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어려움을 피하지 마라

 

1986. 6. 13. 새벽

 

본문:사도행전 1장 4절∼5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여기 ○○서 ○○에 취직한 직원 하나 늘 새벽 기도 나오는데 오늘 새벽에 빠졌는데, 집에 갔어? 그래.

그럴 때에 그 구역장에게 묻든지 나한테 묻든지 하고 가야되지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삼키는데 여게서 진리를 깨달아서 신앙이 살라 하면은 마귀들이 총동원합니다. 하는 데는 별별 수단과 방법을 써. 가족이 아프다 이래 가지고서 그 신앙 줄에서 고 틈을 타 가지고서 기회를 삼는 일도 많이 있어.

그러면 가족이 참으로 아프도록, 병마가 들어 가지고 아프도록 만들어 가지고 그런 것도 있고 안 아픈데 그러는 것도 있고 안팎으로 마귀가 삼킬 자를 찾을라고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날뛰는 고것을 봐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안팎에 눈이 있어야 돼. 안팎에 눈이 있다는 뜻은 많이 있지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밖이요, 또 사람들이 생각해 알 수 있는 것은 밖이오.

그러면 안은 뭐인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 그것이 알맹이요, 또 하나는 아무리 명철한 사람이라도 제 단독으로는 깨달을 수 없고 영감을 받아야 깨달을 수 있는 고것이 알맹이입니다. 안팎을 보는 눈이 있어야 되지 껍데기만 가지고 상대하는 자는 다 실패합니다. 소용이 없어.

그러기에, 우리를 삼킬라고 악령이, 신앙 좀 신앙이 생길라 하면 이사 운동, 그러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에 그게 이사 운동이오 그게.

거주 운동, 이사 운동이라. 너거가 이리 이사 갈래 저리 이사 갈래 하는 그 운동이라. 그것이 죽고 망하는, 죽고 살고 망하는 흥하는 그 갈래길이라 그거요.

그랬는데, 아브라함은 인간과 보이는 현실에 피동되어서 움직이지를 안 했고 하나님에게 피동됐고 롯은 보이는 모든 사람들과 현실을 따라서 움직였기 때문에 비참하게 됐다 그거요.

뭐 하나라도 깨달으면 되는데 암만 말해 봐야 깨닫지 못하면 소용 없습니다.

사람이 비록 존귀한 데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할 짐승과 같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그보다 더 존귀한 것이 어데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받았으니까 굉장히 존귀한 자리에 있지마는서도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꼭 같애.

짐승과 같다 그말이 무슨 말이요? 육체로 산다 그말이오. 육체로 산다 그거야.

인간을 탁월한 객관의 은혜 하나님의 성령으로 살지 못하고 항상 제 주관으로 산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사 갈라 하는 그것은, 이사 갈라는 거 또 무슨 갑자기 사고가 생겨서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다는 거, 그런 것을 대개 보면 거의 열의 열이 다 좋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옮기는 것도 있소. 하나님이 옮기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거게 두면은 멸망받을 것이기 때문에 구원 얻도록 옮기는 것도 있어.

그래서, 사람이 안팎에 눈이 있을라고, 안에 눈이 있을라고 성경 보고 기도하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기도해도 인간이 보지 못하는 거, 인간이 생각지 못하는 거,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거 그런 것을 보고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 그 능력을, 영감의 능력을 받아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암만 기도하러 다녀도.

어제 내가 어떤 사람 하나 만났는데 그 사람이 오늘 아침에 나왔는지, 그 사람도 또 보면 새벽 기도에 자유가 없어. 나오기는 나왔구먼.

기도하러 가서 좀 위에 올라가 가지고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하니까 이상하게 자기 마음이 밝아지더니마는서도 성경을 보는 데에 깨달아지는 것도 과거와 달리 깨달아지고 또 믿어지는 것도 더 확실히 믿어지고 또 예수님에게 대한 대속이 확실히 믿어져서 참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생명 바쳐 죽기까지의 신앙을 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되겠다 이제는 옛사람으로 살지 안하고 새사람으로 살겠다는 그런 마음이 강하게 오고, 또 입에서는 기도가 줄줄줄줄 자꾸 나오는데 기도하는 걸 자기가 들어도 참 그 기도는 아주 올바른 기도라 하는 것을 느껴졌다고.

목사님이 늘 말씀하시더니마는서도 이게 영감인가 그렇게 말하면서 와서 말을 해.

무엇인가 기도하러 가면 깨달아야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는 이것을 그때 뭐 예루살렘 떠나지 말라는데 지금은 우리 어데 예루살렘에 있나? 한국에 있는데. 얼토당토 안 한다 하는 그자는 그래 모두 다 해석을 하는데 성경에는 믿는 이치를 가르쳐 놓은 것이 성경이오. 믿는 이치, 이치를 가르쳐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성경에서 예수님 믿는 이치를 배워야 되지 이치는 배우지 안하고 그때 역사에 어떤 형편이 있었다 하는 그런 거야 암만 알아 봤자 소용 없어. 그게 무슨 소용 있어? 그들에게 당한 이치는 내게도 그 이치는 다 해당하고 그때에 그들이 그 이치로 실패한 것은 오늘 나도 그 이치로 실패하고 그때 그들이 그 이치 가지고서 승리한 것은 나도 그 이치 사용하면 승리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허락하신 걸 기다려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그것은 아버지가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너희들이 알 바도 아니다’ 이것이 그때만 아니라 지금도 해당됩니다.

제가 기도하러 가면서 제 답답한 일, 제 어려운 일, 제 소원되는 일, 제 난제 이 해결을 가질라고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거 다 성경을 몰라 그렇습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아버지의 권한에 맡겼다’ 우리가 지금 전 민족이 이렇게 답답해 죽을 지경이고 이렇게 큰 어려움을 만나고 있는데 온 백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체가 다 동감으로 지금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까 메시야가 오면 해결해 줄 터인데 메시야가 오는가 이렇게 고대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실라고 지금 모든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좀 이상하다 그거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라, 예루살렘 떠나지 말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라 이라니까 아마 이때인갑다 싶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우리가 이렇게 큰 도탄 가운데에 큰 가련과 환난과 말할 수 없는 참 극난에 처해 있는데 이 극난을 메시야가 언제 와서 해결해 줄 건가 하고서 고대하고 있는데 이 나라의 해결이, 메시야가 오셔서 이 해결해 주시는 해결이 지금입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뭐라고 말했소? 이거는 너희의 알 바 아니라 여게는 상관도 하지 말아라.

요거 해석 잘못하면 신앙 다 패전합니다. 암만 들어야 생명인지 생명 없는 것인지 고걸 구별을 못 해. 이러기 때문에. 과거에 그렇게 많은 한국 교회가 있었지마는 신사 참배에 다 꺼꾸러졌지 뭐 그때 신사 참배 한다고 신사 참배에 다 절하고 난 다음에 무슨 주님을 그뭐 구주로 믿어? 과거 믿은 게 다 헛일이야. 다 헛일이고 새로 믿어야 되지.

이거 모양으로 지금도 그래. 산에 가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자기의 어려운 난제 어려움 그거 해결할라고 하나님에게 가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은 다 헛기도입니다. 그런 걸 내가 여러 수백 번 말했어. 말해도 귀에 안 들어가.

그런 것 다 포기하고, 기도하는 것은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 문제를 해결할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소원과 주님의 뜻을 이룰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게 기도입니다. 뭐 감감하니까 언제 배워 가지고 언제 깨달을란지.

오늘 아침에 그런 거 다 냅두고. 우리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하는 것이 신구약 성경에 법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되느냐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에만 기록돼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외에는 딴 데는 아무데도 기록이 안 돼 있어. 신구약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의 본분에 유일한 법칙입니다. 성경대로 믿어야 돼. 많은 사람들의 역사 통계 모든 많은 학자들의 말대로 믿어도 안되고 꼭 성경대로 믿어야 돼요.

이랬는데, 그러면 성경은 육십 육 권이 꼭 같은 성경이지마는도 그 성경에 대해서 깨달음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깨달음이 하나뿐입니까 혹 둘이 됩니까 서이 됩니까 혹 열도 되고 백도 될 수 있습니까? 거게 대해서 깨달음이 하나겠습니까 그 수가 많습니까? 그 깨달음이 꼭 동일하게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버뜩 들어 봐요. 동일하게 깨달음이 하나뿐이라는 거. 깨달음은 사람이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이 깨닫는 것인데 그 깨달음이 꼭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또 그 깨달음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니 둘도 열도 백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이게 맞아. 안 그렇소? 같은 성경이지만 주석이 백 종류도 더 나왔는데 그거 보면은 다 각각 다 다르다 그거야. 그렇지 안해요? 말 좀 바로 말을 좀 못 들은 거 같애. 아마 처음에 손 든 사람들은.

그러면, 거게 대해서 바른 깨달음은 둘이겠습니까 하나겠습니까? 바른 깨달음은 둘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바른 깨달음은 천인 만인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말해도 꼭 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녜, 하나뿐입니다. 요것만 잡아 두면 돼요, 요것도.

그러면, 사람의 신앙 행위는 무엇을 따라갑니까? 신앙 행위는 무엇을 따라가지요, 무엇대로 신앙 행위하지요? 깨달음대로, 깨닫는 대로 신앙 행위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그 사람이 깨달은 대로 신앙 행위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이렇지요. 안 그래요? 그 사람은 이래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신앙 행위하고 저렇게 깨달은 사람은 저렇게 신앙 행위하고 그 깨달음이 다르면 그 두 사람의 신앙 행위가 같애요 달라요? 달라요.

그러면, 깨달음이 만일 이렇게도 깨닫고 저렇게도 깨닫고 두 양면으로 깨달았다고 하면은 그 사람의 행위는 일관되겠습니까 이종되겠습니까? 일관됩니까.

이종됩니까? 이종되지요. 이래도 깨달았으니까 이래도 행하고 이래도 행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행해서 어려울 때는 이렇게 행하지 뭐. 그렇지 안해요? 또 이렇게 행해서 어려울 때는 또 이렇게 행하지.

그러면, 고 성구에 대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행동할 행동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그런데 깨달음이 둘이라면 그 사람은 그 행동이 둘 되겠습니까 하나 되겠습니까? 둘 됩니다.

그러니까, 둘 되면 쉬운 거 찾아가겠소 어려운 거 찾아가겠소? 쉬운 거 찾아갑니다. 이래 가지고 다 망했습니다.

진실이 없는 사람은 신앙 생활을 절대 못 합니다. 제가 암만 학박사라도 못 하고 아무리 유명한 부흥사라도 그 사람에게 진실이 없으면 신앙 생활은 전혀 없습니다. 요걸 알아야 돼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깨달음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깨닫게 하는 것은 두 종류가 아닙니다. 하나뿐입니다. 하나뿐이오. 깨달음이 둘은 아닙니다.

하나뿐입니다.

하나뿐이라는, 하나님이 그 성구로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그 도리는 하나뿐인지 둘인지 양성원 학생들, 그저 아무나따나 여기 가면 이렇고 저기 가면 저렇고 창기 모양으로 그런 행세하지 말고, 똑똑히. 뭐 벌써 다 엔간히 가르쳐 놨기 때문에 상관없어. 가 버려도 좋아요. 진작 갈 거는 가버리지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거 회개하지 안하면.

주님이 성경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셨을 때에 그 성경으로서 우리에게 요렇게 해라 조렇게 해라 하는 행동하는 고 행동에, 인도하는 고 행동 고것이 깨달음인데 그 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이지요. 고거 확실히 믿어집니까? 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도 바른 깨달음이라 저렇게 하는 것도 바른 깨달음이라 이렇게 둘 다 바른 깨달음이라고 이렇게 인정을 하는 그 사람의, 깨달음대로 행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은 대로 신앙 행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도 깨닫고 저렇게도 깨달았으면 그 사람 신앙 행위가 일관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두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예? 두 행위를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두 행위 하니까 그 사람이 어려운 행위는 피하고 쉬운 행위를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든지 요렇게 하면은 어려운데 요쪽으로 하면은 아주 놀기입니다. 아주 쉽습니다.

그러면, 쉬운 행위가 바른 행위겠소 어려운 행위가 바른 행위겠소? 여기 저 양성원 학생들. 그러면 행하기 쉬운 행위가 바른 행위겠소 행하기 어려운 행위가 바른 행위겠소 어떤 것이 바른 행위겠소? 양성원 학생들 한번 답을 해 봐요.

어떻겠소? 한번 대답해 봐요. 저 ○○ 교회 간 조사님 한번 대답해 봐요.

어려운 행위가? 그말 맞아요? 양성원 학생들 맞으면 다 손 들어 봐요. 맞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양성원 학생으로 맞는 사람. 두 행위 중에는 어려운 행위가 그게 옳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또? 그러면 나머지기 안 드는 사람은. 쉬운 행위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쉽고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딱 들어맞는 행위라야 바르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이거야. 이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쉬울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어려우면, 아무나따나 어렵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는 그것이 고행주의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것을 뭐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 그렇게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거냐 저거냐 둘 중에 하나이지 그게 진실입니다.

거룩이라 말은,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말했는데 거룩이라는 것은 선별이라는 말이오. 거룩이라는 것은 자꾸 거게서 이거는 옳다 이거는 틀렸다 자꾸 이렇게 선별하는 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거룩. 이렇게 저렇게 자꾸 가려서 선별하는 것.

어느 게 옳은고 자꾸 이렇게 가리는 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고 말하고, 가려 가지고서 올바른 것을 가렸을 때에 그것을 거룩이라 합니다. 가려 가지고 모든 걸 다 제거하고 그중에 올바른 것을 하나 찾았을 때에 거룩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선별 과정과 선택한 고것을 겸해서 말할 때에 거룩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진실이라 말은 선별이 거게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선별이라 말은 가릴 선 자 구별할 별 자 이래 가리고 가리고 자꾸 구별하는 것을 가리켜서 선별이라 이랍니다. 이런데 진실에는 선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 진실에는 선별이 없어.

진실은 참인 고거라.

그러기 때문에, 거룩이라는 것은 그 과정과 참을 말하는 것이고, 과정과 참에 도달한 걸 말하고, 선별과 진실을 겸해서 거룩이라 말하고 진실이라는 것은 선별 그것은 다 떼내 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올바른 것을 찾아서 가졌을 때에 그때 진실이라 말합니다. 거룩하고 진실, 예수님이 거룩하고 진실하다고 말하지 안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깨달음이 바로 되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이러니까 전부 깨달음을 이 세상 배암의 지식들이 깨달은 거, 왜? 이제 부모도 배암의 지식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녀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배암의 지식밖에는 가르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치는 그 부모가 별로이 없고, 또 학교 가면 이건 순전히 배암의 지식만 가르칩니다. 그렇지 않소? 거게 뭐 성신의 감화를 가르치는 데가 뭐 있어? 이래 놓으니까 모든 것에 대한 그 깨달음이 바로 될 수가 없어.

이러니까, 배우기를 전부 그래 배웠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뭘 좋아합니까? 자기네들이 깨닫기 쉬운 것은 배암의 지식대로의 깨달음이 알기 쉽겠소 성령의 가르침대로의 깨달음이 쉽겠소? 배암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이 쉽습니다. 저거 또 성질에 맞은 것은 뭐일란지, 비위에 맞은 것은 뭐일란지, 욕심에 맞은 것은 뭐일란지, 그것은 영감이겠소 인간 생각 악령 악성 악습에게 맞은 것이겠소 어떤 것이겠소? 악령 악성 악습에게 맞은 것이 저희들의 비위에 딱 맞습니다.

이러니까, 다 같이 말을 해도 땅의 음성은 저들이 알고 있는 것이고 저거 것이기 때문에 잘 듣고 듣기 좋고 깨닫기 쉽지마는서도 하늘의 음성은 듣기도 싫고 들어 보지도 못했고 또 깨닫기도 어렵고 싫습니다.

테레비에서는, 자꾸 테레비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자꾸 보고 싶은데 왜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면 잠이 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뭐입니까? 그런 데서도 다 깨달아야 돼.

그게 뭐이냐? 그거나 내나 설교할 때에 땅에 소리는 하면 듣기 좋고 잘듣고 하늘의 소리는 하면은 듣기 싫은 그거 내나 그거나 꼭 같은 종류의 말이오. 그 같은 종류요 딴 종류요? 같습니까? 내가 하는 말이 틀렸소 바르요? 이거이거 좀 우리도 좀 고쳐야 돼. 좋은 거면 따라가야 되지 초대 교회들은 그런데 점잔만 빼 가지고서 떡 앉아 이럴 게 아니라 소리를 안 내면 그냥이라도 ‘아멘’ 해야 돼. 한번 해 봐요? 아멘! 아멘! 설교를 들으면서 고게 옳으면 ‘아멘’ 이라고, 틀리면 벌써, 고랬으면 좋겠어. `아니다' `아니다' 이래야 될 것이오.

여기 ○○○ 장로님이라고 그 사람이 ○○ 신학교에 우등으로 졸업했고 우리 한국 교회에 문화 운동이라고 학교를 시작할 때에는 그때에 한일 중고등학교가 우리 전국에 기독교 학교로서는 제일 일호 학교고 또 높은 학교입니다. 그 학교에 교장으로, 초대 교장으로 지낸 사람입니다.

이랬는데, 그 사람이 그만 ○○ 교파에서 배척을 당하고 이래 가지고서 이제 아무것도 하지도 못하고 그만 그냥 돌아다니면서 얻어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서도 매월 삼만 원씩을 구제 줍니다.

나는 그 주는 그것이 달리 주는 게 아니라. 그때 ○○ 교파에 한창 그럴 때에 다른 사람들은 거게서 뭐 하는 일을 보고서 그저 이래 꾸뻑 하는데 그 사람이 있다가서 일어나서 ‘밥은 쉿다. 밥은 쉬었다.’ 쉬면 썩지. `밥은 쉿다. 벌써 ○○ 교파에 하는 일이 쉿다. 좀 있으면 썩는다.’ 이라니까 막 청년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이렇게 했어. 그래도 그때 쉰 것을 보고서 쉿다 하는 그말 한 마디 한 그것으로서 나는 지금 대우하고 있습니다. 공연히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래야 돼요.’ 아니다' ‘옳다' 이럴 수 있어야 되겠어. 그것이 강의를 듣는 자의 산 증거입니다. 이 무슨 정견 발표를 할 때도 정견 발표할 때에 아니면 ‘아니다’ 옳으면 `옳다' 이렇게 돼야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듣는 사람들이 옳을 때는 ‘옳소’ 아니면 `아니오' 이런 백성 같으면은 그 정견 발표하는 자들이 삐뚤어진 일을 못 한다 말이오. 하면은 모두 다 ‘아니오’ 이래 버리면 그까짓 게 무슨 투표를 얻겠어? 옳게 말하면 ‘옳소’ 이렇게 되면 될 터인데 이 백성들이 썩었기 때문에 정객이 썩고 정객이 썩기 때문에 백성들이 썩습니다. 교역자가 썩었기 때문에 교인들이 썩고 교인들이 썩었기 때문에 교역자가 썩습니다.

옳은 것이면 ‘아멘’ 또 틀리면 `아니오' 이리 돼야 될 터인데 뭐 이거고 저거고 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 어리석은 교인들은 잘 따라가니까 좀 잘 믿는 것들이 지금 이것을 구별해서 해야 될 터인데,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있고 또 여게 목사님들이 있고 이러니까 그분들이 듣다가 암만 백 목사 설교해도 ‘아니오’ 이러면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말이오. `옳소. 아멘.’ 이라면 또 영향이 클 거라 말이오. 이거는 옳아도 그만 아니라도 그만 이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헛일이라.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는 것도 땅에 속한 거 배암의 지식을 좋아하고 비위에도 맞고 성질에도 맞고 제 행동에도 맞고 성령의 그 가르침은 제 지식에도 안 맞고 성질에도 안 맞고 비위에도 안 맞고 욕심에도 안 맞고 행동에도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이래도 ‘안 맞습니다’ 헛일이야. `안 맞습니다!’ 요렇게 말하면 환하게 이치가 그렇기 때문에 ‘안 맞습니다!' 막 이 소리가 쪼개질 만치 ‘안 맞습니다!’ 막 요렇게 하고 싶은 요 간절이 있어야 될 터인데 그래 놓으니까 앞으로 승리를 못 해. 환해요, 지금. 앞으로 패전할 거 승리할 거 환해.

암만 배워도 지금 여러분들이 바로 못 배우면 헛일이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는 이 말이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그 어려움을 피해 가지 말아라 그말이라고 해석한 것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하면은 죽었어. `어떻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느냐?’ 한다든지 그리 안 하면 ‘옳다' 이거든지 둘 중에 하나로 단정해야 앞으로, 왜? 이 깨달음이, 이 깨달음이 생명을 내놔야 될 그 깨달음이기 때문에 생명 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확고한, 확실한, 자기딴에는 확신이 있고 확실히 믿어지는 것이라야 생명 내놓지 그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데에 누가 생명 내놓을 사람 있어? 신앙 생활은 다 생명 내놓고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나따나 생명만 내놓았다면 돼? 여기 물어 보니까 오늘 아침에는 ‘어려움을 택해 가는 신앙 생활이라’ 그렇게 말해. 그러면 생명만 내놓으면 되는구먼. 그러면 기독교가 고행주의입니까? 고행주의라 말은 고생만 하면 된다 하는 것이 고행주의입니다. 기독교는 고행주의 아니오. 안 할 고생은 털끝만치도 안 해아 됩니다. 할 고생은 생명을 내놔서 죽어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게 바른 깨달음에 있을 것 아니겠소? 이러니까 바른 깨달음이라 말은 바른 해석이라 그말이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하는 이 말을 얼토당토 안 하게, 그때에 예루살렘 떠나지 말라고 했는데 뭐 그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우리에게 해당되느냐?’ 그러면 그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는데 이 성구를 우리에게 복음으로 줬고 우리의 신앙 생활의 유일한 법칙으로 줬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면 어째야 되겠소? 우리는 어째야 되겠느냐 그말이오.

우리는 그러면, 그때에 예루살렘이니까 우리로 말하면 서울이라 해야 될까, 서울을 떠나지 말아야 된다 해야 될까, 자기 현실을 떠나지 말아야 된다 할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 어려운 현실이면 그러면, 현실이면은 어려운 현실을 떠나지 말라 하면 되겠습니까? 어려운 현실은 다 우리가 피하지 안해야 됩니까? 어째야 돼요? 어려운 현실은 그러면 피하지 말라고 그래 해석을 해야 될까? 어려운 현실을 피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알겠습니까? 할 수 있는 대로 어려운 현실 망하는 현실 손해가는 현실을 다 피하십시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이 어려움은 피할 수 없다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움을 피하지 안하지요. 고난을 피하지 안하지요.

그러면, 하나님 말씀이 당하라는 고난을 당하지 고난당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당해요? 그러면 고난을 피해서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고난을 무엇이든지 당해야 돼요? 죄 지어서, 하나님 말씀에 위반되어서, 잘못해서 고난당하는 것이라면 그것 얼른 옮겨 서야 돼요 그 자리 있어야 돼요? 얼른 회개하고 옮겨서야 돼. 그렇기 때문에 요리 깨달으면 망하고 요리 깨달으면 삽니다.

이러니까, 이 예루살렘 떠나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예수 믿는 신앙 생활 때문에, 신앙 생활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그 어려움을 피하지 말아라 한다는 것으로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제가 했습니다. 요 해석은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믿어야 되느냐? 생명을 내놔도 요 도리는 바로, 깨닫기를 ‘요 어기면 죽고 지키면 산다’ 요렇게 확고하게 믿지 안하면은 생명 내놓을 그런 지경에 요 도리를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못 지키지요.

그러면, 예수님 때문에 그때, 그러면 예수님 때문에 그때에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었었는데 예수님의 뭣 때문에 박해가 있었습니까? 예수님 뭣 때문에 박해 있었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했기에, 예수님이 무엇을 했기에 예수님 때문에 그런 박해가 있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박해가 있다니? 예수님의 뭣 때문에 박해가 그래 있었습니까? 고거 말해 보십시오. 예수님 뭣 때문에 그런 박해가 있었지요? 지식 마찰? 천리 만리 거리 멀어. 위험해요. 늘 물어 보면 묻는 것에 엉뚱하게 그 각도가 아주 다를 때 많아. 그 각도가 발라야지 각도가 틀리면 안 돼요.

그때에 예수님 때문에 큰 박해가 났는데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뭣 때문에 그렇게 박해가 생겼든지 모를세요. 예수님이 뭘 했기 때문에 그렇게 박해가 생겼습니까? 저 ○○○교회. 부활? 부활 때문에? 부활 때문에? 뭐 부활한 거나 무슨 상관 있어. 부활하거나 무슨 상관 있어? 부활 하거나 안 하거나 무슨 부활한다고 문제가 생겼어요? 또 다른 사람 없어? 저게 양성원 학생, 바로 깨닫게 했기 때문에? 저 ○○교회, 이렇게 심령이, 성령이 안 와 그래요. 심령이 어두워요.

나 어제 그 사람 말 듣고 어떻게 고마운지. 보니까 환하게 밝아져. 성령은 뭐이냐? 심령이 밝아져서 깨달음을, 자기가 깨닫지 못하는 자기 이상의 객관의 능력으로 깨달아지는 그게 성령의 감화입니다. 자기 주관으로 신앙인 게 아니라 객관의 능력으로, 평소에 요런데 자기가 평소에 없던 객관의 능력으로 믿어지는 믿음이 생겨지는 것이 그것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또, 평소에는 거게 대해서 그렇게 소원이 없었는데 평소에 없던 간절한 소원 생겨지는 것이 그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내가 여게 대해서는 소유와 몸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바쳐서 하겠다 하는 그 행동에 간절한 소원과 행동할 수 있는 뜨거운 능력오는 것이 그게 성신의 감화입니다.

어두워 놓으니까 도무지 깨달음이 항상 인간 테두리를 벗어나지를 못해.

그때 예루살렘에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 당한 거는 둘입니다. 예수님의 사활 때문에 어려움 당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삶 때문에 어려움 당했소.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안했으면 예수님이 부활한다고 무슨 상관하겠소? 예수님 죽이는 데에 상관없는 사람들은 그때 예수님이 부활한다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저희들이 죽였고, 죽였는데 살아난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었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예루살렘에 그 어려움 당한 것은 예수님 뭣 때문에 어려움 당했어요? 뭣 때문에 어려움 당했어요? 예수님의 사활 때문에 어려움 당했다는 요 대답이, 요 깨달음이 조그마치라도 틀림이 있어요 없어요? 틀림이 있어요 없어요? 요 깨달음은 생명을 내 줘도 요 깨달음은 요동치 안할 만침 확고히 잡았습니까? 안 잡으면 헛일이야.

우리가 성경 깨달은 것은 전부가 다 그 깨달은 고대로 행할라 하면, 어떤 깨달음이든지 깨달은 고대로 할라 하면, 평소는 안 그렇지마는 깨달은 그대로 행할라 하면은 생명을 내놔야 되는 고런 경우가 없는 깨달음이 별로이 없다 말이오. 이래 깨달을 때는 생명을 내놔도 ‘요거다!’ 이렇게 생명보다 중량이 있는 그 깨달음을 가져야 되는 건데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 이라기 때문에 암만 가르쳐야 소용이 없어.

이 총공회 산하에 있는 교역자들이 다 죽었어. 아직까지 살아나지 못했어. 생명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안 일어나. 일어나는 그것도 뭐 얼마 해 가지고 모인다 해도 그것도 잡탱이지 별로이 참된 게 없다고 봐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요것부터, 예루살렘 떠나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거, 또 예수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거, 이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자들은 씨종도 없이 막 전멸을 해야되지 그렇지 안하면 우리가 다 죽는다 그 어려움 아닙니까? 그거 아니요? 내가 해석이 틀렸소 어떻소? 저 ○○○ 조사님 생각해 봐. 큰 소리 해 봐. 안 들려. 큰 소리로 하라니까 ‘맞습니다’ `맞습 니다!’ 이래야지. 그래.

그거야.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 때문에 어려움 일어난 것이니까 예수님의 사활과 우리와의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할라고 하면은 환난이 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할라고 하면은 환난이 옵니다. 그게 내나 우리 것이라.

우리가 죽을 것을 죽이고 살 것을 살릴라고 해서 이렇게 예수님의 사에 연합하고 예수님의 활에 연합하고 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려움 오는 것은 예루살렘에 제자들에게 어려움당하는 그 어려움과 그 어려움이 성질이나 종류나 고게 비슷합니까 꼭 고게 고겁니까? 꼭 고게 고겁니까 비슷합니까? 꼭 고게 고거라.

요렇게 깨달아서 확고 부동하게 ‘요거는 틀림 없다’ 확고 부동한 확고하게 깨달아야 이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고 생명 내놓고 걸어갈 수 있고 담대히 갈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안하면 가지를 못한다 그거야.

또, 오늘 아침에 시간 다 됐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암만 가르쳐도 못 해요.

여러분들이 양성원 학생들 뭐 여러분들이 다 목사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서 좀 깨달아요. 암만 그거 뭐, 하루 종일 배워 봤자 한 성구 깨닫는 것만 못 해요.

알겠습니까? ‘하, 요거는 해석이 이래도 할 수 있고 저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요게 맞나 조게 맞나 어느 게 맞노? 보자, 그러면 주석을 찾아보자.’ 주석을 찾아볼 때에, ‘요 주석은 내가 좀 참고해야 되겠다. 요거는 불로 사뤄 버려야 되겠다.’ 내가 여기 저 오층에서 들으니까 ○○ 목사가 이번에 경건회 인도할 때에 다른 사람 데리고 가서는 안 되겠고 자기 마누라 하고 둘이 가 가지고, 책을 싣고 가 가지고서 산에 가서 다 불살랐다 하는 그말 하는데 그말 내가 잘못 들어, 그말 합디까? 그말 해요? 다 태워. 필요가 없어, 알고 보면. 그래 요번에 좀 깨달았어.

아마 깨달았으면 그 사람의 신앙 생활에나 모든 목회가 달라져요.

이런 방편은, 천 년 만 년 써도 완전한 방편이 있고 나 혼자만 아니라 전 교인이 다 써도 완전한 방편이 있는데 그 방편은 다 필요 없고, 그 방편은 다 집어 던져 버리고 이제 지금 한 번만 쓰고 또 몇 사람만 쓰지 다 쓰면 안 될 그런 방편은 좋아해서 가고 있으니까 그것이 복음 전하는 전도 방편적으로는 창기라 음행했다 그말이오. 알아 듣겠어요? 음행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돼? 요 옳은 방편을 배웠는데, 성경이 가르치는 옳은 방편 배웠는데 ‘요 방편은 재미 없다’ 요 방편 버리고 딴 방편 갔으면은 요 방편에 대해서는 배신한 것이요. 요 방편에 이혼한 것이지 요 방편에 대해서는 이혼한 거 아닙니까? 요 방편에 대해서는 갈라진 거 아닙니까? 요 방편에 대해서 배척한 것 아닙니까? 바로 살아야 돼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 새벽으로 나와요. 새벽으로 나와야 깨닫지, 심령이 밝아지지, 심령이 어두워 가지고 있는데 무슨 구원 이루어집니까? 기도록에 등록 안 한 사람들 등록하고 등록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고대로 기도해요. 자기와 자기에 관련된 모든 미래를 위해서 기도 안 하면 앞으로 환난을 피하지 못합니다. 환난에서 다 멸망받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야,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야 앞으로 환난을 피할 수 있지 하나님의 도우심 아니면 인간의 그 힘 가지고는 이 환난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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