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수집 손양원 목사님

2016.01.16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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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 목사님
선지자선교회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에서 부친 손종일 장로와 모친 김은주 집사의 장남으로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에서 출생

1908년 5월 2일 부친 입신때 7세 소아로 입신
1914년 4월 1일 칠원 공립보통학교 입학
1917년 10월 3일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 받음
1919년 3월 24일 칠원 보통학교 졸업
1919년 4월 서울 중동학교 입학
1920년 4월 3일 부친 손종일장로의 독립만세 운동으로 구속,서울 중동학교 자퇴
1921~1923년 일본 동경 스가모(소압)중학교 졸업
1924년 1월 17일 정양순여사와 결혼
1924년 3월 23일 재차 도일했다가 중생하여 10월 귀국
1924년 10월 23일 칠원읍 교회 집사 피선
1925년 11월 6일 동인군 출생.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 때 순교(23세)
1926년 3월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 부산 감만동교회 외지 전도사로 부임
1929년 3월 6일 경남 성경학교 졸업
1932년 감만동교회에서 성서조선으로 한주간 사경회를 인도.사경회 인도 문제로 사임.
1926년~1932년 외지 전도사로 있으면서 밀양수산,울산 방어진,울산 남창,부산 감만 동,부산 남부민,양산 우너동교회 개척.
1932년~1934년 부산 남부민교회 시무
1930년 9월18일 동신군 출생.1948년 10월21일 여순사건때 순교(18세)
1935년 4월 5일 평양 신학교 입학.능라도교회 시무
1938년 3월16일 평양신학교 졸업
1938년 4월~1939년 경남 노회 부산 지방 시찰회 순회 전도사.부산,양산군,김해군,함
안군 각 교회를 순회 전도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함.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한 다는 이유 때문에 순회 전도사 일을 시찰회에서 보지 못하게 함.
1939년 7월 14일 여수 애양원교회 부임.한국인으로는 2대 목사로 부임.
1940년 9월 25일 신사 참배 거부로 여수 경찰서에 검속.
1940년 11월 17일 광주 형무소에 투옥
1943년 10월 8일 청주 보호 교도소에 감금
1945년 8월 17일 8.15 해방으로 석방
1945년 9월 10일 ~10월15일 애양원 임시 원장 겸임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1948년 10월21일 여순사건으로 동인,동신 형제 순교.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 양 아들로 삼음.
1950년 9월 13일 6.25 동란으로 공산군에게 검속
1950년 9월 28일 여수시 둔덕동 617-10(당시 과수원 골짜기)에서 순교 하심.다음과 같은 분들도 함께 순교 하심.

조상학목사 : 여수 덕양교회
지한영강도사 : 율촌 장천교회
지준철성도 : 지한영 강도사 아들 순천고 3학년 재학)
윤형숙전도사 : 여수 제일교회
허상용집사 : 여수 돌산읍 교회
황도백집사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곽은진집사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안경수성도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백인수성도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 손양원 목사님

손양원(孫良源 1902∼1950) 목사 장로교 목사로 호는 산돌이다.

경상남도 함안(咸安) 출생으로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중 궁성요배를 거부, 퇴학당하였으나 선교사 L. 맥레이의 항의로 복교되었다. 3·1운동에 가담한 죄로 아버지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학업을 중단,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소압중학교)]를 졸업, 귀국 뒤 경남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부산나병원교회·울산방어진교회·남창교회 및 양산의 원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뒤 여수의 나병환자요양원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봉사하였고,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지 않아 1940년에 체포되어 광복 후에 출옥하였다. 1946년 목사안수를 받고, 6·25 때 공산군에게 총살되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02년에 경남 함안에서 출생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주기철 목사님을 통해 큰 영향을 받으며 신학을 공부했다.

1939년에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한 이후로 평생동안 애양원의 목회자로 섬기며 애양원 사람들을 사랑했다. 문둥병자의 환부에 입을 접촉하여 병든 환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했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했던 사람이다. 어떤 핍박도 이겨내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일본 형사들에게 붙들려 가서 감옥 생활도 했다.

손양원 목사님의 곁에는 훌륭한 사모님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감옥에 계셨을 때, 사모님은 면회 갈 때마다 꼭 성경 한 구절씩을 외워 가서 목사님께 읽어 드리곤 했다. "만일 당신이 신사참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이렇게 감옥에 있는 목사님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광복을 맞이 한 후 그의 두 아들이 공산당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열 가지나 감사 기도를 했다. 그리고,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그를 살려서 자기의 양자로 삼음으로,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일도 있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6·25 전쟁이 터져 다시 위기가 닥쳐왔으나 그는 끝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다가 공산당에게 붙잡혀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