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강

 

1987. 6. 5. 밤 (금)

 

본문:빌립보서 4장 4절∼7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게 7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의 이 평강을 땅위에서 가진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평강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피조물이 어떻게 하든지 피조물에게 조그마치도 제재를 받지 않는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생활에서나 공생활에서 안팎이 항상 평안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평강을 가지셨는데 다만 그 평강이 외부에 나타나기를 근심으로도 나타났고, 슬픔으로도 나타났고, 눈물로도 나타났고, 고민으로도 나타났으나 그것은 이 평강의 영향으로 이 평강 때문에 모든 죄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런 심정과 모든 행위들이 생겨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모든 근심이나 걱정이나 염려나 또 울음이나 고민이나 하신 것은 당신 자신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도 없고 다만 첫째 우리 택자들과 또 그 외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심으로 그 사랑의 본능의 작용으로 그랬던 것이지 당신 위해서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 평강으로 늘 그 마음과 생각에 가득찼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 위해서는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었고 또 당신이 당신 위해서는 할 일이 다 하나도 없었고, 다 완전히 이루어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만 그 사랑이 우리를 위해서 이루지 못한 그런 것으로 우리 위해서 슬퍼도 하셨고, 탄식도 하셨고, 고민도 하셨고, 눈물도 흘리시고 우시기도 하고 했지 당신 위해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평강이 그 속을 주장하시는 이 평강의 발동으로, 이 평강의 발동으로 땅위에서 온갖 고민도 슬픔도 가지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기도 했습니다. 이 평강의 소산과 소행으로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런 일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그 세례받으실 때도 예수님은 심히 기뻐하셨고 하나님 아버지도 나타나서 기뻐하셨고 또 십자가에 못박히실 일을 변화산상에서 의논하고도 심히 기뻐하셨고 또 십자가상에 달려서도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몇날이 못 되어 서기관과 제사장들에게 정죄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또 삼 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은 심히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으니라.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내가 너희들을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이 말을 듣고 너희들이 근심하나 너희들이 몰라 그렇지 나를 진정 사랑하였으면 내가 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 왜? 그 이유는 이것이 현재보다 못한 그런 실패가 아니고 점점 온전해지는 것이며 점점 커지는 것이며 점점 모든 일이 다 완전을 이루어 점점 더 완전해져가는 그런 일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이 비밀을 알지 못하고 인간 생각을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근심하고 걱정하나 실은 깨달으면 너희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으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그러고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말씀은 사람들이 인간 생각으로 해석할 때에 너무 십자가상에 우리의 죄를 대형할라 하고 대행할라 하고 대화친의 화목 제물이 될라고 하시니까 너무 그 고난이 어렵고 너무 기막혀서 그렇게 주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원망 비슷한, 원망 같은 그런, 불만 불평 같은 그런 말을 하시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에게 ‘양성원에 칼빈 주석이 있으니까 칼빈 주석에는 뭐라고 말했는지 그걸 좀 찾아보십시오’ 이렇게 말을 했더니마는 찾아보고 거게 있는 대로 ‘너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어려움이 너무 심하고 너무 고민스러워서 그렇게 말을 하지 안할 수 없는 그런 형편이라 필연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게 됐다’ 다 너무 고통스럽고 어려워서 못견뎌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그렇게 해석을 해 놨고, 또 박윤선 목사님은 내나 같은 성질의 말인데 ‘그는 예수님의 그 심령적 그 고민의 고통이 심해서 그렇게 말씀했다.’ 어쨌든지 이리 말했든지 저리 말했든지 다 예수님의 그렇게 말씀하신 거는 고난과 고통이 심해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것으로서 다 해석이 돼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몇 시간 전에 유월절 성만찬을 자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하시면서 떡을 떼어 주면서 당신의 몸이라는 것을, 포도즙을 주면서 당신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내가 어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것이 못박혀서 모든 택자들의 구원을 위하고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를 원하고 원하신 그것을 가리켜서 “내가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기까지 고민스럽게 기도를 하시다가 기도의 그 응답을 받고 나서 기도를 다 하고 난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와서 “이제는 자고 쉬라. 또 너희들이 이제 평안하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한 모든 것을 보면은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 벌써 창세 전, 천지를 창조하시기 창세 전 목적을 정하신 다음에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시는 그 예정에 벌써 그때에 당신이 그 일을 예정하셨고 또 그 일을 위해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그래 가지고 예수님이 구약 그 성경에 기록한 모든 표적인 그 계시인 역사들이나 신약에 역사들이나 그 모든 것을 보면 전부가 다 조직적이요 예정적이요 계획적으로 돼 가지고서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하면은 예수님의 그 계획하신 창세 전 영원 계획은 다 실패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원하시고 원하시고 원하셨고 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나 또 교훈하신 그 모든 것을 보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안하면 이 구원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그것이 예수님의 교훈의 전부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으례히 십자가 못박혔으면 아프지 못박히신 그런 일로 가지고서 그렇게 못 견뎌서 원망스러운 그런 말을 할 리는 없는 것입니다.

또 그러고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떻게 지금 나를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원하는 그 대속이 아니고 거게 원망이 가득 찬 대속이니까 그 대속은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그 대속으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죄 지은 것을 다른 분이 죄의 형벌을 대신할 수 있으며 행함을 대속할 수 있습니까? 이 대속이라 하는 것은 원하고 원하고 원하고 원해서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본인이 원하고 자꾸 원하는데 어떻게 이 자유성 있는 이 세계에서 자원하는 것을 그렇게 거절할 수 있는 그런 어데 공법이 어데 있느냐? 자원하는 대로 허락하는 것이 그것이 지공의 법이 아니냐 해 가지고서 예수님이 그 대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을 왜 내가 말하는고 하니 이제까지에 벌써 예수님이 그 말씀 하신 지가 근 이천 년이 다 돼 가는 데에 거게는 사도들도 있었고, 속사도들도 있었고, 속사도 교부들도 있었고 모든 수많은 그 신학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다 이 성구에 대한 해석을 ‘예수님께서 불만해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불만했든지 어쨌든지 불만하는 원망하는 그런 표시를 안 할 수 없어 했다’ 하는 이 해석이 전부 공통입니다.

전부 공통이니, 내가 이 말하는 건 전부 공통이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강을 가지셨는데 이 하나님의 평강을 사람들은 전혀 이해를 못 한다는 것을 지금 말하기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의 평강,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만일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그 일, 회개도 대신 해서, 회개 세례도 대신 회개 세례를 받았고 또 십자가의 대속하셨고 또 영원히 창조주가 피조물을 영원히 입고 있는 것, 천한 것은 벗어버리고 존귀한 것 입어야 좋지 천한 걸 입어 가지고서 좋아할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똥 포대기, 똥 푸대기, 우리가 송장 그 쌌던 피묻은 송장 댕였던 그 두더기를 우리가 옷으로 입는 것 그런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그 피조물의 인성을 입는 거와는 비교를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일을 왜 예수님이 하셨는가? 이것이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기쁨.

이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기쁨을 도무지 측량 못 한다.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그 말은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떻게 나로 하여금 이 모든 자의 대형을 하게 하시며 대행을 하게 하시며 대화친을 하게 하시며 영원히 대신 천해져서 상대방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일을 맡깁니까?’ 이는 참으로 예수님께서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에 넘쳐서, 감사와 기쁨에서 ‘어떻게 이렇게 영광스럽고 존귀한 이 직책을 나에게 맡겨서 나로 하여금 이 직책을 하게 하십니까?’ 하면서 감탄해서 못 견뎌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는데 인간들은 그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근 이천 년이 되도록 성경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이 생각할 때에는 다 ‘예수님이 너무 기막혀서 그렇게 안 할 수 없어서 그렇게 고민하고 원망하는 소리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 얼마나 기쁨이요 얼마나 즐거움이며 얼마나 평강이 된다는 그것을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의 그 기쁨인 것을 이해 못 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내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에 “그리하면” 위에 그리 하는 게 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모든 지각에 뛰어난” 모든 지각이라 말은 인간들이 아무리 알고 깨닫고, 아무리 알고 깨닫고 또 알고 또 깨닫고 또 연구하고 또 연구해도 인간의 지각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그 평강이라 그 말입니다.

“인간의 지각에 뛰어난”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무한히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평강을 우리들이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것이 돼 가지고 있는데 이 하나님의 평강을 아는 사람도 있고 맛본 사람도 있고 이 평강을 가진 사람도 있고 이 평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고 이 평강에 대해서는 참 백지가 돼 가지고서 이 평강을 보는 데에는 너무 첩첩이 많이 문이 가리워 있기 때문에 그저 이천 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궁구하고 궁구했지마는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인간의 지각에 뛰어난,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기쁨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평강스럽고 기뻐서 못 견뎌서 하는 그 말이 이게 다 불만 불평의 말로서 해석이 되어졌다 하는 그것을 말합니다.

이래서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모든 지각, 인간들의 지각이 뭐 그거는 또 생각하고 깨닫고 연구하면 자꾸 나오겠지요. 그러면 이천여 년 동안이나 나올 뿐만 아니라 앞으로 무궁세계에 가면은 하나님에게 대한 모든 이 하나님의 평강도 연구해서 또 알고 또 알고 ‘아이쿠’ 깜짝 놀라면서 또 알고, 이번에 대구에서 그들이 “놀라 가로되” 놀라서 이 놀랜 깨달음을 가진 거와 마찬가지로 영원 무궁토록 ‘예수님은 이렇게 기쁨이 있기 때문에 이 기쁨을 누렸구나.’ 깜짝 놀라 ‘이 기쁨을 누렸구나. 또 이 기쁨을 누렸구나.’ 영원히 깜짝 깜짝 놀라서 ‘이 기쁨을 누렸구나. 이 평강을 누렸구나. 이 속에 이게 있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영원히 알고 알아도 다 알 수가 없는 그 평강이라는 것을 가리켜서 “인간의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런 평강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런 평강을 우리가 누릴 수 있다 하는 걸 말했습니다.

어짜면 누릴 수 있는가? 7절에 “그리하면” 이 평강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지 안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 말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습니다.

우리를 택했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거게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활의 대속, 그러면 사활의 대속은 종점이 뭐입니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종점이 뭐입니까? 선택하셔 가지고서, 예정 구원 창조 구원, 대속 구원, 또 중생 구원, 하나님의 자녀 구원, 하늘나라의 시민권의 구원, 하나님처럼 완전한 성화받는 성화의 씨의 구원, 셋, 물과 피와 성령의 보증 구원, 또 생명의 부활. 생명의 부활.

또 뭐입니까? 제사장, 선지자, 왕, 또 뭐입니까,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뭐입니까? 영광의 찬미,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은 하나님과 꼭 같이 된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는 말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인데 택하시고 하나님의 목적인 택하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이 예정됐고 모든 것이 창조됐고 또 대속이 이루어졌고 마지막에 최종으로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최종으로는 무엇이 우리에게 이루어집니까? ○○○조사님? 최종으로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집사님? 하나님의 뭐? 왜? 영광의 찬미에서 그 맺은 끝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이렇게까지 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라 말은 도성인신하신 이후로서 제사장, 선지, 왕,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 하나님의 형상, 여게까지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리스도는 예정 창조 이제 거게서부터 이루어진 것을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 말은 영원 전 선택에서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로 형상까지 그 어간에 있는 이 전부를 다 망라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한 것입니다. 요것을 믿어요.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뭐이 지켜? 이 평강이 지킵니다. 이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키니까 우리 마음은 이 평강의 마음이요 우리 생각은 이 평강의 생각이라.

이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함같이 나도 너희들을 사랑하니 너희가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하려 함이라.” 그 기쁨이 뭐이냐 하면은 이 평강입니다.

이래서 이 평강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본체신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계시면서 모든 부요를 다 내놓지 안하고는 견디지 못했고, 또 당신이 도성인신 않고는 견딜 수가 없고, 또 땅위에 오셔 가지고서 이 대속, 또 영원한 우리에게 중생 주기 위해서 부활하신 이 일을 하셨으니 그것을 보고서 우리는 웁니다. 너무 감사해서 울고 ‘그렇게 큰 고생해서 해서 하셨다’ 이렇게 웁니다.

우는데 주님은 이 일이 당신이 안 하고는 못 견딥니다. 예수님께서 도성인신하지 안하고는 견디지를 못했고, 만일 도성인신 안 하시고 이렇게 하지 안했으면 예수님이 못 견딥니다. 못 견뎌. 참말로 죽어요. 못 견뎌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그렇게 강제로 하니까 강제당해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당신의 본성으로 박힌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당신의 본성으로 인해서 안 박히고는 못 견뎠습니다.

왜 당신의 본성이 뭣 때문에 그와같이 지금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풀지 안하고는 못 견딜까? 그 본성이, 그 본성으로 인해서 못박혔는데 그 본성이 어떻기에? 그 본성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안 박히고는 견딜 수 없어서 박히신 그 예수님의 기쁨이며 평강이며 예수님의 본성이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모든 그 병정들 때문에 당한 것, 그것 껍데기 보면 그렇지마는, 그것보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당한 것, 그것보다 당신의 본질과 본성으로 인해서 안 하고는 견딜 수 없는 그것이 가장 기쁨과 만족이 된 것이 그것이 주님이시며 주님의 평강의 그 본질과 본성을 지금 말하기 위해서 약간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평강의 본질과 본성이 어떠하다 하는 것이 조금 뭐이 아삼아삼하게 뭐이 잡힐듯 합니까? 어때요? 저 ○조사? 포항에 있는 ○조사? 잡힐듯 해? 알쏭알쏭 해? 확실히 있는듯 해? 그래 알리기 위해서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니까 이 평강, 이 평강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차고 이 평강이 우리 생각에 가득 차면 우리도 제이 예수가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것을 가졌으면 제이 예수님이되지 안할 수 없어.

그 길밖에는 좋은 길이 없고, 그 길밖에는 만족한 길이 없고, 그 길밖에는 평강의 길이 없어. 그러니까 여기는 사망이 근방에 비추지를 못해. 이러니까 땅위에 모든 생활은 전체가 사망의 뭉텅이입니다. 사망의 뭉텅이.

그런데 오늘 밤에 말할라 하는 것은 “그리하면” 하는 요게 문제입니다. 인제 그리하면 우리에게 이런 평강이 오는데 이것은 다 순서적이요 필연적입니다.

필연적이라 말은 그게 일호가 되니, 일호가 되니 이호는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고, 일호와 이호가 되니 삼호는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고, 일호 이호 삼호가 되고 보니까 사호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는,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필연성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실은 기독자의 구원은 다 필연성의 것입니다. 이걸 일호를 하면은 이호 안 될 수 없고 이런 건데 일호를 하지 안하고 이 껍데기로 사람들이 전체를 한목 다 얻을 줄로 알고 이렇게 망라해 하니까 말뿐이지 실상과는 천리 만리 거리가 멉니다. 실상과는 천리 만리 거리가 멀어.

그러면 그 순서를 잠깐 말합니다.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제일 원인입니다, 여게서는. 여게서는 “그리하면” 하는 것 중에 일호가 뭐인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 요것을 하면, 요것을 하면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요걸 하면은 항상 기뻐하는데 요 항상 기뻐하는 요 기쁨을 갖추게 되면 그 기쁨이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 기쁨을 초월한 기쁨이 또 생겨집니다. 알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는 요 기쁨을 가지면 그 기쁨이 늙어서 쇠해지는 게 아니라 그 기쁨이 그 기쁨에 초월한, 그 기쁨보다 더 초월한 더 강하고 가치 있고 존귀한 그런 능력 있는 기쁨이 또 생겨진다. 그러면 기쁨에서 기쁨으로 자꾸 기쁨이 커올라가고 자꾸 높이 올라간다 말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제 제일 원인은 뭐이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제일 원인이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요거 마련하면은 그보다 더 초월한 기쁨이 또 그 위에 또 생겨집니다. 그보다 더 초월한 기쁨이 그 위에 생겨져.

그라면 자, 손가락으로 한번 말해 봐. 일호가, “그리하면” 했으니까 “그리하면” 이걸 만들어야 되겠어. “그리하면” 이걸 만들어야 되는데 “그리하면” 했으니까 그리하면을 만들어야 되겠는데 제일 처음에 만드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요것을 일호로 만들어야 되겠다 말이오. 일호, 또 그 다음에는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호는 이제 항상 기쁜 그 기쁨에 그 기쁨을 초월한 기쁨 쑥뿍 솟은 기쁨이 또 생겨진다. 필연적으로 돼. 이게 다 필연적으로 다, 이거 일호 해 놓으면 이호는 필연적이라. 이호는 필연적.

또 삼호 필연적이 뭐인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삼호는 관용입니다, 관용. 관용은 아주 사람들에게 대하는 모든 것이 다 관대하다, 아주 크다, 크다 하는 말과, 크다 하는 말과 다른 사람에게 대한 것도 클 뿐 아니라 또 모든 상대방을 내가 접촉하는 것도 아주 크다 그걸 가리켜서 관용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모든 사람들을 상대해서 사는데 그 상대하는 것이 상대하는 것이 도무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저 사람은 나를 상대할 때 뭘 가지고 상대하며 어떻게 상대하며 뭐를 목적하고 상대하는지 그걸 알지 못할만치, 마치 말하면 그저 한 서너 살 먹은 어린아이 그 어린아이와 또 거게서 아주 수양이 많은 숙달된 수양 많은 그 큰 사람이 그 아이를 상대할 때에 그 아이는 그 큰 사람이 자기에게 대해서 뭐할라고 이렇게 하는지 저렇게 하는지? 제게 대해서 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 못 합니다. 이해 못 해요. 이 말로 좀 표시하니까 알 수 있습니까? 이해를 못 해.

예를 들어서 어떤 그 주인이 자기 집에다가 무슨 관상조를 하나 새를 키우면은 새를 키운데 거게 대해서 주인이 이렇게 그 새에 대해서 이렇게 경영하고 저렇게 경영하고 이렇게 목적하고 저렇게 목적하고 이렇게 목표를 정하고 그에게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을 새 제가 알 수 있소 없소? 그 주인이 새에게 대해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서 그래 하는 것을 새가 이해할 수 있소 없소? 이해하겠습니까 못 하겠습니까? 이해하요 못 하요? 이해 못 하지? 이해 못 해.

이해 못 하는 거와 같이 천하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다 네가 거게 대해서 인간에게 대해서 이와같이 하는 것을 그들이 이해 못 할 그들에게 갑론을박으로 그저 멍군 장군 이랄 게 아니라 상대할 게 아니라 그분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분들을 심히 탁월하고, 심히 탁월하고 심히 초월하고 그들이 상상도 못할 고차원에서, 예수님이 너거들을 위해 사니까 모든 사람이 뭐 이해를 못 하지요. 이러니까 예수님의 흉내를 내서 예수님이 지금 뭐 이걸 노려서 그라는가 저걸 노려서 그라는가 해 가지고서 명예주의로 공명심으로 이래 가지고서 뭐 자기가 무슨 희생의 제물같이 된다 하는 그런 것 같지마는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껍데기를 보고서 저희들이 그와 같이 지금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영원 전, 영원 전 목적을 정하시고 예정하시고 창조하셨다는 이걸 이렇게 말해도 이해를 못 해요. 그 이해를 못 하기 때문에 믿어지지 안하지.

그러면 하나님이 이 사람들에게 대해서 계획하는 것이나, 그 모든 경영하는 것이나, 상대하는 것이나, 거게 대해서 또 모든 보응 보수하는 것이나 이런 것을 인간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지극히 큰 관대함을 가지고서 인간을 상대하는 거와 같이 네가 이런 이 관대함이 필연적으로 생겨질 것이다.

네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자꾸 멍군 장군으로 이런 게 아니고 사람을 일대 일로 상대하는 게 아니라 그분과, 도무지 그분이 이해할 수 없는 상상도 못 할 그런 아주 이 관대함의 네가 되어 가지고서 모든 사람을 상대하는 그 관용을 사람들에게 보여 줘라.

‘저 사람은 저거 참, 저 사람이, 저 사람은 돈을 보고 사는 사람인지, 애정을 보고 사는 사람인지, 감정으로 사는 사람인지, 저 사람은 이건지 저건지?’ 사람이 그래도 몇 해를 지내면은 사람을 압니다. ‘저 사람은 요런 사람이라’ 사람을 알아. ‘그 사람은 세모잡이다 네모잡이다 뭐 무슨 오모잡이다 육모잡이다’ 이 알 수가 있어.

그거 그 사람을 다 알 수 있는데 이제 기독자는, 어째 보면 그 사람이 바보 같기도 하고, 어째 보면 인색하기도 하고, 어짜면 관대하기도 하고, 어째 보면 유물주의 같기도 하고, 어째 보면 그뭐 권세를 탐하는 뭐, 도무지 아무리 몇십 년을 같이 있어도 그 사람이 뭣 보고 사는 사람인지 뭘 하고 있는 사람인지, 그 사람이 꼭 요렇다 하고서, 틀림없다 요렇다 하고서 견적을 내 가지고서 비판을 탁 하고 보니까 나중에 보니까 엉뚱하게 그 사람 아니라. 또 딴 사람이라. 이것이 기독자입니다. 왜? 그는 커.

“관용함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네가 모든 사람을 전인류라도 품 안에 다 품을 수 있고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고차원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 관대함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을 향하여서 하시는 거와같이 그런 데에서 네가 살아서 그것을 보여 줘라.

이러니까 어떨 때는 미국이 소련하고 이래 할 때는 ‘미국 사람 그거 등신들이라.’ 이래 쌓아도 뒤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이 세계를 향해서 향하는 그 조금 아주 조금 차원이 높으고 관대한 그것을 이해 못 합니다.

이해 못 하나 오랜 지난 후에 보면은 알 수가 있어. 청교도들 산 생활은 그대로 사는데 지금 뭐 자손들은 조금 착각되는 일 있지마는.

여게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먼저 돼라. 다시 말하면 그 기쁨이, 기쁨에 초월한 성장된 기쁨을 가져라. 그라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네가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관용이 ‘저 사람은 관용한 사람이다. 저 사람의 포부는 큰 사람이다. 저 사람은 뭐 그 사람의 포부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또 그 사람은 그라면 뭐 다 무저항주의냐? 무저항주의도 아니고 절대 저항이고’ 이래 놓으니까 예수님을 이제까지 믿었지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하는 것처럼 이렇게 이 점점 큰 사람이 되는 걸 가리킵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을. 사람 상대하는 데에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을 초월한 인간 상대에 그 관대한 사람이 된다 요것이 몇호입니까? 삼호.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제 주님이 한 토막 나그네 생활을 살려 놓고 주님이 곧 오셔서 주님 만날 터이니까 주님 만날, 주님 만날 그것이 목표고 소망이라. 그러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러니까 주님 만날 그것이, 주님 만날 그 시간, 주님 만날 그때에 주님과 나와 관계성 그것이 땅위에 소망이 돼 가지고서 그것만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제 필연적으로 돼진다. 요것도 요 필연성인데 그라면 요거 사호입니까? 사호.

또 오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이러니까 이 사람은 염려가 없어. 죽음에도, 죽음이 와도 염려하지 안하고, 천하가 들어붙어도 염려하지 안하고 아무 염려가 없어. 그 사람이 ‘이라면 좀 자극을 받을까?’ 이것도 자극 안 받고, 저것도 자극 안 받고, 또 이걸 주면은 좀 욕심이 생겨 좀 눈이 떨어질까 하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아무 염려가 없는 사람이 돼. 요거 오호입니까? 오호에는 염려 없는 사람, 염려 없는 사람.

일하다가 무엇이 목회하다가, 목회하다가 그만 교회가 다 절단나서 교인이 하나도 다 없어져도 염려 안 하고, 전쟁이 나도 염려 안 하고, 또 교회가 이렇게 막 벌컥 불어서 어떻게 된다고 해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지 그 속에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요동하지 안하고 이 사람이 오호로 됩니다. 염려 없는 사람이 됩니다, 염려 없는 사람. 염려 없는 사람.

그 모든 것이 다 이하 차원의 것들이기 때문에, 이하 차원에 있기 때문에, 그 이상 고차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염려되지를 안해.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모든 일, 그러면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뭐 크고 작은 일이나 사건이나 뭐이나 모든 일에는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는 기도해. 육호 기도. 무슨 일이든지 있으면은 그저 기도해. 왜? 뭐 어떤 큰 일도 기도, 작은 일도 기도, 세밀한 일도 기도, 그저 무슨 일이 있으면, 일 있으면 염려는 하나도 없고 그만 기도해. 기도하면 돼. 기도. 또, 그라면 육호입니까, 기도가? 칠호는 “간구로”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간구로” 그라면 뭐 할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일이 있으면은, 부자가, 부자가 뭐 할 일 있으면 그만 돈만 한 뭉텅이 척 내 주면 돼 버립니다, 그 할 일 있으면. ‘저 무슨 큰 일이 닥쳤는데 어째야 됩니까?’ 돈 한뭉텅이, 수표 하나 끊어 주니까 그만 그 일이 돼 버려. 그거 어떤 일이 있어도 염려하지 안하고 수표만 하나 끊어 주면 자꾸 일이 잘돼. 그것 모양으로 무슨 일이 있든지 염려하지 안하고 그저 그만 무슨 일만 있으면 기도해.

“기도와 간구로 하되” 그러면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조금 지금 더 큰 일이라면 간구로 하고, 그러면 뭐 딴거 하지 안해. 기도와 간구로 일 다 해 버려. 기도와 간구.

“하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아뢰라” 이것도 다 필연성이라. 이라니까 이제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은 이 감사함은 받아서 감사합니까 받기 전에 감사합니까? 이 항상 기뻐하는 것 자, 요 “감사함으로 아뢰라” 요 감사함이 몇 호지요? 팔호? 팔호. 위에 칠호를 가지니까, 칠호를 가지니까 이제 이 팔호에서는 감사밖에 나오는 게 없어, 감사밖에. 왜?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고 이리 이리 이리 이리 자기가 됐는지? 만고에, 만고에 이거는 하나님이라.

모든 것이 됨으로 감사하는 게 아니고 이 감사함은 그 모든 이제까지 나온 조직이나 순서나 모든 형편이나 조성이나 모든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 되고 되고 넘치고 넘치는 남은 무한을 가지고 있는 그 이미 자기가, 자기가 자기 되어 있는, 자기 입장되어 있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자기가 자기 되어 있는 이것을 생각하고 기뻐서 즐거워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요? 칠호까지 된 것, 칠호까지 된 것, 그러면 뭐 칠호까지 됐는데 거게서 뭣을 간구하고 기도하고 하니까 뭣이 받아지니까 받아지는 자기에게 취득이 되어지는 취득을 인해서, 일이 이루어진 것을 인해서 기뻐합니까, 이미 필연적으로 쭉 돼 나온 과거에 일곱 가지에서 마지막으로 자기가 감사함이 여덟째를 감사하면서 그렇게 되어져 있는 그 순서를 인해서 기뻐합니까? 이 감사함은 뭐입니까? 이 감사함은 받아서 감사합니까 그 자체를 생각해 보니까 감사가 나와서 자기라는 ‘나를 어떻게 이랬는고?’ 자체로 감사합니까 그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니까 감사하는 것입니까? 자체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라니까 “감사함으로 아뢰라” 막 안 되니까 사생결단하고 뭐 주십시오 이것도 아니야. 주님이 심한 통곡으로 간구해서 다 만들어 놨어. 다 만들어 놨기 때문에,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저,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만 통지만 보내면 돼. 통지만 보내면 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은행에 만일 자기 재산이 수백억이 있다고 하면은 그저 거게는 그뭐 거석할 것 없이 수표만 써서 보내면 그만 돈 와. 돈 오고 얼마든지 말이지.

이러니까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렇게 모든 것에 대해서 받아, 내가 간구했고 간구했으니까 주나 안 주나 그게 아니고 간구하면 으례히 주고 으례히 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자기가 그런 자기 돼 가지고 있는 데 대해서 기뻐하고, 기뻐하고,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그저 보고만 하면 돼. 아뢰면 돼. 보고만 하면 다 돼. 이럴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런데, 그라면 자, 팔호.

감사함으로 아뢰는 게 팔호. “그리하면” 뭐입니까? 구호는 뭐입니까 “그리하면” 구호가 뭐입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십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는 거” 그라면 몇호입니까? 십일호. 십일호.

이것이 순서적으로 돌담 쌓듯이 되는 것이지 절대 이것이 한층이라도 초절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전부 초월해 가지고 되는 거라. 요거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되고 그 다음에 되고 이 초월해 되지 초절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일호 하면은 이호 필연적으로 되고, 일호 이호 하면 삼호 되고, 삼호 되면 사호 되고, 사호 되면 오호 되고, 오호 되면 육호 되고, 육호 되면은 이제 칠호 팔호 되고, 칠호 팔호 되면 구호 되고, 구호 되면 십호 되고, 십호 되면은 십일호 되고 이렇게 되는 이거 순서적으로 되는 거라.

이 순서적으로 되는데 그리 해야 되는 것인데, 자, 여러분들 돌담을 쌓는데 돌 한 개 놓고 그 위에 또 한 개 놓고 이래 가지고서 백 개든지 천 개든지 포개기가 쉽겠소, 밑에 돌 한 개 안 놓고 그 위에 돌 한 개 놓는 것이 쉽겠소 어느 것이 쉽겠소? 천 개 놓는 것이 쉽겠소? 돌 밑에 한 개 놓지 안하고 그위에 한 개 놓는 그게 쉽겠습니까? 어느 게 쉽겠습니까? 어느 게 쉽겠소? 천 개 놓는 게 쉬워.

어렵기는 뭐이 어려운고? 어렵기는 뭐이 어렵소? 밑에 한 개 놓지 안하고 그 위에 두개째 놓을라 하는 그것이 어려워. 그 얼마나 어렵습니까? 얼마나 어렵소? 어려운 것이 얼마나 어려울란지 누가 수학 잘하노? ○○○선생 수학 잘해? 얼마나 어렵겠어? 절대 안 돼, 절대. 절대 안 돼.

따라합시다. 내가 말할 터이니까 아직 따라하지 마. 돌 위에 돌 포개는 것은, 포갬 포갬 포개는 것은 천 개라도 포갤 수 있고 만 개라도 포갤 수 있습니다. 힘만 있으면 포갤 수 있습니다. 이러나 돌 안 놓고 공중에 달지도 안하고 돌 한 개, 밑에 돌 없이 돌 포개는 것은 온 세계 이십세기의 과학이 다 달라들어도 못 포갭니다. 안 됩니다. 됩니까? 안 돼. 안 돼.

되게 할라면 사람 눈에 보이지 안하는 다른 막 전기로 공기 해 가지고 이게 주 뜨구로 이래 만들어 가지고 지금 하지 그냥 포개지는 게 아니라. 안 포개져.

하나님은, 하나님은 이 우주에다 달아 놓고 이래 있지마는 인간은 뭣인가 물질로 해 가지고, 안 되면 옆에 어떤 다른 힘으로라도 그놈을 들고 있도록 해도 해야 되지 그리 안 하면 포개지지 안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기독자의 구원 이루는 이 신앙 생활은 일호에서 이호로 삼호로 이렇게 점점 초월해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것이 기독자의 구원이지 초월 방식을 쓰지 안하고 초절 방식을 쓰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따라합시다.초절 방식은!절대 안 된다!초월 방식은!힘있는 대로 할 수 있다!초절 방식은!절대 안 된다!초절 방식은 절대 안 된다! 이런데 사람들은 전부 말로 가지고 다 되고 이와 같이하면 될 줄 알지마는 초월 신앙을 가지지 안하고 전부 초절 신앙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 믿어야 뭐 실상이 이루어져야지? 이루어지지 안하니까 이 세상에 이종교를 만들어 낸 것은 누가 만들어 냈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다음에 다 벌 받습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 전부 초월 신앙으로 이래 했으면은 뭐 다른 데로 갈 데 뭐 있는가? 예수교가 제일이다 예수교가 제일이다 막 모아들 터인데.

‘불교도 다 이게 복받는다 무슨 교도 다 다른 이종교도 다 복받는다 하지마는 그것도 복 못 받고 기독교도 복 못 받고 복 못 받는 거는 한가지고 거짓말은 한가지고 될 때는 되고지 뭐 어느 것이라도 참말 하는 종교가 어데 있노?’ 이러니까 기독교 아무리 전도를 해 봤자 안 믿어. 이렇게 안 믿는 자들이 돼 놓으니까, 그걸 봐도 또 안 믿어. 강퍅하기는 얼마나 강퍅한지? 이번에 이 대구집회 때도 누가 그뭐 안수했어요? 그런 것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하나님 말씀 듣고 요대로 믿고 행하기로 작정하면 병 다 낫는다’ 이랬어. 이번에는 오백여 명이 나을 걸 내가 봤는데 이제 나았으니 됐지마는 그때 뭐 보니까 ‘몇도 안 나을 건데 저 또 백 목사 우사한다’ 이랬는데 내가 한 게 아니라 주님이 설교하게 하신 그분이 나한테 말해서 그래 말했어.

이번에 말 들으니까 지금 들어온 게 얼마 들어왔다 하더라? 얼마? 얼마 들어왔어? 편집실 모르나? 오백 건이 넘었대. 오백 명이 넘었어. 병 낫은 거는 뭐 천도 넘고. 몇천이 되는지 몰라. 하나가 뭐 네 가지 다섯 가지 병 나았는데 사람수가 오백 명이 넘었어. 이거 하나님이 증거하는 것 아닙니까? 이래 하면 된다는 증거라. 믿으면 되는데 이라고 난 다음에는 그만 잊어버려 버리고 집어던져 버려.

어떤 사람은 얼마나 단단한지 작년에 나은 것을 자꾸 행여나 도질까 도질까 이래 있다가 이제 벌써 일 년이 지나가도 안 도지니까 ‘이거 보고 안 하면 나중에 벌받을까 싶어서 그래 보고한다’ 하면서 요새 또 보고가 들어와.

여러분들 우리가 요 기독교는 초절은 안 되고 초월의 기독교기 때문에 일호부터 시작하면 자꾸 필연적으로 자꾸 되고 되고 이래 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한 대로 모든 축복 오면은 자, 예수 안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소? 택한 자 아니라도 세상 봐도 그 사람 예수 믿을라 할 거라. 그라면 기독교 사회가 돼서 천국은 아니지마는 기독교 사회가 되면은 지상 천국이 될 만치 돼. 불택자들도 다 예수 믿게 돼요.

자, 인제 그라면 하나만 하면 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말은 죽기까지만 기뻐하라 말이요 죽고 난 다음에도 기뻐하라 말이요? 죽고 난 다음에도 기뻐하라 해, 죽고 난 다음에도.

자, 결혼의 첫 사랑, 첫 사랑으로 결혼해 놓으면 막 좋고 뭐 못 견뎌서 죽고 못 견딜 겁니다. 오늘도 보니까 내가 여기 보니까 우리 주일학교 반사 비슷한데 팔짱을 끼고, 결혼은 안 한 것 같은데 팔짱끼고 이래 가지고 저리 어데로 가는 데 보니까 아마 되게 좋은 모양이라. 애정에 좋은 것, 사업으로 좋은 것, 여러분들, 세상에 기쁘고 좋은 것 있는데, 기쁘고 좋은 것 있는데 기쁜 것이 뒤에 슬픈 것으로 바꾸어지지 안하는 거 여러분들이 하나만 말해 주십시오. 기쁜 것이 뒤에 슬픈 것으로 화해지지 안하는 거 하나만 좀 말해 봐. ○○○목사님 좀 하나 말해 봐요. 박식이니까 좀 알겠지. 세상에 말이요, 세상에. 안 믿는 사람들 중에, 안 믿는 사람들 기쁨 중에서 그 기쁨이 슬픔으로 화해지지 않는 기쁨 있어요? 있습니까? 없어.

사랑이 좋지, 뭐 죽고 살 만치 결혼의 첫사랑이 좋지. 그런데 그 사랑이 나중에 가서 뭣으로 변해지지요? 눈물로 변해져, 다. 눈물로 변해져, 눈물로. 슬픔으로 변해지고 고통으로 변해지고 안 그런 것 없어. 이런데 “항상 기뻐하라” 하는 것은 주 안에밖에 없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는 항상 기쁠 게 있지마는 주님 밖에는 항상 기쁠 게 없어, 여러분들.

이러니까 오늘 주님 안에서 기쁜 요것만 자꾸 마련하면, 항상 기쁘니까 항상 기뻐하는 이 기쁨은 죽을 때 없어집니까 안 없어집니까? 죽을 때 없어지면 항상 기쁨이 안 돼. 죽을 때도 없어지지 안하고, 병들어도 없어지지 안하고, 심판에 가도 없어지지 안하고, 부활해도 없어지지 안하고, 무궁세계에도 없어지지 안하고, 이 없어지지 안하는 거 항상 기쁜 행복 이것을 우리가 마련할 수 있어.

인간의 최고 행복은 기쁨입니다. 이래서 모든 사람들이 뭐든지 하는 것이 그것을 ‘이것만 해 놓으면 기뻐진다’ 기쁨을 목표로 삼고 이거 하면 기뻐진다 하고서 기쁨을 목표를 삼은 기쁨을 마련하는 것으로 모든 것 하고 있지 그 결과가 기쁘지 않다 하면은 아무도 안 합니다.

이런데 눈이 근시자라서 멀리 보지 못해 그래. 기쁘지마는 기쁨 끝에 슬픔이 되고, 사랑 끝에 미움이 돼지고, 이 평강 끝에 고통이 돼지는 이걸 보지 못하고 이 단면만 보고 길게 보지 못하는 근시자기 때문에 그렇지마는.

이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영원히, 망원경 가지고 영원히 봐도 그 기쁨은 변동 없을 그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 기쁨이 있는데 이 기쁨, 이 기쁨은 오면은 그 다음에는 열한 가지가 이루어져요.

이 기쁨을 가지면은 항상 기쁜 이 기쁨, 이 기쁨만 일초 기초만 놔놓으면 그 다음에 한 가지 항상 기쁜 위에 건축되는 것을 몇 가지 기쁨? 이분 숫자 잘 아는데. 열 가지지? 기초 빼면 열 가지 아니라? 기초까지 열한 가지 아니라? 이런데, 항상 기뻐하는 것, 항상 기뻐하는 것. 여러분들 항상 기뻐하는 것, 이 항상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걸 성령이 말했겠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주 안에 있는 것을 성경에 말했겠소 없는 걸 우리에게 백지 이와 같이 속여서 말했겠소? 속여서 말했겠소 확실히 있는 걸 말했겠소? 자, 성령이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하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했으니 항상 기쁨이 실상 실상으로 실존하는, 실상으로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가지라 했습니까 없는 걸 가지라 했습니까? 있는 것을 가지라고 했다고 확실히 믿는 사람 손들어 봐. 있는 걸 확실히 가지라 했어. 있는 걸 가지라 했어. 이러니까 가지면 돼.

그런데 이거 가질라면 하나씩 둘씩 찾아야 돼요. 찾아야 돼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찾는 자마다 만날 것이라 구하라 주실 것이라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이러니까 이 항상 기쁨은 항상 기쁨을 이것을 찾아서 만나야 되는데 항상 기쁨을 찾는 방편이 뭐이라요? 방편이 뭐입니까? 저 뒤에, 항상 기쁨을 찾는 방편이 뭐이요? 항상 기뻐하는 그 기쁨을 찾는 방편이 뭐라? 찾는 방편이 뭐? 찾는 방편은, 따라해.찾는 방편은! 저 뒤에도찾는 방편은!생각이다!찾는 방편은!생각이다!찾아 만난 것을!뽈끈 붙들어 내것 만드는 것은!믿음이다! 그라면 못 가요. 아무도 가져가지 못해요.

못 하는데 그러면 뭘 생각하라 말이요, 뭘 생각해?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들, 기본구원을 생각해요, 기본구원 기본구원을 생각해요. 기본구원. 기본구원을 생각하다니? ‘하나님이 천지 창조 전에 하나님 혼자 계실 때에 나를 택했다, 나를 택했다.’ 이것을 자기가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으로 택함받은 이 사실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자꾸 거게서 기쁨이 나옵니다, 생각하면.

그 다음에 이호로 생각할 것은 뭐이요? 예정. ‘아’ 예정이라 말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에 영계뿐 아니라 물질계 모든 우주에 한 순서 한 순서 자꾸 전개돼 나오는 것인데 한 순서 한 순서 전개돼 나오는 것인데 이 지구 조그만한 지구 땅덩어리도 뭐 이런 것 저런 것 자꾸 모든 것이 전개돼 나오지 않소? 전개돼 나오지 않소? 이 지구 땅덩어리에 전개돼 나오는 것 ‘미국에서 이런 게 나왔다 저런 게 나왔다, 또 이런 정치가 나왔다 저런 사상이 나왔다, 이런 전쟁이 나왔다 이런 과학이 나왔다, 모든 것 전개돼 나오는 것 하루 몇 개나 전개됩니까? 하루 몇 개나 전개돼요? 한번 말해 봐요, 누가 수학 잘하노? ○○○선생, 하루 몇 개나 전개돼? 어? 뭐라 해? 헤아릴 수 없어, 전개되는 것이.

그 전개되는 것이 그것이 예정대로 전개되는데 그 전개될 것을 예정한 것이, 정해 놓은 것이 예정이고 그 예정한 것을 그대로 전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의 창조인데, 창조 섭리인데 그러면 그 예정이 누구 위해서 있어요? 예정이 누구 위해서 있어요? 예정이 누구 위해서 있어요? ○○○집사, 누구 위해서 있어? 참 너무 건방지지 안했나? 우주와 영계 예정이 ○집사 위해서 있어? 우주와 영계 이게 모든 순서 이것이 자, ○집사 위해서 있어, 그래? 너무 참람되지 안하나? 정말로 ○집사 위해서 있어? 가져. 이것만 해도 한없이 기뻐. 거짓말입니까? 모든 순서 그거 나 위해서 있어. ○집사만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나 위해서도 있어.

모든 예정이 하나님의 목적인 내 구원 위해서 있어, 모든 예정이. 이걸 자꾸 이 사실로 알고 이 사실을 믿을 때 어째 돼? 그러면 공연히, 공연히 거짓말로 기만의 말입니까, 속이는 말이요? 과장한 말이요? 자, 털끝만치도 과장이 있습니까? 없어. 파, 파! 생각해, 생각해! 자꾸 생각해. 생각하고 믿고 생각하고 믿고 생각하고 믿고 해 봐! 땅위에 이런 거 피조물 상대해 가지고 이렇게 할 게 없어. 관대해져. 관대해져.

아무 염려 없는 사람 돼져. 뭐 일이 있으면 썩썩 써서 보내면 몇천만 원 몇억만 원 나오는데, 뭐. 그 모양으로. 아, 뭐 거석하면 기도하면 돼. 염려 하나도 없고 기도와 간구로 아뢰야 돼. 그라면 안 주면 어짤꼬 조급한 게 아니라.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래 부르면 척척 척, 부르면 척척 오니, 부르면 척척 오니 이 어떻게 됐는고 안 올까 염려가 아니고 이렇게 된 과거에 여덟 가지 감사하는 것밖에, 감사가 돼. 감사가 돼. 이 사람이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오늘밤에는 항상 기뻐하는 이것이 기초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거게서 숙뿍 솟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는 기쁨이 옵니다. 이 두 가지 기쁨을, 자, 우주가 나 위해 있다. 모든 순서도 나 위해서 예정됐다. 모든 창조도, 모든 섭리도, 이래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독생자 보내 가지고 나를 대속했다. 하나님이 나를 대속했어. 거짓말입니까? 나를 영생하는 생명으로 중생시켜서 늙지도 쇠해지지도 안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 예수님의 대속은 완성인데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의 그 능력으로 내가 중생됐어. 영생으로 중생됐어. 이것도 자꾸 생각하면 뭐 땅위에 조급할 게 뭐 있어? 땅위에 뭐 탐할 게 있어? 이거 가졌는데.

그 다음에는 여러분들이 다 아니까 기본구원 열 가지 알 터이니까 이래 가지고, 요게 기독자의 구원인데. 자, 오늘 저녁에 이게 지금 열한 가지 말했는데 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자기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손들어 봐. 모두 거짓말 아니요? 자기 것은 자기 것인데 자기 것을 정말로 맛을 봐요, 좀? 느껴 봐요? 좀 실지로 느껴 봐요, 실감해 봐요? 기쁨이 와요? 땅위에 이 피조물하고 너 나 뭐 시비곡직, 시비곡직 할 게 뭐 없어. 여게 붙어 있는데 뭐하고 시비 있어? “모든 사람에게 관용함을 알리라” 너는 관용한 자라는 것을 알리라.

이렇게 영광스러운 것이 우리들인데 왜 이리 우리가 이렇게 못났습니까? 이제부터는 기초부터 합시다. 그저 기본구원 자꾸 생각해요. 생각하니까 기쁘고, 생각하니까 염려가 없고, 생각하니까 모든 게 평안해지고, 생각으로 가지고서 자기가 완전히 그 앞에 열 가지가 건설될 수 있는 이 사람이 되도록 해 보자 그거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광고합니다.

반사 선생님께서는 공과는 꼭 외우고 명상해야 됩니다. 하루 삼십 분 자기 미래를 위해서, 자기에게 소속한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기도를 놓지 맙시다.

어짜든지 이 큰 축복을 받으면 좀 알고, 맛을 알고 좀 깨달아야 될 건데,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데 있어? 이 양성원 학생들도 이 좀 알아 가지고서 속에 이 사람이 돼야 돼. 땅위에 뭐 탐할 게 있어, 지금 막 진뜩진뜩 세계를 뒤벼뜨려 버리고 말지.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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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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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2절/ 1985. 1. 4. 금새벽 선지자 2016.01.05
294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장-19절/ 1985. 1. 13.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5
293 하나님의 축복/ 신명기 28장 1절-6절/ 1984. 6. 27. 수저녁 선지자 2016.01.05
292 하나님의 축복 / 신명기 28장 1절∼6절/ 1985. 1. 23. 수저녁 선지자 2016.01.05
291 하나님의 축복/ 시편 1장 1절-6절/ 1983. 5. 14. 토새벽 선지자 2016.01.05
290 하나님의 축복과 건축연보/ 신명기 28장 1절-6절/ 1982. 5. 19. 수새벽 선지자 2016.01.05
289 하나님의 축복과 우리의 행동/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6. 4. 25. 금저녁 선지자 2016.01.05
288 하나님의 축복받는 방편/ 학개 2장 10절-15절/ 1985년 4월 21일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5
287 하나님의 축복-복의 기관/ 신명기 28장 1절-15절/ 1984. 6. 24.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6
286 하나님의 축복-하나님의 명령/ 신명기 28장 1절-19절/ 1985. 1. 6.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6
285 하나님의 크심과 사랑과 우리의 소망/ 디모데전서 6장 17절-19절/ 1983. 11. 23.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284 하나님의 크심과 사랑과 우리의 소망/ 로마서 1장 17절/ 1984. 1. 1.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11
283 하나님의 크심과 사랑과 우리의 소망/ 누가복음 18장 1절-8절/ 1983. 11. 23. 수새벽 선지자 2016.01.11
282 하나님의 크심과 사랑과 우리의 소망/ 요한복음 1장 1절-15절/ 1984. 1. 1.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1
281 하나님의 특사/ 롬 10장 8절-15절/ 1984. 5. 27.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11
280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충성/ 마태복음 23장 19절-24장 2절/ 1984. 1. 24. 수새벽 선지자 2016.01.11
279 하나님의 평강/ 빌립보서 4장 4절-7절/ 1987. 6. 6.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 하나님의 평강/ 빌립보서 4장 4절-7절/ 1987. 6. 5. 금저녁 선지자 2016.01.11
277 하나님의 평강/ 빌립보서 4장 4절-7절/ 1987. 6. 4. 목새벽 선지자 2016.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