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9 01:40
■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님
출처: 심군식 저, 해와 같이 빛나리-주남선 목사님 전기에서 발췌
7월 26일, 수양회를 은혜롭게 마친 박기천 전도사는 신앙의 확신을 얻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가 시무하는 교회는 개천교회였다. 그는 전일 위천면 면사무소 직원으로 있었다. 마태가 세관에서 부름을 받았듯이, 그는 면사무소에서 부름을 받았다.
전도를 받은 그 날부터 열심이었다. 위천 교회를 출석하면서 교회 봉사를 잘 하였다. 더욱 은혜를 받자 견딜 수 없었다.
면사무소에 안장 사무를 보고 월급을 받는 평범하고 뜻 없는 생활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없었다. 뜨거운 그의 가슴은 복음 전파의 길을 재촉하였다.
그는 별로 많은 성경 지식을 갖지 못했지만 열심히 독학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했으며, 노회 전도사 시취를 갖지 못했지만 전도사의 길을 나선 것이었다.
어렵고 힘겨운 좁은 길을 뜨거운 가슴으로 걷고 있었다. 백씨가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기천이 자식은 예수를 믿더니 영 정신이 돌았어! 돌지 않아야 그렇게 좋은 면서기 자리를 마다하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조사 짓을 해”
백씨는 괜찮게 살았지만 동생을 도와 주지 않았다. 농촌 교회 목회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기쁨으로 그 어려움의 길을 걸어갔다.
6.25 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개천교회로 옮겨 목회를 하였다. 가족은 아내와 아들 하나, 단 세 식구였다.
거창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온 박 전도사는 피난 갈 것을 아예 생각도 내지 않고 열심히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며 교회에서 기도하였다.
8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인민군은 거창에 본부를 두고 마을 마을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산주의 정치가 시행되고 있었다.
8월 27일 지방 행정위원을 뽑는 선거가 있다고 공고가 붙었다.
8월 27일은 주일이었다. 박 전도사는 8월 20일 낮 설교시간에,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기독신자들은 투표에 참석해서는 안됩니다. 주일에는 세상 선거 투표에 신자들이 참가할 수 없습니다. 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외쳤다. 설교를 듣던 한 청년이 이 사실을 내무서에 고발하였다. 다음 날, 무장한 인민군이 나타나 박 전도사를 내무서로 연행하여 갔다.
내무서는 거창읍에 있었다. 명덕학교를 그들이 내무서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무서에서 인민군은 점잖게 타일렀다.
“투표하는 일에 협조하여 주시오.”
“못합니다.”
“왜 못한단 말이오?”
“주일이기 때문에 못합니다.”
“투표만 하면 되지 않겠소?”
“그래도 안됩니다. 그 날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만 합니다.”
박 전도사는 내무서에 갇혀 한 주일을 보냈다.
“이제 선거는 끝났오! 그러니 잘못했다는 말만 한마디하면 내보내 주겠소!”
인민군이 다시 도전하여 왔다.
“안됩니다. 나는 결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기독신자면 누구나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들도 다 투표에 가담했단 말이오.”
“그러나 약해서 그렇지 그들이 잘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할 것입니다.”
“할 수 없군!”
인민군은 박 전도사를 끌고 다니며 내무서 밖의 일을 시켰다. 뙤약볕이 뜨겁게 내리 쬐이는 뜰에서 박 전도사는 일을 하였다.
그 곳에서 200여명의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인민군들의 비위를 거스린 군민들이었다. 신자는 박 전도사 혼자였다.
9월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인민군들은 200여명의 사람을 인솔하여 진주로 가게 되었다. 재판을 받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박 전도사도 끼어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비지땀을 흘리며 일행은 인민군들의 총 끝에 움직이고 있었다. 함양을 지나서 생초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진주 쪽에서 한 때의 인민군들이 이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를 하고 있는 패잔병들이었다. 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이쪽 인민군들은 200여명의 일행을 돌아서게 하였다. 다시 거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행렬은 어수선하였다.
인민군들의 당황하는 품이 심상치 않았다. 끌려오는 양민들은 기회를 보고 있었다. 재판이고 무엇이고 없다. 이제는 총살형이 기다리고 있을 뿐임을 양민들은 알고 있었다.
?뛰자!?
그들은 소근거렸다. 그들은 요행히 묶여있지 않았다. 함양읍으로 들어섰다. 함양읍에서 인민군들은 삽을 거두었다. 수십 자루의 삽을 양민들에게 들렸다.
합양읍에서 나와 목현 쪽으로 집어 들었다. 이미 양민들의 가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내리고 있었다.
길을 멈추게 하였다. 바로 신작로 아래 모를 심지 않는 논이 있었다. 인민군들은 양민들에게 삽을 주면서 구덩이를 파게 하였다.
이때, 총성이 귀를 멍멍하게 했다. 장정들이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필살의 탈주였다. 그러나 이 때 박 전도사는 끝까지 침착하게 행동하더라고 뒤에 사라온 사람이 증거해 주었다.
살아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박 전도사는 조금도 그 몸이 흐트러지지 않고 인격적으로 최후를 기다리는 있는 자세였다고 한다.
9월 28일 수복 후, 남영환 전도사는 황보여한 전도사(지금은 함양교회 장로로 고아원 원장)와 함께 박 전도사의 시체를 찾기 위해 현장으로 갔다.
현장은 비참하였다. 여러 곳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시체가 가득가득했다. 시체는 부패해 있었다.
물이 고인 구덩이에는 시체가 물에 불어 제재소 안에 갔다둔 나무둥지처럼 보였다. 까마귀들이 벌써 눈을 다 뽑아 먹어버려 구멍만 두 개나 있었다. 냄새가 지독하였고 벌레와 파리가 득실거렸다.
시체를 한 구 한 구 치우며, 박 전도사의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숨이 훅훅 막혔다.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땀이 전신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그 많은 시체를 다 뒤졌지만 박 전도사의 시체는 없었다. 결국 시체를 찾지 못하고 두 전도사는 그냥 돌아왔다.
12월 어느 날이었다. 박 전도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남영환 전도사는 시체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갔다. 목현 뒤 산이었다.
골짜기를 올라가 능선의 한 소나무 밑에 반반히 누운 시체가 있었다. 시체는 상한 곳이 없이 그대로 있었다. 산까마귀도 그의 눈에 접근하지 않은 채 살포시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남 전도사는 박 전도사의 시체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역자의 승리적 모습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하나님은 순교자의 시체마저도 보호해 주셨구나!”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구별된 죽음을 죽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더기로 죽어 같은 구덩이 속에서 썩지 않고 이렇게 동떨어진 곳에 시체가 있는 것이 어인 일인지, 그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
며칠 후,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의 장례는 거창 시찰장으로 성대하게 치루게 되었다. 이날 주례는 산 순교자 주남선 목사가 집례하였다.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가 인민군에게 끌려가던 날, 네 살 난 아들 래영은 발가벗고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마지막 길인 줄 모르고 멍하니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래영이,
26년의 세월이 흘렀다.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의 외아들 래영이 자라 30세.
고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연구과에 입학하여 2학년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도사가 된 것이었다. 그는 지금 부산 반여동 장산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일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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