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16
● 평양지방법원 예심회부 (18)
1. 예심 심문(豫審 審問)
신사참배반대운동가들에 대한 사건을 넘겨받은 평양지검에서는 피의자들에게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을 채 시간을 끌었다. 이는 경찰에서 이미 1년 넘게 조사한 관계로 사건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건을 조속히 종결짓기보다는 되도록 지연시켜서 가능한 한 피의자들을 형무소 안에 오래 구금시켜 놓으려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즉 정부당국의 종교 정책을 거부하는 반체제 저항 세력을 교회와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사회적 안정 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장기 투옥으로 인해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의 저항의지가 약화되기를 기대한 측면도 있었다. 형무소에 갇힌 피의자들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회유와 협박으로 일관되었다.
경찰에서 용의자 조사 기한 1년을 채우고 나서 검찰에 피의자를 넘긴 것처럼, 검찰에서도 1942년 5월 12일이 되어서야 68명의 피의자 중 35명을 예심재판에 회부하고 8명을 기소유예, 25명을 불기소 처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기소(起訴)하기 전 인신(人身)을 구속할 수 있는 최고 법적 기한인 1년을 꼭 채운 것이다. 사건을 넘겨받은 평양지방법원도 느리게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재판부에서는 기소된 35명의 피의자를 공식 공판에 회부하기 전 예심법원에 넘겼다. 이때부터 피의자들은 길고 긴 예심 재판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예심 종결이 끝나고 정식으로 평양지방법원 공판에 회부하기로 결정된 것이 1945년 8월 15일이었으니, 피의자들을 무려 3년 동안이나 미결수 상태로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시켰던 것이다.
정식 재판에 넘기기 전 경찰이나 검사 조사 과정에서 작성된 혐의 사실과 이에 관한 증거들을 심사하여 억울한 피의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예심 제도를 재판 지연의 수단으로 삼은 셈이다. 재판 없이 피의자를 장기 구금(拘禁)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최대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는 합법(合法)을 가장한 불법(不法) 행위였다.
그리고 경찰이나 검사 조사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예심 과정에서도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것보다는 회유와 협박을 통한 신사참배 반대 의지를 꺾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 같은 의도는 기소된 지 4개월이 지난 1942년 9월에 처음으로 예심 심문을 받은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드러났다.
법정가서 예심 판사를 만났는데 대단히 친절히 대해 주며 왜 예수를 믿었느냐? 신앙의 동기 또는 신학한 동기 등을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 나라의 신(神)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였다. 물론 내가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하겠다는 성의가 있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국가를 위하여 힘써 달라는 말로 설유(說諭)하고 그 날 출옥시킬 예정이었다. 그리고 나도 출옥(出獄)하리라고 믿었다.1)
한상동 목사도 잠시 판사의 회유(懷柔)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입에서는 정작 다른 대답이 나왔다.
그러나 주께서 나의 마음을 주장하사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온천하가 깜깜하여 이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못하도록 나의 입을 막으시는 체험을 나만이 알 수 있었다. 검사는 다시 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생각해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검사는 목사로서 일본 국체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지 못하였다는 말을 너무도 뜻밖의 대답이라고 하면서 내가 능히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답할 말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20분가량 기다리다가는 검사는 화가 나서 오늘날 우리 일본 청년들이 누구를 위하여 전지(戰地)에 나가서 죽느냐? 하며 바가(바보)! 바가! 바가!하고 수 십 차례나 욕을 하였다.2)
다른 여러 피의자들도 이와 비슷한 회유와 협박의 예심 심문을 받았다. 1942년 9월의 예심은 이인재 전도사를 비롯한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에게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평양과 평북지역 지도자들에 대한 예심은 해를 넘겨 1943년 1월에 이루어졌다. 안이숙 여사는 그의 책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예심 재판정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재판소에는 판사가 높은 자리에 앉았고 검사가 그 옆 자리에 있고 서기들이 밑에서 필기 준비를 하고 큰 테이블 좌우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위엄을 차리고 나를 정죄해 보려고 노력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여서 마음속으로 웃음이 터질 듯한 것을 참고 예수인답게 자연스러운 태도로 지명해 주는 자리에 가서 서 있었다.3)
심문 내용은 한상동 목사의 경우처럼 경찰과 검찰의 조서를 바탕으로 신앙과 신사문제, 천황제도에 대한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대화는 주로 검사와 피의자 간에 논쟁으로 진행되었는데 회유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를 구분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심문이었다.
2. 순교의 해, 1944
거센 반역의 역사 흐름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양심으로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던 종교적 양심범, 이들이 수감된 감옥 안의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악화되었다. 전세(戰勢)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기울기 시작한 1944년 들어서서 형무소의 사정은 더욱더 그러했다.
건강했던 사람도 들어가면 병자가 되어 나온다는 평양형무소에서 2년 넘게 고문과 악형을 당하며 수감되어 있던 옥중 성도들도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그중에서도 평소 몸이 약했던 수감자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었다.
오래 전부터 결핵을 앓고 있던 한상동 목사는 그런 고통을 이렇게 증언했다.
나의 폐병은 날로 위독하여 형무소에서도 아무래도 살지 못할 사람으로 알고 있었으며, 나도 죽을 줄 알고 몇 번이나 오! 주여 어서 데리고 가시옵소서. 나의 한 날의 생활이 괴롭습니다 하였다. 나의 마음은 뜨거웠다. 나는 주님을 위하여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 너무 감사하였다. 아! 나는 진실로 나의 생명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밤마다 오늘밤에나 데리고 가시런지!라고 기대하였다.4)
고문과 악형으로 이어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차라리 축복이라는 생각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타협으로 생명을 유지하기보다는 죽는 한이 있어도 신앙양심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보여주기를 소원했다. 한상동 목사만이 아니라 형무소 안의 모든 옥중 성도들은 죽음을 향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검속되어 고문과 악형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에 대한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경남 진영의 조용학 영수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김해경찰서로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가 뇌를 다쳐 가족들에게 인계되었다. 그 후 10일이 지난 1940년 8월 14일, 부산 철도병원에서 별세함으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최초의 순교자5)가 되었다.
1941년에는 만주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이끌던 박의흠 전도사도 체포되어 만주 봉천의 심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순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6)
1944년에 들어 순교자의 수가 급증하였다. 평양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주기철 목사는 1944년 들어 건강이 눈에 뜨게 악화되었다. 이미 죽음이 눈앞에 와 있었다. 결국 형무소 당국은 4월 13일 그를 병감으로 옮겼다. 4월 21일 밤중에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주기철 목사는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하고서 숨을 거두었다.7)
나흘 후인 4월 25일에는 평양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옥중 성도 가운데 최고령(당시 76세)이었던 최봉석 목사가 숨을 거두었다. 최봉석 목사는 1944년 3월부터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그의 단식(斷食)은 죽음을 끌어당겨 남은 고난의 시간을 단축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40일 금식 기도를 마친 4월 10일에 이르러 그의 몸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형무소 당국은 병보석으로 그를 가족들에게 인계하였고 평양 연합 기독병원에 입원시켰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4월 25일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하나님이 나를 오라고 부르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8)
한 달 후인 5월 23일엔 이현속 장로가 평양 형무소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함안읍교회 장로였던 그는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과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오랜 수형생활로 인한 영양실조로 몸이 회복불능 상태에 다다르자 4월 병보석으로 잠시 가석방되었다.
그 때 평양에 올라와 있던 김차숙 여사(한상동 목사 부인)와 오정모 집사(주기철 목사의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건강이 좋아지자 일제 당국은 그를 재차 수감시켰고 또 다시 시작된 감옥생활을 견디지 못한 채 한 달만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같은 순교 소식을 들은 이인재 전도사와 옥중 성도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떨기는커녕 오히려 순교의 열정에 몸이 타 올랐다. 순교가 감옥 밖의 사람에게는 두려운 공포였으나 옥중 성도들에겐 부러운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얻고 싶은 영광의 면류관이었던 것이다.
3. 순교, 그 이후
주기철 목사와 많은 옥중 성도들의 순교는 그들을 지지하고 따랐던 많은 교인들에게 충격과 슬픔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순교자들의 가족이나 지하교회 교인들의 신앙 투쟁 의욕을 저하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쟁하는 이들에게 신앙 투쟁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특히 형무소 안에 갇혀 있던 옥중 성도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소식이 아니라 부럽기까지 한 축복이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간 그들이었기에 동료 성도들의 순교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신앙과 투쟁 의지가 강화되었다. 이인재 전도사를 비롯한 한상동, 채정민, 이기선, 주남선, 방계성, 오윤선, 이광록, 최덕지, 조수옥 등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옥중성도들 모두가 그러하였다.
이와 같은 순교자들의 죽음 이후에도 옥중 성도들에 대한 예심 과정은 느릿느릿 우보(牛步) 형태로 진행되었다. 주남선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1944년 12월 한 차례 예심 법정에 나갔고 1945년 5월 초에 예심 판사가 형무소로 와서 최후 심문을 했으며 5월 18일에 이르러서야 이기선 등 21명을 평양지방법원 공판에 회부한다는 내용의 예심 종결서가 발송되었다고 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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