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하다 옥고 치룬 방계성 장로

  선지자선교회

한국장로신문 [1296] 20111112

목사님의 신앙따라 살기로 작정하며 헌신

 

방계성(方啓聖, 1887~1950) 장로는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한문에 열중하여 공부를 하던 중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신성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나 갑자기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1년 만에 중퇴하고 말았다.

 

그 후 철산군청에서 서기를 뽑는다는 말을 듣고 지원서를 냈는데 원래 한학을 공부했던 그에게는 유리해 시험에 합격을 하고 철산군청 서기로 취직을 하였다. 때마침 철산군청의 추천으로 측량기사 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측량사가 되어 3년간 측량사로 근무를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한일병탄으로 일제가 토지 조사를 하면서 측량기사인 방계성을 착출해 측량을 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이 일을 거부하고 그 길로 남쪽인 부산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부산에 머물면서 초량동에 문구 및 잡화상을 경영했다. 그는 이미 선천에서 신성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선천 남부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을 갖고 있었기에 부산에 내려와서도 집에서 가까운 초량교회에 등록하고 출석을 하였다. 고향을 떠난 그에게 의지할 곳은 교회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게다가 가게 운영이 잘 되자 남들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게 되고 자연히 초량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장로로 피택받았다.

 

당시 초량교회는 정덕생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정덕생 목사는 경남 동래 출신으로 호주 선교사 왕길지의 추천을 받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1915년 졸업하고 경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초량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방계성 장로는 정덕생 목사에게 열심히 협력하여 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회 서기로서 그를 잘 보좌하였다. 정덕생 목사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설교로 젊은 청년들을 모아 놓고 조선교회는 너희 젊은 청년들의 양 어깨에 매여 있으니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자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정덕생 목사는 교인들이 심방을 요청하면 당회 서기인 방계성 장로를 대동하고 심방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 예배가 끝난 후 정덕생 목사가 혼자만 가겠다는 말을 했고 이를 의아하게 여긴 방계성 장로는 멀리 떨어져서 뒤를 따라 갔었다. 몰래 따라 갔던 집은 이반석 여집사의 집이었다. 이 집사는 돈을 벌기 위해서 부산으로 떠났던 남편이 수개월 동안 연락두절이 되자 남편을 찾기 위해 함경도에서 부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밤이 찾아오자 그가 갈만한 곳이 없었다. 그녀는 거리를 헤마다 초량교회 종각 밑에서 잠을 자기도 해 그에게 살 거처를 마련해주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초량교회에 등록을 하고 초량교회 교인이 되었다. 함경도에서 왔다하여 함경도 댁이라고 불렸지만 후에 함경도 댁은 이씨라는 성밖에 없이 불렀던 그녀를 이반석이란 이름을 지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정덕생 목사의 선행에 놀란 방계성 장로는 정 목사에게 몰래 따라 갔던 일을 고백하고 회개했다고 한다. 그후 정덕생 목사는 부산진교회의 초빙을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초량교회에서는 제3대 목사로 주기철 목사를 초빙하여 목회를 하게 하였다.

 

새로 초량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는 항상 검정 두루마기에 흰 동정을 단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교인들이 시대가 많이 변했다면서 양복을 선물로 주면 그 길로 그 양복을 갖고 가장 가난한 교인의 집 대문 앞에 가만히 놓고 왔다. 교인들이 또 양복을 선물로 가지고 오면 또 다른 가난한 교인의 집 대문 앞에 놓고 왔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앙생활에 감동을 받았던 방계성 장로는 마음으로 나도 주기철 목사가 걷는 그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러한 일로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방계성 장로도 이에 동참하기로 다짐하였다. 그 후 주기철 목사는 1931년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마산 문창교회로 떠나자 방계성 장로는 제주도 신양리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 다시 신의주 건너편에 있는 단동 육도구교회(六道溝敎會)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때마침 주기철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된 1938925일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하고 김길창 부회장의 인솔로 임원들과 각 노회 대표들이 평양신사에 가서 신사참배를 하고 말았다.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주기철 목사는 곧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었으며, 방계성 장로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 형무소에서 옥사해 순교자가 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했던 방계성 장로도 주기철 목사의 뒤를 이어 순교자의 반열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중 8·15 해방을 만나 출옥 성도가 되었다. 해방 후 교회 재건 운동에 앞장섰던 이기선 목사를 도우며 열심히 활동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6·25 전쟁 발발로 월남하지 못하고 북한 땅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김수진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