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8:29
제 5장. 맹물 솥에 불때는 사택
1.거창읍 교회 위임목사
1930년 9월, 주남고 전도사는 경남노회에서 목사고사에 응하였다.
합격이 되어 장립을 받게 되었다.
인수 위원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노회장이 눈물어린 간곡한 기도를 올렸다. 주 목사의 가슴은 뜨거움으로 열이 났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주님을 위해 일생을 온전히 바치려는 굳은 마음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악수례를 나누고 강단에서 내려오는 주 목사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1930년 12월 7일 오전 11시, 감격에 찬 성찬예식을 거행하였다. 목사가 되어 처음으로 집례한 성찬예식이었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거룩하게 진행이 되었다.
온 교인이 은혜를 받았다.
이 날, 권임함 선교사 사회로 공동의회가 모였다. 주남고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하는 투표를 시행한 것이다. 세례교인 81명이 참석하여 만장일치로 가결을 보았다.
1931년 2월 22일. 경남노회가 파송한 위임위원 이자익목사 외 5명의 주선으로 주남고 목사의 위임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많은 성도들과 외부인사들도 참석하였는데, 윤봉기 영수도 참석하였다. 윤봉기 영수는 함양군 서산면 상남리 상남교회 영수였다.
윤봉기 영수는 1907년 4월 10일, 충북 영동읍에서 태어났다. 칠 세에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익혔고, 아홉 살에 강원도 홍천에 가서 모곡학교에 입학하였다.
모곡학교는 남궁억 선생이 가르치고 있었다. 남궁억 선생은 1898년 9월에 발간된 황성신문사의 사장을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모곡학교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강하게 불어 넣어 주었다.
뒤에 이 일로 투옥되고 고초를 많이 받았지만 그는 투철한 민족사상을 젊은이들에게 고취시켰다.
윤봉기는 이 모곡학교에서 낭궁억 선생을 통하여 강한 배일사상과 애국애족의 교육을 받았다. 모곡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양주로 가서 재동 영어학교를 다녔다. 양주에 있으면서 양잠에 대하여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전라도 잠수땅에 가서 삼촌 밑에 얼마 있다가 결혼을 하였다.
함양군 서상면 삼남리에 경치가 좋고 큰 이 있다는 말을 듣고 윤봉기는 이 절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산에 나무가 많고 공기가 맑아 마음에 들었다.
절 주지는 동경약전을 나온 유식한 주지였다. 주지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윤봉기가 뽕나무 접붙이는 기술을 갖고 있다는 말에 자기 절에 와서도 도와 달라고 주지가 조르는 것이었다.
?생활 염려는 하지말고 오시면 됩니다.?
그리하여 윤봉기는 영각사에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오 형선 장로가 영각사에 찾아왔다. 민족사상이 강한 청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오 장로는 윤봉기 청년과 인사를 나누고 민족사상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오 장로는 종종 찾아와 윤 청년을 만났다.
하루는 오 장로가 윤봉기 청년에게
?내만 이 곳에 놀러 올 것이 아니라 윤 선생도 내 사는 곳에 한번 찾아오시오.?
하고 당부하였다.
?일요일에 한 번 찾아가겠습니다.?
약속대로 윤봉기는 오 장로를 찾아갔고 예배에 참석을 하였다. 예배 장소에서 처음 주남고 목사를 만났다. 그 때, 주남고 목사는 목사 인수를 받기 전, 전도사로 일보고 있었다.
처음 대하는 주남고 전도사의 모습은 윤봉기 청년의 눈에 성자로 보였다. 인자하고 겸손한 주 남고 전도사의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초가삼간에서 남반과 여반을 방 두나에 가각 앉히고 마루에서 설교를 하였다.
윤 봉기는 주 전도사의 열띤 설교에서 많은 것을 마음에 담은 뜻하였다. 예배 후 민족주의에 대한 대화가 오가는 중, 윤보기는 주남고 전도사와 오형선 장로 등과 통하였다.
"주일마다 오겠습니다."
윤봉기는 이렇게 약속을 하고 거창을 떠났다. 윤봉기는 절로 돌아와서 계속 일을 보면서도 그 마음은 거창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일마다 거창교회로 나가고 주남고 전도사와 오형선 장로를 만나는 것을 그이 낙으로 삼았다.
얼마 후, 윤봉기 청년은 절에서 짐을 꾸렸다. 아랫마을로 이사를 한 것이다.
방을 얻어 살림을 정돈하고 일자리를 마련했는데 상남 사립국민학교에 교사 일을 보게 된 것이다.
얼마 후 그는 따로 방을 얻어 교인들과 모았다. 그리하여 주일이면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일년이 지난 후 이자익 목사가 찾아왔다.
이자익 목사는 연합당회장을 맡아 순회 전도를 하며 다녔다. 이 목사는 윤봉기에게 오전 예배시간에 학습을 세웠다. 그러더니 저녁 예배시간에 세례를 주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고 어떨덜한 윤봉기 청년에게 이어 영수로 임명을 하는 것이었다.
윤봉기는 영수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이자익 목사에게 물었다.
?영수가 무엇입니까??
?영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영수를 주었구나!?
이 목사는 피식 얼굴가에 웃음을 날리드니 대답했다.
?영수는 집사를 다스리고, 설교도 하고 교회를 살피는 직이지요??
영수가 된 윤봉기는 열심으로 교회 일을 도왔다.
2월 22일, 주남고 목사 위임식에 특별히 학교일을 두고 참석한 것이다. 특히 윤봉기 영수의 마음을 끄는 것은 위임식에 양복을 선물받은 일이었다.
윤봉기는 옆 교인에게,
?위임식 때는 어떤 목사라도 양복을 선물로 드립니까??
하고 물었다.
?대개의 교회들은 양복을 해줍니다.?
윤봉기 영수는 주 목사의 양복 입은 모습을 그려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 종종 주 목사를 만났지만 양복 입은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하루는 주 목사를 만난 윤 영수는 조용히 물어보았다.
?목사님, 왜 양복을 입고 다니시지 않습니까? 전일 위임식 때 받은 양복이 있지 않습니까?
양복을 입으시면 더 신사로 멋이 있어 뵐 것인데요?????.?
주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 농촌교회 목사입니다. 농촌지방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역시 한복이 어울려요.
그리고 내가 한복을 입고 다니는 데는 또 한기지 이유가 있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 영수는 그것도 궁금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항시 흰 두루막을 걸치고 다니는 모습이 이상하였다.
주 목사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시더니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민족사상 때문이지요. 대구 형무소와 진주 형무소에서 독립운동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의 일을 잊고 싶지 않아서요. 형무소에서, 나라 사랑의 마음을 굳히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한복을 입는 거요."
운봉기 영수의 머리가 또 한 번 수그러졌다.
2.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
주 목사는 독립운동과 권서 생활과 신학 공부 때문에 등한했던 가족을 돌아보았다.
착실한 남편으로써 좋은 아버지로 가정을 보살폈다. 목사가 가정에서의 할 일도 가족들의 신앙교육 문제였다.
주 목사는 유순한 그의 천성적 성격과 신앙의 힘으로 가정을 조용히 이끌어 갔다.
큰 아들 경중은 18세 소년으로 거창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으로 갔다.
다시 윤인구 목사가 경영하던 창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둘째 아들 경도가 15세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흥학교는 기독학교였다.
고학을 하다시피 어려운 가운데 학교를 다녔다.
딸 경순이 11살. 거창에서 서오성 여선교사가 경영하던 명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명덕 학교는 4년제 초등학교였는데 극빈한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시켰다. 일반 교과목은 국민학교와 꼭 같으면서 성경과목이 하나 더 있었다. 교사로는 남 직원 1명에 여 직원 3명이었다. 경순은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서 째 아들 경효는 5세 엄마의 등의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다녔다.
네 째 아들 경세는 2세. 엄마의 등에 매달려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주 목사는 이 자녀들의 장래를 위하여 하나님께 늘 기도하였다.
경중이 마산에서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시교회 목사들의 생활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졸랐다.
?아버지, 우리도 이 교회 사면하고 다른 교회로 가요.?
?왜 그런 소리를 하냐??
?교인들도 매일 보는 사람이고, 별로 좋아하는 눈치도 아닌데 오래 붙어 있는 것은 좋지 안아요.?
?네가 무엇을 알아서 그런 소리를 하냐? 내가 여기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좋다고 오래있고 싫다고 떠나고 할 수가 있겠니? 내가 이 교회 위임을 받을 때, 이 교회를 위해서 몸을 바칠 것을 약속했느니라.?
조용히 꾸짖는다기 보다 아들을 이해시키는 주 목사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시 교회는 참 굉장해요. 새로 부임하면 환영식을 하고 사면하고 떠나면 또 크게 송별식을 하고 그래서 목사들도 부자가 된다구요.?
경중은 몹시 그들을 부러워하는 뜻에서 말하였다.
?나는 이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처음 복음을 받은 곳이고,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장로 장립을 받고,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까지 받고, 지금은 위임 목사가 아니냐? 환영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사가 된 거야.?
처음은 어머니도 아들 경중이 말에 찬동하였지만 그만 잠잠하였다.
주 목사는 자녀들에 대하여 과격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게 자녀들을 대하였다.
교육의 효과는 즉석에 나타나는 법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라야 참된 교육은 효과를 발하게 된다.
룻소(J.J. Rousseu)는 그의 교육론에 이런 말을 하였다.
?유년기의 교육은 그 결과가 즉시에 선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적인 교육을 받은 아이나 그렇지 못한 아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교육의 결과는 나타나는 것이다.?
주 목사의 자녀 교육이야말로 이런 이상적이 교육이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경순이 학교에서 늦게 돌아왔다. 이날 경순은 동무들과 학교 화단 가에서 봉선화 꽃잎으로 손톱에 물을 들였다.
연분홍 빛 꽃 물이 손톱에 먹혀들어 여간 보기에 좋지 않았다. 열심으로 꽃잎을 따서 손톱에 문지르다보니 저녁 어둠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급히 집으로 뛰어왔다. 주 목사는 딸의 당황하는 거동을 살피다가,
?왜 늦었냐??
?????????
?어디 갔다 오냐??
?아닙니다.?
?학교에서 그만??????
?어서 올라와 밥 먹어라. 배고프겠다.?
주 목사는 지극히 평온한 음성으로 말을 하였다. 경순이 마루로 올라오자 주 목사는 다시 엄한 말씀 한 마디 하였다.
?다음에 또 이렇게 늦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알겠니?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빨리 와야지, 집에서 늦게까지 네가 오지 않으면 걱정을 하게 되지 않니.?
그 날은 벌을 면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또 늦었다. 그 날도 역시 봉선화 꽃잎 때문이었다.
늦게 들어오는 경순을 바라보신 주 목사는 나직히 속삭이듯 말했다.
?약속을 지켜야지. 너는 분명히 잘못하였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 한다.?
경순은 떨리는 마음으로 시무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매를 맞을래, 벽장 안에 들어가서 곰곰이 생각해 볼래??
???????
?어느 것을 택하겠니? 네가 원하는 것을 하여주마.?
경순은 어린 마음에 매 맞는 것 보다는 벽장에 들어가 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었다.
?벽장에 들어 가겠어예.?
이윽고 주 목사는 경순을 벽장에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캄캄한 골방이었다. 어둡고 침울한 곳이었다. 숨이 답답하고 갑갑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벌로 견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어렴풋이 잠이 들려는데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너라.?
벽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 이후 다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일이 없었다.
3. 강인한 배일사상
중앙에서 일인 거물급 인사들이 거창에 내려왔다. 지방인심을 수습하고 일본에게 복종하는 강연을 하러 온 것이다.
거창 지방 유지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을 공회당에 불러모았다. 총독 아래 있는 콧수염의 사나이가 점잖을 피우며 일본을 인식시켰다.
연설을 마치고 그는 군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오늘날 우리 대 일본 제국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요? 또한 현재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무엇이든지 좋으니 말을 해 보시오.?
단상 뒤에는 의자에 수십 명의 금테두른 모자를 쓴 자들이 앉아 있었다. 몇 명의 경찰들이 주변에 서 있었고 공회당 밖에도 띄엄띄엄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말을 해 보시오! 무엇이든지 좋소. 이 자리에서는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소. 여러분들을 위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가능한 한 노력해 보겠오.?
군중들은 조용하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군중들은 일인들의 당당한 그 위세에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도 할 말이 없오??
이 때였다.
주 남고 목사가 군중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물론 모든 군중들의 눈길이 주 목사에게로 모두 모여들었다.
?제가 한마디하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지요.?
?그게 무엇이오!?
?우리나라에서 일본 사람들이 정치를 하지말고 물러가 주는 일이오?
연설하던 자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 눈썹이 송충이 기어가듯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둘러앉은 금테 두른 일인들의 얼굴도 동시에 이그러졌다. 주 목사는 한층 소리를 높혀 외치듯이 말을 던졌다.
?이 사실은 나도 원하고 우리 2천만 동포가 다 같이 원하는 바요.?
군중들은 가슴에 뜨거움이 찾아왔다.
차마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주 목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일인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술렁이기만 하였다.
그들은 현장에서 주 목사를 끌고 가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주 목사 뒤에는 항시 형사가 감시를 하였다.
한 편, 거창 유지들을 비롯한 모든 읍민들이 주 목사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존경하였다. 거창 읍민들은 모이면 주 목사의 이야기를 하였다.
?주 목사는 참 애국자야. 민족심이 가한 어른이라구.?
4. 고등계 강 형사
공회당 사건 이후, 주 목사 뒤에는 고등계 형사가 미행하고 있었다.
강 형사라는 자는 한국 사람이다. 주 목사의 강인한 배일사상과 독립정신을 아는 거창 경찰서에서는 주 목사를 감시하기 위해서 강 형사를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강 형사는 밤낮을 주 목사 사택 앞에서 감시하였다. 식사시간과 잠자는 시간 빼고는 언제나 사택 문 앞을 서성거리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강 형사의 끈덕진 감시 하에서도 조금도 다름없이 성경을 읽었고, 주석을 참고하며 설교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심방할 일이 있으면 성경찬송을 끼고 태연히 나가셨다.
강 형사는 심방 길에도 미행하였다.
하루는 심방 길에 따라오는 강 형사를 향하여 주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강 형사님, 나를 따라다니는 끈덕진 그 정성을 다른 데로 돌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강 형사는 계면쩍게 피식 웃으면서,
?다른 데라니요??
하고 주 목사옆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시오. 그런 쓸데없는 짓하고 다니지 말고 예수를 믿고 영혼도 육신도 잘 되는 길을 찾으시오.?
?슬데 없는 짓이라니? 대 일본 제국을 위하여 충성하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란 말이요??
?강 형사! 당신의 나라는 대 일본 제국이 아니지 않소??
?뭐라구!?
강 형사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면서 부르르 전신을 떠는 것이었다.
지독한 친일파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시종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를 대했고 시간 있는데로 전도를 하였다.
뒤에 이 강 형사가 주 목사를 잡아 들였고, 심한 고문까지 하였다. 해방 후 강 형사는 진주로 도망갔는데, 거창지방 좌익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돌로 쳐죽였다.
5. 청빈한 가정 생활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여 정치하는 중, 가장 탐을 낸 것이 쌀이었다.
일제는 해마다 4백 64만석의 쌀을 외국에서 사들여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한반도의 쌀 생산은 참으로 탐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본국의 식량 문제를 한반도에서 해결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1920년 11월 총독부가 발표한 산미증식계획 이었다.
일제는 제1차,2차로 산미증식 계획을 세워 시행하면서 공출이란 이름으로 쌀을 빼앗아 갔다. 한편으로는 군수공업 시설을 하여 식민지 착취를 강화하여 나갔다.
이러한 경제력과 노동력의 착취로 농민들이 생활은 궁핍하게만 되어져 갔다. 교인들이 생활이 궁핍하여가니 교역자의 생활인들 오죽하겠는가?
자녀들이 많은 주 목사 가정은 식사를 하는 날보다 끼니를 넘기는 날이 더욱 많아졌다.
철없는 어린 것은 배가 고파 울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그 어려운 사정을 교인들이 알까봐 염려하였고, 끼니를 넘기는 날에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솥에 물을 붇고 불을 넣었다. 물만 끓고 있는 빈 솥을 바라보는 사모님과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아롱졌다.
당시 주 목사는 삼군 (거창, 합천, 함양) 지방 시찰장으로 여러 교회를 혼자 시찰하며 돌보았다. 한 번 나갔다가 며칠이 걸려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에는 십여 명의 전도사들과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 교회의 문제들을 상의하기 위해서 주 목사를 기다린 것이다.
주 목사는 그들 개인 개인, 개 교회마다의 문제를 정중히 해결 지어 주었다. 그리고 찾아온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다.
자신은 굶으면서 찾아온 전도사들에게는 배불리 먹여 보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처사가 못 마땅하였다.
?아버지, 아버지의 자식들은 굶어도 좋습니까? 배가 고파 우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습니까??
주 목사는 손을 내밀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애 너희들의 배고픔을 내가 모르겠니? 그러나 저 분들은 다 주님의 종들이란다. 나를 찾아온 주님의 종들을 굶겨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너희들을 배불리 먹여 주실 것이다.?
아이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아야 해. 배고픈 사람이 우리들 뿐이니??
아이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불평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수 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 그들은 아버지의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지금 주 목사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성공하였고, 배고픈 일이 다시는 없게 되었다.
6. 충성된 청지기
그 해 여름비가 많이 왔다. 장대비가 계속하여 여러 날 퍼부었다.
둑이 터지고, 산골짝 도랑가의 집들이 떠내려 왔다. 그래도 비는 멎을 줄을 모르고 쏟아졌고 바람까지 불었다.
주 목사는 그 밤에 등불을 켜 들고 심방 길에 나섰다. 월천 동네 교인 집이 염려가 되어 찾아가는 길이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월천은 거창읍에서 오리길이 되었다. 그 먼 길을 어둠을 헤치고 걸어가는 것이었다. 두루막 자락을 걷어올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내를 건너 교인의 집 앞에 이르렀다. 벌써 이 집은 마루까지 물이 차 오르고 있었다.
급히 교인을 불렀다.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 목사의 깨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뜬 교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보니 물이 마루 위로 올라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짐을 챙길 여유도 없이 밖으로 나와 강둑에 올라 셨다. 집을 돌아보니 어느 듯 물은 지붕 위를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 때 주 목사의 방문이 없었으면 그들은 자다가 난을 당할 뻔 하였다. 그들 가족들은 너무도 고마워,
?목사님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목사님을 보내 주셨군요.?
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주 목사는 계속 물 때문에 고생할 만한 성도들의 집을 그 밤에 찾아 심방을 하였다.
밤이 늦어 비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리는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다녔다. 교인들 집 앞에 가서 바로 인한 피해가 없고 불이 꺼져 있으면 자는 줄 알고 그냥 지나갔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러 찾아가는 길이 아니다.
그는 교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이 예정 어린 심방의 길을 다니는 것이다. 교인들의 불행이 목사의 불행이요, 교인들의 슬픈 일이 곧 목사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 밤에 그는 옷을 흠뻑 비에 적시며 심방을 하였다. 온 교인들의 집을 그 밤에 다 돌아보았다. 심방을 끝내고 돌아오니 새벽닭이 두 홰를 쳤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교회 출석을 잘하던 노파가 한 분 있었는데 병들어 가지리에 있는 친정으로 갔다. 그 노파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이 중 하자 친정으로 간 것이다.
한데 그 노파는 회복되지 못하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교회로 왔다. 주 목사는 집사들에게 연락했지만 사택으로 찾아온 사람은 세 사람뿐이었다.
주 목사는 세 집사와 길을 떠났다.
가지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초상집은 쓸쓸하였다. 입관을 하고 마당에서 장례식 예배를 드렸다.
상여군이 적었다. 주 목사는 앞장서서 상여를 메었다.
이마에 구슬땀이 송알송알 맺혀 흘러내렸다. 능선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이 황토구를 안고와 얼굴에 더부룩히 묻혀주고 지나간다.
주 목사의 입에서는 찬송만 흘러 나왔다.
?우리 구주님 계신 곳에 천사 함께 늘 찬송하고, 주께 영광을 돌림으로, 모든 슬퍼한 맘 플겠네.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교인들 집 앞을 그냥 지나지 않고 들어가 기도하였다. 함께 동행을 한 최영교 집사는 주 목사의 그 충성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하나님 밖에 모르시는 귀한 어른이시다.?
최 집사는 그 날 주 목사와 동행하였다가 너무나 피곤하여 집에 들어오자 자리에 쓰러졌는데 3일간 몸살을 하였다고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 해 겨울은 눈이 몹시 많이 내렸다.
길이 눈에 묻혀 사람들의 왕래가 힘드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지방교회 순회에 나선 것이다. 삼십리가 넘는 가조면 마상리 교회로 간 것이다. 산길은 눈에 묻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항상 바지저고리에 두루막을 걸친 몸가짐이다.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한다는 것이 그만 한발을 헛 딛어 눈 속을 아무렇게나 마구 뒹굴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두루막 뒷자락이 찢어져 나풀거렸고 다리를 절기까지 하였다.
순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도 오랫동안 한 쪽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만나는 교인마다
?목사님 왜 다리를 져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목사님은 피식 웃으시며,
?눈에 미끄러져 조금 다쳤습니다. 내리막길에 그냥 주저 앉았드랬습니다. 곧 괜찮을 것입니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였다.
7. 아버지가 사 주신 책상
주경순은 거창 명덕학교 4년을 졸업하고 진주로 갔다.
선교사가 경영하는 시원 여학교 5학년에 편입을 한 것이다.
가난한 목사의 딸로 자라면서 그녀는 설움도 많았다.
국민학교 과정을 공부하는데도 이처럼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학비와 식생활 문제로 선교사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진주로 왔다.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12세 어린 소녀는 집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두 눈에 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자르르 양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엄마!?
가만히 불러보는 경순.
해가 서녘 하늘로 기울고 어둠살이 몰려 올 땐 못 견디게 집 생각이 났다.
생각을 말고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야무지게 마음을 고쳐먹어도 12세 어린 소녀의 마음은 굳세지를 못했다.
날이 가도 집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장씩 떼도록 되어 있는 큰 달력이 기숙사 방벽에 걸려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경순은 달력이 걸려 있는 벽을 향한다.
다른 아이들은 다 자기 책상이 있어서 책들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제법 화병을 구하여 꽃도 꽂아놓고 앉아 공부를 한다.
그러나 경순에게는 책상이 없었다.
책보에 책을 싸서 방 모퉁이에 밀쳐놓고 필요한 것만 챙겨 방바닥에 펴 놓고 공부를 하였다.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 집 형편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라 묵묵히 참고 공부에만 전심을 기울였다.
이 무렵 진주에서 봄 노회가 시작되었다.
아버지 주 목사가 노회에 참석차 진주로 왔다. 주 목사는 딸이 있는 학교로 찾아왔다.
기숙사 방을 돌아보고 딸을 만났다.
경순은 아버지를 만나자 너무나 반가워 울음이 터졌다. 주 목사는 얼마의 돈을 내밀며 어린 딸을 위로해 주었다.
?아버지, 나는 책상이 없어요.?
철없는 딸은 아버지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
언제나 조용한 주 목사.
주 목사는 딸에게 그가 유속하고 있는 여관을 가르쳐 주었다. 경순은 수업이 끝나자 아버지 여관으로 갔다. 아버지 주 목사는 최상림(崔尙林) 목사와 한 방에 있었다. 다음 날도 경순은 여관으로 찾아갔으나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최상림 목사 혼자 방에 앉아 있었다.
?목사님! 우리 아버지 어디 가셨습니까??
?오, 경순이 왔니? 잘 왔다. 아버지는 급한 일이 생겨 빨리 거창으로 가셨다. 아버지가 가시면서 네가 오거든 저걸 전해주라 하더군.?
최 목사는 책상을 경순에게 내 밀었다. 새 책상이었다. 그렇게 가지고 싶던 책상이었다.
책상을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선물.
경순은 아버지가 사다 주고 가신 책상을 머리에 이고 기숙사로 왔다. 책상을 방 한 쪽에 자리잡아 놓고 그 앞에 앉자 눈물이 나왔다. 그 후 책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아버지의 훈훈한 사랑을 피부로 느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경순은 방학 2일 전에 선교사 자동차 편으로 거창으로 왔다.
8. 기도와 성적
경순이 방학이 되어 집에 온지 열흘이 지났다. 학교에서 경순이 앞으로 편지가 날라왔다.
뜯어보니 성적표였다. 성적이 형편없다. 중간 밖에 되지 않는다.
?기도를 좀 하고 공부를 해라. 세상 학과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잘 할 수 있는 거야.?
?공부하고 기도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경순은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모르는 소리, 공부를 하는 것도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께 총명한 머리를 달라고 기도해야지.?
2학기가 시작되어 경순은 진주로 갔다. 경순은 밤이고 낮이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침저녁 특별히 시간 내어 기도하였고 책상 앞에서 공부를 시작하기 전 먼저 잠시 기도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부에 요령이 생겨지는 것이다.
학기 말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올랐다.
6학년 때엔 3등을 하였다.
학기말 성적표를 보신 아버지는 경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봐라. 성적이 올라가지 않았니? 기도의 응답이야.?
?앞으론 더 기도 많이 하겠습니다.?
경순은 진주 시원 여학교를 졸업한 후 동래 일신여학교에 응시하기 위하여 원서를 내었다. 그러나 공부에 너무 심혈을 기울였음인지 날짜 4일을 앞두고 경순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면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배돈 병원에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았다.
얼마만큼 전신이 돌아오자 경순은 기도하였다. 입원하여 3일이 지나자 열이 내리고 몸이 가벼워 지는 것이다. 퇴원하자 경순은 짐을 챙겼다.
동래로 가기 위하여 역으로 갔다.
김용국 목사 딸과 함께 기차를 탔다. 그녀는 지난 해 시원여학교를 졸업하고, 일신여학교에 응시하였지만 시험에 떨어졌다. 그래서 한 해 더 재수하여 시험 치러 가는 것이다.
동래에 도착하여 우선 동래 교회를 찾아갔다.
김만일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사전 연락을 받고 두 목사의 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거기엔 김해읍 교회 이 목사 딸과 그의 전도사 딸도 와 있었다. 가난한 교역자의 딸들이 가난한 교역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시험을 치루고 발표를 기다렸는데 결과는 가슴 아픈 것이었다. 경순이 혼자 합격하고 다른 3명은 모두 떨어진 것이다.
시험에 떨어진 그들은 몹시 우는 것이었다. 시험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슬프게 만드는가? 경순도 그들 친구들의 슬픔에 함께 젖었다.
차라리 자신도 그들과 함께 떨어져졌으면 싶었다. 함께 공부하게 되어 좋았는데 시험이란 게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경순은 시험에 떨어진 친구들을 위로도 해주지 못하였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는 결과가 될 것 같아, 간단히 몇 마디 하곤 집으로 향하였다.
거창으로 돌아가면서 경순은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였다.
?세상 학과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잘 할 수 있는 거야.?
사실이었다.
경순은 기도의 힘이 참으로 큰 것임을 마음에 굳게 확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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