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 7가지, 4계명


선지자선교회 1983. 4. 17. 주후

 

본문 : 출34:27-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기독교는 지극히 크신 모든 것에 근본이 되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 이상이 없는 제일 큰 권위의 도요, 또 지혜의 도요, 능력의 도요,  또 영원 무궁한 소망의 도입니다. 또 어데서나 언제나 영생하는 생명의  도입니다.

 수많은 이종교들이 있지마는 그 이종교에는 기독교의 것은 하나도 거기에 섞여  있지를 않습니다. 또 그들이 알지도 못합니다. 제일 큰 도요, 또 생명의 도요,  권능의 도요, 영원한 평강의 도입니다.

성경에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보배로워" 하는 말씀을 하신 것은 마치  금을 연단하면 잡것은 다 타 버리고 순금만 남는 것처럼 기독자의 건설하는 자기  인물 건설이나 행위 건설이나 기타의 모든 활동 소유의 건설들을 처음에 할  때에는 이런 것 저런 것 잡것을 섞어서 하게 됩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도 지은 것이 있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에서, 또 영원한 시간에서 정죄받지도 쇠해지지도  더러워지지도 낡아지지도 아니하는 그것만 남고 모든 인간이나 피조물 적으로 된  것은 다 소멸시키고 순전히 하나님과 진리로만 이루어진 영원한 것, 완전한 것,  불변한 것, 산 것, 이런 것만 남기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도 하시고, 시련도  하시고, 연성도 하십니다.

 시험에서 남아 있는 것 연단에서 재 성별하고, 성별한 데에 또 온전한 것으로  성장케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고로 요한일서 3장에 보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분도 세상이 모르고  우리의 구원도 세상이 모른다고 했습니다. 실은 세상이 보고 빛이라 영광을  돌리는 그것은 외부에 세상 빛은 될지라도 무궁한 하늘나라의 존재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구원이기 때문에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또 그 사람의 주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순전히 객관인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초에는 이런 것 저런 것이 있었을지라도 결말은 하나님으로  이루어지는 그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로 말하면 온전한  행위가 되어져야 하고 또 하나님과 관계로 말하면 자기의 전부 곧 자기라는  사람을 다해서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 하나님과 교제가 되고 친밀히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은 다 공력이 불타서 구원을 얻으나  부끄러운 구원 얻는다' 하는 그 말은 사람들이 처음에 믿을 때와 갈이, 또  탈선되고 속화된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주관 곧 자기가 신앙의  주인공이 되고, 자기가 자기의 주인공이 되고 자기가 자기의 모든 생활에  주권자가 되어서 신앙 생활하는 이것 가지고 객관적인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오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모든 악령의 미혹에서 다 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으시지 아니합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무궁세계에  그대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이 알려 주실 때에 아는 데에 힘을 써야 하고,  다음에는 행하게 하실 때에 행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고, 이것은 다 준비입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깨달아 자기를 비어 주를 모시고 자기는 완전히 주님에게  속하고 주님의 것이 되고 자기는 주님과 주님의 도에 대해서 털끝만치라도  자유하지 못하고 주님은 자기에게 모든 일에 전권을 가지시고 자유 하게 되는  거기에서부터 구원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르는 사람이 구원을 이룰 수 없고, 또 행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대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고, 변화되지 아니한 사람이 하나님과  결합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한 말로 말하면 기독교는 실상의 도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우리가 믿는 믿음의 목적이 무엇인가? 모든  소망하는 것을 실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듣고만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래 전에 주일을 지키는 데 대해서 일곱 가지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쓴 사람은 지키려면 지킬 수 있는 일인데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되었을 것이고, 어려워도 계속 주 일을 바로 지키려고 할 때에  자기의 허무한 것을 알게 됐을 것이고, 또 계속 지키려고 애를 쓰는 자에게는  자기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 수없이 주위 환경에 둘러싸 있는 것도 자기가 알게  되었을 것이고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너에게 친밀히 곧 너를 망치는  원수니라 하는 그 말씀도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듣고 버리는 자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듣고 지키려고 하는 데에서 자기도  알게 되고, 또 듣고 지키려고 하는 데에서 자기 환경의 이웃도 알게 되고, 또  계속 지키려고 할 때에 과연 주님이 나를 이 세상에 두신 것은 양을 이리떼  가운데에 두셨다고 말씀하신 그대로라 하는 것도 자기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데에서 자기의 무지와 연약을 알아 주께 구하게 되고, 모든 위험성을 알아  주님에게 구하게 되고, 또 주님 외에는 피난처가 없고 주님 외에는 믿을 만한  실력가도 의지할 만한 진실한 자도 없는 것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실행하는 그 실행으로 한 자욱 떼놓고  나면 자기가 변화되는 변화로 한 자욱을 옮겨놓고 변화되면 다시 그 진리를 다시  더 깨닫게 되고 이렇게 한 자욱 한 자욱 걸어서 주님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오후에는, 우리에게 주일 지키는 데 대해서 그저 간단하게 외부적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내용은 또 거게서 더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나 외부가  변화되지 않을 때에, 외화가 없을 때에 내적 변화는 없는 것입니다.

 주일에 대해서 일곱 가지를 여러분들이 지키고 나오고 있는지, 지키려고 애를  쓰는지? 애를 쓰면 제가 증거 하는 이 말이 다 같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매매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사고 파는 일을 주일날은  안해야 된다 하는 것을 단정 지워야 합니다. 그럴 때에 악령은 그것을  에누리하기 위해서 큰 죄를 작은 죄로 이래 바꾸게 하 다가 나중에는 작은 죄를  큰 죄로 이렇게 바꾸어지게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는  에누리로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다 스스로 속습니다. 즉시 순종해서 즉시  실행해야 되지 거게서 에누리해서 차차 어떻게 하겠다고, 서서히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그것은 다 인본의 주장이지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안심하고 주일날 장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도 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증하시기를 주일날 일하지 아니한 그 수입을 다른 날에 보충해  주시겠다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계약을 선포했습니다. 또 안식년에 대해서는 삼  년 쓸 것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해도 살고 그 이듬해 농사 지을 때도  살고 농사 다 짓기까지 산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이렇게 보증을 해 주셨으니까 안심하고 주일날은 장사하는  것 딱 단절하고, 매일 품 들어 사는 사람도 단절할 수 있고, 또 그보다도  하나님이 나 위해서 죽기까지 하셔서 대속해서 주신 구 원이니까 우리가  죽어봤자 주님이 나 위해 죽으신 것만치 합니까? 이러니까 안 줘서 주일을  지키다가 죽어도 우리는 지키는 것이 당연한 체면이요 당연한 예의입니다.

 그런고로 아예 주일날 매매하는 것이나 일하는 것이나 그런 것을 단절해야  됩니다. 열 가지 일하던 것 아홉 가지 하고, 아홉 가지가 여덟 가지 되고 차차  줄여뜨려서 가려고 하는 그 사람은 스스로 속는 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는  자입니다.

 오늘에는 다라도 금할 수 있어도 다라도 금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내일에는  하나도 금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약자라 하는 것을 알아야 되고 악령의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다 금한 사람들은 단번에  금했습니다. 길게 끌면서 그래 금하지 않았습니다. 뭐 죽고 살고 '죽어도  마땅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나를 구출해 주셨는데 내가 주님이  주신 이 구원을 보존하기 위해서 감당하기 위해서 죽는 것도 마땅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나 위해서 이랬는데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아 감당키 위해서  죽어지는 것이 무엇이 크냐?' 에누리하지 않고 양심을 써서 지당하다고 생각하고  단번에 끊은 그런 사람들은 죄를 다 끊어서 자유의 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첫째가 매매하는 것을 단절할 것, 두번째는 일하던 그 일을 다 중지해  둘 것. 뭐 큰 일 작은 일 무슨 일이든지. 그 일로써 어떤 큰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나와의 원수 되는 것보다 크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유익이 있어도  하나님이 내게 축복해 주는 것보다 더 크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체면에 중요한  것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대속해 주신 그 체면보다 더 큰 체면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절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셋째는 천한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물론 내  안에도 계시고 우리 가정에도 계시지마는 그래도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모임에 내가 나아가는 것이니까 내대로는 힘껏 의복을  정결케 하고, 몸을 정결케 하고, 자기 마음을 정결케 해서 자기의 인격이  외부에서부터 깨끗이 정리 정돈해 가지고 '지극히 크시고 나를 구속하신 이  하나님이신 주님이 모으시는 이 회에 나는 참여하러 간다.' 영광된 것도 권위  있는 것도 느낄 뿐 아니라 자기로서는 있는 대로는 깨끗이 자기를 단속해서  준비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뭐 사회에 나갈 때에는 제대로는 제일 깨끗한 의복을 입고 제대로는 다 차리고  다듬고 이래 가지고 나가지마는 하나님의 교회 갈 때는 뭐 교회쯤이야, 이렇게  하나님과 그 회를 만홀이 여겨서 그렇게 오는 자 들도 있고,  또 의복을 가지되 이 장사꾼한테 갈 때에 입는 의복, 점잖은 분에게 갈 때 입는  의복, 어떤 예식에 갈 때 입는 예복 다 있어서 '교회에는 가난하고 무지러기들만  있기 때문에 내가 다듬어 가지고 가면 그들이 다 기절하고 너무 부러워할  터이니까 좀 검소하게 해 가지고 가야 된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기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다 버려야 됩니다.

 우리나라는 의복에 대해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다 넉넉한 의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화려한 의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사람  보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크신 분에게 나아가니까 내가 오늘은  목욕해야지. 또 의복도 씻어서 갈아입어야지.' 하나님을 향해도 그러하고 교인들  보기에도 '아무것이는 저렇게 깨끗이 해 가지고 오는데 나도 깨끗이 해야  되겠다.'  '아무것이는 저렇게 좋은 옷 입고 오는데 나는 떨어진 더러운 옷 입고 가기  어렵다.' 가기 어려우면 왜 너는 좋은 옷을 왜 마련 안하느냐! 우리나라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방종하고 방탕해서 허비 낭비해서 그렇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가는 그 의복은 그래도 엄숙하고 정숙하고 품위 있는  그런 의복을 해서 마련해 가지고 예배보러 갈 때에는 그런 복장을 해 가지고  가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 게을배기 나쁜 자들이 말하기를 '좋은 옷 입고 가니까 나 같은 헌옷 입은  사람 못 가겠다' 하는 그런 자들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어. 그자가 회개를 해야  됩니다.

 역부러 찾아가 가지고 '야, 나는 다 같은 사람으로 이래 가지고 이 옷 입고  다니는데 너는 왜 그러냐? 네가 돈 안 쓸 돈을 쓰고 네가 방종하고 일할 것  일하지 않고 네가 그래서 그렇지 않느냐?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네가 남에게  빚지지 말고 네 밥 네 먹고 살고 옷도 남한테서 단정하게 입고 다니고 교회 좋은  옷 입고 올 수 있는 그런 사람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런 지저분한 핑계 대지 말고 의복과 몸과 마음과 그 모든 인품을  깨끗하게 해 가지고 주일날 와야 되겠습니다.

 넷째로는, 정해 놓은 시간 있으니까 정한 시간 정한 장소가 어데든지 그 자리에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가서 자리잡고 앉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다섯째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에, 여호와의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그 얼굴 꺼풀이 광채가 났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가운데에서 사십 일 사십 야를 굶는 것도 느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가운데에 자기의 용모가  변해졌습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드릴 때에 오늘은 나의 생 명이신  주께서 생명에서 나에게 생명의 모든 역사가 나에게 올 터인데 어떤 은혜가  나에게 오는가를 기다리는 그 마음에서 벌써 일하는 것 매매하는 것, 자기의  심신을 깨끗케 했어, 모든 것 다 제하고 정한 장소에 정한 시간에 도달했어,  준비 갖춘 여기에서 주님이 이 시간 나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은 곧 내게 멸망치  않는 영생을 이루는, 막바로 영생이오. 막바로 전지한 지혜요, 전능한 능력이요,  막바로 나에게 필요한 모든 실상의 축복이라.

 그것을 나에게 주시는 것이니까 거게서 받으려고 자기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기다릴 때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약간의 성경에  내포되어 있는 그 진리를 해석해서 증거하나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개인  개인에게 필요한 것을 여게서 증거해 주지 못합니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도 증거하려 하면 적어도 한 시간이나 반 시간 이상은  걸리는데, 어떤 사람이 난제에 빠져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데리고 앉아서  타일러서 깨닫고 거게서 구출하려고 하면 진액이 빠지고 한 시간 두 시간 어떤  사람은 세 시간도 걸리는데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각자에게 해당된 것을  다 증거해 주겠습니까?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마음과 정성을  갖추어 가졌을 때에 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기까지 갖추어 가져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의 용모가 변화된 것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릴 때에 목사는  한 설교를 하는데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각각 자기의 형편과  사정을 다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각각 자기에게 합당한 주의 인도를 깨닫게 하고  거게서 깨달아 결심도 하고 각오도 하고 '요라면 되겠다' 안심도 가지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영감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는 것도 확고하게 더 깨달아 확신을  가지게 하고 또 나에게 믿어지는 견고한 확신을 가지게 하고 또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직접 나에게 당면된 그 현실에 어떻게 해야 될 것을 지도하시는  지도의 그 깨달음을 나에게 가지게 해 주시는, 이것을 받을 때에 근심에 눌렸던  자가 이 은혜를 받을 때에 근심이 없어지니 당장에 모세 같이는 되지 않을지라도  이 피부에 근심을 느끼는 것이 피부에서 사라지고 이 세상 방종에 방탕에 헛된  욕심에 지금 분발해 가지고 정신없이 날뛰는 자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그런  것이 다 사라지니까 포근하고 평온하고, 마치 경기 앓은 아이가 그 경기 병이  끝나고 나니까 포근해서 잠자는 것처럼 그 피부에 평강이 나타나고, 또 절망  가운데 있던 자가 소망의 안면이 나타나고 그 피부에 제 삼 자들이 볼 때에  환하게 볼 수 있을 만치 용모가 변화되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 주일날인  것입니다. 저 지난번에 부활 주일에도 주 일은 다 부활을 시키는 날이라 하는  것을 증거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마음이 변화되고, 자기의 생각이  변화되고, 자기의 경영이 변화되고, 자기의 소원이 변화되고, 자기의 목적이  변화되고, 자기 마음 가운데 눌려 있는 모든 근심 걱정이 변화돼서 없던 걱정이  생겨지고 있던 걱정이 없어지고, 없던 두려움이 생겨지고 있던 두려움은  없어지고 이렇게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자체가 변화되어지는 그것이  살아나는 것이요 그것이 무궁세계에 나에게 필요한 영생성의 모든 구비한 생애  필수의 것들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주일날 받으려고 애를 써서 받아보면 자기가 자기를 정죄할 것이오.

'주여, 나같이 못된 놈은 없습니다. 나같이 이중 삼중의 놈은 없습니다. 바람  앞에 갈대 이상으로 흔들리는 더러운 인간입니다.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여게서 낙망하고 울다가 다시 말씀을 들어 소망하고 이리저리 하는 데에서 나를  꾀어 망치는 옛사람 그놈은 곯아서 살살 비틀어져서 도망을 쳐버리고 묻혀 있던  진리로 영감으로 중생된 새사람은 차차 활기를 가지고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일날 살리지 못하면 못 살립니다. 주일날 살리지 못하면 못 살리고  주일날 자기가 변화되지 못하면 변화되지 못합니다. 큰 부흥회나 집회가 있어도  다 주일날 변화 받고 살린 것을 귀묻어 놨다가 "네가 어떻게 들었으며 어떻게  받은 것을 네가 깨닫고 행하라" 사데 교회에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주일날은 죽은 것을 살리는 날로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요 첫 열매이인  주님이 살아나신 날입니다. 살아나는 것이 우리를 대표해서 살아났습니다. 우리  위해서 살아났어. 당신이 죽으심만 고난이 아니라 사심은 영원히 하나님이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래서 주일 오전 오후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악령은 우리 속에  부패성을 충동시켜 가지고 '예배봤으니까 이만하면 안 됐느냐? 하고 좀 죄를  지어야 되겠고, 좀 죄를 지어야 되겠고, 좀 방탕해야 되겠고, 좀 방종해야  되겠고, 좀 사람을 못쓰게 자기를 버려야 되지, 그 좀 고쳐 놓은 걸 버려야  되겠으니까 마귀란 놈이 이렇게 저렇게 할 때에 오후에 그것이 이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오후에, 오전 오후에 받은 이 말씀을 가지고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네가 들은 게 바로 들었느냐 내가 들은 게 바로 들었나?' 다른 연구, 다른  시비, 다른 장기 자랑하지 말고 거게서 '이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신 데 거게는  이런 뜻이 안에 내포돼 있는 줄 안다.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 여게서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 여기서 나는 이런 깨달음의 다시  전환을 가졌다. 이렇다.'  외우고 서로 대조하고 서로 깨달은 것을 칭찬하고 협조하고 또 안 된 것은 다시  그에게 타일러 알려 주고, 이래서 오후에 그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외워보자.'  그러면 필기한 사람은 필기를 내놓으면 알게 될 것이고 녹음 그것은 참  허무합니다. 여게 우리 교회에 모두 신앙에 으뜸이 되는 사람들이 전부 녹음기가  들어서 다 죽였습니다. 내가 녹음기가 들어 죽은 사람 누구 누구 죽었느냐 내가  죽은 사람 말하면 다 압니다. 장로도 녹음이 죽였고, 집사도 녹음이 죽였고,  권찰도 녹음이 죽였습니다.

 녹음 탁 틀어놓고 난 다음에는 '녹음에 있으니까' 저는 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격자이신 것을 모릅니다. 인격자를 그런 그 비인격으로서 상대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며, 대적하는 것이며, 멸시하는 것입니다. 만홀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자기 혼자 가서 아무리 녹음을 틀어봤자 그때 그 자리에 멸시하는  자에게 영감이 갑니까? 지식만 받으니까 자기는 교만하게만 됩니다. 진리를  팔아먹는 장사꾼이나 될까 절대로 사람 살리지 못합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입니다. 만나면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사람을 약하게 만듭니다.

 아말렉 족속이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방해했기 때문에 그 복수를 짐승 한  마리도 생명 있는 것은 남구지 말고 몰살시키라 했습니다. 그것 안하다가  사울왕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래 가지고 오후에 가서 다시 이 말씀을 거석하면서 '봐라,-네가 공부에  우등을 했다 자랑하지 말고, 일류학교에 들어갔다 자랑하지 말고 큰 출세를 했다  자랑하지 말고, 앉아서-야, 네가 그걸 깨달았느냐? 네가 그것을 깨달았느냐?  너도 네가 어린 양하고 그만치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나는 이렇게 깨닫는데 여보  아내 자기는 어쨌소?' 남편은 아내를 살피고 아내는 남편을 살펴 서로 좋은 점을  따라서 존경하고 본받고 따르고 거기에서 세상 것만 가지고 그 하나도 그것 없는  사람을 죽은 자와 갈이 생각해서 불쌍히 여겨서 다시 소생을 시키도록 이렇게  노력을 하고,   이러다가 남은 시간이 있으면 '우리는 다 이렇게 모두 다 해서 은혜를  입었으니까 우리가 또 가자. 야, 너도 제법이다. 너는 열 살 먹는 학생이니까 열  살 먹는 동무에게로 가라. 너는 고등학생이니까 고등학생 동무에게 가라. 여보  자기는 여인이니까 여인의 친구에게로 가고 나는 또 남반에게 가겠다. 또 나는  어데 가겠다.'  가서, 이웃에 가서 여게 대한 얘기를 하며 오늘 설교는 뭐이지요? 몰라서 묻는  듯이도 하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에게 묻고  가르치는 방식을 가지신 것과 같이 이렇게 하면서 오후에 사람을 구원하는 그  일을 하다가 저녁 먹고 곤하니까 자고,  그것 못하면 오전 오후에 예배보고 그만 죽은 듯이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게  낫습니다. 가만히 드러누워 자는 게 낫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오락을 금하라  했는데 이런 재미 저런 재미로서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다 쏟아버리고 마귀란  놈이 '요놈이 오늘 주일날 거게서 조금 변화한 생각이 나 가지고 가졌으니까 그  대신 그만치 기합을 줘야 되고 그만치 강한 죄악을 속에 쐐기로 박아야 된다.'  해 가지고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어 예수 믿은 지가 점점 오래 갈수록 변화는  없고 점점 속화돼서 이것은 다시 면역성이 있어서 아무 데 갖다 놔도 꼼짝도  안하는 그런 자 돼 가지고, '저 풋믿음이라서 저렇게 하지 우리는 다 노성한,  노숙한, 노장한 믿음이라서.' 말하면서 늙은이 믿음으로 죽어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냐?  절대로 생명 있는 도는 육체는 쇠잔하나 그 마음은 더 뜨거워지고, 육체의  활동은 범위가 좁아지나 그 심령의 활동은 범위가 얼마든지 넓어지고 점점 그  심령은 속사람으로서는 새로워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요것 주일 하나라도 좀 지켜보자 그말이오. 이러면 사람이 변화가 될 것이고  변화가 되면 '성전 기초를 쌓을 때부터 그날 전후를 네가 생각해라. 성전 기초를  쌓는 그날 이전 날을 생각해 봐라. 네게 대해서 모든 일이 어떻게 돼졌는가  그것을 심히 살펴보고 성전 기초를 네가 참 회개하여 살기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구원을 이루려고 하나님의 성전 되려고,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꺼풀갈이 되어서 하나님이 내 안에 역사하고 나는 그 역사 받아  가지고서 세상 모든 만물과 접촉하는 이 생활을 신앙 생활을 해 보려고 작정하고  시작한 그날부터 그 후를 봐라. 그 전날과 후가 네 자신이 같으냐?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네 자신의 언행심사가 같으냐? 또 사람을 대할 때에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대하는 것이 같으냐? 다르냐? 만물의 모든 것이 누가 도와주고 도와주는  그런 것이 있고 없는 것이 보여지느냐? 그 전후를 네가 추억해서 살펴보라.

대조해 보라.' 말씀했습니다.

 이럴 터인데 마음뿐으로 지나가 버리고 말기 때문에 점점 예수를 믿지 못하게  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 서부교회서 벌써 앞으로 환난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밤으로 특별 기도회를  정해 가지고 기도한 지가 얼마입니까? 얼마 됐지요? 대략 얼마나 됐습니까? 한,  올까지 말하면 삼 년 아닙니까? 그렇지, 또 하나님께서 보여 주셔서 회개치  안하면 다 불에 소멸된다 하는 이 일을 방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하자는 것이  벌써 석 달채 납니다. 늘 거게 대해서 우리가 회개한 사람은 회개해서 자기  양심으로서는 살펴봐야 뭘 회개해야 될까?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기까지 회개한  사람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고로 실행에서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하나의 이 주일을 바로  지키도록 우리가 회개를 합시다. 과거 주남선 목사님은 '십계명이 있지마는  제사계명이 중심 되는 계명되는 계명입니다.' 하는 그 말을 저는 다른 데서  듣지도 못했고, 배우지도 못했고, 또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지만 무슨 말씀인지도  몰랐고.

 이러나 그 어른이 별세하시고 난 다음에 신앙 생활을 살아갈수록 '하나님의  십계명이 있지마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 암아 우리에게 생명의  역사는 주일날 부활하셔 가지고 주일날 부활시키는 역사가 있어 그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계를 지킬 수도 있고, 이계를 지킬 수도 있고, 삼계를 지킬  수도 있고, 오계 육계 십 계까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접선하는  것이 주일날 접선이 제일 중점이다.' 하는 그것을 지금은 제가 깨닫는 대로 자꾸  느껴갈수록 그 어른이 위대했다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 변화됐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암만 들어도 내게 뽑아버리지 못하는 암 같은  욕심 하나라도 있으면 그놈 때문에 말씀은 안 들립니다. 그놈 때문에 절대로  마음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놈 때문에 내 정신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놈  때문에 내 변화된 그 변화가 내 피부에 나타나지를 아니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느낄 것입니다. 제가 문둥병자들 그 문둥교회에 가서 집회를  많이 했습니다. 갈 때는 얼굴이 괴상한 그 문둥이지마는 나중에 은혜 받고 나면  그 얼굴이 다 미남 미녀로 다 변화돼 버려. 이렇게 변화되니까 그렇게 오뉴월에  집회를 해도 그 썩은 내음새가 처음에는 나지만 나중에는 그 내음새가 안 나.

그들도 안 나고 나도 안 나고 다른 사람이 와도 내음새가 안 나.

 여러분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오.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을 가까이 할 때에 그분은 내게  사죄의 역사를 빛을 비추는 것같이 역사하고, 칭의 역사를 하나님과 화친의  역사를 해서 나로 하여금 온전한 인품으로 변화시키는 그 역사를 나를 접촉하는  그 접촉을 통해서 마구 바람 불어넣듯이 불어넣습니다. 마구 바람 불어넣듯이  불어넣어. 짙은 물을 들이듯이 자꾸 물을 들여갑니다.

 사람은 순응성 있게 만든 사람입니다. 못된 잡된 남녀를 만나서 하루를 지나면  자기도 잡된 남녀가 되고 맙니다. 순 사기꾼을 만나면 하루만 지나면 사기꾼이  됩니다. 하루만 제자랑쟁이 자긍하는 그런 교만한 자 만나 가지고 하루만 지나면  저도 우쭐해서 자랑한 자가 됩니다. 사람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 사모합시다. 하나님 생각합시다. 하나님 생각할 때에 나도 모르게 나는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멸망 받을 그 길을 벗어나는 은혜가 있고  복있는 길을 찾는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복받고 뭐 멸망 안 받으려 하는 게  아니라 그분을 만나다 보니까 멸망할 길은 피하게 되고 복받을 길은 찾게 되고,  그분의 말씀을 이렇게 상고하다 보니까 내가 가는 데에 꼬불꼬불 요리 가야 될  데 요리 가고 조리 가야 될 데 조리 가는데 나중에 걸어가고 뒤를 돌아보니까  만일 그대로 내 욕심대로 내 생각대로 내 주관대로 걸어왔으면 함정에 빠져서  다시 복구 못할 그런 위험이 과거에 얼마나 있었던 것을 우리가 다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제는 때가 가까웠습니다. 주님의 재림도 가까웠고 또 환난도 가깝습니다. 그  환난은 모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그까짓 환난은 다 물러갈 것이오. 우리가  회개를 깨끗이 하면 다 무신론 유물주의는 우리 손에 다 붙임을 받을 것이오.

그저 오거나 가거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 앞에 지금 일하는 이 지금에  바로 서야 되지 안 서면 안 됩니다. 명예를 가지면 뭐 이며, 지위를 가지면  뭣하며, 무슨 훌륭한 무대를 가지면 뭐할 것이며 뭐입니까? 당신이 나를  인정해야 되지. 당신이 인정해야 돼지. 당신의 인정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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