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15
● 검찰의 기소와 평양형무소 시절 (16)
1. 검찰의 기소
1940년 9월 20일 일제 검속으로 전국에서 193명을 체포한 후 각 지역 경찰서별로 혐의자를 8개월 동안 기소조차 하지 않고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에 따라 혐의가 가볍거나 신사참배를 수용하겠다고 서약한 피의자들은 석방하고 나머지 68명의 피의자는 1941년 5월 15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때부터 사건은 평양 지검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지방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들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이것은 1938년 이후 평양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 거점이 되었던 관계로 각 지역별로 진행되던 조사를 평양으로 통합하여 단일 사건, 즉 전국 단위의 비밀결사 조직 기도사건으로 처리하려는 경찰 당국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이리하여 이기선 목사를 비롯한 고흥봉, 서정환, 장두희, 양대록, 김화준, 박신근 등 평북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1939년 영변에서 검속된 후 신의주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박관준 장로도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주남선, 최상림, 이현속, 주수옥 등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도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과 평북지역 지도자들과 함께 조사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자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전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평양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 석방 위로를 겸하여 열렸던 1940년 4월 22일의 평양 채정민 목사의 사택 회합 이후 15개월만의 일이었다.
검찰조사가 진행되면서 피의자들은 경찰서에서 형무소로 옮겨졌다. 8월 25일, 평양시내 여러 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피의자들이 평양형무소로 이감(移監)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가들이 다시 한번 전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2.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던 날
평양이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듯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한국 교회 수난의 대표적 현장이 되었다.
1941년 8월 25일, 처서(處暑)가 지났는데도 아직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간간이 불러오는 바람에도 더위 기운이 가득했다. 평양 종로경찰서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평양형무소로 이감(移監)된다는 소식이 아침부터 들려왔다. 감방에 있던 신사참배반대운동가들의 마음이 설레었다.
더운 날씨지만 잠시라도 거리를 걸을 수 있고 지하의 답답한 곳을 벗어나 넓은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였지만 햇볕을 한몸 가득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리고 잠시만이라도 보고픈 하나님의 종들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있겠기에 이감(移監)되는 시간만 기다려졌다.
한 나절이 지나서야 종로경찰서 마당에 그동안 평양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 주남선 목사, 최봉석 목사, 한상동 목사, 방계성 장로, 이광록 집사, 조수옥 전도사 등 참으로 반가운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함부로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포승줄에 묶인 채 일본 순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걸어가기를 원했다. 다리 운동도 해야 했고 마음껏 햇빛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 순사가 말하였다.
평양형무소까지 택시로 가야하니까 택시비는 당신들이 내시오.
이게 무슨 말인가?
주기철 목사가 항의하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지하 유치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햇빛이 그립습니다. 오늘은 걸어서 가게 해주시오.
그러나 일본 순사는 엉뚱한 말을 하였다. 마치 그들을 위하는 것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모두 목사들인데 어찌 포승줄에 묶인 채 길을 걷는단 말이오. 창피하지 않겠소? 부끄러울 터이니 택시를 타고 가도록 합시다.
그때 주기철 목사가 말하였다.
우리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인입니까?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 순사들은 막무가내 택시를 네 대나 불렀다. 그리고 타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네 대의 택시에 각각 나눠 탔다. 택시는 평양 시내로 들어갔고, 평양 형무소가 있는 서쪽으로 향하여 거침없이 달렸다. 평양 형무소 철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택시에서 내리니 순사들이 말했다.
택시비를 내시오.
아니 여지껏 경찰서 유치장 안에 갇혀 지내던 사람이 무슨 돈이 있다고 택시 값을 내라는 것인가? 정말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부인이 면회를 와서 필요할 때 쓰라고 준 돈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생각해냈다.
택시 한 대에 1원씩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4원을 내어 각각 택시 운전사들에게 주었다. 돈을 건네주면서 이인재 전도사는 무척 기뻤다.
하나님의 종들을 위하여 요긴하게 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를 많이 즐겁게 하였다. 그 즐거움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것이었다.
평양 형무소 철문이 육중하게 버티고 있었다. 문이 열려져 있었다. 이들을 환영한다는 의미 같아 보였다.
이인재 전도사가 앞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소!
여성의 소리였다. 이인재 전도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안이숙 선생님!
이 전도사님 많이 고생하셨어요.
정말 반갑습니다. 여기서 만나다니...
이제 들어가면 영영 나올 수 없는 감옥소가 되지 않을 런지...
... ...
일행들은 형무소의 넓은 뜰을 걸어서 사무실 쪽으로 갔다. 형무소 사무실 옆에 옷을 갈아입는 방이 있었다. 그 곳으로 안내되었다.
수인복(囚人服)은 푸른색이었다. 모두는 사복(私服)을 벗고 푸른색 수인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인복에는 각각 번호표가 붙었다. 죄수복은 때가 묻고 더러웠다. 세탁을 하지 않은지 오래된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입고 있다 벗어 놓고 나간 옷을 세탁도 하지 않고 그냥 나누어 주는 듯했다.
이때 권능(權能)이란 별명이 붙은 최봉석 목사가 소리쳤다.
예수님은 홍포(紅布)를 입으셨는데 우리는 청포(靑布)를 입는구나.
최봉석 목사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 있던 주남선 목사가 한 마디를 던졌다.
지금은 청포를 입지만 우리도 얼마 안가서 예수님처럼 홍포를 입게 되겠지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무소 안에서 미결수는 청포(靑袍)를 입지만 기결수가 되면 홍포(紅袍)를 입는 법이다. 멀지 않아 재판을 받게 될 것이고 형이 구형(求刑)될 것인데 그 형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는 국법(國法)을 어긴 것이 되고 따라서 대역죄(大逆罪)가 된다. 그들은 이 죄를 가볍게 볼 리가 없다. 치안 유지법 위반이요, 보안법 위반이니 불경죄에 해당되어 실형만 선고되면 무기형은 물론이요 사형까지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이 확정되기만 하면 홍포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이곳까지 온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은 두려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푸른 죄수복을 입으면서도 그들의 얼굴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한 그들이었기에 푸른 죄수복을 입으면서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세계의 사람들이기도 했다.
3. 입소 후 몇 달 동안
평양 형무소 내에는 40명에 가까운 목사, 장로, 전도사가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의 고난은 실로 극심하였다. 그중에서도 먹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하지만 이인재 전도사 일행이 평양 형무소에 입소한 후 몇 달 동안은 그야말로 지낼만한 형편이었다.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대접이 좋았다.
거의 매일 사식(私食)이 들어왔다. 이 사식은 옥문 밖 숨은 기독교 신도들의 성의(誠意)로 들어와지는 것이었다.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金次淑) 여사가 돈을 모아 공동으로 사식을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감되어 있는 신사참배반대운동가 모두에게 공급되었다.
사식은 형무소 내 식당을 통해 나왔다. 밥은 팥이 섞인 쌀밥이었다. 붉으스레한 밥에 채소 반찬, 소고기 부침, 돼지고기 부침 등 그 당시로는 가정에서도 먹기 어려운 음식들이 전하여졌다.
감옥 안이었지만 그 어느 부자 부럽지 않은 생활이었다.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여사는 자녀가 없고 오직 한사람 남편뿐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자 옥문 밖에서 뒷바라지 하는 것이 그의 생활 전부였다.
그녀가 평양형무소 밖 담벽 밑에 앉아있으면 평양성 안의 숨은 기독신도들이 무엇인가를 전하여 주었다. 쌀이며 돈이며 옥중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이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40명 가까운 옥중 성도들의 사식을 마련하여 차입을 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만주에서 트럭 운전을 하고 있는 이경석씨(1908년 8월 8일~1990년 4월 8일)를 통하여 돈이 전달되기도 하였다. 이경석 씨는 해방 후에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고 후에 부산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이사장을 지낸 바 있는 옥문 밖의 신실한 봉사자였다. 그는 당시 만주에서 트럭 운전을 하며 모은 돈의 일부를 만주에서 평양으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여사의 역할은 전국교회 숨은 기독신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무엇이든 있는 대로 김차숙 여사에게 건네졌고 김차숙 여사는 그것으로 매일처럼 사식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 때는 한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다. 감옥 안이 덥기 때문에 시원한 모시옷이 필요하였다. 이 모시옷도 김차숙 여사의 손을 통하여 들어왔다.
다른 죄수들은 생각도 못하는 모시옷을 입고 옥문 안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4. 고달픈 감방생활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잠깐이었다. 이후 감방 생활은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특히 식사가 말이 아니었다. 처음 몇 달은 사식이 들어 왔지만 그것도 중단되었다.
당국에서 금하였다.
전쟁터에서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호사(豪奢)스럽게 사식이라니?
그 후 콩밥은 콩깨묵 밥이 되었다. 그것도 콩기름을 짠 콩찌꺼기 밥이었다.
어느 날은 썩은 콩찌꺼기 밥이 들어와 감옥 안에 소동이 벌어졌다.
콩 찌꺼기 밥에서 황냄새가 지독하게 난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모두가 배탈이 났고 여러 사람이 회복되지 못하고 죽기도 하였다.
그리고 밤만 되면 빈대와의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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