사탕 두 개씩이었다.
순식간에 감방 안은 명절날 분위기가 되었다. 죄수들 모두 기뻐하며 어린아이들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빗은 이인재 전도사에게만 해당이 되었다. 유치장에서 석 달 이상 있는 죄수는 별로 없었다. 그러니 머리빗이 그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니 깨알같은 이가 머리에서 툭툭 떨어졌다.
이인재는 머리를 빗고 이를 잡으면서 부인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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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검찰의 기소와 평양형무소 시절 (16) | 선지자 | 2016.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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