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원인은 소경된 것

 

1987. 3. 2. 밤 총공회

 

본문: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때에 계시 방편과 기관을 문서로 해서 계시해 주실 때도 있고 또 어떤 역사적인 사실인 그 형상을 계시 기관으로 삼아 가지고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역사의 형식이든지 그런 것을 하나의 역사인 사실 그것만 알고 거게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구원 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참된 복음이 되지를 못합니다.

오늘 밤에 봉독한 이 말씀은 육신의 그 소경 바디매오의 일을 가지고 신령한 이스라엘된 우리들에게 우리의 실상을 가르쳐 주시는 도리로 주신 것입니다.

이 소경이 자기는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바디매오라고 이렇게 밝히 그 부자의 이름을 밝힌 것은 아무런 우리에게 이유가 없는데 그 지방에 소경이고 거지고 이러니까 참 하나의 불쌍한 그런 사람으로 유명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소경이 자기가 모든 면으로 가난하고 불쌍하고 가련하게 된 그 모든 원인은 눈먼, 그 눈이 어두운 이것으로써 그렇게 불행하게 됐다는 그것을 그 소경이 똑똑히 깨닫고 자기 소경된 것을 이리저리 고쳐 볼라고 많이 애를 썼으나 안 되고 예수님이라는 분이 소경들의 눈을 띄워 주셨다는 그런 말을 듣고 예수님을 기다려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런 길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앞은 보이지 안하니까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렇게 호소했습니다.

그때에 같이 가는 많은 사람들이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그렇게 했다고 여게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는 이 기록이 돼 있지마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한 이 말씀을 들어보면 그 소경이 큰 선생님이 지나가는데 그렇게 죄인 소경이 그 난잡하게 고함을 지른다고 꾸중한 것입니다.

육체의 이스라엘은 어떤 병이든지 들면 그것은 죄값으로 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전에도 용납시키지 안하고 거룩한 모임에도 참여시키지를 아니하는 것이 그들의 풍속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이 소경은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고 꾸짖는 그 소리에 제재받지 아니하고 “더욱 심히 소리질러”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고 떠드는 것과 거게도 제재받지 안하고 더욱 더 큰 소리로 부르짖는 이 소경의 소리를 주님이 들으시고 멈추어 서서 그 소경을 불러오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소경이 자기를 부른다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자기의 겉옷을 내 버리고 뛰어 일어서서 예수님에게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소경 형편으로서는 그 겉옷이라면 그에게는 제일 귀중한 재물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랬는데 일어나 뛰어온다고 하지 안했고 뛰어 일어난다고 하면 일어나지 안하고 그분이, 가만히 그 형편을 생각하면 참 그저 옆의 사람이 보면 어떻게 마치 단 철판 위에 어떤 그 생명 있는 무슨 그 곤충이든지 뭣이 닥치면 뜨거워서 못 견뎌서 그저 확 뛰는 것처럼 그렇게 그 광경을 가만히 눈 감고 우리가 생각하면은 비정상으로 그렇게 뛰어서 일어섰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래 가지고 예수님에게 오니까 예수님께서 소경을 만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물을 때에 그 소경이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라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곧 어둡던 눈이 떠서 보게 됐습니다.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 소경이 이제까지 자기가 모든 삼라만상을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그저 사람들이 말을 한다 해도 그 말을 참 믿을 수 없고 그저 자기 보지 못하는 그것이 자기에게는 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눈이 뜨이니까 자기로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 세계가 발견되니까 그는 참 뭐 미칠 듯도 할 것이고 참 환장할 만치 신기한 세계를 봤을 것입니다. 이라니까 그 소경이 눈뜬 즉시로 그만 그 자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좇았다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의 형식을 가지고 계시 도구로 이용한 것이지 이 무슨 소경 하나 눈 뜬 것이 그렇게 뭐 별수로 큰 일이라서 우리에게 기록해서 보여 준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데에는 소경 눈 뜨는 그런 표적들이 생긴다 하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소개해 가지고 예수 믿으면 소경 눈도 뜬다 하는 그런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다 기록할라면 세상에도 둘 만한 곳이 없는 그런 많은 양 가운데서 이렇게 간추려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 육체의 이스라엘 시대에 육체의 일을 가지고 신령한 이스라엘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실 도리가 있기 때문에 영원 전에 벌써 이 소경을 예정하시고 또 창조하시고 양육하셨다가 때가 되매 그 길가에 와서 앉았었고 이런 이 사실이 이루어졌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 소경이 자기가 보지 못함으로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어서 불행한 사람이 됐습니다. 이 소경은 보지 못하는 그 원인으로서만 그는 불행하게 됐습니다.

여게서 우리는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에 선포해 놓은 이 모든 계약은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 그런 절대성 있는 계약이라고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고, 또 하나님의 그 크심에 대해서나 또 그분의 그 모든 사랑과 능력과 그 역사에 대해서나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나 거게 대해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성경 말씀에 빠진 게 없이 다 똑똑히 기록해 주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이 생명에 대해서도 똑똑히 가르쳐서 세상에 사람들은 다 죽음을 제일 두려워하는데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영생이라는 그 말씀을 얼마나 우리에게 계시하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또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역력히 기록하셨고, 또 세상에 대해서도 기록을 하셨고, 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생활은 어떠한 그 결과를 맺는다는 것도 똑똑히 기록을 했고, 또 주님이 구름타고 오실 것과 또 심판이 있고 영원한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고 천국의 그 보응으로서 요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믿는 자의 기업으로 하나님이 주신다는 이 계약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다 이 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기록이 이것이 우리가 거의 다 알고 있고, 다 알고 있고 또 우리가 인정한다고 스스로 우리가 또 자인을 하고 있고, 또 인정한 이대로 우리가 계시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라고 애를 쓰고, 또 순종하고 사는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우리 자타들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신구약 성경에 나타내신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이 모든 것은 다 그것이 실존이, 실제로 있는 실존이 아니고 그것이 실상이 아니고 하나의 논리 문서에 그치고 마는 것인지 하나의 그렇지 안하면 상상을 하나의 추론과 추상을 기록해 놓은 것인지 우리는 지금 이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것과 우리가 믿고 바라고 상대해서 사는 것은 너무도 이거는 얼토당토 안 한 거리 먼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도 우리가 세상 것을 생각할 때에 그뭐 세상에 사람이 권세가 있어봤던들 그 권세는 너무도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한 자리 누웠어도 잠만 들어도 뭣이 어찌 되는지 모르고, 또 한 장의 종이 하나가 가려 있어도 그 너머는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 이런 참 실지로 따져보면은 허무한 사람의 권세지마는, 그런 그 일국의 권세 있는 사람이 자기와의 이 관계가 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같은 이런 관계일랑 가지지 못하고 이런 관계의 뭐 몇십분의 일의 관계를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게 대해서 참 그 실상을 느끼고 알고 보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 배경에 대한 그 배경을 너무 써서, 너무 그 배경을 의지하고 너무 힘입고 너무 그 배경을 실질적으로 써서 참 다른 사람에게 실수할 만치 오해를 받을 만치 이렇게까지 되어지는데 우리와 하나님과의 이 관계에 대해서 신구약 성경에 선포해 놓은 이 관계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를 “내 손바닥에 너희를 다 기록해 놓고 있다”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고 있다” 땅위에 있는 모든 군왕들이라면 정권자를 다 말하는 것인데 “정권자들이 네게 양부가 되고 왕비들은 유모가 된다. 그들이 너희들의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다. 너희들의 자손을 메고 너희들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모든 땅위에 온갖 그 세력가들의, 무력가들의, 또 온갖 그런 과학에 모든 기구들의 그 세력도 도리어 그것을 역용하게 돼서 그것이 자기네들을 자기가 스스로 해하게 되고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이 그 모든 데에서 다 탈환시키고 능히 구출할 수 있다.” 뭐 성경에 우리에게 기록해 놓은 것은 참 말할 수 없이 기록해 놨습니다.

우리가 이 기록에 대해서 살펴볼 때에 ‘이 기록은 좀 부족하다, 요보다 더 좀 우리와의 밀접하게 기록했으면 좋겠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좀 더 친밀했으면 좋겠다, 좀 더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우리를 더 책임지시고 보호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그 이상 더 가깝고 그 이상 더 친밀하고 우리에게 그 이상 더 관계를 맺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록을 할라고 해도 기록 더 그 이상 못 할 만치 기록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은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만드셨다고, 모든 영계 것도 만드셨다고, 지은 것이 그분이 없이는 하나도 지은 것이 없다고, 또 모든 세상을 그분이 지으셨고, 모든 인간들도 그분이 지었으며 땅위에 있는 모든 이 세계도 다 자기 땅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그분이 곧 사람되어서 오셨다는 것을 또 요한복음 1장에 말씀해 놨습니다.

이런 것은 순전히 우리가 거짓말로 압니다. 이건 거짓말로 알지 만일 거짓말 아니고 참말로 안다고 하면은 이는 기독교가 미쳐서 자빠져 버렸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 거짓부리라면 이 기록되어 있는 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날뛰면 능력이 없으면 다 죽여서 없애버려서 기독교가 완전히 박멸을 당했든지 참 기독교의 이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그렇다고 하면은 뭐 이 세상이라 하는 이거 복음화된다는 것이 잠깐 될 것입니다.

이 기독교가 이 세계에서 제일 인정받는 이런 일이 대번에 되지마는 지금 이렇게 멈추고 있고 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가 성경에 이 계약이라 우리가 말은 잘 합니다. 구약은 처음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더불어 계약한 계약이요 신약은 그 다음에 다시 선포한 이 계약이라, 이 두 계약이라. 뭐 이 계약은 그 획 하나도 변하지 않고 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다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창조주다, 전지 전능자다, 만주의 주다, 만왕의 왕이다, 주권 개별 섭리자이시다, 우리를 당신 생명보다 사랑하시고 우리 위해서 모든 부요를 다 내놓으시고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셨다 하는 이 말이 전부 우리에게 믿는다 해도 다 거짓말로 압니다.

우리가 인정한다는 것은 인정하면 인정하는 표가 나는데, 어떤 사람이 있다가 만일 이 세상 잠깐 지내가는 정권자와 자기와의 비밀 약속을 했다 할지라도, ‘이 약속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네가 나타내지 말고 숨어서 이 권세를 주니까 네가 이 권세를 가지고 좀 우리 국내를 돌아봐라’ 하는 과거에 그 암행어사라고 있었는데 그와같은 약속을 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자기가 단둘이 정권자하고 이런 좀 단합되는 약속을 했다고 하면은 그것을 자랑하지, 자랑하지 안하고 입을 다물고 숨겨 가리워 놓고 있다는 것은 심히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랬는데, 우리는 이 계약이 거짓부리든지 우리가 믿는다는 게 어떻든지 아무리 우리가 참 논리적으로 해 봐도 그 믿음은 이 세상 것을 봐서, 우리가 이 자연계시를 이 세상 것을 봐서 이 성경에 기록된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전능자가 우리 안에 계시는데, 전능자가 계시는데 뭐 피조물을 두려워할 것이며, 전능자가 계시는데 뭐 공산주의를 두려워하며, 또 뭐 독침을 두려워하며, 또 왜정 말년에 일본 정권을 두려워하며, 오늘도 이 세상 이런저런 권세가 두려워서 그걸 두려워할까? 우리 안에 이 전능자가 계셔서 곧 내가 되어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으면 우리가 어찌 될까? 참 믿는다면 어찌 될까? 그렇게 우리가 좀 생각해 볼 때에, 또 그분이 대주재신데, 모든 걸 가지신 대주재신데 그분이 곧 우리를 사랑하셔서 생명까지 바쳐 주신 그분이 대주재시요, 하나님의 이 크심에 대해서, 뭐 하나님의 그 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또 능력에 대해서, 하나님의 그 앞으로 계획한 그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이 현재 섭리하시고 있는 섭리에 대해서, 이 보면 개미 한 마리 움직이는 것도 전부 주님의 단독 주권 섭리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말로는 잘하고 증거는 하고 있는데 왜 이럴까? 성경에 기록해 이렇다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우리가 그 실상을, 그 실상을 우리가 정말로 그 실상을 보았다면, 그 실상을 우리가 참으로 실상으로 안다면, 하나님과 관계된 우리의 이 존재라 하는 이 존재와 대속받은 이 대속을 우리가 진리로 증거하는 그대로의 이 실상을 우리가 참 안다면 우리가 어찌 됐을까? 우리가 이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거짓말 하지 안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못 믿어서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가감도 못 하고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암만 말씀해야 우리는 귓전으로 들립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절대로 안 믿습니다! 믿는 게 아닙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참으로 세상 빛이 될 수 있고 뭐 우리가 다니엘만치 관계를 못 가진 것 하나도 아니고 그 이상 가졌습니다. 다니엘은 구약에 속해서 아직까지 미진한 미개에 속했지마는 우리는 다 완성한 그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다니엘보다 우리는 더 밀접하고 견고한 관계를 가졌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보다도 더 견고한 관계를 가졌고, 뭐 엘리야나 모세나 그런 사람보다도 더 우리는 밀접하고 견고한 관계를 가졌는데 우리는 왜 이럴까? 여게서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병들었습니다. 믿음이 병이 들어서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것은 다 실존이오. 실존 중에 실존이요 완전한 실존이요 영원 불변의 실존이요 이런데 이 실상을 우리 믿음이 병들어서 보이지 않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렇게 계시하신 이 거짓말 안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이 이렇다고 계시해 놓으신 이 계시를 우리 믿는 믿음이 병이 안 들고 사실로 믿는다고 하면은, 당신이 계시한 것을 우리가 사실로 믿는 요 믿음이 병들지 안해서 주님이 이 계시해 놓으시고 약속해 놓으신 이 실상을, 이 실상을 우리가 본다면 어찌 될까? 주님이 신구약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이 실상을, 하나님께서 “나는 어떤 자다, 나와 너거와의 관계는 어떤 자다, 내가 무엇을 하고 왔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왔다.” 당신이 이렇게 계시로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이 말씀은 진리인데 이 진리는 곧 실존인데, 곧 실상인데, 이렇게 계시해 놓은 이 진리 요 실상을 보는 눈이 우리가 멀어서 그 실상을 보지 못하고 하나의 추상으로 추론으로 하나의 논리로, 그저 하나의 그렇단다는 이런 하나의 구설로, 하나의 이런 그저 말로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그 계시되어 있는 계시의 내용인 그 실상, 그 실상을 우리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능자이면서 전능자로 살지 못하고, 전지자이면서 전지자로 살지 못하고, 영계와 물질계의 많은 천군 천사들이 있지마는 그들의 주인공인데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고, 이 모든 땅위에 있는 거, 모든 진동되는 것이나 파괴되는 것이나 건설되는 것이나 멸망하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너희들의 입술에 달렸다, 너희들의 입술에 달렸다, 너희들이 사실을 믿고 믿는 입술로 가지고 하면은 그대로 다 땅위에서 파괴 건설, 또 멸망 구원 이것이 다 그대로 된다고 이렇게 말씀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계시해 놓으신 이 실상을 보는 눈이 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멀었습니다.

왜 전능자 품안에 내가 안겨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가 왔을 때에 한국 교회는 다 조그만한 일본 나라의 그 국력, 그 나라의 국력 그 국력에게 떨어 가지고 한국 교회는 다 삼켜졌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품안에, “능력의 보호를 입었으니” “전능자가 너희들의 머리털 하나까지 내가 세신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지마는 내가 허락지 안하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데 너희들은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전능자의 품에 안겨 있다고 우리가 기도도 하고 이라는데. 이 전능자가 분명히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걸 보고 두려워하고, 이분이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 될 수 있는 이걸 상속으로 약속했는데 일생동안 떠들어 봤자 조그만한 빌딩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암만 해 봤자 이 우주 가운데에 뽀스래기 같은 이 지구 땅덩어리, 지구 땅덩어리 속에 하나의 고기 비늘만한 거 그런 거 하나 이것도 큰 줄 알아서 떨고 큰 줄 아는데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계약에 있는 이 계약의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의 눈이 있는지! 이 믿음으로 실상을 보는지! 아무리 비판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 계시된 실상, 계시된 하나님의 실상이나, 하나님의 섭리의 실상이나, 하나님의 이 크심의 실상이나, 하나님의 사랑의 그 높고 깊고 넓고 긴 그 하나님의 사랑의 실상이나, 그분이 우리 위해서 십자가의 이 사활의 대속으로서 우리에게 일곱 가지 구속을 준 것이나,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이 택함 때문에 모든 걸 예정하시고 예정한 대로 모든 걸 창조했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 믿음의 눈이 뜨이면 절대로 이렇지는 안합니다! 왜 우리가 못 났습니까! 우리는 소경인데 소경인 줄 모르니까 우리는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이 실존을 우리가 믿음이 병이 들어서 이 실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공연히 떨고, 공연히 울고, 공연히 기뻐하고, 본다면은 분명히 울어야 될 터인데 기뻐하고, 본다면 기뻐 분명히 기뻐해야 될 터인데 울고, 울어야 될 터인데 기뻐하고, 이거 뭐 도무지 정신 이상의 미치괭이 생활이 우리가 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계시하신 이 계시가 이 실상인 것을, 이 계시의 실상을 우리가 봤다면은 그 실상을 우리가 몇만분지 일을 실상으로 보고 있는가? 몇억억만분지 일을 보고 있는가? 그 계약의 그 실상을 우리가 몇만분지의 일이나 우리가 보고 있는가?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의 실존을 보는 우리의 믿음의 눈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고 하나도 가감이 없는데 그걸 우리가 믿는다고 해도 억만분의 일도 안 믿습니다. 그걸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믿음에 소경된, 믿음이 병들어서 믿음으로 봐야 될 걸, 믿음은 당신이 이렇다 할 때에 내가 그렇다 하면 되는데, 아브라함은 그분이 백 세에 아들 낳을 거라 하니까 믿음으로 봤기 때문에 낳기도 전에 기뻐서 즐거워서 이렇게 뭐 즐거워해서그때 척 스미스 목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돌아다니면서 아들 낳았다고 자랑을 하고 이라니까 다른 사람이 있다가 ‘아들 언제 낳았느냐?’고.

언제 낳을거라고, 지금. 아직 낳지는 안했지만 낳을거라고. 그분을 그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금 자랑하고 다녔다는 그 척 스미스 목사도 믿음의 눈을 떠 가지고 약간 하나님의 이 계시의 실상을 본 그분이라는 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참 성경에 기록한 대로 모든 예정에 전개되는 순서들도 모든 창조되어 있는 존재들도 어느 하나가 우리 기독자의 구원을 위해서 있지 안한 게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 목적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존재했다고 성경에 기록했지마는 우리가 이것을 믿는가? 참으로 이 믿음으로 그 실상을 보는가? 그 실상이 보일 만치 하나님은 전능자로 보이는 그 믿음인가? 믿음이 다 병이 들어서 믿음으로 보지를 못하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성경에 이렇게 수많은, 이 천상 천하에 누가 복됩니까? 모든 영계 천군 천사들도 모든 피조물은 발등상이 되고, 발등상이 되고 우리는 그 위,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그분의 몸이 되고, 지체가 되고, 그분의 성전이 되고, 그분의 신부가 되고, 그분의 제사장 선지자가 되어서 그분과 만물 사이에 중보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우리가 이 지식 하는데 이 지식하는 이 지식을 우리가 참으로 믿음으로 그 실상을 보는가? 믿는 것만치 보일 터인데 우리는 억만분의 일도 믿지 않기 때문에 억만분의 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실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약속된 그 구원이 크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는 뭐 측량 못 할 만치 큰데 우리가 믿으면, 믿으면 그 실상대로 알아야 되는데, 믿으면 실상대로 봐야 되는데, 믿으면 실상대로 봐야 되는데 그 실상대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이것 때문에 우리가 불행하지 이것만 본다면 우리는 염려할 것 없고, 탐할 것 없고, 부러워할 것 없고, 겁낼 것 없고, 탄식할 것 없고, 천상 천하에 하나님 다음으로 행복스러운 자가 우리들인데 왜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모르고 있는가? 이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가 하나님이 절대 이 계약으로 선포해 놓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나님은 진실해서 거짓말 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지식으로 선포해 놓으신 이것은 곧 진리요 이것이 실상인데, 말 있고 실상 있는 게 아니고 이 말이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이 실상이요.

있으라 하니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못해 그렇지. 우리 눈에 보지 못해 그래도 그게 한 순서에 우리 구원에 필요 있는 단계를 찾아 그런 것이지 벌써 말이 있으라 하면 있는 겁니다.

이런데, 이런 행복될 우리들이 행복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계약하신 이 계시를 믿는 믿음이, 믿는 믿음이 억만분지 일만 믿으니까 억만분지 일만 우리에게 그 실상이 보여지고, 억억만분지 일만 우리가 믿기 때문에 우리에게 효력이 억억만분지 일이 와 있는 것이지 만일 그 사실대로 우리가 다 믿으면 그 효력은 다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여게서, 우리 기독자들이 다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이제 것이나 장래 것이나 하나님이나 모든 것이 다 우리 위해서 있고 우리 것이고 우리의 현실은 우리를 영원 무궁세계의 영광과 존귀와 칭찬으로 존귀를 이루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우리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이것을 다 내것 삼아 가지고, 만물이 고대하면서 탄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뭇아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거, 내가 현실에서 내 자유,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것이 내 자유인데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그 한 살이에서 모든 피조물은 구원 얻는, 만물이 지금 우리의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고대하고 있는 이 말할 수 없는 이 존귀의 대상이 되어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가 이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란 놈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리는 참 이 불쌍하고 가련한 이 노릇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이 바디매오는 자기가 가련한 것을 알았고, 가련한 신세를 알았고, 그랬는데 우리는 기독자들은 가련한 신세를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뭐 밥 먹고 옷 입고 부동산 좀 있으니까 됐다고 생각합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는 부요하여 부좀함이 없다 하는 자야 너의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한다”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취득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으로 취득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취해라 믿음으로 취득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방편 가지고 취득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방편 가지고 취득한 게 없습니다. 우리는 순전히 마귀 방법 이 세상 방법 가지고 취득해 놓고 취득했다고 하는 것이지 믿음의 방법대로 우리가 취득한 게 얼마나 있어? 뭐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거지.

우리가, 이거 참 하나님이 계약해 놓으신 이 계약을 우리가 그 실상대로 믿으면, 하나님이 계약해 놓으신 그 계약을 실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그 실상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굉장할 것인데 이 실상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실상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거 실상은, 실상 이걸 거짓부리로 알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아무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의 실상을 무진장인데, 무진장의 큰 것인데 이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으로서 내 안에 계시지, 성경에 말하기를 내 안에 계시지 내 밖에 계시지 안팎으로 나를 싸고 계시는데 우리가 두려울 게 뭐입니까? 하나님이 보이면 그렇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이 병들어서 믿음으로 보지 못해. 믿음으로 본다, 믿음으로 본다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요렇다 할 때에 ‘예, 그렇습니까?’ 하는 게 믿음으로 보는 겁니다. 요렇게 취하라 할 때에 그 방법대로 취하는 것이 믿음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봐야 되고, 믿음으로 알아야 되고, 믿음으로 취해야 되고, 믿음으로 이겨야 되지, 하나님이 요렇게 이겨라 한 그대로 이겨야 되지 그외에 거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건 다 멸망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건 다 멸망이오! 이런데 우리가 믿음이 병들어 가지고 이런 이것을 우리가 깨닫고 아무래도 내 믿음의 병을 고쳐야 되겠다. 이 바디매오를 통해 가지고 우리에게 고치는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바디매오가 고친 것은 그는 자기가 보지 못한 것이 자기의 불행의 원인을 알아. 자기가 불행자라는 것을 알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는 걸 알았는데 우리는 불행자인 줄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성경 가운데 많은 그 약속이 있지마는 이것을 전부 기만 설교라 합니다. 다 기만 서적이라 하요. 이종교자들이 기독교 다 기만 서적이라 합니다. 기만 서적이라 말은 꾀우는 거짓말 서적이라 말이오. 거짓말 서적이 아니라 참말로 너희들이 참말로 믿는다면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그말이오! 이 거짓말 서적을 누가 만들었어? 신구약 성경은 완전히 거짓말 서적이오. 거짓말 서적입니까? 우리가 거짓말 서적으로 만들어 놨어.

세상 사람들이 신구약 성경을 거짓말 서적으로 보지 이대로의 실상이라고 세상들이 봅니까? 실상 같으면 우리가 행동이 달라질 터인데. 우리의 평가가 달라질 터인데.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그게 뭐 달라질 건데 보니까 순전히 계시한 말씀은 거짓말이기 때문에 이라는고로 이것을 기만의 모든 서적이라, 사람을 꼬우는 서적이라, 꼬우는 서적.

왜? 사실되면 그렇지 않을 것인데 이래 가지고 구멍가게로 하나 둘 모아 가지고 할라 하는, 전부가 그들이 볼 때에 기만 서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말이오. 남을 꾀우고 속이는 것 다 기만 서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만 서적으로 만들었지, 기만의 도로 만들었지, 하나님을 가상으로 만들었지, ‘너거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이 쇠덩어리 놓고 우리 부처라 하는 이 부처나 가치가 부처는 눈에 보이지마는 너거 하나님은 눈에 보이기나 하나?’ 그까짓 거 억억만 개보다 우리 부처 한 개가 낫다고 그들이 말해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여 주지 않기 때문에.

이러니, 우리의 병은 우리가 이 성경 본다면 모든 피조물이 따라올 수 없는, 천군 천사도 우리를 따라올 수 없는, 모든 피조물은 발등상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인데, 이렇게 우리가 존귀한 자요, 능치 못함이 없고, 알지 못함이 없고, 부족할 게 없고, 성경에는 잔뜩 이래 놨는데 이것이 하나도 우리가 가지고 있지를 못하니까, 가지고 있지 못하는 이것이 불행으로 우리가 깨닫지를 못합니다.

왜 불행으로 깨닫지 못해. 문서를 참되다 인정치 않기 때문에 우리가 불행으로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문서를 참되다고 인정하면, ‘나는 문서와 비교할 때에 나는 참 거지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 이 진공과 같은 이런 자이다’ 이럴 건데 성경을 거짓말로 보다 보니까 우리가 그 성경대로 되는 그것을 될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에 성경과 정반대로 성경의 억억만분의 일도 안 이루어져도 이 세상 것 있으면은 만족하고 있으니까 이게 우리가 비참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제가 깨닫는 대로는 우리가 성경대로 볼 때에 비참하다. 우리가 성경대로라면 비참하다. 성경대로라면 한없이 행복될 자인데 실상은 한없이 비참한 자이다. 모든 면에 아주 거지 중에 거지요 비참한 중에 비참하고 모든 것을 하나도 바로 그 실상대로 보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비참한 걸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이 비참한 것은 주님이 계시해 놓으신 이 계시의 그 실상을, 진상을, 그 실상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이것이 우리의 모든 불행과 비참과 무능과 모든 어리석음의 이 원인이라 하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이 둘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급선무인 줄 압니다. 이 둘을 아는 것이 급선무고 이 둘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얻어지는 방법은 쉽습니다.

얻어지는, 이 둘만 알면 다 얻어질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를 우리가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이 바디매오는 그가 길에서 예수님 만날라고 고대했다 했습니다. 성경에 “네가 호리라도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게서 나오지 못하리라. 그러기 때문에 길에 있는 동안에 사화해라.” “너희는 길 가는 나그네요 행인이다. 나그네와 행인으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는 지금 이 일생이 천성을 향해서 걸어가는 이 걸음인데, 천성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자기의 팔다리를 다 끊어서 다 불에 집어 태우든지 그리 안 하면 영생의 것으로 만들든지 우리는 참 이거 굉장한 것이 지금 성패가 일 초 일 초, 이 한 시간 한 시간, 일 보 일 보에서 결정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 바디매오는 보니까 길에서 예수님 만나기만 고대했습니다. 왜? 예수님이라야 해결해 주지 다른 이는 해결해 줄 수 없단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 한 분 만나기만 자기 소원하고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아무래도 이 계시를 바로 보는 이 믿음의 눈이 우리가 소경이 돼 가지고 있는데 이 믿음의 눈이 뜨이는 데는 예수님이라야 띄워 준다. 요한복음 9장 39절 이하에 보면은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은 보는 자는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겠다.” “우리가 소경 됐느냐?” “네가 본다 함으로 죄가 그저 있다, 보지 못하였더면 너희들에게 죄가 없으리라.” 말씀했는데 주님 외에는 띄워 줄 이가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안하면 하늘나라를 보지도 못한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분명히 이 소경된 이것을 이 소경의 비참을 알고 이것은 주님밖에 띄워 줄 수 없는 이 사실을 성경에서 보고 우리가 깨닫고 이 띄워 주실 주님을 만날라고 이 바디매오에 대한 걸 연구하십시오.

이래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그분은 길가에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고함을 지르니까, 고함을 지르니까 많은 사람들이 눌렀습니다. 잠잠하라 눌렀어요. 그래도 거기 억압당하지 안하고 누를수록이 더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요게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첫째는 우리가 비참한 걸 알아야 되고, 둘째로는 우리 비참한 이유는 믿음의 눈이 멀어서, 믿음의 눈이 멀어서 이 마귀가 준, 마귀가 주는 눈만 밝아 있지 성령이 주는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영원한 우리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마귀란 놈이 우리를 꼬우느라고 영원한 것 가지지 못하게 꼬우는 이 땅에 있는 이런 것만, 마귀 주는 눈으로 이런 것만 보지 참은 보지 못하는 이 비참한 우리가 돼 가지고 있는, 우리는 바로 계약의 진상을 그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비참하다는, 보지 못한 이 참 여기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여기에 우리가 전폭의 소원이 되고 원한이 돼 있어야 되겠고, 이 원한이 돼서 우리가 참으로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대로 바로 볼라면, 전능자를 바로 보고, 전능자를 바로 보면 그분 외에 두려워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전능자의 품에 안긴 자가 세상에 두려울 게 뭐 있습니까, 있기를? 공산주의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있기를? 왜정 말년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있기를? 총칼이 오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눈이 어두워서 안 놀랠 거 놀래고, 안 탐할 걸 탐하고, 분주하지 않을 거 분주하고, 이러니 우리가 눈 뜰라고 하면은 첫째로 우리가 주님 만나기를 원하는 길에 있는 자가, 길에서, 우리 일생동안 예수님 만나기를 원하는, 예수님님 만나기를 원하는 일생 소원이 돼야 이 믿음의 눈이 뜨이지 그냥 이래 뭐 하루 이틀 기도하고 좀 뭐 어북 주의하고 이래 가지고는 소경 절대 못 면합니다! 암만 성경을 백 독 하고 몇백 독 뭐 몇천 독을 하더란대도 성경에 전능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능자가 보여야 합니다! 전지자가 보여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보여야 됩니다! 정말로 죽음이 보여야 됩니다! 죽음 너머 부활이 보여야 되는데 우리가 부활이 보입니까? 하나도 없어. 완전히 당달봉사입니다.

본다 하지마는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이념과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평가와 우리의 비판은 완전히 세상적이지 성경적은 아닙니다.

그분은 주님을 지나간다는 소식 들을 때에, 소리 들을 때에 이분 못 만나면 나 죽는다, 이분 못 만나면 내가 살아봤자 별수 없다 해서 그들이 막 억압하고 이라니까, 억압하고 이러니 그때 많은 군중 심리에 박해 주면 거기서 뭐 짓밟혀서 다 발에 밟혀서 절단날 것 아닙니까? 그래도 내가 안 죽고 살아봤자, 예수님 못 만나서 눈 못 뜨이면 살아봤자 죽는 것이 낫지 살아봤자 별수 없는 것, 밟혀 죽으면 죽고 예수님 만나면 만나고, 만나서 눈 뜨이면 다행이고 안 만나면 밟혀 죽고, 눈 못 뜨면 살아봤자 별수 없다는 이것을 계산했기 때문에 그는 결사적으로 달라들었어요. 결사적으로 주님, 주님이 지나간다는 소리 듣고서 결사적으로 달라들었어.

내가 어떤 사람 보니까 성경에 성자들마다 다 주님이 자기를 만나게 되는 그런 기미가 보이니까 그만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밥도 굶고 모든 것 다 전폐하고, 후란시스 그분도 주님이 자기에게 좀 나타나 가지고 주님의, 주님이 영안을 뜨여서 그 신령한 면이 좀 보여지니까, 보여지니까 모든 것 다 두고 그분도 석 달 동안이나, 석 달 동안 어데 가 있었는데 나중에 오니까 그 사람을 동리에 가니까 다 모두 돌로 던지며 귀신 온다고 다 유령이라고 그렇게 모를 만치 피골이 상접되기까지 찾았고, 바울도 보면 아라비아에 가 가지고 삼 년 동안 있는 그것이 주님의 흔적이 보여지니까 놓지 안하고 달라들어 가지고 그렇게 했고, 뭐 다 사람들마다 다 그렇게 주님의 흔적이 보여져서 그 신령계에 하나님의 계약이 하나씩 둘씩 보여져서 그 계약의 실상이 보여질 때에는 그만 자기는 모든 것 다 버려두고서 주님 만날라고 애를 쓸 때에 그때에, 물론 그 여러 사람이 방해하는 거와 같이 가족 방해도 있고, 경제 방해도 있고, 사업 방해도 있지만 모든 거 눈에 안 보이고 다, 다 눈에 안 보이고 예수님 만나야 되겠다는 이것이 우리는 생명을 초월해서, 생명을 바쳐서 예수님 만나야 되겠다는 요게 있어야 우리 영안은 뚫힙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은 뚫힙니다.

절대로 땅위에 믿음의 눈이 열리는 것 이것보다도 땅위에 귀한 게 있는 사람은 그는 천리 만리 거리 멀어서 못 봅니다. 땅위에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만나서 믿음의 눈 밝아지는 것이 자기 생명이 사는 것보다 귀하다고 평가하는 거게서 된다는 걸 요게 보이고 있습니다.

요 바디매오가 모든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야단을 칠 때에, 그때 군중 심리에서 뭐, 그때 유대 나라에서는 소경이니 이런 문둥이니 하는 것은 죽여도 상관없어. 그거 아무 거석없어.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뒤에 뭐 “하나님은 자비를 기뻐하신다” 이랬지 그 병신들 근방에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모든 군중들이 자기를 그래 하니까, 물론 그것도 생명의 위험성도 있고 오만 것 다 하지마는 그것보다, 자기의 생명의 위험성이 있는 그것보다 주님 만나서 눈 떠야 되겠다. 주님 만나서 이 계약에 계약돼 있는 것이 실상인지 거짓부리인지 이거 알아야 되겠다. 요 믿음이 있어야 되고, 그래 가지고 주님이 오라 한다고 하니까, 주님이 오라고 하신다고 이제 자기에게 그 소망하는 눈 띄워 주실 분이 가까와오는 그런 기미가 있으니까 자기의 겉옷을 버리고, 겉옷을 벗어버려 버리고 달아났다 이랬습니다. 예수님에게로 달아났다 이랬어.

이러니까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계시되어 있는 계약된 이것이 실상을 볼라고 하면은 겉옷은, 그 거지의 겉옷은 제일 재물 중에 귀한 재물이오.

재물의 소유의 전부입니다. 그거는 그저 겉옷 하나가 이불도 되고 요도 되고 그거 하나뿐이지 딴거 없습니다. 겉옷이라는 것은 자기의 있는 소유 다 집어던지고, 그거 다 집어던지고 예수 만나서 이 계시에 계약되어 있는 계약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요 진상과 실상을 보고자 하는 요 믿음이 아니면 못 봅니다.

오늘 공연히 이리 저리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거 다 거짓부리로 이렇게 하고 있지, 내가 오늘 어떤 사람 말 들으니까, 그말인가 내가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이 입신했는데, 그거 다 거짓부리로 그분은 웃는 소리로, 거짓부리로 ‘네가 땅위에서 어떤 목사를 만나보고 왔느냐?’ `만나보고 왔습니다.' 모릅니다. ‘그거 다 거짓부리다. 너는 기적과 표적을 많이 하고 왔는데 그것도 거짓부리다.’ 와 가지고 ‘나는 이제 새로 예수 믿을라고 한다’고서. 그거, 그것도 믿을 수 없는 거짓부리 세상이지마는.

어쨌든지 우리가 신구약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계시되어 있는 그 사실, 계시되어 있는 요 실상을 보는 우리가 눈 가지는 거 이것이 우리의 그만 금생과 내세에 흥망성쇠의 원인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요 실상을 내가 보는 거, 이 실상을 보는 거. 우리는 전능자를 봐야 되겠습니다. 개별 주권 섭리자를 우리는 실상 봐야 되겠습니다. 그분이 개별 주권 섭리하고 계시는가 봐야 되겠어.

이 보는 데에는 자기의 겉옷 다 버리고 주님에게 달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달렸다” 했습니다. 그 뛰어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믿음이, 주님이 이제 ‘오라 하신다’ 주님이 오라 하신다는 그 말을 듣고 난 다음에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 병신이 뛰기부터 뛰었습니다, 훌쩍. 그 광경을 볼 때에 고게 믿음이라.

뭐 천천히 뭐 챙기고 챙기고 정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고 그만 비정상으로 일어났어, 비정상으로. 비정상으로. 요런 갈급과 요런 간절이 없이는 절대로 믿음의 눈은 뜨지 않는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주님에게 가니까 주님이 “내가 너에게 뭐 해 주기를 기다리느냐, 원하느냐? 뭐 해 주기를 원하느냐?”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내가 주님을 만났을 때에는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집니다. 믿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믿음의 눈이 밝아져서 그럴 때는 이것도 되겠고 저것도 되겠고 안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만사가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 믿어집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에는 아무리 평소에 ‘그놈은 희망 없는 놈이다’ 해도 ‘왜 희망이 없어?’ 세상에는 희망 없는 게 하나도 없고, 망할 게 하나도 없고, 안 될 게 하나도 없고, 막 전체는 다 소망이요 희망이요 안 될 것이 없는 능치 못함이 없는 우리에게 확실한 희망이 들어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것 저것으로 흩어지기 쉽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너한테 뭘 해 주기를 원하느냐?” 돈 달라 하면 돈 줄 거고, 권세 달라 하면 권세 줄 것이고, 주님이 이때 ‘내가 너한테 뭐 해 줄라 하는지 해 달라 하는 대로 네가 소원을 해라’ 할 때에 말하면 뭐이든지 다 해 줄, 해 줄 수 있고 당신이 해 줄 권리 있고 하니까 해 주기를 욕망했을 터인데 바디매오는 다른 거 하지 안하고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나를 하나님께서 올리워 가시기 전에 네가 나에게 구할 것을 구해라. 뭘 구하겠느냐? 왕권을 구하느냐 뭘 구하느냐?” “아닙니다. 당신의 영감, 당신의 영감을 나는 갑절이나 주십시오. 당신의 영감의 눈으로 모든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보고 믿었기 때문에 당신은 이스라엘의 마병이요 병거요, 그대로 봤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부 당신의 하나님이 돼 가지고 다 된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보는 그 영감의 눈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엘리사가 간청한 것처럼, 바디매오는 이렇게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요것은 우리가 그렇게 눈 뜨기 시작하면 ‘이제 희망이 보여지니까 공부할 길도 열렸다, 공부할 길도 열렸다, 출세할 길도 열렸다. 사업에 이런 사업의 길도 열렸다.’ 오만 걸 다 그래 만가지 형통해서 땅위에 지저분하게 열 가지니 스무 가지니 백 가지니 다 형통하고 하면 됩니다. 되나 그 모든 것 천하를 차지하는 것보다도 내가 믿음의 눈이 밝아서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에 약속으로 계시해 놓은 요 약속의 실상을 보는 요것을 보여 주십시오 하는 요것을 원하는 자에게만 눈이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할 때에 즉시 눈 뜨이고 보니까 갈 데가 없습니다. 눈 뜨이고 나니 예수님 버리고 갈 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면 다, 예수님 외에 찾을 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계약을 보는 이 계약을 본다면은 예수보다, ‘보배 보배 예수, 보배 예수 보배 예수,’ 예수 외에 찾을 게 뭐 있습니까? 우리가 공연히 어리석게 지금 이 비참해도 비참한 줄도 모르니 이게 참 얼마나 비참 속에 들었습니까? 이 썩어질 거 없어질 거 성도의 가질 것은 아닌 거, 죄뭉텅이로 가지고 있는 거, 죄뭉텅이로 가지고 있는 이것이 이것이 좋은 건 줄 알고 그게 분투 노력하고, ‘이번에는 죄 지어 가지고 돈이 한 뭉텅이 들어왔다, 지위가 하나 올라갔다, 좋았다!’ 하니 마귀가 주는 눈만 있지 우리가 믿음의 눈이 있는가! 신구약 성경을 믿는 믿음의 눈이 있는가?

우리가 아무래도 이번 기회는 새로워져야 됩니다. 우리가 이번 총공회에서 새로워져 우리 총공회가 한번 깨끗해져야 되지 이래 가지고는 우리가 안 돼. 전부 외식입니다.

외식이기 때문에 권할 말이 있고 책망할 말이 있고 가르칠 말이 있지 우리 눈 뜨이면 다 되는데, 뭐 있습니까? 눈 뜨이면, 눈만 떠서 하나님의 계시된 이 모든 것의 실상을 보는 눈만 있으면 거게 내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다 거게만 기울이게 되니까 이만하면 다 돼 버렸지 뭐 다 됐는데 딴거 뭐 찾을 게 뭐 있습니까, 있기를? 이렇게 눈을 뜨는 데는 거게 있는 그 간단 명료하게 그 순서를 가르치셨으니 그 순서의 그 경로를 통과하기 전에는 절대 믿음의 눈은 뜨여지지 않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감사합니다. 주님이 이 거룩한 공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이 피로 구속하시고 구속을 위해서 허락하신 성령과 진리로 우리들을 다 살려 주셨사오니 이 은혜가 이 공회를 주장하셔서 금번 이 공회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확고하게 새로와지고 우리의 모든 소망의 눈이 밝아지게 하사 이 어두운 세상에서 참으로 비추는 빛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이 선포해 놓으신 우리의 구원의 이 실상과 우리의 근거의 이 실상의 무한하심과 완전하심의 지극히 크심을 확실히 보는 저희들 되게 하사 세상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금번 이 공회에서 한번 새로움을 출발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고 남은 모든 순서도 주님이 주장하셔서 주님에게 영광되고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의 것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은 하나도 발작하지 못하게 하시고 순전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공회가 되사 주님이 기뻐하셔서 동행하고 함께 하는 역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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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불심판 준비/ 베드로후서 3장 9절-13절/ 870724금새 선지자 2015.11.02
40 불심판에 대한 표준적 계명/ 마태복음 25장:31절 -46절/ 820317수야 선지자 2015.11.02
39 불심판에 대한 표준적 계명/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820314주전 선지자 2015.11.02
38 불쌍한 사람/ 사도행전 3장 1절-13절/ 850506월밤집회 선지자 2015.11.02
37 불쌍한 사람/ 사도행전 3장 1절-21절/ 850507화전집회 선지자 2015.11.02
36 불쌍한 세 사람/ 사도행전 3장 1절-13절/ 850505주전 선지자 2015.11.02
35 불쌍한 의인/ 사도행전 3장 1절-16절/ 790814화전집회 선지자 2015.11.02
34 불의의 재물로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복음 16장 11절/ 840427금새 선지자 2015.11.02
33 불의의 재물로 친구 사귀는 법/ 누가복음 16장 9절/ 840420금야 선지자 2015.11.02
32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요한일서 3장 16절/ 840421토새 선지자 2015.11.02
31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 16장 9절-10절/ 880320주새 선지자 2015.11.02
30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 16장 9접-10절/ 880322화새 선지자 2015.11.02
2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 16장 9절/ 880321월새 선지자 2015.11.02
28 불의한 청지기의 고민/ 누가복음 16장 3절-4절/ 820614월새 선지자 2015.11.02
27 불이 섞인 유리바다/ 요한계시록 15장 1절-4절/ 871129주전 선지자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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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의 원인은 소경된 것/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870302밤총공회 선지자 201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