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날 알맹이

 

1986. 11. 16. 주일오전

 

본문:빌립보서 2장 5절∼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은 모든 교회들이 추수감사 주일로 그렇게 연보들을 하고 지킵니다. 주일이 추수감사 주일 된 것 아니고 주일은 지극히 큰 은혜의 축복의 날인데 그날에 추수감사 연보를 드린다고 해서 추수감사 연보 드리는 그 주일에 드리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추수감사 주일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이 추수감사 주일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일날 추수감사 연보를 드리자 해서 이 주일을 지키면서 그것도 겸해서 추수감사 연보를 드리자 하는 뜻입니다.

육체의 이스라엘로부터 신약에 내려오면서 세 가지 절기를 지켰는데 하나는 유월절, 하나는 오순절, 하나는 장막절 셋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양 피로 구원 얻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오순절은 십계명 곧 영감과 진리를 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장막절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해 주심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렇게 지킵니다. 이 추수감사절은 장막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번 여러분들이 들었기 때문에 잘 거기 대해서는 알 줄을 압니다.

오늘 추수감사 연보로 하는 그것은 하나의 표요 알맹이는 따로 있습니다.

알맹이는 주님의 피로 나를 대속해 주신 것을 특별히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신구약 성경 참 도리를 우리에게 주시고 영감 주신 데 대해서 특별히 감사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는 일, 하나는 하나님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를 안보해 주시는 그 안보를 깨달아 감사하는 그런 감사를 가지고 세 가지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표로 연보를 드리면 작으나 많으나 그것은 연보가 연보다운 것이고 세 가지 은혜를 생각지 안하고 돈만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는 외식 연보요 참 연보는 되지 못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 그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그 마음을 우리가 가지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그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가지신 그 마음을 내가 가지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죽는 데 이르지 안하는 영생하는 완전한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알을 채워서, 알 채워서 완전과 생명을 채워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네 마음 안에 영접해서 모셔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을 품으라.

그러면 그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마음을 가지신 그것 가지고 위로 성부를 성령을 기쁘시게 했고, 아래로 영계나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 복되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이 복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들도 다 주님에게는 감사하면서 영광을 돌리고 주라 시인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지옥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에게 영광 돌릴 게 뭐 있는가? 지옥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 지옥에 있는 것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것은 완전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이 이해를 하지 안하고 받아들이지 안해 그렇지 완전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지옥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 앞에는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그 앞에 머리를 다 숙이게 된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이 마음을 가져라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 마음을 품고 있으면 이 마음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해서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에 행동한 것이 영계 있는 영물들이나 이 물질계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다 우리를 대적하지 안하고 우리를 송사하지 안하고 우리에게 불만과 불평을 품지 안하고 우리에게 다 감탄을 하고 우리를 존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믿는 사람들이 땅위에서 믿음 준비하는 것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순전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가는 것이요 인간의 자기의 어떤 깨끗한 행동이라도 이 행동이 내가 하늘나라 가는 데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생각하는 그놈을 회개하지 안하면 하늘나라에는 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버리고야 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라면 뭐할라고 예수 믿을라고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가? 애를 쓰는 것은 하늘나라 가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가 가지마는 하늘나라 가 가지고 영원히 사는 데에 우리가 하나님과 피조물들에게 대립되는 자가 되느냐 환영받는 자가 되느냐, 영원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가서 사느냐 하나님을 영원히 근심되게 한 자로 하나님을 섭섭하게 한 자로 가서 살게 되느냐, 영물과 천군 천사와 모든 택한 자들과 불택자들 지옥에 가서 있는 모든 자들에게도 우리가 그들에게 환영과 존대를 받는 자로 사느냐 또 그들에게 필요 없는 사느냐 가해자로 사느냐, 그들에게 해를 주는 가해자로 사느냐 그들에게 영원히 봉사해서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느냐, 그들에게 필요 있는 사람으로 사느냐 필요 없는 사람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는 것을 그들이 받든지 아니 받든지 하는 것은 상대방의 문제이지마는 우리는 얼마든지 줄 수 있고 은혜를 베풀 수 있고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서 진정 그들에게 행복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그 사람으로 변화를 받아 가지고 가는 이 변화 이 성화 받는 것이 오늘 땅위에서 믿는 사람들의 노력인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데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품으셨느냐?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것도 우리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동등 대우를 받을라고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그러면 하나님이면서 하나님의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사람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낮아졌습니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 복종하는 생활 했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9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땅 아래 있다 말은 이것은 땅 아래 지옥이 있다 말은 아닌데 우리에게 한 상징적으로 말했습니다. 모든 음부 지옥을 말합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아래 꿇게 하시고” 다 모든 것들이 이제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희생하시고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 사은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한 것을 그때 그들이 다 알게 될 때에 모든 존재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모든 입으로 그들이누가 강제로 시키는 게 아니라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됩니다. 이는 참으로 나는 이분을 주로 삼겠다고 해 가지고서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이렇게 삼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가지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세상 나그네 생애를 할 수 있고 예수님과 같은 그 나그네 생애를 하게 되면 영원 무궁세계에서 모든 존재들이 우리에게 머리를 숙일 것이고 무릎을 꿇을 것이고 우리를 찬양하면서 환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무엇을 하는 세상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을 우리 위해서, 우리가 못 지키니까 우리 대신해서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법을 지키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셨고, 또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로 더불어 불목한 것을 화목시키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모든 불목이 다 깨어져서 화목의 싹이 텄습니다. 이제 화목의 이 큰 공로가 완성됐습니다.

또, 우리를 범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범죄함으로 죄의 종이 되었고 죄의 종이 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법대로의 사망의 종이 되었고, 죄와 사망의 종된 그것으로써 영원히 마귀의 종이 되어 있었던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마귀와 죄와 사망의 영원한 종이 되어서 사망에 피동되고 마귀에게 피동되고 죄에 피동되는 그 종이 되는 이것으로 영원 멸망을 받는 우리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당신이 십자가에 대신 형벌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불목을, 모든 불행을, 다른 사람을 복되어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하늘의 모든 권세와 영광과 존귀의 그 쾌락의 모든 부요, 모든 부요를 우리 위해서 내놨습니다. 모든 부요를 우리 위해서 내놨고 당신의 지위와 권세와 모든 소유와 생명을 다 내놔 가지고 화목의 제물이 됐습니다.

이런데, 민족을 행복되게, 가정을 행복되게, 자기와의 단둘이의 친구라도 행복되게, 내가 타를 행복되게 하는 데에는 자기가 녹아지는 것 외에는 딴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리켜서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라 이랬습니다. 자기가 녹아지는 것으로만 민족도 구원할 수 있고 국가도 구원할 수 있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되는 것인데, 자기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는 운동은 결국은 민족을 삼키고 마는 결과밖에는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걸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두 가지를 위해서 죽으셨고, 또, 예수님은 한 가지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한 가지는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또 하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이행하시고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로 더불어 화친을 가지는 이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이 일 함으로 당신이 죽은 게 아니고 이 일을 계속하니까 이 일을 못하도록 마귀가 자꾸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문과 고형을 해도 예수님은 이 일을 양보하지 안하고 계속했습니다. 계속하니까 그만 너무 못 하게 하도록 위해서 고문과 고형한다는 것이 운명이 됐습니다. 생명이 끊어져 버렸어.

그러니까 마귀는 더 예수님을 항복 받을라고 고문과 고형할 아무 여유가 없고 예수님은 모든 게 다 끊어지기까지 하나님 법을 이행하시고 이 화목을 위해서 끝을 마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화목은 성공이 됐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법을 이행하는 것은 성공이 됐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이 죽으신 것이 아니고 이 둘을 이행하니까 사탄이 죽인 것입니다. 죽일라고 죽인 게 아니라 이것 내놓으라고 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문과 고형하다고 예수님의 그 모든 생명이 끝나 버렸기 때문에 마귀는 대패전했고 예수님은 완전 이행의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소원을 들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은 뭣 때문에 부활하셨느냐? 아무리 이와같이 죄에서 구출해서 자유를 주었고 또 하나님과 모든 만물들과 완전한 화친을 이룬 것과 하나님의 그 입법을 완전히 완수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만 가져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의롭다 인정하는 의만 받았지 완전자로 살 수 있는 그 생애는 하지 못하고 생애는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사람되어 이 완전한 생애를 우리 대신 영감과 진리대로의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상대하는 완전 생활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주셨음으로 우리에게 영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두 가지 죽으심으로써는 우리에게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공로를 설정해서 우리를 완전타 온전타 자유하는 자는 만들었으나 우리가 새생명을 가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당신이 죽으심으로 이것을 대속하시고 다시 살아야 우리로 하여금 이 대속받은 실지의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은 심한 통곡으로 살려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심한 통곡으로 살려 주시기를 원했다 하니까 이 육덩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는 게 고통이기 때문에 살기를 원한 줄로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으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했다, 이 간구와 소원한 것은 무엇을 간구와 소원한 것입니까? 다시 신인양성일위로 영원히 살도록 해 달라는 것을 간구했습니다. 살도록 해 달라는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면 살도록 해 달라는 것을 간구했으면 이 사는 것이 당신에게 복되고 유익된 것입니까 당신에게 영원히 사랑의 희생입니까? 뭐입니까? 영원히 사랑의 희생입니다.

요것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하는 요것도 요 성경에 대해서 일반 학자들이 깨닫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는 영광이라, 부활하신 것은 참 이제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우리 육덩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그렇게 좋게 그렇게 해석을 하고 생각을 합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기쁜 날이라고 이렇게 말하고서 부활은 참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모두 기쁨으로 찬송합니다.

살아나신 것이 우리에게는 감사와 기쁨이지마는 당신에게는 영원한 십자가 못박혀 죽으심과 꼭 같은 희생입니다. 이래서, 부활절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같이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슬픔으로 맞이하고 예수님의 부활은 기쁨으로 맞이하니 그것이 다 육적으로 생각하는 육의 사람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본성으로서는 생각하는 것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지금은 그렇지마는 어느 구석에서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하나님이 피조물의 형상을 입으시고 하늘에서 낮아지심과 같은 영원히 낮아지심을 취하셨다는 이 설교가 조그만한 구석에서 튀어나와도 얼마 가면 세계는 다 요대로의 신앙의 교리와 신조가 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진리는 이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과 도성인신으로 십자가에 죽으심과 예수님의 그 희생의 사랑의 희생의 중량이 어느 것이 높은가? 그 중량이 꼭 같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중량이 꼭 같고 사랑의 중량이 같고,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의 그 사랑의 희생이 우리에게 효력 있는 것은 어떤가? 효력 있는 것도 효력이 중량이 꼭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을 이루어 주시지 안했으면 아무리 우리를 대신해서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려 주실라고 해도 밑천이 없으니까 살려 주실 수 없습니다. 또 밑천을 마련해서 영생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준비됐다 할지라도 영생으로 살아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래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사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셨으니 썩지도 안하고 쇠하지도 안하고 더럽지도 안하고 낡아지지 않는 소망이 있게 하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이 말씀을 봉독하신 것은 오늘은 주일입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서 복음을 증거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 주일은 이루어진 것 아닙니다. 죽으심으로 주일은 우리에게 올 수 없습니다. 죽으심으로 이 주일이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있다가 예수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 주일이 완성돼서, 첫째 안식 둘째 안식 다 외식으로 실패했고, 셋째 안식은 다시 이름을 갈아서 주일로 갈아서 이렇게 세번째 영원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그 모든 총력을, 모든 총 요소를, 총 은혜를 종자적으로 받는, 원인적으로 받는, 모든 씨종자적으로 받는 이 중요한 이 은혜를 주시는 주일날이 비로소 성립됐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주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날 새벽에, 마리아에게 나타나셔 가지고서 그들이 반가와서 주님을 잡을라고 하니까 “아직까지 나를 잡지 말아라.

네가 아직까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될 것이고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될 이분에게 내가 올라가지를 못해서 영광을 받지 못했으니까 잡지 말아라.” 잠시 후 올라가셨다가 다시 내려오셔 가지고서 “이제는 내 옆구리와 창자국을 만져 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살아나시는 이 사활로 인해서 우리의 대속은 완성이 됐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 마귀의 문제가 해결됐고, 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서 하나님의 이 입법을 완전히 이행하고 하나님과 완전한 친교를 가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인정하는 하나님의 의를 달성시켰습니다. 그러면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와 자유, 하나님의 의와 자유를 줬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유를 주셨지마는 자유 있다 해 봤자 자유의 행동할 실력이 없는데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아무 공심판도 우리를 간섭하지 안하고 다 옳다 좋다 하지마는 내가 힘이 있어 살아 움직여야 되지 살아 움직이지 못하면 소용 있습니까? 이랬는데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사 너희들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사”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중생이 됐습니다. 그라고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더럽지 안하고 낡아지지 안하는 영원한 기업은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살으시는 이 대속으로 이 주일에 지극히 큰 구원을 우리가 은혜로 받는 이 은혜가 약속됐습니다.

이 주일을 설정하시는 데에는 예수님이 사활하시는 이 대속을 하셔 가지고서 이 설정이 됐습니다. 이 설정된 설정은 온 세계에 뭐 대국끼리 만나는 그 유엔에서 결정 지운 거 또 강대국끼리 서로 약속한 거 그까짓 거야 골목에 앉아서 소꿉장난 하는 아이들만치도 신임성 못 가집니다. 오늘 철통같이 동맹하고 이와같이 결의해도 내일 부숴지고 마는데 소용 있습니까? 이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예수님의 사활로 설정된 이 계약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로 인쳤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주일날은 예수님의 사활로 대속하신 이 대속의 공로가 무엇인 것을 우리가 똑똑히 알고 이 대속의 공로가 내것 된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 자기 것을 삼은 것을 확실히 믿고 이 대속의 공로를 내것 삼았으니 대속의 공로를 내것 삼아서 대속의 공로를 모시고 있는 이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우리들은,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것이 완전히 된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날은 주님의 사활의 대속을 바로 아는 것과, 자기가 바로 믿는 것과 실상으로 자기 것을 삼는 이것이 주일날 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 의 사활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영생할 모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깨닫고 믿고 이 능력을 실상으로 받아 가지는 것이 주일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것이 요 주일을 외식으로 지키지 안하고 알맹이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외식으로 지키는 것은 주일날 일하지 안하고 한테 주 모아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것 좋지마는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그것 가지고는 항상 껍데기지 알맹이는 하나도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차에 안식을 받은 아담 하와가 완전 실패했고, 이차 안식을 받은 아담 하와와 가인과 아벨과 셋, 그 다음에 육체의 이스라엘이 계대해서 이차에 안식일 받은 사람 가운데는 외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다 실패했고 안식에 들어가지를 못했고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이 약간 있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7절 이하에 보면은 거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삼차적으로 안식일을 이름을 변경시켜서 주의 날이라고 변경해 가지고서 영원한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이 축복을 받는 날로 정해 준 날이 이레 중 첫날입니다. 어제가 안식일이요 우리는 안식 지낸 후 첫날 오늘 주일입니다.

오늘 주일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못박혀 죽으심으로,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이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이 공로를 우리에게 실상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실 때에 이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내가 심령으로 확실히 인정을 하고 실상으로 우리의 영육에 받아서 잠뿍 싸 가지고, 이 능력을 싸 가지고, 이 능력은 보이지 안해. 보이지 안하나 이 능력이 오면은 자기의 심신이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어.

이 주일날 자기가 변화된 걸 알 수 있어.

변화되어서 이제는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를 뺏기지 안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인 완전 생명을 빼앗기지 안하고, 예수님이 부활로 주신 영생으로 날마다 살아가는 그 실력을 받는 것이 주일날입니다. 이 능력을 받는 날이 주일날이오.

이 능력을 받는 데에는 이 모든 거 다른 것 다 일할 여가가 없어. 일하지 말라는 건 이 능력 받기 위해서 그런 거 다른 거 하지 말라 그말이오. 이 능력을 받을라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목숨 다 바쳐야 돼요.

이 시간 ‘주여, 이 대속의 은혜를 나 위해서 주님이 사활로 대속의 은혜 주었으니’ 내 생명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완전히 바꾸기 때문에 내 마음도 완전히 주님에게 바쳐서 주님 마음과 내 마음과 바꿔서 주님 마음 내 마음 만들고, 또 내 생명은 주님의 것 주님의 생명 내 생명 만들고, 또 내 힘 바쳐 주님의 힘 내 힘 만들고, 내 소원과 뜻 바쳐서 주님과 바꾸고, 완전히 주님의 이 사활의 대속의 이 생명과 자유는 완전히 내것이 되어서 나는 영원히 살았고, 날마다 영생하는 것이 내 생활이지 날마다 범죄하는 생활은 내 생활이 아니라. 이 생활할 수 있는 이 능력을 주일날 받는 것이 이것이 주일날 알맹이로 지키는 것이요 외식으로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데, 과거에 육체의 이스라엘 때에 안식일을 알맹이로 지키는 것을 말을 했지마는 그 말은 사람들이 듣기를 싫어했고 껍데기로 지키는 것은 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해서 나무하는 사람 잡아다 죽이는 일은 잘했지마는 속에 알맹이, 알맹이가 뭐인데? 예수님을 대신해서 양이 죽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양으로 대속한 이 대속을 실상으로 입어 가지고서 양으로 자기 모든 걸 다 대신해 가지고서 이렇게 해서 이 대속한 이것을, 예약이고 예표로 하나님께서 미래에 예수님의 대속을 소망하는 그 예약으로 해 놓은 그 예약으로 가지고서 자기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과 불목에 대해서, 자기를 전부 다 바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데 대해서, 그때 제사가 세 가지 종류가 있어요. 죄에 대해서 속죄제가 있었고, 또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전부를 다 바쳐 사는 번제가 있었고,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 완전히 화목하는 화목제가 있는 이 세 제사를 가지고서 자기네들의 그 현재에 양심에 조그만치라도 가책되는 거 있으면은 양을 대신 대속의 제물로 죽여 가지고서 가책 없는, 양심에 가책이 하나도 없는 요 생활해 가지고서 안식일마다 번제를 드리라 했습니다. 안식일마다 번제를 드리요.

요래 가지고서 요것을 완전히 준비한 사람들은 이차 안식일에 안식 세계에 들어갔고 나머지기 사람들은 다 건설구원은 다 멸망을 받아 버렸고 기본구원만 얻어 가지고서 하늘나라 가서 벌거벗은 자로 살게 됩니다.

이랬는데, 그때도 요 바로 가르치는 선생들은 적었고 그저 “일하지 말아라” 하는 그것만 거석해 가지고서 일하면 일하는 사람 잡아다 형이나 주고서 이라니까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서 하나님과 결합된 생활,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예수님 앞에서 살아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결합이 됐기 때문에 살아난 증거라. 살아난 증거는 결합됐다 증거라. 결합하는 일은 그들이 안식일날 이런 일 한다고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라고 그때부터 도모하고 송사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 삼차 안식일을 변개해서 주일날로 준 이 주일날을 어떻게 지켜야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외식으로 이 주일날 그저 일이나 안 하고 장사나 안하고 억지로 여기 와 앉아 있으면서도 장사 안 하고 문을 닫으니까 ‘오늘 문 열었으면 누가 손님이 왔다 갈 건데’ 그런 거나 생각하고서 이와같이 그저 억지로 여기 와 앉았는 그런 거 가지고는 다 소용이 없습니다. 외식이오. 여기 와 앉았는 것도 외식이고 하나님 찬양하는 것도 외식이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것 삼는 요 일이 돼야 외식이 안 되고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됐으니 나는 주님의 것 되는 것, 이 사활의 대속을 내게 주신 주님의 사활의 대속은 내것 됐고 사활의 대속을 내것으로 가진 나는 주님의 것 되는 요걸 실상으로 화하는 요것을 만드는 것이 주일날입니다.

요것 만든 것이 각각 달라요. 어떤 사람은 비유컨대는 꿀밤만치 만들었고 어떤 사람은 주먹덩이만치 만들었고 어떤 사람은 아름드리 만들었고 어떤 사람은 태산같이 만들었고, 만든 게 각각 달라요.

만들었는데, 만든 것만치 주일날 만든, 대속을 아는 거, 믿는 거, 깨달은 거, 소망하는 거, 자기 것으로 삼은 거, 이러니까 나는 주의 것으로 사는 거 요것을 주일날 자기가 느끼기를 주먹덩이만치 느꼈으면 요 주먹덩이만치 느낀 요것을 감하지 말고 주먹덩이만치 느낀 요것을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까지 요 느낀 요것을 자기 현실에서 살아 봅니다. 자기 현실에서 살아 봐요.

요 주일날 예수님이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된 것과 대속을 받았으니까 나는 주님의 것 된 요 두 가지를 자기가 잡고서 ‘나는 주님의 것이다. 내맘대로는 못 한다.

나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으로 인하여 산다. 주님으로 인하여 산다.’“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했습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나는 살지 내 자유로 살 수 없다. 나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으로 인하여 산다.’ 뭐 때문에? ‘주님이 대신 사활로 베푸신 대속은 내것이다. 내것이 됐기 때문에’ 나는 사활의 대속은 어디다 그만 냅두고? 사활의 대속을 내것 삼았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것 됐지 사활의 대속을 내것 삼지 안하면 나는 주님의 것이 되지 못해요. 그는 완전자이신데 어찌 내 이 더러운 것이 완전자의 것이 됩니까? 안 됩니다.

이것을 자기가 주일날 깨달음이 어느 정도 깨달았든지 깨닫고 소망하고 작정하고 믿는 요것을 뺏기지 안하고 주일날 자꾸 되새겨 가지고서 월요일날 부터는 주일날 바꾼 것, 주님의 대속은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 된 것 요것을 주일날 깨달은 것만치 그 깨달은 생활을 월요일날 해 봅니다. 공장에서 해 봅니다. 자기 가정에서 해 봅니다. 자기 모든 언행심사에서 해 봅니다.

해 보니까 주일날 분명히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인데 살다 보니까 내가 내것으로 살았고 주님의 대속은 상관없이 살았거든. 이러니까 또 거기서 ‘아이쿠 잘못됐다’ 그게 회개입니다. `잘못됐다' 다시 고칩니다. 다시 고쳐 가지고 또 그래 살다가 보니까 또 거석하고, 이러면, 얼마나?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네가 하다가서 실패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믿습니다.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실패했으면 다시 다시 다시 해 가지고서 주님의 대속은 사활의 대속은 내것, 대속을 받아 가진 나는 주님의 것 요것을 엿새 동안에 하다가 또 실패하고 새로 하고 새로 해서, 엿새 동안은 요 세 가지를 연습하는 날이 엿새 동안 하는 일이요, 장사하면서도 요 세 가지를 연습하고, 밥을 지으면서도 세 가지를 연습하고, 정치하면서도 이 세 가지를 연습하고, 자기가 교편 생활하면서도 이 세 가지를 연습하고, 자기는 어떤 예술하면서도 이 세 가지 연습하고 이 마음은 뺏기지 안하고 그거는 이 세 가지, 예술하면서 그 예술에서 이 세 가지를 자기가 연습합니다. 주님의 이 사활의 대속과 나는 주님의 것 된 것을 내 모든 생활에서 연습하고, 자꾸 연습하니까 못 하구로 방해하는 것 있으니까 한 번 연습하니까 대번 뚝 떨어졌다가 두번째 연습할 때는 방해하는 게 있어도 또 좀 내가 하게 됐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연단이라 말합니다.

연습하고 연단하고, 그 다음에는 엿새 동안 사는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다 한 사람 있고, 주일날 생각한 대로 그대로 다 행한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만분의 일도 행하지 못한 사람 있고 요래서 엿새 동안에 실패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생겨집니다.

이래서, 요 일을 바로 하도록 하기 위해서 삼일 예배는, 주일날 지나가고 삼 일이 닥치니까 서너 날 지나갔으니까 벌써 이 바꾼 것, 주님의 사활의 대속은 내것 대속을 입은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요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삼일날 새롭게 하기 위해서 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또 새롭게 해 가지고 또 한 이틀 지내고 나니까 약해져서 또 오일 예배를 또 드리는 것이고 주일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삼일, 오일 예배 드리는 것은 오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금요일날 예배 드리는 것 아니오. 이 사활의 대속을 더 새롭게 해 가지고서 이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이래서, 주일날은 사활의 대속을 실상으로 받아 가지고 날이요 나는 실상으로 내가 주님의 것 되는 날이요, 되는데, ‘받아 가졌나 내가 주님의 것 됐나 실지로 실험해 보자’ 월요일부터 실험하는 날입니다. 실험하다 보니까 아니거든 또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또 연단을 해서, 한 번 새로 두번째 고치니까 좀 더 잘 되고 이랬으니까 그게 연단되는 거라 말이오. 연단하고 그 다음에 연성을 하는 것이 자기 일이라.

엿새 동안은 자기 일을 힘써 하는 것이 자기 일이 무엇인가? 주일날은 주님 섬기는 일 하고 엿새 동안은 제 욕심대로 하는 그것이 자기 일인가? 아니오! 엿새 동안은 주일날 주님의 사활의 대속을 받아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이 것 된 요 주일날 받은 은혜 생활을 엿새 동안에 해서 엿새 동안에 자기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그게 자기 일입니다.

요게 예수 믿는 사람이오! 요것이 예수 믿는 기독교인데 오늘 기독교는 완전히 변질돼 버렸습니다. 완전히 변질돼서 이렇게 전부 껍데기 외식만 되고 말았기 때문에 “옛날 노아 때에 실패한 거와 같이 인자가 올 때에 너희들이 다 이와같이 실패할 것이다”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요것을 깨닫고, 주일날은 주님이 죽으심과 살으심으로서 이 주일을 설정해 가지고서 사활의 대속의 이 대속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니까 사활의 대속을 나는 주일날 받아야 된다. 받으면 받은 것만치 나는 주님의 것이 돼야 된다. 요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해서 요 실상으로 받는 것이 주일날 은혜 받는 것이요 노는 게 은혜 받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 은혜받는 것인데, 믿음 생활은 어떤 게 믿음 생활인가? 주일날 이 대속 받아 나는 주의 것 된 이것이 나는 주의 것으로, 대속받아 가진 주의 것으로 엿새 동안을 영감과 진리대로 계속해서 사는 것이 그것이 영생이요 그것이 자기 일을 바로 한 사람이요 그것이 나그네 생활을 두려움으로 지낸 사람입니다. 나그네 생활은 이사갈 준비하는 거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는 사람입니다.

알겠습니까? 껍데기로 믿지 말아요.

이래 가지고 이걸 배울라 하면 힘이 드니까 ‘아이구 암만 말해야 알아듣지 못하겠다. 잘 알아듣기 쉬운,’ 잘 알아듣기 쉽게 볼라 하면 테레비를 가 보지! 알아듣기 쉬운 것 할라면 테레비 가 보지! 그거는 더 보기 쉽지! 그것도 좀 봐야 돼요. 제일 알아듣기 쉬운 것은 제가 오늘까지 죄짓던 물들어 있는 제 습성, 제 습성 제 습관대로 하는 것이 제일 쉽고 제일 좋지. 그것은 멸망이라.

“모든 육체는 무익한 것이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는 것이 너희들에게 전한 이 복음의 말씀이다. 이 말씀대로 살면 세세토록 영원히 있다. 영생한다.” 영생을 세상에서 못 가진 사람은 영생을 하늘나라에 가도 심신의 기능 영생은 없습니다, 영의 영생뿐이지.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모든 선배들이 안식일을 외식으로 지켜서 멸망하였고 노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들어서 다 멸망하였고 그럴 때도 하나님 말씀을 절대의 말씀으로 신실히 들은 사람들은 다 구원을 이룬 것을 저희들이 기록해 주셔서 보았습니다.

셋째 안식일로 주일을 주신 이 날에 오늘도 몰라서 외식으로 주일을 지키고 알고도 교만하고 패역해서 외식으로 지켜 멸망받는 형제가 하나도 없게 하시고 이 시간이라도 다 깨어서 주일날 주님의 대속의 이 공로는 내것 대속의 공로를 내것 삼은 나는 주님의 것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 확실히 바꾸어서 주님의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 되는 이것을 실상으로 이 주일날 이루는 저희들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룬 이것을 엿새 동안에 요대로의 생활하여 요것만을 위해서 넘어지면 또 일어서고 넘어지면 또 일어서서 엿새 동안에 전생활은 주님의 대속과 대속 입은 나로서의 합당한 생활하는 이것을 연습하고 연단받고 연성하는 이 일만이 땅위에서 하는 것이 저희 일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 각 분야에서 어떤 일 하든지 거게서 알맹이는 이것 하는 것이 알맹이요 나머지기는 다 찌끼요 알맹이는 이것이 알맹이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 외식으로 멸망하지 말고 진실한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형제를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들이 이렇게 생명의 주를 알지 못하고 근심 걱정에 싸여 있던 저희들이 이제 주님을 찾았사오니 모든 것을 주님에게 의논하고 간구하여서 이 나그네 세상 악이 가득찬 세상이라도 담대히 염려 없이 평강으로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고 발아래 밟고 살아 나가는 영육에 복받는 저희들 되게 하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한 종들에게도 더욱이 인간 구원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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