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09 14:43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적통성
장차남 (온천제일교회 원로목사)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장로교회의 교세는 압도적으로 강세이다. 한국개신교 전체의 60%~70%를 점한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장로교가 곧 한국 기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로교는 1884년 9월 20일 알렌 선교사의 입국으로 한국주재 선교사로선 최초로 입국 하였기에 개신교 중 제일 뿌리깊은 교파이다. 그러므로 역사성과 교세면에서 장로교의 위상은 한국 기독교의 표상이요 장로교의 향배는 한국 개신교의 향방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런 장로교단이 해방전까지 하나의 총회였었는데 해방후 갈기 갈기 찢어지고 나누어 졌다. 몸이 찢긴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로서 교회의 이미지와 신뢰와 권위에도 손상이 컸다. 물론 제도적 교회로서 보다 영성적 교회로서의 단일교회로 보는 입장인 개신교에서 교회분열이 절대로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기본교리에서 성경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를때 갈라설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없는 분열은 주님과 교회와 역사앞에 죄가 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그러면 장로교 분열사에서 그래도 명분과 입장이 분명했던 1950년대의 고신, 기장, 통합, 합동으로의 분열에 대하여 먼저 개괄하고 다음은 장로교 총회의 본류가 되는 적통성이 어느교단 총회에 있는지 규명해 보고자 한다.
1, 1950년대의 총회분열
한국 장로교 총회의 분열은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연출되었다. 지금은 200개 교단도 넘을만큼 분화 되었지만 이슈가 분명한 분열은 1950년대의 10년간에 일어난 경우요 그이후의 이합집산은 장로교 전체의 입장에서 볼때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50년대의 분열은 장로교 총회가 하나였을때와 크게 두쪽으로 갈라진 경우였고 그 이후로는 자생 하였거나 인위적 규합에 의해, 또한 특정인이 세운 신학교 까닭에, 그리고 교권분쟁으로 인한 열패감 때문에 생겨난 교단들 이어서다. 그래서 초기 분열에 대해서만 그런대로 의미를 부여하여 그때의 사정을 개괄코자 한다.
1) 교회의 순결문제로 고신측 분열
해방후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던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가, 1946년 그의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와 한국교회를 지도할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역시 출옥성도인 주남선 목사 등과 더불어 박윤선 목사를 교장서리로 하여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원래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전통을 승계한다는 뜻에서 폐교전 그학교 교수였던 박형룡 목사를 교장으로 선임 하였으나 만주 봉천에 있는 그의 귀국이 늦어지자 임시체제로 개교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출옥성도들과 경남노회 일부 교권세력 사이에 갈등이 빚어져 제48회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에 제동을 걸었고,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에 잠정탈퇴를 선언하여 교계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결과 노회장 김길창 목사 등 임원들이 물러 서겠끔 되었다. 이때에 송상석 목사의 안내로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1947년 10월 14일 고려신학교 제1대 교장직에 취임하였다. 이때의 취임 강연제목이 <사도적 신학 소론> 이었다. 그러나 전국교회를 배경으로 주한 4개 선교부와 연관을 가지며 총회직영신학교로 승격시키겠다는 박 박사의 개방적인 입장은 기존 교회구조에 불신감을 가진 출옥성도 및 그들을 지원하는 메이천 계통의 선교사들 사이에 마찰을 일으키게 되자, 1948년 4월 박 박사는 조선신학교를 견제하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주도권을 확보코자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사실 박박사와 한목사 등 고신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한국교회 전체를 보는 시각에서 서로의 예정된 길이 있었다. 고신의 중심인물인 한상동 목사는 일본당국에 검속되기 전해인 1939년12월에 벌써 이인재 전도사 등과 밀양 마산리교회에 모여 “⑴천년세계가 임박 하였으니 지상천국 건설에 노력할것 ⑵신사참배 하지말것 ⑶신사참배한 교회는 파기할것 ⑷신사불참배 주의자로 새 교회를 조직할것 ⑸이 사업을 위하여 운동자금을 거둘 것” 이란 매우 혁신적인 결의를 하였고 1940년 1월1일에는 한상동 목사가 마산 제비산 위에 위치한 태매시 선교사 집에 이인재, 최덕지 전도사 등과 모여 “1)신사참배한 현 노회는 해체토록 한다. 2)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는다. 3)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새 노회를 조직한다. 4)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 원조를 도모한다. 5)신사불참배 그룹 예배의 여행과 동지획득에 주력한다”는 사항을 합의, 결정하고 실제로 모금도 하였을만큼 기존교회에 대한 불신과 새 교회에 대한 의지가 강하였다(김린서 편집:주기철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85-87쪽, 이상규 지음: 한상동과 그의 시대 52쪽, 심군식 지음: 손명복 목사의 생애와 설교 49-51쪽 참고). 이에 대해 주기철 목사는 모든점에서 한상동과 의견을 같이 하였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들만의 새로운 치리회구성은 ‘시기상조’로 보아 반대하였다. 주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는 개인적 결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인데 비해 한목사는 신사참배를 개인적으로 반대할 뿐만아니라 이를 조직화하고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이상규지음,상게서25,53쪽). 따라서 경남노회는 박 박사의 신앙노선을 지지하게 되었고 고려신학교의 인정취소를 결의하게 되었다. 한편 1948년 제34회 총회와, 1949년 제35회 총회는 거듭 고려신학교와 총회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천명 되었으며 6.25 전란의 와중에서 1851년 5월 24일 부산중앙교회당에서 모인 제36회 속회총회는 경남노회 분규에 대하여 고신측이 제외된 경남노회를 승인하므로, 고신파는 한상동 목사를 회장으로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하게 된것이 고신측 분열의 발단이다. 그리하여 1952년 9월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고신측 총로회가 조직되었다. 그후 1954년 4월, 제5회 총로회를 마지막으로 동년 9월 그동안 조직된 6노회 총대들이 부산남교회당에 회집하여 총로회를 총회로 개편하고 총로회 회수를 총회 회수에 가산키로 한 것이 고신파 총회의 공식 출범이다.
2) 신학의 자유문제로 기장측 분열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제27회 총회(1938.9.9~15)의 신사참배 결의에 항거하여 1938년 9월 20일에 자진 폐문후 채필근 목사를 교장으로 한 소위 ‘후평양신학교’가 1939년에 총회주도로 시작되었으나 1940년 서울 승동교회당 하층에선 기장측의 모태인 조선신학교가 김대현 장로를 학원장으로 김영주, 함태영, 이정로, 윤인구, 김재준 목사를 교수로 하여 시작되었다. 경기도지사의 강습소 인가를 받아 문을 연 조선신학교의 설립목적은 “복음적 신앙에 기해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재능있고 쓸모있는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8.15 해방이 되고 남북분단이 되자 조선신학교는 자연히 남부총회의 직영신학교가 되었다. 그때로선 남한에 소재한 유일의 장로교 신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를 중심한 일부 교수권의 신학내용이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허용하고 성경유오설을 주장하므로 학생들중 51인이 1947년 4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 김재준, 송창근 목사의 교수내용을 적시하여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사실 김재준 교수는 이미 <신학지남>1934년 1월호에 게재한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의 ‘처녀’를 사실과 본문에 가깝다며 ‘젊은 여자’로 고쳐 불렀고 거기서 ‘표적’을 ‘이적’으로 볼것은 없다고 지적하므로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 성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당시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어서 박형룡 박사의 제동으로 1935년 5월호를 끝으로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글을 쓸수 없게 되었다(이상규 지음; 한상동과 그의 시대 270쪽). 또 해방후 그는 1946년 <새 사람>지에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요 정통적 이단이다” 라고 도전할 정도로 썩 진보적이었다. 이에 총회는 김재준 교수를 1년간 미국에 유학케 하고 보수적 교수들을 보강한 조선신학교 개조안을 결의 했으나 조선신학교 측의 적극 반대로 1948년 6월 박형룡 박사를 임시교장으로 하는 장로회신학교가 신설되었고 1949년 제35회 총회는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결정하므로 총회안에 보수와 진보, 두 개의 직영신학교가 존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1년 부산중앙교회당에서 모인제36회 속회총회에서 권연호 총회장의 사회로 조신과 장신, 양 신학교의 직영을 일괄 취소하고 단일의 총회직영 신학교를 신설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1952년 4월 대구서문교회당에서 모인 제37회 총회에서 총회의 결정에도 굽히지않는 조선신학교 측을 제동, 선도하기 위해 성경유오설을 주장한 김재준 목사를 경기노회에 명하여 면직케 하고 서고도 선교사는 본국에 소환을 요청키로 결정했으며 1953년 4월 대구총회에서 전회(前會)의 결정에 따라 노회가 총회의 지시를 시행치 않았으므로 총회장이 직접 면직을 선언하였다. 이에1953년 6월 10일 서울 조선신학교 강당에서 호헌총회를 모이므로 기장측 분열이 이루어 졌는데 여기에 카나다 선교부가 동참했다.
3) W.C.C.의 찬반문제로 통합측 분열
1956년 9월 승동총회 때에 총대 100여명이 연서하여 ‘W.C.C. 탈퇴안’을 제출하였다. 이후 한국 N.C.C. 총무 유호준 목사는 ‘W.C.C.를 탈퇴할수 없다’는 장문의 성명서를 인쇄, 살포하였고 한국 N.A.E. 총무인 조동진 목사는 ‘W.C.C.를 탈퇴해야 한다’는 반박문을 기독공보에 실었다. 이들의 논쟁은 두어번 더 반복되었으며 W.C.C.에대한 찬반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총회에서는 1957년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을 선정하여 보고하게 했는데 그 조직은 위원장 한경직, 서기 정규오, 위원 안광국, 황은균, 전필순, 유호준, 박형룡, 박병훈 목사로 되어 있다. 찬반 위원이 4대4 였다. 세계교회운동에 대한 개방적 입장과 비판적 입장이 팽팽한 가운데 1958년 박형룡 박사는 신학지남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 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 세력과 교회합동의 구경적 목적을 비판하였다.
1959년 제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당에서 회집 하였을때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로 개회도 못하고 진통을 겪다가 근소한 표 차이로 임시노회측 총대를 받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124대 119, 기권 5표로서 중립을 지켜야 할 선교사 23명이 가세한 결의였다. 이 결의에 대하여 정기노회측이 불복하고 소원장을 내므로 회장은 그것이 유효함을 선언하고 정치부와 증경총회장에게 맡겨 보고, 처리케 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장내 소란으로 회장이 사무진행에 대한 대책을 증경총회장들에게 맡겨줄 것을 요청하여 거기에서 동년 11월 24일에 새문안교회당에서 모이되 경기노회 총대는 다시 투표하여 오기로 정하여 본회에서 받았다. 이에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했으나 안광국 목사 등 일부가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낭독하고 임원 불신임안을 낸다면서 자의적으로 가부를 묻고 회의를 계속한다 하였고 대전중앙교회에서 장소사용을 허락지 않으므로 야간열차 1량을 빌려서 동조하는 총대들을 서을 연동교회당으로 수송하여 증경총회장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계속 하였으니 이것이 소위 연동총회이다. 하지만 당시 임원들 중 회계, 부회계를 제외한 전임원과 다수 총대들이 그대로 11월 24일에 장소를 불허한 새문안교회 대신 승동교회당에 회집하여 총회장 노진현 목사의 사회로 속회총회를 한것이 승동총회이다. 이때의 형편은 막강한 선교부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승동총회가 연동총회보다 훨씬 강세였고 증경총회장도 한경직, 전필순 두분 외엔 전부 승동총회를 지지 했었다.
이렇게되니 당황한 것은 불법이탈한 연동총회로서 궁여지책으로 장로교회의 대분열을 마음아파 하는 교회의 정서를 이용하고 일부는 선교사들이 앞장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회유하여 1960년 2월 17일 새문안 교회당에서 증경총회장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소위 통합총회를 모이게 되었으며 이때에 승동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당선된 나덕환 목사가 거기에 합류했고 부서기로 있던 경북노회의 김삼대 목사가 거기에 동참했으나 후자는 큰 약속을 받고 갔었지만 그후 통합에서도 이탈하고 말았다(정규오 저:한국장로교교회사<상>246쪽). 그러므로 통합총회가 허구인 것은 교단대 교단의 통합이 아니라 일부가 개별적으로 참여한 통합일 뿐이다.
하지만 승동총회는 고신측과 신앙이 같은데 나누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 양 교단 대표들이 합의하여 1960년 9월에 모인 양측 총회에서 공히 정회하고 동년 12월 13일 승동교회당에서 합동하여 총회를 하였기에 진정한 합동이며 절차대로 한 합동이었다. 그러나 이 합동도 2년여 유지하다가 고신의 환원선언으로 600여 교회중 150여 교회만 남고 다시 고신교단으로 돌아갔다.
이상의 교파분열을 살펴보면 고신파는 순결문제로, 기장파는 신학문제로, 통합파는 W.C.C.문제로 나누어 졌으나 여기에는 교권과 지방문제, 선교사들 개입도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해방후 한국교회가좀더 자숙하고 스스로 겸비한 모습을 보였어도, 조선신학교가 장로회 정통적 신학 입장에만 있었어도, 선교사들의 본국교단 입장에 영향받고 휘둘리지만 않았어도 장로교 총회는 찢어지고 나누어 지는 분열의 아픔을 겪지않고 하나의 장로교 총회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장차남 지음:한국교회 목회현장을말한다260-264).
2, 장로교 총회의 적통성
장로교 총회의 분열로 하나의 장로교단이 여러개로 분화 되었을때 과연 어느 교단이 그 적통성을 승계하고 있느냐는 문제가 대두된다. 대체로는 교단의 규모에 무게를 두기도 하나 피상적 관점일 뿐이다. 이삭은 이스마엘 보다 나이로 보나 체구로 보아 비교가 되지않을만큼 열악했으나 아브라함의 적자로 가통을 승계했다. 또한 그가 가졌고 누리는 조건을 따져 평가하기도 하나 세속적 평가일 뿐이다. 서머나교회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고 한 말씀대로 신앙이 부요해야 주께서 인정한다.
그러면 한국의 장로교 적통성이 과연 어느 교단에 있는가? 여기서 한신대학을 중심하는 기장측 교단은 분립시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교단 명칭을 바꾸었고 고신대학을 중심한 고려측 교단은 분립시 총회 회수를 새로 정하여 출범 하였기에 자파가 장자교단 이라고 애써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총신을 중심하는 세칭 합동측 교단과 장신대학을 중심하는 통합측 교단은 양 교단의 명칭이나 총회 회수가 똑같음은 물론이요 교세와 역량에 있어서도 쌍벽이라 할만큼 호각지세 이므로 서로가 한국장로교회의 적장자라고 주장하는 형편이다. 여기서 이것을 가려 보자는 것은 산 신앙보다 죽은 족보를 챙기려는게 아니라 역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서 그 실상을 살펴 보고자 함이다.
1) 법리적 입장에서 본 적통성
적통성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게 법리적으로 적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해석에서 문자적 해석법이 기본이 되는 경우와 같다. 그렇다면 1959년에 모인 제44회 총회의 법통이 연동총회인가, 승동총회인가 하는점과 1960년에 모인 통합총회와 합동총회의 적법성이 통합총회에 있는가, 합동총회에 있는가 법리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제44회 총회를 준비하고 개회부터 임원교체까지 총회를 주도할 임원진을 보면 총회장 노진현, 부 양화석, 서기 김상권, 부 김삼대, 회록서기 정규오, 부 박찬목, 회계 김형남, 부 신태식으로 원부회계 두분을 제하고는 목사임원 전체가 반W,C,C. 입장이었다. 1959년 9월 24일 대전중앙교회당에서 회집한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로 공전하게 된것은 이환수 노회장측의 정기노회에서 뽑은 총대명단과 강신명 부회장측의 임시노회에서 뽑은 총대명단이 함께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계속 갑론을박 하다가 이튿날에야 투표를 하였는데 23명의 선교사표가 가세하여 5표차이로 친W.C.C. 측이 지지하는 임시노회 총대명단을 받기로 하여 26일에 호명 했다. 한편 정기노회측이 이에 불복하고 소원장을 제출했고 회장은 소원장이 살아 있음을 선언함과 더불어 이를 정치부와 증경총회장들에게 맡겨 보고 채용토록 했으나 그들의 해결안이 양측대립으로 가결되지 못한채 계속 장내만 소란할 뿐이었다. 28일 오전 9시에 속개후 토의중에 장내 소란으로 회의를 진행하기 곤란케 되어 회장이 총회진행의 묘방을 증경총회장들에게 회부하기로 제안하여 총회가 채택하였다. 증경총회장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여 총회가 가결하였으니 그것은 “⑴ 현 총회의 정세하에서는 회의를 원만하게 진행하기 곤란하므로 동년 11월 24일 화요일까지 정회하고 그 전으로 경기노회 총대는 개선하여 오도록 할것(단 계속 회의장소는 새문안교회로 할것). ⑵ 특별위원회를 원부총회장과 증경총회장과 각 노회장으로 구성하고 총회 당면한 문제를 수습하도록 하여 주실것” 이었다. 이에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 하였으나 안광국 목사가 단에 뛰어올라 미리 준비한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자신이 가부를 물어 가결되었다며 회의를 계속하겠다고 하자 대전중앙교회에서 그들을 용인하지 않으니 호응하는 일부 총대들을 대절한 야간열차에 싣고 서울 연동교회당에 모여 증경총회장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속개총회를 하였으니 속칭 이를 ‘연동총회’라 일컬었다(정규오저:한국장로교교회사<상>211-212,218쪽). 한편 원래의 총회는 예고했던 11월 24일에 새문안교회의 장소 불허로 승동교회당에 모여 노진현 총회장의 사회로 속개총회를 성료했으니 세간에서는 이를 ‘승동총회’라 일컬었다.
그러면 총회분열의 직접 단초가 된 경기노회 총대권문제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그렇게도 중요 한 것인가 ? 제44회 총회를 앞두고 교권의 향배에 따라 W.C.C. 찬반에 대한 총회의 정책노선이 정해질 것이므로 경기노회 총대 28명의 숫자란 선교사를 포함하여 284명이 총대인 당시의 총회에선 능히 대세를 좌우할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을 중심하는 경기노회는 전국 노회들 중에 제일 권위있는 노회인고로 그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당초에 5표 차이로 임시노회측 총대를 받기로 하였다가 이튿날 오전 9시 속개된 총회에서 문제된것은 정기노회측이 제소한 소원에 관한 건이었다. 잎서 결의한 것이 소장을 앞에 놓고 전총회가 치리회로 화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행할일이 아니었으므로 사무결의방식에 의한 전 결의가 법에 위반될 때에는 재론 되어야만 하였던 것이다. 정기노회 총대는 ⑴ 그선거, 그개표에 추호의 비법성이 없고 발표에 오착이 있었던 것이므로 발표의 오착만 수정할 것이지 전체를 무시하고 새로 택한것은 위법이고 ⑵ 노회규칙에 ‘총회총대는 5월 정기노회 에서만 택한다’는 법문이 있으니 임시노회에서 택한것은 위법이고 ⑶ 임시노회 안건은 ‘44회총회 총대항의의 건’ 이라고 되었던 것을 소집된 임시노회 석상에서 ‘시정’으로 고치기로 결의하고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총회 정치 제6장25조 제10항에‘임시노회는 통지서에 기재한 사건만을 의결한다’는 법에 위반이고 ⑷ 5월 정기노회 240여명이 선택한 총대를 80여명이 모인 임시노회에서 포기시킨다는 결의도 없이 재선만 감행하였으니 불법이고 ⑸ 총대권은 자기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누구든지 빼앗을수 없다는 점 등으로 그 위법성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를 묵과할수 없음을 깨달아 총회는 정치부와 증경총회장 연석회의에 회부하여 소원을 회답하는 법의 정신에 의한 처결안을 위임하고 정회하였다. 따라서 경기노회는 권징조례 제9장 91조에 의하여 양측 다 회원권을 상실케 되었다 (정규오 저:한국장로교교회사<상>214,215쪽).
결국 이 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동년 11월 24일까지 정회하고 경기노회는 총대를 다시뽑아오되 새문안교회당에서 속회한다는 증경총회장 회의의 방안을 총회가 받고 회장이 정회를 선언 하였건만 법에도 없는 임원 불신임안을 들고나와 무법총회화 하고 서울로 옮겨 연동총회를 만들었으니 이는 우발적이 아니라 아예 작심한 일이었다. 그 예로 안광국 목사는 불신임안을 여러장 써서 강만유 장로, 최중해 목사 등과 나눠들고 기회를 보던중 자기가 먼저 나가 낭독 하였다고 밝혔다 (안광국목사유고집297쪽). 그총회가 새로 만든 것임은 통합측 증경총회장 김종대 목사가 고 안광국 목사 추도사에서 이런말을 한데서 잘 들어난다. “대전총회에서 불의에 항거하여 단상에 올라가 성명서를 낭독했던 그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동아 에서는 안목사를 일컬어 <새 교파의 창시자>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안광국목사유고집353쪽). 쉽게말해 연동총회에서 시작된 통합총회는 안광국 목사가 창시한 교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합총회는 적법하게 조직된 단체인가? 여기에도 법리적으로는 문제가 있다. 먼저 연동총회에 명분이 없는데다가 적법하게 모인 승동총회에 정통성과 규모면에서 밀리게 되자 승동총회의 분열공작에 총력을 쏟으면서 양측이 합하자는 제안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개별섭외에 의해 승동총회에서 선출된 부총회장 나덕환 목사와 부서기 김삼대 목사 등과 합하여 1960년 2월 17일에 새문안 교회당에서 한경직 목사 사회로 소위 <통합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법리적으로 부적한것은 연동총회에서 파회한 총회를 다시 하므로 44회총회를 두 번 했다는 것과 양 총회의 합의에 의한 통합이 아니라 회유와 눈가림을 통해 눈덩이를 다시한번 굴리므로 외형을 키운데 불과한 기만이라는 것이다. 통합총회의 무법성에 대하여는 당시 승동총회 측에서 발표한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통합총회 성립으로 ‘연동 불법집단이 소멸되었다’며 소위 통합총회의 무법성을 이렇게 열거했다. “⑴ 소집결의가 무법이다. ⑵ 소집자가 무법이다. ⑶ 개회 사회자가 무법이다. ⑷ 횟수가 무법이다. ⑸ 통합이란 명칭이 무법이다. ⑹ 회원권도 무법이다”(내용은 지면관계로 생략함).
이에 비해 승동총회는 총회장을 비롯한 임원단중 원부회계를 제한 전임원이 총회진행을 섬기되 총회의 가결을 얻어 증경총회장과 총회장에게 해결방안을 맡겼고 그 회의 결과를 한경직 목사가 부르고 명신홍 목사가 기록하여 총회장을 통해 총회에 제출하여 가결을 얻었으며 이에 총회장이 11월 24일까지 정회선언을 하여 예정된 일자에 새문안교회 대신 승동교회당에서 모여 원만하게 회무를 마쳤으니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합동총회의 경우는 고신교단과 교단 대표간의 합의사항을 1960년 9월, 양측총회에 보고하여 합동을 결의한 후 정회하고 동년 12월 13일에 제45회 속개총회를 승동교회당에서 가졌으니 합헌적이요 적법하므로 적통총회이다.
2) 신앙적 입장에서 본 적통성
적통성 문제에서 신앙전통의 맥을 승계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영적혈통을 이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외형과 현상이 닮은꼴이어도 신앙전승을 못하면 이질화된 집단일 뿐 적통으로 인정받을수 없다. 그렇다면 교단총회에서 신앙전통의 상징이 과연 누구인가? 교단의 원로이면서 그동안 총회를 섬겼고 지도했던 증경총회장 들일것이다. 이들은 법리와 신앙은 물론 교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분들이다. 1959년, 연동 승동으로 나누어지고 1960년, 통합 합동으로 구분될때 증경총회장들은 대다수가 승동총회를 지지했고 합동총회에 합류했다. 단지 한경직 목사(제40회)와 전필순 목사(제42회) 두분만 연동총회, 통합총회에 참여하고 지원했을 뿐이다.
1960년 2월 17일 “통합총회” 이후 승동총회 측의 성명서 “2.17집단<소위 통합총회>의 무법성을 지적한다”의 말미에 증경총회장 7인의 이름이 연서 되었으니 이인식 목사(제23회), 이승길 목사(제25회), 최재화 목사(제35회), 권연호 목사(제36회), 명신홍 목사(제38회), 이대영 목사(제41회), 노진현 목사(제43회)이다. 또한 제44회총회의 전남노회 총대명단에도 나오는 김재석 목사(제37회 총회장)는 그해에 별세 하였으나 가장 확실한 반에큐메니칼 지도자였다. 안광국 목사는 김재석 목사에 대하여 “이 총회(분열당시)에서 N.A.E.측의 모든 지략은 김재석 목사에게서 나왔다. 그는 회무에 능한 분으로 김상권, 박병훈, 정규오, 박찬목 등 소장들과 합의하여 회의에 대한 지략을 모아 진행하였다”라고 하였다.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회무중 ‘소원장이 살아있다‘는 자신의 말에 ’총회에는 소원장이 없는것 아니냐”는 질문이 들어왔고 법에 아주 분명한 증경총회장 김재석 목사가 일어나 ‘총회장의 대답이 법이다’ 라고 하자 다른 사람들은 아무말도 못했다“고 하였다(노진현목사회고록:진실과 증언57-58쪽). 뿐만아니라 제24회 총회장 정인과 목사 역시 해방후 조용히 은거하여 지나는 형편이었으나 합동총회에 속한 파주 법원리교회를 한명수 목사가 전도사로 섬기는 3년동안 당회장으로서 주일날만 서울에서 낯예배 인도차 내왕하되 본인 신상에 대하여는 일언반구 없었기에 한목사도 그분이 증경총회장인줄 당시에는 전혀 몰랐었다고 하였다(한명수 저:잊지못할 사람들 55쪽). 이를 보아 정인과 목사 역시 합동측에 속하였다. 결국 당시의 생존하신 증경총회장 중 연동총회를 만들고 통합총회를 만드는데 사회를 본 한경직, 전필순 두분을 빼고는 전수가 총회본류에 서 있었다. 이분들은 오랜 세월동안 선교사들과 함께 일해왔다. 그런데도 신앙전통을 지키고자 그들과 동행하지 않고 결별했다. 당시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국교회가 빈약하고 열악하며 경제적으로 핍절한 때여서 선교사 의존도가 매우 컸다. 그들은 시혜자요 한국교회는 수혜자였다. 더구나 학교, 병원, 복지기관 등 주요시설 전부가 선교사들이 세웠고 후원하였다. 이런 그들과의 결별은 맨땅에서 빈손들고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증경총회장 대다수는 모세와 같은 심정으로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오직 신앙을 택하였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신학교의 경우만 보더라도 민주당정권의 국회의사당 건축결정으로 철거통고를 받고 남산교사에서 퇴거하게 되었을때 장신측은 이내 대광고등학교에 청원하여 구교사를 임시교사로 사용하는 한편 광나루에 마련한 현 부지에 선교불로 교사를 신축하여 옮겼다. 그러나 총신측은 빈손이어서 남산에 위치한 대한신학교가 마침 야간이요 설립자 김치선 박사가 다시 총신교수로 임명되었기에 낡은 콘센트 건물로 비가 세는 그학교를 빌려쓰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건없는 선물이라며 I.C.C.C.의 칼 매킨타이어 총재에게 받은 10만불로 용산교사를 마련하여 이전했다. 하지만 이는 궁여지책으로 수용한 일로서 명분이 약했으며 결국 한해가 지나고 제46회 총회에서 I.C.C.C.와의 우호관계를 단절했다. 그시절의 신학교와 관계된 비화 두가지를 소개하면 먼저 장신측은 1959년 10월 17일 6시30분에 기습적으로 학교기물을 임시교사로 옮기고자 교수들이 인부들과 함께 트럭 두 대를 동원하여 학교에 갔으나 사찰 김정걸 집사가 학교에 도둑이 들었다고 소리 지르고 기물을 실은 차가 나오려 할때 교문을 잠그고 ‘내가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쫒겨 이곳까지 왔는데 어떻게 용공주의자들과 같이 살겠느냐 나는 보수신앙을 위하여 순교나 순직하련다’고 고함지르면서 차의 이동을 필사적으로 저지하였고 그사이 가까운 회현동 기숙사에서 몰려온 학생들이 가세하여 기물 한점도 가져가지 못했다. 그러나 학적부는 학교의 한 서무직원이 혼란중에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평소에 친밀하였던 장신의 박창환 교수에게 자기의 부채 때문이라며 팔아넘기는 교섭을 하였는데 40만원을 요구하였다. 학교측이 응하지 않으니 1년후에 다시 시도하되 이번에는 20만원을 요구하여 결국 17만원에 합의했으나 장신당국은 여전히 난색을 표하여 박목사가 5부이자로 급전을 돌려 단독으로 매수하였다. 그러나 학교가 채무를 해결해 주지않고 계속 5부 이자를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권세열교수가 원금을 빌려주어 이자대신 원금을 갚아 나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몇년후 권교수가 빚을 갚아달라고 독촉하므로 박교수는 자기 집을 팔아 변제하였다. 그러다가 1972년 이종성 학장이 원금을 상환해 주어 그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 377-378쪽). 이렇게 혼란의 시대엔 충직자도 있고 배신자도 있는법이다.
그때는 모든게 열악한 사정이어서 성경구락부 교사로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들을 비롯하여 선교사에게 의존하는 학생들 상당수가 장신을 택하므로 학생비율 3대2로 장신이 우세했고 적수공권인 총신은 학교운영 자체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증경총회장 대다수가 여기 남은것은 신앙을 파수하고 전승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의 선교사들은 본국총회의 개방적 연합운동에 따르고자 초기 선교사들의 순수한 신앙전통을 저버린채 앞뒤 헤아리지 않고 일방적 지원을 하므로 총회분열에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노진현 목사의 전언에 의하면 김린서 목사가 초기에는 이런 세태를 풍자하여 에큐메니칼측을 선교불(宣敎弗) 따라가는 불교도(弗敎徒)라 칭하더니 나중에는 자기도 가버렸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원로인 증경총회장 대다수가 확고부동하게 제자리에 있었음은 장로교 총회의 신앙전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증명하며 총회의 적통성이 선교사나 교육, 의료, 복지기관 등의 향방에 의하지 않고 교회역사와 신앙전통의 살아있는 표상인 증경총회장들의 거취에 따른다는 뜻이다.
3) 신학적 입장에서 본 적통성
적통성을 운위할 때 장로교신학의 정통성이 어디에 있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1907년 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를 조직하고 대한 장로교회 신경 12조목을 채택한바 그 서문에서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대소 요리문답이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교회와 신학 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안다고 했다. 또한 이 토대위에 세워진 대한의 장로회신학은 선교사시대를 지나 한인신학자 박형룡 박사에게 승계되었다. 박 박사는 선교사가 주도하던 시대의 유산을 승계하면서 한국인이 주도하는 시대의 주역으로 준비된 인물이었다. “실로 초대 선교사들의 보수신앙에 기초하여 설립된 한국교회는 제1희년에 이르러서는 한인 보수주의 신학자(박형룡)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음이 역연하게 되었다”고 김양선 목사가 밝힌 대로다(김양선 저:한국기독교해방10년사189쪽). 감리교의 유동식 교수도 “초대 선교사들은 한국에 보수주의 신학의 씨를 뿌렸고 박형룡은 이를 가꾸어서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의 토대를 세운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유동식 저:한국신학의 광맥187쪽). 1953년 박박사가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 하였을때 기독공보는 보도와 특집기사를 실었는데(1953년8월9일과9월7일) 취임식 보도중에 이렇게 썼다. “70년 한국교회 사상 유례가 없던 대 식전이 지난 9월 2일 대구 서문교회 예배당에서 개최 되었다.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장을 한국인으로 하자는 총회 결의에 의하여 이사회에서 한국인 초대 교장으로 추대된 박형룡 박사와 김치선 박사와 계일승 박사를 취임케 하는 동 예식은 한국교회의 신학수립에 기초를 세운것과 같은 엄숙한 식이었다. 전 평양신학교 교장 라부열 목사의 ‘신학교 교장은 박형룡 박사로 하라’는 유언에 의하여 본 의식은 남북통일장로회 총회산하 단일 신학교로서는 마포삼열 박사, 라부열 박사, 감부열 박사를 이어 제4대 의식에 해당하며 한국인 교수 취임식은 초대 교장의 취임이 되는것이다”라고(장로회신학대학교100년사 343,344쪽).
그러므로 박형룡 박사는 1930년 이후 통합교단이 분립하기까지 한 세대간 한국 장로교 신학의 중심에 자리했고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상징이자 대표적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거취는 장로교 신학의 본적지가 되므로 신학적 적통성의 필수적 유전자이다. 왜냐하면 박형룡 박사의 신학이야말로 지금까지의 한국 장로교신학의 대종이기 때문이다. 그 박형룡이 장신에 가지않고 총신에 남은것은 장로교 신학의 적통성이 총신을 운영하는 승동총회. 합동총회에 있게 된 사실을 말해준다. 교단분열시 박형룡의 향배가 중요했던 것은 그의 거취가 총회의 신학적 적통성을 가려 주기 때문이다. 통합측 증경총회장 강신명 목사는 분열후 20년이던 해에 연동총회 분립의 기수였던 안광국 목사 유고집 <한국교회 선교100년비화>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주 봉천신학교 서무과장 겸 사감으로 은사(박형룡박사)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말갈 때 소갈 때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안목사가 그처럼 간곡하게 직언을 하고 조언을 하였으나 박박사는 분열주의자들의 책동에 휩싸여 벗어나지 못하시고 1959년에 교단을 떠나셨을때 ‘강목사나 내가 아첨할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박박사가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탄식하던 일이 생각난다.” 여기서 강목사의 말속엔 박형룡 박사를 놓진데 대한 진한 아쉬움이 배어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그동안 박형룡의 신학적 역할에 크게 의지해 왓다. 신앙의 동지요 동갑인 주기철 목사는 학자인 박형룡을 신사참배의 위해로부터 보호코자 그가 일본으로 떠날 때 만류하기 보다 눈물로 전송했고(김린서편집:주기철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49,50쪽) 만주안동제일교회의 권연호 목사는 연보를 거두어 박형룡과 김린서를 각각 돕고 박박사는 봉천신학교에, 김린서는 안동성경학원에 초청하여 신사참배의 핍박을 피하게 하였다(김린서편집:신앙생활지1954년7,8월호). 박윤선 목사는 ‘신학교라 할때 박박사가 계셔야만 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인식하고 있었던 까닭에(합동신학교출판부편:박윤선의 생애와 신학32쪽) 1946년12월 초에 이제 한국에 나온지 한달밖에 되지않는 한부선 선교사에게 만주에 가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올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하였고(허순길저: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46쪽) 송상석 목사는 블레셋 군대와 충돌하면서 사선을 넘어 베들레헴 우물에서 샘물을 길어오는 세 용사처럼 만주까지 가서 박박사와 그가족들을 모셔내 왔으며(송상석저:법정소송과 종교재판69,70쪽, 허순길 지음:상게서47쪽) 한상동 목사는 박박사가 귀국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코자 부산에 내려오자 자신이 목회하던 초량교회의 목사관을 박박사 가족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사찰집사의 집에서 기거할만큼 최선을 다해 받들었다(박아론저:세월따라 신학따라165쪽). 또 서울의 주요 목사들이 수도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기로 한것도 박박사를 옹립하여 바른신학을 확립하므로 한국교회를 살리고자 함이었고 한국교회의 원로 채정민 목사(평신3회)가 임종 3일전 김치선 박사를 부르사 ’김목사는 조선교회에 신사참배 죄와 미소기 바라이 죄를 회개하도록 외쳐주오‘ 부탁하고 박형룡 박사를 부르사 ’박목사는 조선교회가 정통신앙과 신성(神聖)을 보수하도록 힘써주오‘ 유언을 남기시고 수일간 영열(靈悅)이 충만하사 찬송중에 입천(入天) 하시었음도 한국교회의 순결과 정통신앙의 보수를 당부함이었다(김린서편집:신앙생활지1953년5,6월호). 이는 한국교회와 신학의 진로에 박형룡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해방과 분단상황에서 한국교회와 신학판도에 박형룡은 결정적 변수였던 까닭이다.
과연 박형룡 박사의 거취는 한국 장로교회에 비상한 영향을 끼쳤다. 그 예로 해방후 만주에서 귀국하여 부산에 내려갔던 그가 이듬해 고신교장을 사임하고 상경하자 고신이 분립했고 그가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총회가 직영하는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수로 참여하자 기장이 분립했고 그가 W.C.C.를 반대하고 선교사들과 등지자 통합이 분립했다. 그러나 통합과의 분열로 그의 영향이 절반으로 감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예로 분열 50년인 2010년에 간행된 이성웅 지음 <헌법교리론>에 보면 통합측의 ‘개정헌법해설서Ⅰ’이라 하였으나 교리부문의 주요내용들은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일곱권에서 골고루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1935년에 출간한 박박사의 <신학난제선평>은 한국교회의 나침반이 되었고 그의 교의신학 전7권은 한국 장로교회의 지침서가 되어있다. 더불어 1918년에 창간되었고 박형룡 박사가 ‘평양신학교의 철저한 성경적 개혁주의적 실천적인 신학사상은 그 대변지인 기관지 신학지남에 반영되었다’고 한 그 ‘신학지남’이 총회신학교에 속하여 있음도 의미심장 하다. 1964년, 박형룡 박사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이란 그의 논문에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 이라고 했다. 이는 유럽대륙의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주의를 가미하여 가진 장로교회가 우리의 뿌리요 전통인 것을 강조함인 것이다. 더불어 그의 신학을 사변적이 아닌 생동적이고 활력있게 하는것은 주요 다섯가지 기조가 1)성경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신념 2)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 3)주일성수와 경건생활 4)확신있는 복음전도 5)천년왕국 전 예수재림 신앙으로 곧 청교도적 개혁주의면서 순정(純正)한 복음신앙인 까닭이다. 과연 박박사의 신학은 개혁파 전통의 다양한 유산을 도입하고 소개하면서 한국형 정통신학을 창출한 것으로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이정표요 견인차였다(신학지남1964년9월 제1호, 최덕성:박형룡의 개혁파 정통신학). 그러므로 한철하 박사가 한국기독교 100년사 중 “후기 반세기 동안에 1천2백만 신도, 수만 교회를 이룬것에 대하여 그 가장 큰 공로를 박형룡 박사에게 돌려야 한다. 그분이 보수신학을 한국교회에 확실하게 세워주지 않았다면 사실 한국교회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될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모든면에 흠잡을데가 없는 건실한 신학을 세워주신 일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하겠다”고 한 말은 타당하고 공정한 평가이다(신학지남1997년가을호43쪽).
나가는 말
해방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사를 통해 비록 아픔이요 상처이지만 법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적통성에 대하여는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분열당시의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회고록’에서 ‘역사라는 것은 사실대로 기록해야지 창작할수 없는것이다’ 라며 ‘민경배 교수의 <한국교회사>중 이부분은 창작에 다름아니다’ 라고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사실을 적시했다(노진현목사회고록,진실과 증언64,65쪽). 이때의 충격이 너무 컸음인지 노목사는 총회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병이났다. 거의 석달동안 교회 강단에서 설교도 할수 없었고 예배도 드릴수 없는 고통의 나날들이었다고 말했다(노진현,상게서61쪽).
이런 분열의 와중에선 가족이 나누어 지고 친구가 나누어 진다. 김종석 목사(군산개복교회)는 박형룡 박사에게 배워 확립된 성경관과 교회관의 영향으로 장인이 연동총회와 통합총회의 총회장 이창규 목사인데도, 군목봉급의 절반쯤 되는 선교사 보조금이 끊기는데도 그쪽을 선택하지 않았음을 이렇게 증언했다. “1959년 9월 24일 대전중앙 교회당에서 모였던 제44회 총회가 양분되었다. W.C.C.를 지지하는 회원들은 서울 연동교회당에서 총회를 속회 하였는데 그때 나의 장인되시는 이창규 목사님이 총회장이 되셨다. 그리고 그들은 1960년 2월 17일 새문안 교회당에서 통합총회를 하였는데 그때도 이창규 목사님이 총회장이 되신 것이다. 그러자 W.C.C.를 반대하는 측에서는1959년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총회를 속회하였고 이듬해 12월 13일에 고려총회측과 합동총회를 하였다. 그때 나는 육군군목으로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속할 총회의 선택권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었다.그리고 육군중위 봉급이 월 42.000환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 선교사들이 본 교단 군목들에게 한하여 20.000환씩을 보조하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총회가 분열된 다음부터는 통합측에 속하지 않으면 그 20.000환씩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신학생 동기생 군목들 가운데 통합측에 가담하지 않고 합동측에 머무른 목사는 최정학, 지상섭, 그리고 나 뿐이었다. 그무렵 나는 집에 들어오면 내자와의 갈등이 심했었다. 장인께서 ‘딸자식 하나 잃은셈 친다’ 하시면서 우리집에 오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박박사님을 통하여 배운 나의 교회관은 결코 변할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나의 내자는 나의 결심을 따랐다. 그리고 장인에게는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대접을 잘해 드렸더니 얼마인가 지난다음 그 노여움이 풀리셨다”(박용규 엮음,박형룡박사의 생애와사상215,216쪽) 라고.
한국장로교회를 양분하는 통합과 합동 중 적통성을 가리는데 중요한 빙거로서 당시 총회장을 비롯한 목사임원 전부와 교단원로인 증경총회장 대다수와 장로교 정통신학의 적통인 박형룡 박사가 승동총회와 그 연장선상인 합동총회에 속했다는 사실은 유전자 검사보다 더 확실하게 본 총회가 적자임을 증명한다. 여기엔 법리적 적법성, 신앙적 전통성, 신학적 정통성을 다 갖추어 삼합이 맞기 때문에 아무도 본교단이 한국장로교회의 적파요 적자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3:9)고 한 성경말씀을 유념해야 한다.
더불어 21세기 한국교회가 통일과 분리 사이에서 무조건 일치해야 하는가, 끝없이 분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장로교 신학과 제도의 비조인 칼빈 선생의 기준을 전감삼아야 한다. 1)그는 누구보다도 교회의 통일을 열망했다는 사실이다. 2)그는 신앙으로서의 연합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3)그는 ‘기본진리’ 라는 적정한계선을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러한 기준과 원칙아래서 분리보다는 통일지향이 되어야 겠고, 평화가 좋으나 진리에 더 충실해야 하고, 편협하지 않으면서 참된교회를 추구하는데 정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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