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14
● 가족들의 수난 (14)
1. 이인재의 부인: 신을라(申乙羅)
이인재 전도사의 부인인 신을라는 1909년 1월 9일 조선조 때 양반 가문이었던 평산신씨(平山申氏) 신덕균(申德均)과 백전이씨 이재순(李才順)사이에서 1남 3녀중 3녀로 출생했다. 하지만 조선조의 멸망과 더불어 가문도 몰락하게 되어 신씨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다가 1916년, 청년 이인재를 만나 첫 눈에 반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신을라(申乙羅)란 호적명의 취득 사연은 이렇다. 신씨가 출생한 후 모친이 그를 업고서 출생신고를 하러 면사무소에 갔는데, 아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호적 담당 면서기의 물음에 얼라(어린애)라고 한 것이 을라(乙羅)로 호적에 등재되어 버린 것이다. 부인 신씨가 그 이름을 몹시 싫어하는 탓에 결혼 후 이인재는 그 이름을 신상이(申相伊)로 개명(改名)해 주었다.
2. 가족들의 고생
1938년, 이인재는 13년간 몸담고 있던 면사무소 면서기직을 사임(辭任)하였다. 그는 면민들 뿐 만 아니라 상사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공무원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평양으로 떠난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학문탐구의 길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가족들의 고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타향살이의 설움, 가난과의 싸움,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수감생활...
1939년 가을, 이인재는 장녀 이정희(李廷喜)와 장남 이정빈(李廷彬)과 함께 먼저 평양으로 떠났다. 이인재는 평양신학교 교수들에게서 개인 교수를 받기 위해(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 됨), 그리고 큰딸 이정희(초등 4학년)와 아들 이정빈(초등학교 1학년)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학교가 평양에 있다 해서 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먼저 평양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 후 며칠이 지난 후에 부인 신을라와 둘째 이정옥(李秀玉)이 뒤따라 평양으로 오게 되었다.
딸 이정희와 아들 이정빈은 대동학원(大同學院)에 입학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합동 수업을 하는데 교장겸 교사 1명이 모든 것을 담당했다. 그런데 글은 가르치지 않고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기가 일쑤여서 채 한 달도 채우지 못해 누나 이정희의 의견에 따라 이정희, 이정빈 모두 대동학원을 그만 두게 되었다. ?
1940년 5월 13일, 이인재가 고등계 형사 두 명에게 연행되어 갈 때 그는 가족들에게 "걱정 말라"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평양 종로 경찰서로 연행, 수감되었다. 이때부터 이인재의 가족들은 계속 형사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형사들이 밤중에 가족들의 임시거처에 찾아와(폐교된 평양신학교 기숙사) 방 창문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부인 신을라가 보고서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른 적이 있었다. 그 소리에 방에서 잠자던 3남매도 놀라 소스라지게 되었다. 이때 아이들이 떨고 있는 것을 본 일본 형사는 방안으로 들어와 "내니 두려워 말라. 내가 예수다"라면서 빈정대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가족들도 차차 감시당하는 일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이인재가 평양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고 면회가 허락된 이후로 부인은 꼭 한 주에 한번씩?면회를 하러 왔다. 이인재는 부인과 만나면서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또 그렇게 짧은 가을이 지나가 버리고 11월이 되면서 평양의 겨울은 시작되었다. 면회하러 오면서 가지고 오는 음식은 식지 않도록 솜옷에 싸여서 전하여졌다.
이인재는 부인의 면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도 부인이 면회 올 날인데 종일 기다려도 부인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그날 밤 11시경, 포승에 묶인 채 고문실로 끌려가는 그의 눈에 울고 있는 3남매의 모습이 들어왔다. 정희, 정빈, 정옥이었다. 형사는 아이들에게 말하였다.
이 개새끼가 너희 애비냐?
형사들은 이인재의 뺨을 치면서 아이들 옆을 지나쳐 그를 끌고 가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는 이인재이지만 분명 큰일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부인이 면회를 왔다.
어찌된 일이오? 왜 오늘에야 면회를 오는 거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인의 말은 이러하였다.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를 어느 권찰 집에서 드리게 되었다.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공식예배와 모임을 일제 당국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주일이나 수요일 저녁도 집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도 이인재의 부인 신을라는 그 권찰집에서 산정현 교인들 몇과 함께 수요일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형사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형사들은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을 모두 이 종로경찰서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추운 취조실에서 지내게 한 것이다.
한편, 도대체 예배를 드리러 갔던 모친은 돌아오지 않고 그 와중에 모친을 비롯하여 몇 사람들이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딸 이정희(당시 열한살)와 아들 이정빈(당시 여덟살)은 동생 이정옥을 업고서 그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평소 동생 이정옥이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부친의 면회를 다녔기 때문에 네 살 밖이 어린애였지만 경찰서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이정옥의 길 안내를 따라 종로 경찰서에 도착한 세 남매는 거기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 내어 보내 주세요.
1시간가량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다가 형사 1명이 울고 있는 3 남매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너희들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느냐?
큰 딸 이정희가 말했다.
우리도 신사참배를 안한다
그러자 형사가 이정희의 얼굴을 수도 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함께 종로경찰서로 갔던 남매들은 더 크게 울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 형사 2명이 나타나 일본말로 자기네들끼리 말하였다.
이들 3남매는 평양에 연고자가 없으니 고아원으로 보내자.
이들이 말하는 것을 큰 딸 이정희가 알아듣고서 동생들에게 더 크게 울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동생들은 더 크게 악을 써가며 울었다.
그런 중에 형사에게 묶인 채 끌려나오는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날은 그야말로 이인재 가족의 수난의 절정이었다.
새벽에 이인재의 자녀들은(삼남매) 집으로 돌아 왔고 너무 고단하여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는데 어머니가 옆에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일본법에는 24시간 내 석방을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아이들이 경찰서로 찾아가서 밤새워 운 것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부인은 이인재에게 이와 같은 일들 때문에 지정된 날 면회하러 오지 못하였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만으로도 심히 힘겨운 그의 부인이었다.
3. 큰 딸 이정희의 편지
이인재가 유치장에 갇혀있는 동안 아이들은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직접 대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큰 딸 정희는 종종 어머니 편에 편지를 보냈다.
겨우 열한 살이었다. 소학교를 정규적으로 다녔다면 4학년이었다. 그러나 신사참배 때문에 정규적인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런 딸이었지만 아버지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버지를 격려하고 힘을 돋게 하는 내용의 글을 편지로 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 집안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신앙으로 이기세요. 우리는 매일 아침, 저녁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용기를 주는 편지였고 그 끝에는 언제나 요한 계시록 2장 10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네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인재 전도사는 딸 정희의 편지를 받았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감격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4. 밀양으로의 귀향
이인재의 가족 중 아이들(3남매)은 그 후 평양 생활을 접고 다시 밀양 마산리로 내려 왔고 부인 신을라는 옥중 수발을 위해 평양에 남았다. 하지만 부인도 셋째 딸 수자(秀子)를 해산하게 되어 더 이상 평양에서 견디기가 힘들게 되었다. 또 이인재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기 때문에 부인 역시 다시 밀양 마산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셋째 딸 수자를 병으로 잃게 된다.
이인재의 부인 신을라는 믿음과 덕을 갖춘 여인이어서 사람들에게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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