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8:27
제3장. 선동자 삼형제
1. 독립운동의 배경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병 조약문이 공포됨으로써 대한 제국은 조선으로 개칭되었으며, 일본 통감부는 총독부로 바뀌면서 조선통치의 기본 방침을 무단 정치로 나타내게 되었다.
총독부는 공무원들의 복장을 통일시켰다. 경찰관과 모든 공무원들에게 금테 두른 모자를 쓰게 하고 군복 비슷한 복장을 하므로써 조선 사람들을 억압하게 되었다.
헌병 사령관이 경찰을 총지휘하게 되니 이는 헌병경찰이었다. 그들은 무례한 자들로 구성되었고, 조선 사람을 짓누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의 이 악랄한 정치에 반대하여 곳곳에서 애국지사들이 힘을 모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일본인들은 기독신자들을 두려워하였다. 그 이유는 기독신자들 뒤에는 미국과 영국인들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한 음모를 생각해 냈는데 이것이 데라우지 총독 암살음모 사건이었다.
1911년 12월 28일. 서울과 의주 사이를 연결하는 경의선 철로 개통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날 총독이 참석하게 되는데 신민학회와 배일 사상의 중요 인물들이 총독을 암살하기로 음모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 신민회의 창설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 애국사상이 투철한 사람을 엄밀히 택하여 조직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장차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육기관을 세우고 정치, 문화, 경제 등 각 방면의 진흥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민족운동은 제 2세들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어야 한다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그들이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총독암살 음모사건은 순전히 일본인이 꾸며낸 허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허위 음모를 한국인들에게 덮어씌운 신민회 간부들과 기독교 중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9월, 전국에서 지식층과 기독교 지도자 600여명을 검거 투옥시켰다. 그들은 죄 없는 이들 한국 지도층의 사람들을 혹독한 고문으로 괴롭히며 치사자까지 내었다.
1912년 6월에 그들 중 105인을 경성지방 법원의 공판에 넘겼으며 9월에는 전원 유죄판결을 내려 5년 내지 10년의 징역형을 내린 것이다.
평화로운 한국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모진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을 무렵, 한국의 평화를 도와 주어야 할 구라파에서는 전쟁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1914년 7월 28일. 새벽 세계 제1차대전이 발칸 반도에서 터졌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T.W. Wilson)은 1918년 1월, 세계 열강에 14개 조항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특히 세계 약소민족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었다. 세계 1차 전쟁은 그 해 11월에 월슨 대통령의 알선으로 휴전 조약을 체결하므로써 끝이 났다.
이 세계적인 움직임에 돛을 올리고 자주독립을 찾기 위해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독립만세가 이 땅에 메아리치게 되었다.
독립 만세는 교회가 먼저 부르게 되었다. 3?1운동을 처음 계획하였던 민족대표 중 대부분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 교회가 앞설 수밖에 없었다.
평양 남산현 교회와 장대현 교회에서는 서울보다 한 시간 앞선, 1919년 3월 1일 오후 한 시에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를 부름으로써 이 나라 제일 첫 번째 독립 만세 사건이 되었다.
서울은 오후 두시에, 이리하여 독립 만세의 함성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2. 거창 지방의 독립운동
독립만세운동은 각 지방 도, 군, 읍, 면, 리, 동으로 파급되었다.
도별에 따라서 날짜가 달랐다. 남부 지방의 전라도와 경상도는 3일 이후에 시작되었다.
경상남도는 3월 3일에서 4월 29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것은 전국에서 가장 오랜 시일동안 운동이 계속된 것이다.
3월 3일은 부산과 마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정도였고, 11일에 부산진 광장에서 만세시위가 시행되었다.
12일부터 각 지방으로 만세운동은 번져 갔는데, 합천이 18일, 거창과 산천은 20일에 거사가 시작되었다.
거창군 가조면 양기리 시장에서 독립만세 사건이 터져 4명이 순국하고 나머지 분들이 투옥되었다. 거창읍에서도 독립운동 사건은 교회가 주동이 되었으며, 주남고 장로 형제분들이 선동이 되었다.
남고 장로의 백씨 남재씨는 민족주의자로서 성경이 강직하고 정치에 밝았다.
그의 제씨 남수씨도 투철한 애국청년으로 뒤에 거창 의용군으로 뽑혀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 하다가 순국하였다.
남고 자올 삼형제는 이때 뜻을 합하였고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선동하였다.
거창교회 오형선 장로와 고운서씨를 거창, 합천 지방의 조직 책임자로 맡기고 교회 청년들을 선봉으로 주민들을 일깨워 독립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3월 20일경 거창은 지역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다.
3. 평양 신학교에 입학
주남고 장로는 복음 전도에 대한 열심이 가슴을 태웠다.
?신학교에 가자!?
그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 올 때마다 더욱 간절하게 자신을 향하여 다짐하였고 기도 할 때마다 이 문제를 앞세웠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였다. 먼저 전도사 시취를 받기로 하였다. 신학교에 입학하려면 전도사 시취에 합격해야하기 때문이다.
1921년 3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모이는 경남노회에 참석하여 전도사 시취에 응시하였다. 그 날 함께 전도사 시취를 받은 사람 중에는 주기철 전도사도 있었다.
그 해 일곱 사람이 전도사 시취에 합격을 하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평양으로 올라 갈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다. 평양 신학교, 말만 듣던 평양 신학교에 가게 되는 것이다. 평양 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들이 교육을 담당한 보수주의 신학교였다. 한국에 이러한 신학교가 설립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신학교 교장은 나부열 박사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평양으로 올라갔다.
시험은 힘들지 않았다.
그는 이미 대구 형무소에 있을 때, 신구약 성경을 암송해 두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33세의 중 늙은 학생으로 입학이 되었다. 주기철 전도사도 함께 입학이 되었는데 그는 24세의 청년이었다.
둘은 전도사 시취 때부터 알게 되었으므로 신학교에서는 친숙하였다. 같은 영남 사람이요, 성이 같다는 이유에서 더욱 친근하였는지 모른다.
신학 공부는 보람이 있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색다른 어학 때문에 고충은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익숙 되어 갔고, 재미가 있었다.
학기 시험을 치고 나니 곧 방학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한 학기를 마치게 된 것이다. 짐을 꾸리고 기숙사를 떠날려 하니 아쉬움에 코가 찡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심으로 가사를 돌보며, 전도를 하며 교회를 봉사하였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등교하지 못하였다.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다.
그 해 10월, 교역자로 시무 하던 오형선 장로가 사임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당회와 제직회에서는 주남고 전도사를 시무토록 하자고 결정하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모교회 전도사로 일보게 되었다.
4.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운동 사건
나라 없는 민족은 서러웠고, 힘이 없는 백성은 슬펐다.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간절한 소망은 2천만 민족의 염원이요, 주남고 장로의 애절한 소원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지하조직을 통하여 우리나라 각 지방에까지 연락이 미쳤다. 지리산은 서북 경남 독립운동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만주 군정서에서 독립군의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 운동이 비밀리에 시행되고 있었다. 만주 군정서는 상해 임시정부 소속기관이다.
한국에서 만주로 이주해 간 우리 민족들이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부민단이란 조직을 가졌다.
이것은 흉년으로 인하여 자금이 결핍되고 원주민들과도 알력이 있으므로 한 민족의 정신적 단결과 상호 협조를 위하여 조직된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민단은 한족회로 발족되었다가 임시군정부가 되어 임시정부 소속 군정서가 된 것이다.
군정서에서는 비밀조직을 통하여 국내에 의용병과 군자금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 일은 성공리에 진행되어 거창 지방에까지 손이 닿게 되었다. 1922년 8월 이 일에 주남고 전도사가 책임을 맡아 거창지방 책임자로 비밀리에 모집운동을 시행하였다.
주남고 전도사 제씨 주남수씨는 독립군의 의용병에 지원하였다. 남고 전도사는 오형선 장로, 고운서 전도사, 김태연씨 등과 상의하여 모금운동에 나섰다.
나라를 위하여는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굳은 결의로 동지들은 먹는 것, 잠자는 것을 잊고 뛰었다.
그러나 이 일은 어느 정도 성사 될 무렵, 민활한 일본 고등계 형사진에 의하여 단서가 잡혔고, 주동자 전원이 검거된 것이다.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까지 넘어간 애국 지사들은 다음과 같았다. 주남고, 이덕생, 김태연, 고운서, 이사술, 이성두, 백기주, 이태홍, 진도출, 주남수, 정장현, 이갑수, 오형선, 한성진 등 14명이었다.
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포승에 묶여 처참하게 경찰서로 끌려갔다.
거창 경찰서에서 조서가 꾸며지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경찰서 별실 시멘트 바닥은 이들 애국열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몇 번이나 많은 물로 시멘트 바닥을 씻어 내어야 했다.
5. 옥고 2년
조서가 다 꾸며지자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전원을 의성 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의성 경찰서에서의 고문은 더욱 혹독하였다.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넣고 누르고, 손등을 구둣발로 짓뭉갰다. 이 고문 이후, 주남고 전도사는 장지뼈가 부러져 휘청했고 출감 후에도 계속 글을 잘못썼다 한다.
주남고 전도사의 글씨는 명필이었다. 허나 고문 후 장지가 휘어져 글씨가 엉망이 되었고, 설교 원고를 쓸 때마다 한참씩 장지를 만지곤 했다 한다.
또한 일경은 머리에도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의성 경찰서에서의 고문은 다른 곳에서 받은 고문의 몇 갑절 더했다. 머리를 너무 많이 때렸기 때문에 정신이 얼얼하고 멍청하게 되었다. 그들이 머리를 혹독히 때린 이유는 정신 이상이 되라고 한 처사이다. 정신이상자가 되면 독립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받은 고문으로 출옥 후에도 주남고 전도사는 종종 머리가 띵하게 아파온다고 말씀하시며 한참씩 눈을 감고 멍하니 앉아 있곤 하였다.
의성 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대구 형무소에 넘어갔다.
대구 형무소에서도 고문은 계속되었다. 대구 형무소에서 1년을 미결로 있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써 차마 견딜 수 없는 혹독한 나날을 보냈다.
고문의 형태는 차마 이루 다 글로 쓸 수 없지만 그 주 한 방법은 엄지손가락 두 개를 질긴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어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몸이 손가락 두 개의 힘으로 공중에 매달려 견디어 내기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손가락이 끊어지는 아픔과 고통은 표현하기 어렵다.
밤이면 물을 먹이고 싸늘한 시멘트 바닥에 앉혀 팔을 뒤로해서 다리에 얽어 묶어 놓고는 전신에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이 극악한 형벌을 어찌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극악한 고문을 감행한 것인가?
사람으로 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일본 경찰들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하여 나타난 악마의 화신이었다.
주남고 전도사, 그는 이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기도와 성경 읽는 일에만 힘썼다. 대구 형무소 1년의 세월 속에 신구약 성경을 거의 암송하였다 한다.
1921년 3월 4일. 재판에서 징역 1년의 선고를 받았다.
그는 진주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포승에 묶여 진주 땅으로 들어설 때, 감개가 무량하였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경학원을 찾아오던 6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 백성, 특히 조상 대대로 미신과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죽음처럼 살아가는 이 민족에게 참 삶의 길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성경학원을 찾아 왔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아무런 죄가 없으면서도 몸은 포승에 묶여 감옥에서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자동차에서 내려 형무소로 들어 갈 때. 핏기 없는 시민의 얼굴들이 연민의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피골이 앙상한 처참한 주남고 장로의 모습.
1년 동안 경찰서와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겪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다.
햇빛을 보지 못한 파리한 그의 모습은 해골에 거죽만 씌운 것 같았다. 목숨만 붙은 송장 같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동정 어린 눈길을 주었다.
진주 형무소의 실팍한 철문이 열리고 간수의 인도를 따라 주 남고 장로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침울한 감방,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정해진 감방에 들어서자 둔한 금속성 소리를 내며 쇠문이 닫혔다. 형무소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남고 전도사. 그는 원망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고 사는 그에겐 원망이 없었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하여도 입을 열 줄 모르는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의 신본주의의 철저한 신앙, 애국 애족의 강인한 사상은 어떤 고문이나 형벌로도 꺽을 수 없었다.
그 어둡고 침울한 감옥 안에서도 그는 기도와 성경암송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의 열풍도 믿음으로 견디어 내었다.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갔다.
가을이 가고 추위를 몰고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감옥의 겨울은 춥다. 난방 장치가 있을 리 없고, 따뜻한 침구가 있을 리 없다. 오돌오돌 떨면서 이 추위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허약한 그의 몸은 추위를 이겨내기엔 너무나 지쳐 있었다.
1921년 12월 28일. 가출옥이 허락되었다. 어쩐 일인가? 아직 3개월이 더 남아 있는데 웬 일인가? 아마 몸의 허약함과 그의 모범스러운 인감 됨에 일인의 마음이 움직여졌던지 출옥이 허락된 것이었다.
주남고 전도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출옥으로 그리운 고향의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2년 만에 돌아 온 집은 남의 집 같았다. 집을 떠날 때 3살 되었던 경중이 벌써 5살의 개구쟁이로 자라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왔다는 소리에 뛰어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뼈만 앙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눈만 깜박이고 있다.
포승에 묶여 거창 경찰서를 떠날 때, 전송 나온 엄마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자던 둘째 아들 경도가 말을 익히고 있었다.
벌써 3살이 되었구나, 주 장로가 경중이와 경도를 양팔에 와락 안으면서 그들의 볼을 비비니 하염없이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고생을 했나??
자신이 당한 고난보다 어린것들이 가여워 더욱 슬펐다.
보다 더 마음 쓰리고 아픈 것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다. 방에 누어 있다가 아들이 왔다는 소리에 겨우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시는 어머니!
주남고 전도사는 뛰어가 어머니 앞에 쓰러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검속 되어 가던 그 날부터 얼마나 마음을 많이 상하셨던지 귀도 멀어지고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보행도 잘 하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어머니 앞에 눈물을 쏟으며 주 장로는 얼마동안 쓰러져 울었다.
마당에 서 있는 아내를 보았다. 만사에 불평을 할 줄 모르는 착한 아내. 흙일 길쌈과 바느질, 어느 하나 꺼려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며 신앙으로 현실을 견디어 나간 충실한 여성, 그녀는 한국의 훌륭한 여성이었다.
주 장로는 몸이 회복될 여유도 없이 다시 가정을 돌보며 교회 봉사하는 일에 열중했다. 특히 어머니를 모시고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다.
자신의 건강보다 어머니의 병환을 위하여 애타게 부르짖었다.
기적적으로 어머니의 병환은 낫게 되었다. 귀도 밝아지고, 눈도 잘 보이게 되었다. 주남고 장로는 참으로 효성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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