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8:35
제 11장. 살려 놓은 하나님의 뜻
1. 경남노회 노회장에 피선
경남노회는 1943년 5월 26일에 해산되어 있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사실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정치의 힘으로 교파를 해산시키고 교단을 통합하였다.
1943년 5월 5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해산이 되었다.
성결교, 안식교, 침례교가 폐지를 당하고 모든 교파는 ?일본 기독교단?으로 통칭, 총리라는 직명을 주어 운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기독교단은 종교단체라기 보다 어용기관으로 일본인들의 요구대로 따라가는 단체가 된 것이다.
일본 기독교단 경남교구장이 된 김X창 목사는 경남교구회 소집 통지서를 다음과 같이 발송하였다.
?배계, 시하성전에 어건시를 경하부기 하나이다. 진자 조선 기독교 각파 합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가 자체가 과거의 불비한 조직을 해소하고 현 일본 기독교단 규칙을 기준해서 우리 반도계의 최 적당한 규칙을 작성하여 거 5월 5일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발전식 해소를 하고 이에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을 결하게 된 것입니다.
교단 총리로는 좌천 X근씨가 당선되었고, 불초 교제가 결성국장 겸, 경남 교구장으로 임명되고 금성 X준씨가 경남 부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로 금후 더욱 불초 소생등을 위하여 선한 지도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1회 경남 교구회를 시급히 개회코져 하와 여히 통지하나이다.?
그리하여 통지문대로 1943년 5월 25일에 부산 항서 교회당에서 모여 2일간 회의를 계속하고 26일에 경남 노회를 해산시켰다.
8?15해방과 함께 경남 노회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9월 2일. 부산시 교회 연합 예배를 모이고 최재화, 노진현, 심문태 목사 등 뜻있는 20여명의 교역자들이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9월 18일에는 부산진 교회당에서 경남 재건 노회가 조직되었고, 현 교직자들의 자숙안을 내세웠다.
1. 목사?전도사?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들어가며 현재 시무하는 교회를 일단 사면할 것.
2. 자숙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하여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 자숙안은 신사참배에 앞장 선 똑똑한 사람들의 궤변으로 인하여 잘 실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통회의 기색은 전혀 없고 도리어 교권으로 다시 교단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러한 어지러운 교계의 상황 속에서 제47회 경남노회가 모이게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부산진 교회당에서 제47회 노회가 개회되었다.
주남선 목사는 노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날 거창을 출발하였다.
교통이 불편한 거창에서 도보로 진주를 향하였다.
가다가 요행히 트럭이 있어서 고마운 신세를 졌다.
노회에 참석한 주 목사는 어지러운 분위기를 느끼고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건노회 위원들이 주가 되어 노회 진행을 이끌어갔다.
예배가 끝나고 임원선거가 시작되었다.
앞자리 강대상 옆에 원로목사들이 앉았고, 재건노회 위원들도 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임원선거가 진행되려 할 때,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신사참배 주동자들과 가담자들은 죽은 듯 앉아 있었다.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님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참석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원래 얼굴이 두꺼운 사람들이라 카랑카랑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일본에서 나온 목사들, 농촌에 피신했던 분들의 얼굴도 있었다.
임원을 어떻게 뽑느냐고 의논이 분분하게 나돌고 주위가 수건수건 시끄러웠다.
이때, 박X애 목사가 밖으로 뛰어 나가더니 물통을 들고 와서 앞자리에 앉아 수건수건 논쟁하는 목사들에게 끼얹었다. 물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 새끼 같은 놈들이 뭐 잘났다고 야단들이냐 말이냐! 내나 너희 놈들이나 다를게 뭐냐??
박 목사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실은 오줌통을 끼얹는다는 것이 물통을 들고 왔다.
박X애 목사는 항서 교회에서 김X창 목사와 함께 일을 보던 분이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 문제 뿐 아니라 다른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근신 당한 형편이었다.
갑작스레 쏟아진 물벼락으로 장내는 더욱 어지러웠다.
잠시 후, 다시 정돈이 되었고 임원개선이 시작되었다. 회장에 주남선 목사가 추대되었다. 주 목사는 노회장 자리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노회 복구의 빨리 길은 주 목사가 노회장직을 맡아주는 일이었다. 이 일에 반대하는 분은 별로 없었다.
사양의 뜻을 표했지만 어지러운 이 시점에서 회장 자리를 맡아야만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노회원들 전체 의사를 무시할 수 없어 끝까지 사양하지 못했다.
임원 선거가 끝나고 신임 임원들의 인사 차례였다. 주 목사는 회장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단 위에 올랐다.
장내가 조용하였다. 책망의 소리가 나온다 해서 불평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목사는 침착하면서도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주님만 생각하고 살아 왔기 때문에 어떻게 세월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살아왔습니다만 여러분은 직접 일본 사람들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자니 참으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장내에서는 이곳저곳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진 것이다.
?저 같이 말주변도 없고 정치도 모르는 사람에게 옥중 성도라는 것 하나 때문에 회장의 중대한 자리를 맡기시니 너무 가슴이 무겁습니다.?
주 목사의 겸손한 인사는 감동으로 회원들과 방청객들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다.
출옥 성도의 위치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들고 나와 여지없이 책망할 줄 알았는데, 이외로 온유한 말이 나오자 회중에서 훌쩍훌쩍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주 목사의 회장 추대를 극구 음성적으로 반대하고 나오던 신사참배 앞장 선 인사들도 의외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눈치였다.
인사가 끝나고 회무가 진행되었다. 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경건회 시간마다 부흥회였다. 자복하고 통회하는 소리가 교회당을 메웠다.
제47회 경남노회는 은혜가운데 그 막을 내렸다.
2. 고려 신학교 설립 초대 인사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바싹 마른 고목에 순이 돋고,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위에 따뜻한 햇살이 퍼져온다.
1949년 4월 어느 날, 주 목사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평양 산정현 교회를 시무하고 계시던 한상동 목사가 모친 별세의 소식을 듣고 부인과 함께 남하하였다는 것이다. 뛰어가 만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목사가 먼저 거창을 찾아왔다. 뜨거운 악수가 교환되고, 두 출옥 성도는 밤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한 목사는 모친 산소를 둘러보고 월북하려고, 하였지만 길이 막혀 월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교계 소식을 들으니 아무래도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불타는 마음이 그를 초조케 한다고 하였다.
?교회가 바로 될려고 하면 신학이 발라야 합니다. 평양 신학교가 문을 닫고 다시 그 문을 열지 못하는 한, 그 정신과 신학을 계승할 신하교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옥중에서 데려가시지 않으시고 내 보내주신 것은 이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한 목사의 말은 무겁게 깔렸다.
?옳은 말씀입니다. 신학이 발라야지요. 힘을 쏟겠습니다.?
주 목사는 한 목사의 제의에 찬동하였다.
?서울에서 박윤선 목사를 만났습니다. 만주 동북 신학교에서 교수 일을 보다가 서울에 와 있습니다 .적산집 이층 다다미방에서 몹시 고생을 하고 있더군요. 부산서 신학을 했으면 싶은데 와 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대단히 기뻐합디다.?
잘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라면 안심하고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형용 박사도 모시게 되면 참으로 좋은 신학을 할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 봉천에 사람을 보내어 모셔오도록 하십시다.?
?좋습니다.?
이리하여 두 옥중 성도는 보수 신학교를 할 일을 위하여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1946년 5월 20일. 경남에 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위원으로는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목사였다.
6월 21일. 서울 승동 교회당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남부 총회가 모였고 이북에서는 1945년 12월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이북오도 연합노회가 회집 되었다.
이남에서는 남북노회가 함께 모일 날을 기다렸으나, 정치적인 38선 장벽으로 불가능하게 되자, 이남만의 회집으로 남부총회가 모이게 된 것이다. 이 총회가 회수로 치면 제32회가 된다.
주 목사는 개인 자격으로 제32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회장에 배은희 목사가 당선되고 부회장에서 함태영 목사였다.
이 총회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결의하였다.
1. 장로회 헌법은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2.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불법한 결의였으므로 이를 취소한다.
3. 조선 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 신학교로 한다.
등이었다.
총회를 마치고 돌아온 주 목사는 경남에 시급히 신학교가 세워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졌다. 주 목사는 부산에 내려가 한 목사를 만나서 경남에 세워질 신학교를 위하여 의논하였다. 우선 신학 강좌를 열기로 하였다.
1946년 6월 23일. 진해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한편 주 목사는 경남노회 임원회를 소집하여 이 행사를 후원하는 일을 위하여 논의한 결과 후원하도록 결의가 되었다. 신학강좌가 은혜 중 개강되었다. 60여명의 수강생들이 등록을 하였고 많은 방청생들이 강의를 들었다.
신학교 설립의 싹이 보이므로 기성회가 다시 모여 신학교 개학을 논의하였다. 신학교 이름을 고려 신학교로 하고 9월 20일 개학하기로 결정하였다.
주 목사는 7월 9일, 경남 노회 임원회 결의에 따라 임시 노회를 소집하였다. 고려 신학교 설립을 노회가 허락하고 협조해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노회에서는 고려 신학교를 인정하고 협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6년 9월 20일.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고려신학교 개교식이 거행되었으며,
김치선 박사가 설교를 하였다. 김 박사는 ?신학과 신조?라는 제목으로 바른 신앙의 길을 외쳤다. 이리하여 감격속에서 고려신학교는 개학이 되었다.
주 목사는 고려 신학교 설립자임과 동시, 이사가 되었다. 가난한 신학교 이사는 이사회를 모일때마다 자부담으로 참석해야 했다.
거창에서 부산까지의 길은 험하였다. 정규적으로 운행되는 버스가 없었으므로 진주까지 걸어서 다니기가 일쑤였다.
주 목사가 부산에 오면 한상동 목사 사택이 숙소였다. 한 목사는 초량교회 목사로 1946년 7월에 부임하였다. 주 목사는 초량교회 사택을 찾아들면서 떨떠름한 음성으로 말을 뱉았다.
?사모님, 본전군 왔습니더!?
손님대접 잘하기로 소문난 김차숙 여사는 조금도 얼굴에 짜증기를 풍기지 않고 손님을 맞아 들였다.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무료 숙박인을 친절히 대해 주었다.
주 목사는 명예를 얻기 위해 신학교 이사직을 맡은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혜택은 물론 없었고, 염려만이 무겁게 눌렀다. 그러나 기쁨으로 이 이사직을 맡아 힘을 쏟았다.
12월 3일. 진주에서 제48회 경남노회가 회집되었고, 회장에 김길창 씨가 당선되었다. 묘한 인간적인 정치운동의 결과였다. 신사참배를 합법적으로 주장하고 나선 인사가 어떻게 회장으로 당선이 된 것인가?
그리하여 나타난 결과는 비극이었다. 한 번 구부러지기 시작한 나무는 계속 구부러지기 마련이다. 헌 옷을 입은 자는 새옷 입은 자를 시기한다. 같이 헌옷 되기를 바란다. 같은 헌옷 입은 사람은 헌옷 입은 사람과 짝이 되고 서로 동정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심리다.
드디어 고려 신학교 인정 취소를 결정하였다. 노회가 신학생을 추천 해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유는 얼마든 만들면 되는 것이다.
주 목사는 마음이 아팠다. 한상동 목사는 부패한 경남노회를 탈퇴한다고 선언을 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교단 안에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고려 신학교는 고아 같은 외로움을 실감하며 곡해와 수모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역사는 언제나 불의 한 몇 사람이 들어 굴곡을 만들어 놓는 법이다.
3. 기억을 더듬어
1945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높은 지리산 봉우리엔 흰 눈이 쌓이고 계곡은 얼음으로 덮혔다.
주 목사는 당회 구역순회로 나섰다.
순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함양 사근 교회에 찾아들었다. 사택에 들어선 주 목사는 키가 작고 여자처럼 곱게 생긴 청년을 만나 입을 열었다.
?여기 민영완이란 분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까??
청년은 주 목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면서,
?왜 그러십니까? 제가 민영완입니다.?
하고 말을 씹었다.
?아 그러세요. 내가 용케 찾아 왔군요.?
?목사님, 추우신데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나를 아시겠습니까??
?그럼요. 이 함양지방에서 목사님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다 아는 걸요. 저는 목사님을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주 목사는 민영완 전도사의 아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교회 일을 보시나요???예. 일본 관서 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가 집에 있었는데, 하도 이 사근교회에서 집회 인도를 요구하기에 응했더니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잘 되었군요.?
?집회 중 경찰에 불려가 욕을 좀 보았습니다만 목사님 앞에서는 부끄러울 뿐입니다.?
민영완 전도사는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서 자랐다. 일본으로 들어가 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일을 보지 않고 쉬고 있었는데, 사근교회에서 집회를 청하여 응하였다가 경찰에 입건되어 수모를 당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다시 사근 교회 요청에 따라 목회를 하고 있는 터였다. 민 전도사는 동그란 눈을 섬뻑거리며 다시 주 목사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알고 싶어했다.
?이 추운 날, 원로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 때 주 목사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진주 경찰서 유치장 있을 때입니다. 같은 유치장 감방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 때 유독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누구였는지 아시겠습니까??민 전도사가 그 청년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주 목사는 싱긋 웃음을 얼굴 가에 날리더니 말을 잇는 것이다.
?그 청년이 말입니다. 나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이렇게 몹쓸 짓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지만 저에게도 자랑스러운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신학을 하고 있지요. 하고 그 청년은 큰 눈에 찔끔 눈물을 짜지 않겠습니까??
?아니 형님이 어떻게 유치장에 들어갔습니까??
?야미 쌀장사를 하다가 걸린 모양입니다. 나가서는 다시 그런 짓 안하고 선량하게 예수님을 믿고 살려 하더군요.??아 그랬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그 청년과 그의 동생인 민영완을 위하여 기도하여 왔습니다.?
민 전도사의 얼굴이 불화로를 덮어쓴 듯 확 달아올랐다. 두 눈에 뜨거운 액체가 고여들었다. 주르르 뜨거운 액체는 얼굴 밖으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목사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 목사는 민 전도사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밖으로 나온 주 목사는 민영완 전도사의 손을 꼭 쥐고 악수를 나눈 후,
?복음전파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이니, 용기를 잃지 마시고 힘껏 일하십시오. 부족하지만 전도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말을 맺고는 총총히 주 목사는 길을 떠났다.
4. 거절한 독립 유공자 상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3?1절 기념행사였다.
갑격스런 3?1절이다. 일제의 몹쓸 욕심의 제물이 되기 싫어 목숨을 걸고 항거한 3?1운동!
그리고 36년. 모진 고난과 피흘린 보람이 있어 해방을 맞았다. 누구의 수고로 얻어진 해방인가? 나라에서는 일제와 항거한 독립투사들과 순국한 가족들에게 표창을 했다.
거창에서도 3?1절 기념행사는 거대히 준비되었다. 주 목사에게 3?1절 기념행사 준비위원들이 찾아왔다.
?목사님, 공설 운동자에서 3?1절 기념식을 갔습니다. 꼭 참석하셔서 표창을 받으십시오.?
그러나 주 목사의 얼굴은 담담하였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였다고 표창을 받는단 말입니까??위원들은 깜짝 놀라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 목사님은 독립투사입니다. 독립유공자란 말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그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한 것이 무엇이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
주 목사의 말은 억지 겸손이 아닌 진실을 통하는 말이었다.
?주 목사님은 3?1운동때도 독립군을 도우고 상해 임시정부의 한 예속부대인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자금 조달에 적극 협력하시다가 투옥되어 2년 동안이나 형무소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셨지요.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반대로 투철한 배일사상을 보여 줌으로써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어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옥살이하시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이야 말로 우리 거창의 보배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어른이십니다.?
?너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할 일을 했고, 예수님을 믿는 기독신자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목사님, 꼭 식장에 참석해 주십시오.?
?목사가 갈 곳이 못됩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준비위원들이 돌아가고 얼마 후 군수가 직접 찾아왔다. 그러나 주 목사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 목사는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무슨 일에나 예수 중심으로만 움직였다.
5.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
1947년 10월. 전성도 목사가 거창읍 교회 사임을 표명하였다.
주 목사는 마음으로 섭섭해하면서 전 목사에게 말했다.
?계속 함께 일을 하십시다. 교인들도 많아지고 일은 더욱 벅차지는데 왜 가시려합니까? 함께 일하는 것이 저에게는 많은 힘이 됩니다.?
전 목사는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 목사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며, 또 전 목사 자신이 단독으로 목회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힘에 알맞은 교회가 나서면 떠나가 주 목사에게서 받는 감명과 그 목회 방법을 살려 힘껏 뛰고 싶었다. 그런데, 단독 교회가 나선 것이다. 김해읍 교회에서 청빙이 온 것이다.
전 목사는 주 목사께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목사님 곁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섭섭합니다. 그러나 저도 앞날을 위해서 단독 목회를 희망합니다. 계속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전 목사는 주 목사와의 아쉬운 작별을 고한 것이다.
1947년 10월 19일. 전 목사는 6년여의 거창읍 교회 사무를 종결짓고, 새 임지인 김해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주 목사의 일이 더 많아졌다. 주 목사는 기도와 독경과 심방으로 그의 부지런한 목회를 계속하였다.
11월 30일에 두 장로를 장립 하였다. 이영조, 박병영 장로였다. 당회가 보강되니 더욱 교회 일을 활발하였다.
주일학교 유년부 학생들이 천 여명이 되었다. 관리가 힘들었다. 그래서 죽전 명덕학교를 확장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어린이에 대한 교회교육은 교회 부흥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주 목사는 이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교회교육은 어려서부터 철저히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일에 주력하였다.
6. 제헌 국회의원 출마 거부
1948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일제의 탄압 밑에 신음한 우리 민족에겐 자유도 나라도 없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된 것이다. 정치 체제가 달랐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군정을 폈다.
군정이지만 일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군정을 폈기 때문에 전제주의적 기풍이 깔려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달랐다. 미군이 다스렸기 때문에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지만 한국인에 의한 자주독립 체제의 정치를 백성들은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1월 27일 한국에 대한 10개년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치열한 반탁운동이 일어났으며, 급기야는 피를 흘리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국내 뿐 아니라, 미국내에서 까지 여론이 비등해졌다. 미 국무차관 애치슨씨는 이 여론의 비등을 수습하기 위하여 기자회견을 갖고 해명하기를,
?미국은 한국에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가 생각될 때에 한해 5년 간의 통치를 하며, 또 신탁의 연장이 필요하게 되면 다시 연장을 할 수 있으리라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견에 불과하고 계획안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반탁운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극렬해졌다. 국내 지도자들은 하루 빨리 남북 간의 총선거가 시행되도록 동분서주하였다.
김구 선생은 여러 차례 이북을 왕래하며 남북 간의 총선거를 추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승만 박사는 남한만의 총선거라도 신속히 하므로써 이북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보고 이 일을 위하여 뛰었다. 방미외교에 나선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방미외교는 성공적이었다.
1947년 4월 21일. 이승만 박사는 성공적으로 방미외교를 마치고 돌아와 남한 단독 총선거의 가능성을 예고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박사는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그의 환국환영 국민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미국 정책이 공산주의와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우리도 입법위원회에서 총선거 법안을 급속히 제정하여, 남북통일을 위한 남조선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유엔에 참가하여 소련과 절충, 남북통일을 꾀해야 합니다.?
결국 이승만 박사의 주장대로 유엔 소총회에서는 남한 만의 총선거가 허락되었다.
1948년 5월 9일을 총선거 날로 정하고 남한 전역에 공고하였다. 이에 따라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게 된 것이다. 곳곳마다 독립투사들을 앞세워 정당을 만들고 입후보를 내세웠다.
거창에서도 국회의원 후보자 물색에 정당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거창에는 인민위원회(좌익계)와 공복위원회(우익계)가 동시에 인물을 찾았다. 양쪽에서 다 주 목사를 두고 이야기가 오갔다.
?아무래도 거창지구에서는 주남선 목사 밖에 나설 인물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3?1운동 때부터 일제와 투쟁한 애국지사 아닙니까? 거창 지방에서 주남선 외에 애국인물이 또 있습니까??
?주 목사만 나서 주면 무투표 당선으로 결정이 되어집니다. 누가 맞설 상대가 있어야지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주 목사를 내세웠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어느 날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주 목사의 앞에 길을 막는 장정 둘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목사님!?
납덩이처럼 무거운 음성이 주 목사의 귀를 때렸다.
?왜 그러십니까??
의연하고 맑은 주 목사의 목소리였다.
?노상에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거창군의 국회의원 선거위원인데 이번 국회의원 거창지방 후보로서 주 목사님을 모셔야 한다는 전체의견 때문에 찾아 뵈옵게 된 것입니다.?
주 목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듣게 되어 잠시 대답할 말을 찾기 위해 눈을 감았다.
겸연쩍은 듯 말을 잇던 장정은 잠시 주 목사의 눈치를 살피다가 숨을 돌리고,
?우리 거창지방 유지들이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오니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다른 장정이 말을 뱉았다.
?선거운동이나 운동방법에 대하여는 일절 신경을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선거위원들이 성심껏 일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의사표시만 해 주시면 됩니다.?
주 목사는 이 딱한 장정들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를 몰라 망설였다.
?주 목사님말고 우리 거창에 참 애국자가 누가 있습니까? 목숨보다 나라를 사랑하시고????
?잠깐.?
주 목사는 장황하게 연설조로 말을 끌고 가려는 장정의 말허리를 꺾었다.
?전 생각지도 않은 일입니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듣고 보니 무슨 말로 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지방민들의 고마운 성의에 대답할 말이 궁해집니다.?
주 목사는 신중히 말을 이었다.
?저는 교회 목사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몸을 바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는 일밖에 다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거위원회에서 달리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한 청년이 바지를 추켜 올리며 재빨리 응수를 하였다.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주 목사님의 겸손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분명히 사양하실 줄 알고 오늘은 우선 귓뜸 만 해 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을 할 것이니 그리 아시고 계십시오.?
그들은 말을 던지고 그냥 깍듯이 인사를 하곤 가버리는 것이었다.
딱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였다.
다음 날이었다. 광복위원회 쪽에서 사람들이 왔다. 중앙에서 온 선거위원 두 사람도 함께 왔다. 죽전 사택으로 찾아온 이 정당인들은 허락해 달라고 늘어 붙는다.
?거창지방에서는 일본사상에 물들지 않고 무슨 일에나 신용할 만한 분이 주 목사님 뿐입니다.?
또 한 사람이 말을 잇는다.
?땅을 다 맡겨도 안심할 수 있는 탐심 없는 사람이 주 목사님 외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 거창 지방에 주 목사님 같으신 분이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이요, 자랑입니다. 출마만 허락하시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주 목사는 할 말이 없었다.
멍하니 그들의 동정만 바라보았다.
?출마하셔야 합니다. 국회의원으로 중앙에 올라가셔서 일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중앙에서 내려왔는데, 중앙에서도 주 목사님의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주 목사님 같으신 분이 일을 하셔야지 누가 일을 한단 말입니까? 나라를 위해서 출마를 허락하십시오.?
주 목사는 이 끈질긴 정당인들에게 말을 잘랐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목사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떼를 위해서 교회를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국회의원 되셔서 주님의 일하면 되지 않습니까? 더 크게 일할 수 있지요.?
?안됩니다. 나는 목사직이 나의 천직으로 알고 이 일에만 충성하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연 4일간 계속 설득작전을 펴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새벽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계속 정당인들이 늘어 붙기 때문에 마음의 시험이 되었다. 기도로 이 시험을 물리쳐야 했다.
주 목사는 예수님의 시험을 생각하였다. 광야 40일의 금식 후 마귀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 경배하라고 했다. 그러면 이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했다.
이와 같은 명예의 시험이 주 목사에게 온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명예를 얻기 싫어하는 자 어디 있겠는가? 부귀와 영화를 싫어할 자 어디 있겠는가?
모진 고생을 했다. 배고픈 설움이 제일 슬펐다. 자신의 배고픔보다 처자식들의 굶주림은 가장으로서, 부로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었다.
국회의원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선 자신은 주님의 종이었다. 주님의 종은 주님 밖에서는 자유가 없는 것이며, 주님의 일 외에는 마음을 돌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목사가 된 그는 목사로서의 사명만이 전부이다. 주 목사의 두 눈에 영롱한 물방울이 맺혔다.
?주님, 모든 시험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님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하옵소서!?
중앙에서 왔다는 선거위원들은 4박 5일로 주 목사에게 접근하였다.
마지막으로 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주남선을 두 사람 만드시오. 그래서 목사 아닌 주남선을 데려가시고, 목사인 주남선은 교회 일만 보도록 놓아두십시오.?
선거위원들은 더 이상 권해야 소용없는 줄 알고 주 목사 곁을 떠났다. 그들은 가면서 참 이상하다고 말했다.
?허락만 하면 저절로 당선 될 국회의원 자리인데, 어째서 한사코 거절하는 것일까? 명예와 부귀와 영광이 동시에 넝쿨채 굴러오는 것을 거절하다니????? 참 이상하다. 목사자리가 그렇게 좋은가??불신자인 선거위원들이 주 목사의 심중을 알 까닭이 없다.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나 주 목사의 가슴속에는 예수 밖에 없었다.
다른 어떤 것도 주 목사의 가슴에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의 가슴속엔 예수만으로 꽉 차 있었다. 예수만 위해서 그는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었으며, 예수 만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이며, 예수만을 위해 죽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일편단심 예수만으로 주 목사의 가슴은 설레이고 있었다.
선거일이 다가왔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5월 9일은 주일이기에 기독교 교계가 연합전선으로 날짜 변경을 호소하였다.
날짜가 곧 변경되었다. 5월 10일, 월요일을 총선거의 날로 정한 것이다. 선거는 혼란과 잡음 속에서도 사고없이 진행되었다.
전국의 총 입후보자 902명 중 198명이 당선되었다. 이리하여 국회가 조직되고 헌법이 만들어졌다.
드디어 초대 대통령이 뽑혔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이 된 것이다. 긜하여 8월 15일 대통령이 취임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새 공화국 탄생을 백성들은 다 함께 기뻐하였다.
7. 하나님 제일주의
박봉기라는 소년이 있었다. 지금은 마산 애리원에서 일을 보는 착실한 장년이지만 당시는 마음 약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예수님을 믿고 너무 기뻐서 주 목사 심부름을 해 주고 나들이 나가실 땐 가방도 들어주곤 했다.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봉기 소년이 밖에서 서성거리자 주 목사가 불러 들였다.
?심부름 한 가지 할래"
주 목사는 교회당 열쇠 꾸러미를 내밀면서,
?당회실에 가서 당회록을 좀 찾아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다.
봉기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당회실에 무서워서 못 들어 가겠심더.?
주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던졌다.
?무섭긴 무엇이 무섭단 말이냐? 하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서운데 예??????
?참 딱하군. 나는 말이야, 신학교 다닐 때, 혼자 김천에서 걸어서 거창까지 오곤했다. 낮이 아니고 밤일 때가 많았다. 우두령 고개 알지? 그 무서운 고개를 혼자 걸어 넘었단 말이다.?
?목사님은 어른이시니까 그랬지요!?
?아니야, 어른은 뭐 무서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든???어른은 아이들하고야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이들보다야 한결 무서운 생각이 덜 나지, 하지만 어른도 사람인 이상 무서운 거야.?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 우두령 고개를 넘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모든 걸 맡기고 다녔지!?
봉기는 주 목사를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 목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고 한다. 김천에서 우두령 고개를 넘어가는데, 너무 피곤해서 큰 나무 밑에서 잠시 쉬었다. 달빛이 하얗게 쏟아져 산천에 깔렸다.
너무 조용한 시간이었기에 주 목사는 앉아서 한 참을 기도하였다. 눈을 떠 보니 옆 자리에 짐승이 한 마리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호랑이였다. 허나 별 무서운 생각이 일지 않았다. 주 목사는 일어나 길을 걸었다. 호랑이도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주 목사를 앞서 가는 것이었다. 우두령 고개를 넘어 거창이 보이는 길목까지 가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주 목사는 소년에게 시선을 주며,
?봉기야, 그래도 무섭냐?
봉기 소년은 꿈을 꾸는 듯 신기함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호랑이를 보내어 길을 인도해 주신 거야. 하나님은 신자들을 이렇게 끔직히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단다.?
?목사님, 가겠습니다. 이제는 무섭지 않아요.?
봉기는 그 길로 당회실로 들어갔다.
조용하고 어두운 당회실은 무서웠다.
그러나 주 목사님의 말씀을 하여 믿는 성도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담대 할 수 있었다. 그 후 봉기 소년은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8. 유급 교역의 원리
백영희 전도사는 계속 개명 교회를 시무하면서도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았다. 생활비를 받지 않고 목회 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하루는 주 목사께서 백 전도사를 찾아와 신앙적인 격려를 해 주었다. 그 때 주 목사는 백 전도사에게,
?아직도 교회에서 생활비는 받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예, 받지 않습니다. 저는 생활비를 준다해도 안 받을 것입니다. 생활비를 받으면 약점이 잡혀 일을 힘차게 못할 것 같아요.?
?백 조사, 그게 잘못된 생각이야. 성경에도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전 9:9)고 하셨고, 예수님도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고 하시지 않았오. 전도인이 생활비를 받는 것은 성경이 가르친 바 원리입니다.?
?그래도 생활비 안 받는 것이 속이 편합니다.?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오. 교인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대로 일하려는 잘못된 생각에서 온 처사입니다. 생활비를 받고 유급 전도사가 되시오. 그래서 신학도 하고 유능한 목회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백영희 전도사는 생활비 받는 일만은 마음에 허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백 전도사의 둘째 딸 아이가 정미기에 들어가 중상을 입었다. 팔과 다리, 중요 부분의 뼈가 부러졌다. 다섯 군데나 뼈가 절단 난 것이다.
백 전도사는 아찔함을 느꼈다. ?하나님의 징계가 아닐까?? 자신의 고집으로 온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교회당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주 목사님의 권면을 외면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그냥 밀고 나간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백 전도사는 자신의 잘못된 고집이 결국 어린것에게 미친 줄 깨닫고 통회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만일 어린 딸아이의 중상이 주 목사님의 권면을 거절하고 자신의 고집으로 나간 것 때문에 온 것이라면, 즉시 상처를 낫게하여 주옵소서. 상처가 의사님의 손을 빌리지 않은 어떤 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낫는다면 이는 분명히 주 목사님의 권면을 듣지 않는 결과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파서 못 견디며 울부짖던 어린것이 3일이 못되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밖에 나들이를 하는 것이었다.
백 전도사는 기쁜 마음으로 주 목사에게 뛰어갔다.
?목사님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제는 생활비를 받고 일하겠습니다.?
그때부터 백영희 전도사는 유급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신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질 뻔 했다.
논문 시간에 그는 긴 말을 쓰지 못하고 단 하나 마디 ?포도나무의 원가지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 왔습니다?고만 논문을 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박손혁 목사가,
?논문도 쓰지 못하고 이런 한 마디의 글을 쓰는 정도의 실력으로 앞으로 신학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입학을 거절하였는데, 주 목사가 설득을 시켜 입학이 되었다.
백영희 전도사는 주 목사의 여러 가지 배려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목회에도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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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선지자 | 2015.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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