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관


선지자선교회 1985년 8월 3일 토새 

 

본문 : 창세기 5장 21절∼24절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우리가 날 중에 제일 귀한 날은 주일날이라, 우리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가리켜서 날 중에 제일 우리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날은 주일날이라, 또 시간  중에 제일 중요한 시간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이라 그렇게들 우리가 다  일반 상식화돼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없으면 주일날이 우리에게  소용이 없고, 또 예배드리는 시간이 있다 할지라도 예배드리는 시간에 우리가  능력 받지 못하면 예배드리는 시간이 소용이 없습니다. 능력을 받아서,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능력이요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능력인데, 하나님 앞에  말씀과 능력을 받는다 할지라도 행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또  행하는 것이면 다 되는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행동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로 변화되는 이 변화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날 중에 제일 중한 날은 주일날이요 시간 중에 제일 중한  시간은 예배 시간이라. 예배 시간을 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시간에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대로 행할 수 있는 일이 되기 때문에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동이면 다냐? 행동이면 다  아닙니다, 행동하는 것이 그 행동으로 자기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가 돼 가야 되지 변화되지 안하면 그 행동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날 중에는 주일날이 제일 중요하다. 주일 중에도 제일 중한  시간은 예배 시간이다. 암만 또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은혜  받지 못하면 소용없다. 또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행동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자체가 변화되지 안하면 소용없다 하는 것이 우리들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은 변화 받는 것인데 변화는 무슨 변화인고 하니,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모욕시키고 대적하고 마귀와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참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고 이렇게 하던 우리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로 우리 행동이 변해지고,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지는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목적인 것입니다.

 지난밤에도 모든,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이기는 그 능력을 언제  받았나? 또 자기를 이겨서 옛사람 자기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은 로마서  6장에 말씀한 거와같이 죽여 버리고, 옛사람을 죽이고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아난, 다시 난,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 좀 재미없습니다. 다시 난 너희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느니라' 이랬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해산했다 우리를 생산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은 게 살아난 것만이 아니고 새생명이 와 가지고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세상을 이기고 옛사람 자기를 이기고 악령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이렇게 모두 승리하는 그 능력을 받아서, '때를 따라 과실을 맺으라'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런 기회나 저런 기회나, 그 때라는 것은 모든 기회를 말합니다.

그때는 어떤 때인고 하니 현실이라는. 현재라는 때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라는  때를 만날 때마다 다 과실을 맺는다. 그거 비유인데, 그것은 인간의 결실을  맺는다 그말입니다. 인간의 이 결실을 맺지 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인간의  결실 맺는 것, 자기를 이기는 것이 결실 맺는 것이요 악령을 이기는 것이 결실  맺는 것이요. 죄악을 이기는 것이 결실 맺는 것이요 이런 것이 뚤뚤 뭉쳐  가지고, 천도 만도 넘은 것이 뭉쳐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이겨서 내가 세상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행하지 세상이 제가 뭐라 하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나는 딱 세상에 대해서 행해야 됩니다. 행하면 세상을 죽이는  것이요 구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나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게 할라고 아무리 발악을 하지만 마지막에는, 내가 행하면 세상이 지고 내가  행하지 못하면 세상은 이기고 나는 진 사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다  달라붙어 가지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그렇게 했지만 예수님은  기어코라도 그대로 하심으로써 끝이 났으니까 마귀는 다시 더 할래야 더 할 수  없고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복종하는 것으로써 끝을 마쳤기 때문에 예수님은  승리했고 마귀는 패전을 해서, 그래서 그걸 가리켜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 받는 거라 말이오. 능력 받는  거.

 능력 받는 것은, 자기를 옛사람 자기를 이기는 것이 능력 받는 것이요, 자기를  부인해 버리는 것이 능력 받는 것이요. 아무리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말 한 마디만 하면 그만 훅 그랍니다. 말 한 마디만 하면 그만 '옛사람이 나서  가지고 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날뜁니다. 그러면 세상이 그 사람의  옛사람을 일으켜서 옛사람으로 살고 새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할 때에 그만.

결심하고 암만 해도 옛사람으로 살아 가지고 패전한다 그 말이오. 그거는 능력  받지 못한 사람이라.

 능력 받은 사람은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약을 올리고 충격을 주고 미혹을 해도  옛사람으로 살지 안하고 새사람으로 사는 그 사람이 옛사람을 이긴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고 죽여야 할 것은 옛사람을 이기고 옛사람을 죽여야 됩니다. 로마서  6장에는 옛사람을 죽이라 이랬습니다. 옛사람을 죽이라. 옛사람을 죽여야 되고  새사람으로 살고, 마귀를 우리가 죽이지는 못 하지만 마귀의 모든 역사를 다  박살을 내고 거기다가 성령의 역사를 건설을 하고, 또 사망을 이기고 생명으로  건설해 나갑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죄를 이겨야 되겠으니까 죄를 이기고  의로 건설해 나갑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긴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마귀를 이긴다는 말이요, 마귀와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자기, 옛사람  자기를 이긴다는 말이요, 죄를 이긴다는 말이요, 사망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세상에는 이 넷이 들어서 합작해 가지고 우리 신앙을 위협합니다.'  '너 죽인다.' 죽인다고 하지만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죽이는 거 그까짓 거 암만  협박을 해봤자 상관없이 그저 사망이 오면 사망 그놈을 삼켜서, 사망을 삼켜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큰 성공을 얻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망이 와 가지고  '죽인다, 죽인다' 하니까 그 사망에게 굴하지 안하고 그 사망이 오는 그 끝까지  하나님 말씀 가지고 복음을 전했으니까 손양원 목사님이 일생 동안 산 것도 잘  살아서 복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에, 사망하고 싸울  때에, 사망을 이긴 마지막 순교한 것이 더 큰 수입과 큰 성공을 했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렇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언제 받느냐? 그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뭐 이런 저런 개인으로도 받고, 또 조용한 시간에도 받고 이렇게 받지만 대개  보면 세상을 이기는 그 능력을 받았는데 제일 큰 능력을 받아 가지고 실수 없는  그 능력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요? 그 사람은 평소에 기도로만 은혜  받은 사람도 아니요, 또 성경만 연구하고 읽어 가지고 은혜 받은 사람도 아니요,  또 찬송으로만 은혜 받은 사람도 아니요, 또 자기 혼자 어떤 굴에나, 금식이나  하면서 은혜 받은 사람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대중 예배, 이 대중  예배에서 대중 예배는 우리가 일주일에 네 번 있지 않습니까? 오전, 오후, 삼일  예배 오일 예배 이래 네 번 있는데 네 번 있는 이 대중 예배에서 은혜를 받아서  그 사람이 자라가는 사람.

 그러기에 권찰님들도 그렇고 모두 다 보면 사람을 길러 가는 데에 기를 때에  몹시 애를 먹이는 그것은 그저 그것이 우리 할 일이고 우리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 그게 뭐 자라 가지고 기특하게 유력하게 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

자식도 키울 때에, 육신의 자식도 키울 때에 꼴막거리고 자꾸 병치레 해쌓는  그거는 근근히 죽을 때까지 부모의 마음은 관심은 더 거기 다 기울어집니다.

그것이 사랑이오. 다 기울어지고 애를 먹이고 이러나 그게 근근히 살다가서 죽는  것뿐이지 그까짓 게 무슨 희망 있는 저 아니오. 클 때도 보면 이게 뭐 뭘 이거는  자꾸 입이 짧아서 뭐 먹일라 하지만 이거는 뭐 뭘 달라고 해도 뭐이라도 주면  훅훅 먹어 버리고, 또 공부해라 공부해라 할 여가도 없이 제가 공부하고. 위생  주의해라 위생 주의해라 하게 할 여가도 없이 그만 몸이 튼튼하게 자라고 이런  게 자식 노릇하고 하는 것이지 애 먹이는 그런 거 병자 그런 거는 안 키울 수  없어, 그건 사랑이기 때문에 온 식구에는 다 형제간들이 시기할 만치 '아버지  어머니는 전부 병신 새끼 저거 지금 우리 동생 저것에게 관심 다 가네. 우리는  먹었는가 안 먹었는가, 모두 전부 맛있는 거 있으면 또 아무것이 줄 거다.

아무것이 줄 거다.' 이렇게 시기할 만치 거기다가 뭐 기울이는 그것이 사랑이라  그말이오. 이 무정한,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는 약자를 밟아 쳐 넣어서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계에서는 약자 그것이 제일 대우를 많이 받고 제일  세력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 거 그렇지만.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말썽 일으키고 애  먹이는 그거는 나중에 쓸모없습니다. 쓸모없어. 그래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그  사랑을 가진 자라야 자기 구원이 이루어지고 또 하나님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애 먹이는 그런 거 그거는 수지 계산 만 맞춰 가지고, 집어 던져 버려라.

뒈지면 뒈지고 까짓 거 낙심하면 낙심하고 교회 안 나오면 안 나오고 버리면  버리고 이렇게 버릴 수 있는데. 그것을 그렇게 버리는 사람이라면 그 속에  생명인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구원 역사를 크게 강하게 일으키지를  못한다 그거요. 그런 것이지만, 우리는 자연히 안 그럴 수가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해 나갈 때에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람  세상을 이기는 사람, 세상은, 악령을 이기는 사람이요 죄를 이기는 사람이요  사망을 이기는 사람이요. 이 세 가지로 되어 있는 옛사람 자기 그놈을, 자기  아니기 때문에 그놈을 부인해 버려서 이기는 사람이라. 그러면 세상을 이기는 이  능력을 언제 받았는가? 지난밤에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아야 된다.

뭐 능력 안 받으면 안 됩니다. 인간의 그 속는 것이 무엇으로 속느냐 하면 자기  주관을 가지고 객관인 줄 알고 속습니다. 자기 주관이라 말은 자기라 말이오.

자기로 가지고 무슨 일을 자기가 하는 줄 알고 이래 하는 그 사람이 다 속고  실패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안 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전적  믿는 그 사람이라야 되는데 자기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능력 받아야  내가 승리한다. 하나님에게 능력 받아야 승리하지 하나님에게 능력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하는 그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오 자기를 죽여 없애  버리는 사람이라 그거요. 이렇게 되는 데에는 그 능력을 언제 받느냐? 그 능력은  예배 시간에 받는다. 그것을 어제, 엊저녁에 강조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은 다 능력을 받아야 신앙생활하지 능력 안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 뭐 어떻게 신앙생활 잘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해도 잘하는 그것이 새사람  옛사람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섞여 가지고 한 그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마귀란  놈은 그걸 보고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네까짓 게 암만 신앙생활 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해도 이제 옛사람 고놈을 충격만 한번 주면 막 사생결단 합니다. 금방  자기가 주님 앞에 생명을 바치기까지 충성한다 하는 그 사람이 자기에게  거리끼고, 자기에게 무슨 거리끼고 충격이 오면 그만 그때 그만 노발대발해  가지고 못 견뎌서 이렇게 날뛰는 그 사람은, 그것은 주의 일을 하지만 옛사람이  하는 것이라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옛사람을, 자기가 마귀도 이기고 죄도 이기고 사망도 이기고 다  이기고 있는데 최종적으로 이겨야 될 대장이 뭐이냐 하면 옛사람 자기입니다.

자기 그놈을 부인해야 되지 자기 부인하지 안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기르는 사람이 잘 아주  능력 있게 그 옛사람을 그것을 살살 죽이도록 그렇게 잘 지도를 해서 요렇게  하면 고 옛사람이 죽습니다. 옛사람을 죽여서 이기도록 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고  만일 '아, 그 사람이 주의 일을 부지런히 하니까 일을 시켜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마음놓고 착 시켰다가는 그 사람은 옛사람으로 만 자랐기 때문에 마귀란  놈은 조롱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어떤 때가 되면 옛사람을 충격을 주면 그만  교회도 나오지도 안합니다. 그렇게 열심 있는 뭐 장로도 교회 안 나옵니다.

목사도 그만 목회 안 합니다. 이러니까 최종에 마귀란 놈이 한 번 충격만 주면  된다 그거요.

 옛사람을 죽여 놓은 그 사람은 그게 상관이 없어. 아무리 자기 명예가 절단나고  지위가 절단나고 인격이 절단나고 자기의 자존심이 다 절단나고 자기를 똥같이  천하게 버린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어떻다는 데 대해서 자극을 받지 않는 것이  그것이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대해서는 자극을 받지 안해. 자기에게  '아, 나를 위신을 안 알아준다. 내 공로를 안 알아준다. 내 권위를 안 알아준다.

나를 무시하네. 내가 자꾸 굽신굽신하니까 영 아주 속에 창자도 없는 거 뭐  등신같은 것인 줄 알고 나를 멸시하고 천대하네' 이런 것이 나오는 사람은 그  사람은 옛사람이 내나 죽지 안하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잘 조절해  가지고 차차 차차 옛사람을 완전히 부인하도록 만들어야 되지 그대로 그만, 일을  시켜도 탈. 그란다고 뚝 끊어트려서 일을 안 시켜도 탈, 이러니까 옛사람 이놈이  문제라 그말이오.

 그러면 장성한 사람 능력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능력 받은 사람인고 하니  마귀와 죄와 사망, 자기 이것으로 더불어 싸우는 능력 받은 사람이 능력 받은  사람인데, 능력 받은 사람은 어찌 되느냐? 그저 좋은 것이 닥쳐도 하나님을  중심해서 평가합니다. '아, 보자. 이것이 내게는 자금 죽음이 왔다. 내게는  죽음이 왔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내게는 죽음이 왔지만 이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어떻느냐? 아, 하나님 중심이다. 나는 죽어도 하나님에게는  좋다. 그러면 내가 지금 매장을 당해 가지고 억울하게 매장을 당해서 이거 뭐  굉장하게 이래 매장 당하고 하는데 어쩌냐? '매장을 당해도 주님에게는 영광이  된다. 주님에게는 기쁨이 된다. 매장을 당해도 진리의 말씀대로는 됐다.' 이렇게  된다 말이오. '진리의 말씀대로는 됐다.' 뭐 이래도 저래도 언제든지 평가하는  것이 제일 처음에 초두에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냐 아니냐  그것을 평가하고 그 다음에 더 평가하는 것은 그라면 영감대로냐 영감대로가  아니냐 그것을 평가하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 최종적 평가는 자존자,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 위주요 중심이냐 그것으로 평가해서 그것만 된다면 뭐  진리대로라면 내가 죽어도 살아도 상관없다. 영감대로라면 죽어도 살아도  상관없다. 주님 위주 중심이라면 내야 어찌 되든지 상관없다. 이렇게 자기를  이겨 버리고 완전히 부인해 버리는 사람이 아니면 아직까지 그 능력이 빈약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능력을 우리가 다 받기를 원하는데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우리가 언제 받느냐?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예배 시간에 받는다 그렇게 지난밤에  말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받습니다.

 다른 시간에도 받는 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아, 저 사람은 사십  일 단식기도하고 그렇게 능력을 받았다.' 사십 일 단식기도하고 능력 받았다.

하면 아예 많은 경험이 있고 다, 많은 사람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 그 사람은  좀 위험성이 있다. 날뛰는 것이 부흥사로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해도 뭘 한다고  해도 좀 위험성이 있다.' 그렇게 봅니다. '위험성이 있다니?' '그 사람은 앞으로  실수하기 쉽다.' 나중에 보면 막 온 천하를 떠들고 이리 쌓지만 얼마 지나고 난  다음에 보니까 폭 쪼그라져 버렸어. 아, 폭삭 쪼그라진 것은 뭐이냐면 그거 그만  능력을 잃어버리니까 실수하게 돼 버리지. 또 성신의 감화가 없으니까 옛날 하던  식이 있으니까 부흥회할 때는 '옛날에는 이거 훌쩍 뛰니까 사람들이 은혜  받더라.' 훌쩍 뛰기도 하고. '옛날에는 그래 고함을 꽥 지르니까 은혜 받더라.'  꽥 지르기도 하고, 또 푹 낮추니까 '낮추니까 은혜 받더라.' 소리를 낮추기도  하고, 또 주먹으로 때려 가지고 이래도 하고. 강단도 부수고, 저도 처음에 젊을  때 이 거석할 때는 강단을 몇 번 분지렀습니다. 아, 이래 가지고 이래 그만  설교하며 그만 이래 거석하다 보니까 그만 강단이 푹 내려 앉아 버렸어. 시골  강단이야 뭐 송판 가지고 근근히 해 놓은 거 아닙니까? 내려앉지 아, 또 예배  인도하면서 그만 이러다 보니까 그만 뭐 그 책상이 뭐 부러져 버려, 책상을 때려  서 가지고 책상이 부러졌다 말이오. 아, 이랬는데 그럴 때는 또 그것도 되지만  나중에 가서 하나님의 성신의 감화와 진리는 없고 젊을 때는 그거 좋습니다.

그런 것도 다 괜찮아요. 그래 놓으니까 그때는 뭐 가서 일주일 동안 집회하면  ○○교파에 있을 때에 아무리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도 그만 가서 한번 집회만  가면 그만 그 교회는 ○○교파로 돌아왔습니다. 그래 내가 ○○교파로 돌아오게  한 교회가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이 남한 지방에서 거의 안 간 데가  없었습니다. 가는 데는 다 돌아왔다 말이오. 그래 모아 가지고 ○○교파를  모았습니다. ○○교파를 뚤뚤 모아 가지고 또 인제 ○○교파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러기에, 그런 것도 능력 있을 때는 좋고 뭐 이래 하니까는 나중에 가서  그것은 남아 있으니까, 그거 남아 있으니까 식은, 뭐 그 식은 좀 연습을 했기  때문에 더 잘합니다. 잘하지만 속에 영감과 진리가 없어. 그러니까 '아, 저  사람은 속에서 나오는 뭣은 아니고 그 사람은 하나의 연극하듯이 하나의 배우  노릇한다. 그러면 그 사람 부흥사가 배우 부흥사다.' 그만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다 말이오. 그러면 다 헛일되고 만다 말이요. 그런 사람이 다 어떤  사람이냐? 뭐 사십 일 동안 단식에서 은혜 받았다, 능력 받았다. 벌써 사십 일  단식해 가지고 은혜 받을라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처음부터 시작이 잘못됐다  말이오.'아. 저 사람은 사십 일 금식 기도한 사람이라.' 그 명예를 가지고 했기  때문에 헛일이라.

 그 명예라 하는 데에는 눈도 떠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해 보지 못하고 어쩌든지  예배 시간에 능력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기가 찬미할 때에, 찬송할  때에 자기 마음을 전부 똘똘 뭉쳐 가지고 지금 요이 땅! 하는 거 모양으로 자기  마음을 똘똘 요래 뭉치고 그 다음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을  향하니까 두 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할 때에 첫째 감사가, 아, 이런  일로 말미암아 자꾸 감사가 이거 자꾸 생각하니 감사가 나온다 말이오.

감사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 감사하다 보니까 '아이고 이거 내가 잘못했다.' 또  자복할 게 자꾸 나온다 말이오. 감사 기도가 나오고 자복 기도가 나오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런 것도 주님에게 알려야 될세.' 알라는 도고 기도가 나오고,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에게 간구해야 되겠다.' 또 간구 기도가 나오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이제 주님과 나와의 그만 벌써 만났다 말이오.

 주님과 만나 나와 이와 같이 대화할 만치 요렇게 가까이 만났는데 그때 주님이  말씀하신다 말이오. 말씀에 내가 성경을 읽음으로 그래 말씀하든지 설교를  들음으로 말씀하든지 어쩌든지 예배드릴 때에 대중이나 소중이나 내가 성경  말씀을 읽고 내가 깨달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설교할 때 내가  청강을 하는 것이나 이래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니까, 그랬으니까 곧  주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말씀 이 되니 그 사람이 말씀을 받을 때에  전지전능의 말씀으로써 사랑의 생명의 말씀으로 받게 된다 말이오. 이래 받고,  말씀을 그러니까 받을 때에 주님이 나에게 사람을 통해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 그 사람이 받아지게 되고, 받고 나니 이 말씀대로 행해야 되겠다는 그  능력을 받게 되고? 능력을 받고 난 다음에는 이제 능력 받고 말씀 받았지,  말씀이 그 실상이지, 그대로 또 살 수 있는 능력 받았지, 이라고 나니까 그  다음에 마지막에 통성 기도할 때에 기도할 때에는 '아, 거기 대해서 이걸 다져야  되겠다.' '주님이여 내가 이 시간 주님이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을 내가 들어서  강직했습니다. 내가 이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과 각오와 소원도 다  받았습니다. 요대로 세상이 어떤 내가 나가는 세상에는 어떤 대적들이 가득이  즐비 해 가지고 있을 건데 어떤 대적들이 가득 즐비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때에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이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그대로 실행의 결과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고  난 다음에 도장을 딱 찍어 버렸기 때문에 변동이 없다 말이오.

 이래서, 그 시간에 우리가 예배 시간에 능력 받는다 말하는 거는 예배 시간에  내 마음을 집중시키기 때문에 집중하는 데에 내 마음 집중이 제일 예배 시간에  집중이 잘되기 때문에 집중의 은혜를 받고, 이것도 내 주관 능력이라 말이오.

내가 똘똘 뭉친 게 이것이 주관 능력입니다. 주관 내 능력이라 말이오. 내가  똘똘 뭉쳤으니까 내가 열이나 스물로 이래 모두 다 흩어져 버리면 까짓 거 아무  힘이 없는데 합하니까 강하다 말이오. 아, 실내끼 그까짓거 한 개 고까짓 거야  뭐 힘도 없고 뚝 그라면 떼지지만, 실내끼, 이것도 한 열 개나 합해 놓으면 요라  하면 이래 손가락에 피납니다. 손이 베이게 된다 그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합즉 강이오 분즉 약이라' 그말이오.

 내 마음을 합해 가지고 내 마음이 아주 집중되는 그것이 예배 시간에 제일  잘되기 때문에 찬송에서 집중을 시키고 그 다음에 둘째, 기도에서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막혀 있는 걸 다 틔웁니다. 그 틔우는 거는 회개로 틔워지는 것이고? 또  내가 주님에게 대해서 주님이 섭섭하는데 그거는 주님 앞에, 선물을 줘도 고맙다  소리도 안 한다 말이오. 아, 선물을 사다 줘도 고맙다 소리도 안 해. 주님이  내게 대해서 온갖 은혜를 주셨는데 아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받았지만 감사한  마음이 없어. 그것이 주님에게 대해서 얼마나 해될 일이고 얼마나 주님에게  대해서 섭섭하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기도에서 감사할 거 감사하지,  또 자기의 잘못 그릇된 거 또 고쳐서 틔우지, 또 자기의 모든 사정을 다 고하지,  또 주님에게 '간구하지 이라니까 벌써 주님 만났다 말이오.

 주님 만나 가지고, 기도로서 만났는데 그라고 나니까 주님이 말씀해 주신다  말이오.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해라.' '이렇게 이렇게 해라.' 이렇게 이렇게 하는  그것은 뭐이냐면 그것이 말씀인데 곧 실상이라 그말이오. 말씀인 데 실상이라  말이오. 말씀인데 실상이라.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실 때에 어떻게 지었는가?  말씀을 던지니까 그 말씀이 가 가지고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내나 그 말씀과 꼭 같은 능력을 가진 말씀인데 처음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는 그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이 곧  진리인데, 그 진리가 지었는데 우리에게 온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처음에  우주를 지을 때의 그 말씀이 진리인데 우주를 지은 말씀이 지은 것은 변동될  것들을 지었습니다. 일차 창조에서 우주를 지은 것은 다 변동될 것들이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은 변동되지 안할 것을 창조합니다.

그러니까 일차 우주를 창조한 그 능력의 말씀보다도 더 권위 있는 말씀이요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말씀이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오는 말씀은 이 말씀은 영원히 변동되지 안할 다  영생이요 완전이요 불변이요 이래 이것을 일으키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하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 가지고.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 가지고 자기가  이제 넷째로는 뭐냐? 그대로 받아 가지고 그 넷째에 기도하는 거, 기도하는 것은  이제는 이 말씀을 받아 가지고 자기와 이 말씀과 일치시킨다 말이오.

 일치시키는데 그 기도로써 이 말씀과 자기와 일치를 시키는데 자기 마음도  일치를 시켰고. 자기의 뜻도 이 말씀과 일치를 시켰고 자기의 소원도 일치를  시켰고. 자기 욕심도 일치를 시켰고, 자기 성질도 일치를 시켰고 자기의 모든 거  다 일치를 시켰는데 일치시키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 있는 그게  뭐입니까? 일치시키지 못한 거는 뭐입니까 ○○○집사 일치시키지 못한 것은  뭐이겠지? 일치시키지 못한 거, 일치시키지 못한 게 뭐이지? ○○○조사님,  ○○○목사님, 일치시키지 못한 게 뭐이지? 일치시키지 못한 것은 이  고깃덩어리의 움직임이라 말이오. 고깃덩어리의 움직임은 현실을 만나야 되지 그  전에는, 내가 입으로, 입으로 해야 되겠는데 현실을 못 만났는데 자기 혼자 하면  미친 사람 안 되겠소? 자꾸. 사람에게 대해서 예를 들면, 그라면 안 된다든지  된다든지 이렇게 해라든지 해야 된다 하는 그걸 그 사람 만나 가지고 해야 되지  안 만나 가지고 하면 소용 있느냐 말이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네가 아합  왕에게 가 가지고 지금 이 말을 해라.' 아합 왕이 죽일라고 찾아다니는데 '아합  왕에게 가 말하라.' 이러니까 아합 왕에게 가서 말을 해야 그것이 권위 있는  말이 이 순종이지 아합 왕에게는 겁이 나서 가지도 못하고 그래 인제 아합 왕도  아닌데 백지 바위를 보고 아합 왕에게 '네가 이래라. 이래라' 하면 엘리야를  다른 사람이 미쳤다 할거라.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고깃덩어리 혀로 말하는 것도 현실을 당해야 되겠고, 또 내  손으로 하는 것도 현실을 당해야 되겠고, 또 내가 걸어가는 것도 현실을 당해야  되겠고, 이러니까 이제 이 영으로 다 해 놨지 마음으로 다 해놨지 남은 역사  남은 것은 고깃덩어리로 할 일만 남아 있다 그말이오. 고깃덩어리로 할 일만  남았어. 고깃덩어리로 할 일만 남아 있으니까 그만 하면 될 터인데 그건 굴  안에서도 할 수 없고 예배 장소에서도 할 수 없어. 고깃덩어리로 할 수 있는  것은 그 현실을 만나야 되니까 현실 만나기 전에 기도로 연습 다 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 현실을 만나니까 착착 그대로 해서 세상을 이겨 버린다 말이오.

 이런 일을 예배 시간에 할 수 있고, 예배 시간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배 시간이 제일 귀중한 시간이라. 세상을 이긴, 세상은 마귀와 죄와  사망. 옛사람이 넷이 세상인데 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어디서 얻느냐? 이  능력을 예배 시간에 얻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 그러면 예배 시간에 어찌  얻느냐? 예배 시간에 얻는 것은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고, 그라고 난 다음에 자기가 거기서 실천한다 말이오.

 기도로써 실천 다 해 가지고 이래 가지고 능력 받는 것인데, 예배 시간 한국  교회의 예배 시간은 전부 엉망입니다. 예배 시간은 전부 저거 기쁘게 하려는  예배 시간이오. 이래서 우리 주일 학교를 한국 교회서는 제일 주일 학교가 이  교회가 뭐 잘됐는지 못됐는지 모르지만 평가하기를 제일 이것으로 평가합니다.

이거는, 주일학교는 이것으로 평가해. 장년반 교회는 뭐뭐 내가 모르겠지만,  평가하는데 그게 뭐냐? 딴거 아무것도 없어. 세 가지만 달라요. 다른데 그중에  제일 중요한 거 뭐이냐 하면 다른 데서는 주일학교를 가르칠 때에 아동 심리를  위주해 가지고 심리를 위주로 해서 그 아동들 심리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그렇게 아동들을 위해서 중심으로 하는데 우리 서부 교회는  그것이 아동들을 중심하지 안하고 하나님을 중심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아이들이 알아듣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만 가르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만 쓰고, 또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일할 수 있도록만 하고,  이라니까 온 사람마다 눈이 뚱그래 가지고 '하, 그래 가르쳐 가지고 아이들이  아, 이 주일학교 이거 공과를 보십시오. 최고의 진리를 말합니다. 그게 뭐이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말씀이 능력 있고, 또 영감이 능력  있고, 이렇기 때문에 아, 진리도 인간을 만들었고, 또 영감은 더욱 인간을 만든  그 진리보다도 위에 어른이니까, 아, 영감과 진리가 역사하니까 문제가 없다.

이것을, 성경 말씀을 믿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셔서 자꾸 주일 학교 부흥을 시켜서 그래도 많이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이번에 보니까, 인제 한 주일은 만 백 오십 명이 나온 주일이 한 주일  있었습니다. 주일날, 이랬는데 그러다가 또 내려가다 올라가다 자꾸 이래  구천으로 내려갔다가 또 팔천으로 내려갔다가 또 구천으로 올라갔다가, 이거 또  만으로 올라가지 안했는데, 요번 이 집회 때문에 자꾸 이 기회가 이래 돼  놓으니까 그런데 이제 집회 갔다 오면 분명히 만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만으로  올라갑니다. 이게 뭐이냐 하면 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그것을 믿는 거기서  역사가 일어난 역사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날 중에는 주일날, 시간 중에는 예배드리는 시간, 예배드리는  시간이 뭣이기 때문에 그렇겠느냐? 무엇이기 때문에 그렇겠느냐? 네 가지 때문에  그렇다 하는 이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네 가지 때문에 그렇다. 네 가지.

첫째는 뭐입니까? 찬미. 찬미는 뭐하는 것입니까? 자기의 주관 요소 전부를 똘똘  뭉쳐 가지고 주님을 향하도록, 이 전체를 뭉쳐 가지고 자기의 그 모든 걸 촛점을  만들어, 촛점 촛점을 딱 마쳐서 만들어 가지고 고라고 난 다음에는 이제  기도하는 게 뭐이냐 하면 주님과 나와의 가로막힌 것을 다 틔워 버리고 주님에게  내가 딱 들어붙어서 주님 외에 딴 데 볼 수 없도록, 볼 수 없도록, 아, 주님은,  주님을 꼼짝 못 하게 요동 못 하게 하는 수 있습니다. 주님을 요동 못 하게 하는  수 있어.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내가 잘못된 것을 '주여! 이거 이거  잘못됐습니다. 잘못된 것을 자복할 때에 주님은 그것 다 듣지 안하고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서 막 달아날라고 해도 '아, 주님 내가 요거  잘못했습니다.' 잘못된 걸 말할 때는 가지 못합니다. 또 '아, 주님 이 은혜를  감사합니다. 또 감사할 때는 주님이 또 뿌리치고 가지를 못한다 말이오. 자,  둘로 붙들었지. 또 그 다음에 아, 이렇고 저렇고 이렇고 저렇고 하니까 이거 내  사정이 이렇고 저렇습니다. 이렇게 도고할 때도 또 가지 못해. 내가 간구할 때도  뿌리치고 가지를 못해요. 주님 앞에 말이지. '아, 나 바쁘다.' 하는 '가야  되겠다' 하는, 가야 되겠다 해도 이 두 가지로 계속하는 자에게는 하루도 붙들고  있고 열흘도 붙들고 있고 일 년도 붙들고 있고 평생도 붙들고 있습니다. 에녹이  삼백 년 동 안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요렇게 하나님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데 가지를 못해. 떠나지를 못해. 꼼짝 못해. 요러니까 하나님을  붙들고 일생 동안 살았다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에 붙들렸으면 딴 데 못 가? 하나님은 전능자요  전지자라. 이러기 때문에 여기도 계실 수 있고 저기도 계실 수 있고 하나님 한  분은 다 완전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공간에, 우리 제한 받는 거는 여기 있으면  저게 못 있지만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공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여기  계시고 또 저기에도 계실 수 있다 그 말이오. 그걸 가리켜서 공간을 초월했다  그럽시다. 공간을 초월한 거. 이러니까, 이렇게 예배 시간에 이렇게 해서 하나님  명령받고.

 다 기울여 가지고 기도로 기울이고 주님 앞에 지금 간곡히, 이 둘이 이래  말하다가. 사람도 말하는데 그거 그래요. 하도 이래 말하는데 말 같지 않은  소리하고 있으면 전화 끊어 버리요. 말을 하는데 그 옳은 말을 자꾸 하면 전화를  못 끊어요. 그래도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할 때 이거 그만 필요 없다 이래 해도  말 같지 않은 소리하면 전화 끊어 버리지 그 말 들으려고, 하면 세월 다 보내  버리고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 그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주님을 내가  향해서 올바른 거 이 기도, 올바른 기도는 대게 네 가지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데, 감사기도, 또 자복 기도, 또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을 사정을 고하는  도고기도 그 다음에는 간구기도,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돼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그 말이오.

 '주님이여 나에게 주시옵소서.'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이 말씀을 척 주시면 그  말씀 그것이 실상입니다. 말씀 그게 실상이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들 때 뭐  우주를 보낸 것 아니오. 우주를 만들 때 말씀을 척 보내니까 말씀이 그만 우주를  만들어 버렸다 말이오.

 그러면 그보다 더 능력 있는 말씀을 우리가 받기 때문에 이 말씀을 받을 때에  내가 믿고, 그대로 단정하고, 바라보고, 그라고 난 다음에 이 말씀대로 행해  봅니다. 이 말씀대로 자기가 다 행합니다. 뭘로 행합니까, 말씀대로? 뭘로  행하지요? 뭘로 행하지요? 뭘로 행하지요 뭘로 행해요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행해야 되는데 뭘로 행해요? 기도로 행해, 기도로. 기도로 행하면 다 행할  수 있어. 다 행할 수 있는데 전부 다 행합니까? 남은 거, 아직까지 덜 행하고  남은 거 있습니까? 남은 거 있소 없소? 남은 거 있어. 다행했어, 뭐 다 행했는데  남은 거 뭐이냐 하면 이 고깃덩어리로 할 것만 남았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고깃덩어리 그거는 현실을 만나야 하지 그전에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다 행해  놓은 거 영으로 하는 것이 제일 능력 있고 그 다음에 마음으로 하는 것이 능력  있고 다 행했으니까 고깃덩어리로 하는 그 거는 닥치면 할 수 있다 말이오.

닥치면 할 수 있으니까 나중에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우리가 능력을 받아야 될 터인데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주시는 것인데, 능력을 주시니 능력을 주실 때 말씀으로  주시는 것이고, 말씀에는 또 말씀뿐 아니고 영감과 같이 주는 것인데 이걸랑  받지 안하고 뚱딴지같이. 말씀 한 번 듣고 아, 성경 벌써 그 성구 읽으면  좁니다. 졸아. 그만 이 본 성구 보면 졸아. '아이고 또 그 말씀.' 귀신이 들어,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말이오. 그 말씀에 대해서 능력을 받았습니까?  받으면 다인데 뭐. 이래 가지고 예배드리는 이 예배 의식이 잘못됐고 예배  인식이 잘못됐고 예배에 대한 예배관이 잘못됐어. 예배관이 잘못됐기 때문에  이걸 고쳐야 되지 이거 고치지 안하면 안 됩니다. 해방 직후에, 승리한 손양원  목사님이 대구에서 그때에 전국 총회가 모였을 때에 그때에 강사로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하는 가운데에 내가 하나를 받았습니다. 받은 것은 뭐이냐? 다른  지저분한 설교 뭐 그런 거는 뭐 들을 필요도 없고 이랬는데. 그 설교 중에  간추려서 하나 들은 건 뭐이냐면 아무래도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을 찾자 하는 그것을 주장을 하는 그런 것을 봤습니다.

 예배 시간이 중요한 것은 내 단속하고, 하나님 붙들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거 받고, 그 다음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 영으로 행하고 마음으로  행하고 다 행하고 고깃덩어리로 할 수 있는 능력까지 착 받아놨으니까 다 됐어.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 이루었다. 이제는 자고 쉬라.' 잠깐  자고 나니 '또 가자' 그때부터는 안심을 하고 했습니다. 그게 뭐이냐 하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결재 다 했다 말이오. 아. 영감이 도와 가지고 못할 것 없이  완성을 할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 기도로 허락 받고 난 다음에 '이제 됐다.

가자. 안심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서 어짜든지  이걸 받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지금 서론을 말하고, 이 이 말씀을 보고 다 '뭣 때문에 자꾸  이말 하는고?' 하는데 아직까지 본론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그거요. 서론하다  보니까. 본론은 간단합니다. 그거 뭐이냐? 말한 대로 인간이 뭐 네가 일생  목적을 뭘로 삼을래? 제일 가치 있는 걸 목적으로 삼아라. 목적으로 삼는데 제일  가치 있는 거는 뭐이냐? 영생이 제일 가치 있다. 네가 가치 중에 제일 큰 가치는  영생이다. 이렇기 때문에 너는 네 목적은 영생이 돼야 된다. 그러면 영생을  이루어 가야 되겠다는 이 제일 가치 있는 가치는 잡았고, 그 제일 좋은 가치를  이래 목표로 삼고 목적으로, 소망으로 삼기는 삼았지만 이 일을 이루어나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편이 있으니까 그 방편을 취하는 데는 방편 중에 제일 좋은  방편이 뭐이냐? 방편 중에 제일 좋은 방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이 제일  좋은 방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은 어떻게 하는 거냐 하면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어기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느냐 세상을 따르느냐 하는 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안하고 한다. 현실에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것만 버리지 안하고  하나님의 인도만 따르면 죽어도 동행이고 살아도 동행이고 감옥에 갇혀도  동행했다 말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을 얻기 위해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 저버릴 때 동행하는 걸 그 현실에서 저버려놓고 난 다음에 '주여  주여 나는 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암만 떠들어 봤자 '이 거짓부리  입술로만 나를 공경하는 이 외식자야' 하고 하나님은 같이 하지 않는다 말이오.

 그러면, 방편 중에 제일 좋은 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 이러니까 방편은  이런 뭐 공부하는 방편, 취직하는 방편. 출세하는 방편, 무슨 기술 배우는 방편  이 세상에서 온갖 방편이 많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이 제일이다. 이래  가지고 그 동행하는 방편이 제일이니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동행이 되면 공부도  할 수 있고 이거 저거 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동행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과 동행은 죽어도 좋다. 죽는 것도 좋다. 하나님과 동행은 죽는  것도 한다. 이것이 제일 좋은 방편이라 말이오.

 그라는 데는 우리가 이래 살면 우리는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게 살아야 되는데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게 사는 게 뭐이냐?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고 죽음이  빼앗아 갈 수 없고 영원히 기쁘고 즐겁고 완전한 기쁨이 뭐인가? 완전한 기쁩은  두 가지 기쁨이다. 십자가의 기쁨이 완전한 기쁨이오. 십자가의 기쁨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내게 있는 것을 바치는 것이, 주는 것이 십자가의 기쁨이요, 그  다음에는 기쁨은 하나님에게 선물 받는 기쁨, 하나님이 내게 없는 거 당신이  나에게 주셔서 받는 모든 은혜 받는 그거로 말미암아 기쁜 것이 선물의  기쁨이요, 그 다음에는 주님 만나서 나와 동행하는 그것이 이제 만나는 것이  그것이 마지막으로 최종의 기쁨이요 최고의 기쁨이라 그말이오. 이러기에 두  가지 기쁨. 십자가의 기쁨 주님과 나와의 선물을 받든지 주님을 나와 만나든지  주님을 차지하든지 선물을 차지하든지 하는 거기서 얻어지는 기쁨,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승리하고 난 다음에 기쁜 것은 그런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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