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방계성 목사와 후손들

  선지자선교회

오마이뉴스 일시 15.04.04 20:43 조호진(mindle21) 기자

 

생략

 

방계성 전도사 주기철 목사와 함께.jpg

 

방계성 전도사(왼쪽)와 주기철 목사(오른쪽)와 오재길(뒤쪽). 주기철 목사가 193712월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됐다 풀려난 뒤에 찍은 사진이다. 방인성목사 제공

 

방계성(1888~1949) 목사는 신앙의 절개를 끝까지 지킨 순교자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에는 예배당에 인공기를 게양하라는 요구와 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는 공산당의 요구에 반대하다 순교했다. 배교와 변절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한 한국 개신교회 역사에서 방 목사는 정통파다. 하지만 방 목사는 순교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기독교 정신에 철저한 방 목사 때문이다. 방 목사는 가족 및 후손들에게 '옥고와 순교를 자랑하지 말라'고 엄하게 가르쳤고 유족과 후손들은 유언을 단단히 지켰다.

 

방계성은 평북 철산군에서 1887년 태어났다.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평북 선천에 설립한 신성학교에 입학하면서다. 가정형편으로 신성학교를 1년 만에 중퇴한 방계성은 철산군청 토지산림측량기사와 철산군 원세평동 동장으로 근무하다 부산으로 이주해 수산업체 사장 딸과 결혼한다. 32세에 평양신학교를 입학했지만 가정 사정으로 2년 만에 수료한다. 그리고는 38세에 부산 초량교회 장로에 취임하면서 약관 28세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방계성은 43세에 목회자가 된다. 전도사에 임명된 그는 제주도 추자도에 신양교회를 개척한다. 야학을 통해 청년 인재들을 육성한 방계성은 추자도에서 유기농업의 산증인으로 정농회 초대회장을 지낸 오재길(95)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월드비전 회장을 지낸 오재식(80·2013년 소천) 형제를 발굴한다. 오재길는 방계성 목사의 도움으로 평양에서 공부를 하면서 사위가 된다. 방인성 목사와는 고모부 관계다.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 신사참배파가 장악한 교회

 

출옥성도 사진-화질 최고.jpg  

                  

방계성 전도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등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교회지도자들이 1945817일 평양형무소에 출옥한 후에 주기철 목사의 집에 모여서 찍은 사진이다. 방인성 목사 제공

 

만주 안동현 육도구교회에서 3년간 전임 전도사로 활동하던 방계성 전도사는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의 요청으로 전도사로 부임한다.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 유계준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당회(교회집행부)를 구성한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이자 거점이었다. 일제가 교회를 폐쇄하자 지하교회를 조직하면서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거부 등의 신앙적 저항운동을 전개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확산시킨다.

 

신사참배((神社參拜)는 십계명 중에 첫째 계명(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과 둘째 계명(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숭배하지 말라)을 어기는 심각한 배교행위였다. 하지만 산정현교회가 속한 평양노회를 비롯한 종교 권력자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신사를 참배한다. 그리고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핵심 인물인 주기철 목사를 파면하고 산정현교회 폐쇄를 일제와 공모하는 등 철저하게 훼절한다.

 

예배당에는 일장기가 게양되고 '가미다나'라는 모형 신사가 설치됐다. 교인들은 예배 전에 '궁성요배''황국신민서사' 제창 등 '국민의례'를 먼저 거행했다. 신앙의 절개를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면서 기득권을 유지한 종교 권력자들은 일제가 패망하자 신사참배를 재빨리 버리고 새로운 권력인 미국을 숭배한다. 반공과 친미로 갈아타면서 득세한 친일파와 신사참배세력은 동일체다.

 

방계성 목사 성경책.jpg  

    

방계성 목사는 성경책에 "예수님의 죽음이 사망을 이기엿으니(였으니) 우리도 갓치(같이) 죽자 갓치(같이) 산다"라고 썼다. 조호진

 

주기철과 방계성은 순교의 동지였다. 주 목사가 경찰과 감옥소에 갇히면 방 전도사는 교회를 지켰고, 같이 갇혀서는 주 목사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방 전도사는 주 목사보다 열 살 연상이었지만 체격이 건장하고 강건했다. 손자 방인성 목사에 따르면 고문 경찰이 주 목사가 보는 앞에서 방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의 배후를 불라고 족치자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배후라고 했고, 고문으로 병약해진 주 목사를 보호하려다 매질과 고문을 더 당했다.

 

주기철 목사는 1944421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한다. 순교의 피는 주기철 목사의 제자인 손양원 목사에게로 이어지면서 배교로 얼룩진 한국 개신교회에 면류관을 씌운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방계성 전도사는 6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45817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다. 방계성의 부인인 박분옥(방인성 목사의 할머니)은 남편뿐 아니라 다른 옥중성도들의 가정에 생활비를 대고,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자 주 목사의 부인(오정모)을 헌신적으로 섬긴다.

 

신사참배에 항거한 방계성 전도사와 이기선 목사 등은 한국교회의 복구와 재건원칙을 제시한다.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할 것" 등이 담긴 결의문을 발표했지만 교회 권력을 장악한 신사참배 세력에 의해 무시된다. 한국 사회가 친일청산에 실패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한국 교회는 혁신과 재건의 기회를 잃으면서 정통성을 상실한다.

 

산정현교회도 내분에 휩싸인다. 평양노회를 장악한 신사참배파와 타협한 '기성교회파'가 교회를 장악하면서 방계성 전도사 등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혁신복구파'는 산정현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 '평양산정현교회'를 개척하면서 '독자적인 노회'(독노회)를 조직한다. 주기철, 방계성과 함께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혁신복구파를 따르면서 평양산정현교회 장로에 취임한다.

 

19495월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방계성 목사는 예배당에 인공기를 걸라는 요구와 공산당이 주도한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하다 19491227일 공산당에 납치된다. 일제 군국주의와 북한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은 평신도 출신인 방 목사는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61세에 순교한다.

 

생략

 

방계성 목사 성경책 2.jpg

방계성 목사의 친필이 담긴 성경책. 방 목사는 한자로 '평양형무소'라고 쓰고, 형무소에 들어간 날(入) 1941. 8. 25일과 출옥한 날(出) 1945. 8. 17을 표기했다. 이 성경책은 방계성 목사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다. ⓒ 조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