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8:37
제 13장. 살인 명부
1.북괴군 남침과 살인명부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북괴군은 평화로운 이 땅에 포탄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동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날은 주일이었다. 마귀는 언제나 주일을 이용한다.
오전 11시.l 평양방송은 엉뚱한 보도를 하였다.
?이승만 괴뢰의 침략군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개시했으며, 이것은 정당방위입니다.?
오후 1시 35분. 김일성은 방송을 통하여,
?남한은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제안을 거부해 왔고 평화통일을 반대해 왔으며, 급기야는 옹진반도의 해주에서 인민군 진지를 공격하여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을 가한 것입니다.?
핏대를 올렸다.
거짓말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거짓말하는 자는 마귀의 후예들이다.
26일 낮, 북괴군의 탱크는 의정부를 깔고, 수유리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날 오후 서울 상공에는 적기가 날았다.
28일 새벽 1시경. 북괴군의 탱크는 미아리에 접근하여 왔고, 아군과 접전하였으나 불행히도 아군은 밀리고 말았다. 드디어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적은 7월 6일, 평택을 짓밟았고, 7월 7일 밤엔 천안으로 밀어 닥쳤다.
7월 15일 토요일이었다. 주 목사는 죽전 사택에서 설교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사님! 목사님!?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나서 책상 앞에 앉아 계시던 주 목사가 밖을 내다보았다. 먼 친척뻘 되는 청년이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목사님은 마루로 나오면서 조용히 말했다.
?큰일났습니다. 목사님,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거창지방 인민위원회 간부회의에서 작성한 살인명부를 저가 보았습니다.?
동란이 일어나자 비밀리 활동하던 좌익계 인사들은 자기 세상이 왔다고 날뛰며 인민군들이 당도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당도하는 날에는 합세하여 전투를 도울 것이고, 지방 행정을 맡을 것을 꿈꾸며 그들의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청년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에 좌익계 사람들과 접촉하는 중, 사상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무실에서 비밀 살인명부를 보고 호기심에서 표지를 넘기다가 놀란 것이었다. 주 목사의 이름이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님, 살인 대상자가 50명이었는데, 그 첫째가 목사님었습니다. 얼른 피하십시오, 큰일납니다. 지금 전쟁은 이북이 우세합니다. 인민군이 거창에 들어오면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말을 하는 청년의 입술은 공포에 젖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청년의 모습과는 반대로 눈시울을 활짝 펴면서
?고맙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나는 일을 하여야 해!?
?목사님 당합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괜찮아! 하나님의 허락이면 당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공중의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청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뒤통수에 살며시 손을 얹드니, 고개를 굽히고 돌아서 나갔다.
주 목사는 피신할 수 없었다. 7월 19일부터 거창지방 교역자 수양회가 모인다. 36일까지 계속될 수양회는 주 목사가 없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혼란한 전시에 교회를 담임한 교역자들이 더욱 더 교회를 사수하여야 하며 이 일에 격려를 해 주어야 했다.
주 목사는 책상 앞으로 돌아와 조용히 설교 준비를 계속하였다.
주 목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그의 생명까지도 이미 맡기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잔잔했고, 주일 준비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2. 교역자의 수양회
7월 19일 수요일. 거창지방 교역자 수양회 날이었다. 삼군(거창, 합천, 함양)지방 교역자들이 모여들었다.
전시였지만 평상시나 다름없이 교역자들은 거창 명덕학교로 찾아 왔다. 명덕학교는 거창 성경학교 교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장소를 이 곳, 강당에 정하였던 것이다.
모두 21명의 교역자들이 모였다. 반가왔다. 전시에 같은 길을 걷는 교역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 더욱 반가웠다.
힘이 솟았다. 모두들 굳게 악수를 나누고 신앙의 격려를 하였다.
이날 모인 교역자는 다음과 같았다.
주남선 목사를 비롯하여, 남영환, 배수윤, 이종대, 안태수, 추교경, 추국원, 백영희, 이백원, 임상율, 정우덕, 이성옥, 하종숙, 조갑득, 이재순, 김상수, 장익진, 강진실, 박기천, 임동선, 장병용 전도사 등이었다.
개회 예배가 시작되었다. 수양회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시로 전쟁이 밀려온다는 소문이 계속 들려왔다. 교역자들의 마음은 점차적으로 초조하고 무거워졌다. 주 목사는 교역자들 앞에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역자들입니다. 교회를 버려 두고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순교를 각오하십시오. 십년 후, 이십 년 후에 죽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 목사의 얼굴엔 이미 세상을 포기한 숭고한 빛이 아련히 감돌고 있었다. 교역자들의 마음에 깊고 견고한 신앙의 지층이 쌓이고 있었다.
주 목사는 다시 교역자들에게,
?우리가 이번 수양회 기간에 특별히 할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찬송가 가사를 외우는 일입니다. 적어도 20장 이상은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암송하는 일입니다. 유다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외워야 합니다. 유다서는 이단을 배격하는데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어두운 시대가 오면 찬송가도 성경도 우리 손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가 세상 노래를 하겠습니까? 암기한 찬송을 불러야지요. 암기한 성경을 암송해야지요. 그러한 때 영적 힘을 잃지 않게 됩니다.?
말을 하는 주 목사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그의 눈엔 초롱초롱 광채가 빛났다. 수양회는 기도하는 일과 찬송가 외우는 일, 그리고 성경 암송하는 일로 계속되었다.
전세는 불리하였다.
7월 20일 오후. 대전이 북괴군 제4사단에 의하여 빼앗겼다. 북괴군 제6사단은 대전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아래로 질풍처럼 내달았다. 20일에는 벌써 전주를 삼킨 것이다. 그들은 안의, 진주 노선까지 뻗을 양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이 위험하였다. 미 제8군 위커 장군은 24일, 24사단 처어지 소장에게 서부전선을 방어하라고 명령하였다. 진주와 김천 노선은 공비의 소굴인 지리산을 끼고 있었다. 북괴군이 공비와 합세하여 안의, 거창을 거쳐 낙동강에 이른다면 마산이 위험하였다.
미 제24단은 25일 방어를 폈다. 제19연대의 주력 2개 대대를 진주에 두고, 나머지 1개 대대를 안의에 배치하였다. 제34연대는 거창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단 사령부를 합천에 두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 날 밤이었다. 집회 도중에 배낭을 맨 오십대 장정이 들어왔다. 그는 개성이 있는 어느 교회 목사였다. 저녁집회가 끝나고 그 모사는 교역자들을 보고 말했다.
?어쩔려고 이렇게 태평스럽게 있습니까? 삼십리 밖에 인민군들이 들어오고 있어요.?
주 모사는 그 목사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는 태평스럽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수하기 위하여 힘을 얻으려고 교역자 수양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괴뢰군 놈들은 악랄해서 목사나 전도사는 우선적으로 살해합니다. 빨리 피하십시다.?
?이 전시에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교회를 사수해야 합니다. 피난을 간들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도 함께 합시다.?
?나는 어차피 나왔으니 가야 합니다. 지금은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 때 교역자들 가운데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있었다. 가족 때문이었다. 그 목사는 밤에 떠나가고 수양회는 계속 새벽까지 기도회로 진행되었다.
26일 새벽. 큰 은혜가 내렸다. 모든 교역자들의 가슴은 뜨거웠고. 죽음도 무섭지 않은 담력을 얻었다. 주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만일 잡혀서 순교를 당하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하고 이용을 당할 우려가 있을는지 모르니 아예 몇 가지 가결을 지어 둡시다.?
모두들 그게 좋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주 목사는 다음 2개항을 교역자들과 함께 자결했다.
1. 기독교 연맹에 가담하지 말 것.
2. 공민증을 받지 말 것(왜냐하면 공민증은 계시록의 짐승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26일 새벽 기도회로 수양회는 끝났다. 교역자들은 각각 자기 담당 교회로 양 떼를 지키기 위하여 떠났다.
북괴군 제6사단은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 여러 항구를 점령하였고, 순천에 모여들어 동쪽으로 침입할 계획을 짰다.
한편 대전을 점령한 북괴군 제4단은 금산을 누르고 남으로 내려와 거창을 향하였다.
3. 거창 전투
7월 28일. 작열하던 태양이 서산에 얼굴을 감추자 대지에는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벼 포기가 검푸르게 자라는 논 주변엔 사람들의 그림자가 없다.
전쟁은 부지런한 농부들을 피난시키고, 벼 포기에 땀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했다. 거창의 넓은 벌판과 마을에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었다.
북괴군 제4사단의 대 차량이 안의를 거쳐 위수 골짜기 신작로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위수는 위천과 안의 사이에 흐르는 강을 말함) 부옇게 먼지가 장사진을 이룬다.
생각 밖이었다. 분명, 김천 쪽에서 올 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주에서 넘어 올 줄 알았다. 그리하여 미 제34연대는 주로 김천 길을 주시하고 방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북괴는 전주를 거쳐 들어오는 것이었다. 보고를 받은 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위수쪽 산허리에 대기시킨 포 부대에 사격을 명령하였다. 포 부대에서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했다. 먼지 속에서 차량이 폭파하는 폭음이 하늘을 치솟았다.
적의 차량은 계속 폭파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의 병력은 엄청났다. 차량은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대 차량 뒤에는 2개 연대 병력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일개 연대 병력으로 사단 병력을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자 더 이상 사격을 가할 수가 없어 사격이 잠시 중지되었다.
한편 시내를 사수하기 위하여 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거창 시가에 병력을 원형으로 깔았다. 그러나 자신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북괴군 제 사단은 수 개년 단련된 민활 보병이었다. 벌판과 시가지 싸움에서는 자신을 가진 북괴군이었다.
그러기에 넓은 벌판으로 형성된 거창을 사수한다는 것은 연대 병력 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4연대 병력은 1천1백50명에 불과했다. 또 장비도 많이 모자랐다.
뷰챔프 대령은 일단 시내에서 맞서 보다가 제3대대 3백여 명에게 후군 방위를 맡기고, 양곡부근으로 후퇴할 계획을 정하고 있었다. 거창 시내는 미군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괴뢰군 정예부대가 낮에 벌써 거창에 밀어닥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국군 복장으로 들어왔다. 그러므로 유엔군은 그들이 괴뢰군들인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국군복장을 한 괴뢰군들은 유엔군과 함께 섞였다.
거창읍 교회 앞 강둑 아래에 유엔군이 엎드렸다. 강 건너 쪽에는 유엔군과 괴뢰군이 섞여 엎드렸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8월의 하늘에는 달이 없고, 별싸락만이 희뿌연 빛을 피우고 있었다.
북괴군 제4사단 소속의 보병들이 다람쥐처럼 소리 없이 날쌘 동작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교회당 안에는 기도하기 위하여 몇 분이 들어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와 장익전 여전도사, 그리고 박또임 집사와 신용진씨 그 외 몇 분이 기도하며 밤을 지냈다.
주 목사는 어둠을 뚫고 부지런히 교회로 향하였다. 그러나 집에서 불과 얼마를 못 가서 통금 사이렌이 울리는 것이었다. 그냥 가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싶어 옆길로 빠져 죽전 대밭으로 들어갔다. 그곳 대밭 속에서 주 목사는 밤새도록 기도했다.
한편 교회당에 있는 성도들은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하고 조용조용 기도하고 있었다. 밖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조용히 기도하였다.
너무나 조용한 밤이었다.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새벽 4시가 되었다. 교회당 종 칠 시간이다. 사찰이 밖으로 나갔다.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종을 치기 위하여서이다.
교회에서 종을 치는 것은 반드시 신자들이 모이라는 뜻에서만 종을 치는 것은 아니다.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살아있다는 의미에서 종을 친다. 한 사람이라도 신자가 앉아 있다는 의미에서 종을 친다.
전시에는 더욱 그러하다. 교회당에 종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땅은 비극이다. 교회당에 종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땅은 고독하고, 그 땅은 사지인 것이다.
사찰은 종 줄을 잡았다. 그리고 힘있게 당겼다.
종소리가 고용한 새벽 공기를 깨고 요란하게 울렸다.
그 때였다. 종소리를 기다리고나 있은 듯.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사격이 가해진 것이었다.
총소리가 거창 창공을 덮었다. 탄환이 불줄기를 이으며 공간에 수 백개의 포물선을 그렸다.
탄환은 교회당 유리창을 뚫고 벽에 박히기도 하였다.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총성은 계속되었다. 한참 조용해졌다가 다시 접전이 되곤 하였다.
오후 3시 경에야 총성이 멎었다. 거창 서쪽의 제3대대가 후퇴하므로써 제34연대는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29일 저녁 무렵, 제34연대는 결국 거창을 후퇴하여 산제리의 삼거리로 들어서게 되었다. 미군은 후퇴하면서 도로와 교량을 파괴하였다. 북괴군이 급히 좇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영환 전도사는 오후 3시 경에 교회당 밖으로 나왔다. 강둑 아래에 미군의 시체가 3구나 넘어져 있었다. 성경 찬송을 겨드랑이에 끼고 걸어가는데,
?어디 가는 거야??
?인민군 한 명이 길을 막았다.
?교회당에 기도하려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전시에 기도가 다 뭐야??
?밖에 나돌아다니지 마시오.?
예외로 말이 부드러웠다.
남 전도사가 주 목사 사택으로 가니, 가족들과 주 목사가 염려하고 있었다.
?무사했군요.?
주 목사의 착 가라앉은 부드러운 음성이 흘렀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주 목사 댁에서 예배를 드렸다.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주 목사 사택을 임시 예배처로 삼았다. 거창읍 교회 교인들은 400여명 정도였는데, 백명 정도가 피난 나가고 나머지는 가정에 있었다.
주 목사는 이들을 가까운 지역별로 모일 수 있도록 지시를 했다. 여섯 군데를 모이는 장소로 정하였다. 지역이 가까운 가정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 곳은 주 목사가 예배인도를 맡고, 세 곳은 남영환 전도사가 맡도록 하였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4백명 가까운 교인이 거창읍 교회에 모였지만, 교역자 생활비는 형편이 없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인들은 교역자 생활비에는 후하지 못한가 보다.
교역자는 의례히 고생을 해야 하고, 생활이 어려워야 하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다. 교역자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실제 대접하는 일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교인들은 교역자를 천사로 대하였다. 또한 천사가 되기를 원했다. 밥을 먹지 않고, 옷을 입지 않는 천사 말이다. 병이 날 염려나, 아무리 뛰어도 피곤하지 않는 그런 천사 말이다.
자녀를 낳지 않고 자녀 교육이나 가정 문제에 하등 구애를 받지 않는 그런 천사가 되기를 교인들은 원한다. 그러나 실은 교역자가 천사가 아닌 것이다. 교역자도 사람인 것이다.
한 끼만 밥을 먹지 않아도 힘이 빠지고, 병에도 약한 사람이다. 교역자의 옷은 천사의 옷이 아니고, 교인들이 입고 있는 그런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옷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뽑아 세우신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은 강해도 인간은 약할 수 있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교역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위하는 일이다.
더욱이 전쟁통에 교역자의 생활비가 전달될 리가 없다. 평화로운 때에도 호강의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환란 때엔 제일 먼저 고난의 덕을 보는 것이 교역자이다.
교회 회계가 피난 나가면서 맥추 연보한 헌금 5천원과 피보리 4가마를 맡긴 것이 있었다.
?어떻게 될는지 모르니 생활에 쓰십시오.?
주 목사는 이것을 나누었다. 자신이 피보리 1가마니, 남전도사가 1가마니, 추 교경 전도사에게 1가마 보내고, 장익진 여전도사에게 1가마 주었다.
돈도 나누었다. 추교경 전도사는 지산 교회에 파송한 전도인이었다.
앞으로 피보리 1가마로 생활하여 나가야 했다.
매일처럼 보리죽을 끓였다. 보리죽이지만 끊일 수 있는 것만 다행이었다. 보리죽을 먹고도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 심방하며, 가정 집회를 인도하였다.
4. 폭격 속의 십자가 자세
주 목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교인들의 집을 돌보기 위해 시내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냥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무더운 한낮이었다.
희뿌연 하늘엔 솜구름이 피어오르고 하늘에서 내려 쪼이는 따가운 태양열과 땅에서 솟는 지열이 사람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훌훌 벗고 물에 뛰어 들고 싶은 한낮의 거리를 주 목사는 흰 두루막을 입고 모자를 쓰고 오른쪽 겨드랑이에 책가방을 끼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공습 경보가 울렸다. 금시 거리에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방공호 속에 숨은 것이다. 그러나 주 목사는 태연히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쌩-?
바람을 째는 소리가 하늘에서 났다.
비행기가 낮게 지나가며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주 목사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가방을 발 앞에 놓고 두 팔을 십자가형으로 펴고 서 있었다. 숨을 줄을 모르고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이다. 얼마 후 비행기는 사라지고 공습 경보 해제 싸이렌이 울렸다.
주 목사는 팔을 내리고 가방을 다시 주워 겨드랑이에 끼고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괴뢰군이 있었다.
세 명의 괴뢰군이 주 목사 앞에 나섰다.
?야, 이 늙은이야. 이제 막 무얼 했어!?
귀가 쨍 하도록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얼 했단 말이오??
?공습 경보가 울리고 피하라고 소리쳤는데도 그냥 서 있었지 않았오!?
?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잔소리 말아! 양고자들에게 무슨 신호를 보냈지??
?신호를 보내다니요??
?스파이 노릇 한 거야! 비행기에 암호를 보냈지? 이 늙은이야!?소리를 빽 지르면서 괴뢰군은 따발총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란 걸 알렸을 뿐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를 보여 준 것이요.?
괴뢰군들은 주 목사를 끌고 내무서까지 갔다. 두루막을 벗기고 꿇어 앉혔다. 그리곤 얼마간 야단을 치더니,
?앞으로는 조심하시오.?
그리곤 보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주 목사는 수요일 저녁 예배 준비를 하였다. 사택에 교인들이 모여왔다. 아무런 일도 없는 듯 차분히 예배를 인도하였다.
5. 권총 앞에 태연히
유엔군이 후퇴한 거창 시내는 완전히 인민군 세상이었다.
무지한 인민군들은 난폭한 정치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폭격기로 인해 파괴된 교량을 놓겠다고 작업을 시작했다. 주로 밤에 일을 했다. 물론 그들은 감독이고 노역자는 시민이었다.
어둠살이 내리면 작업은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거창에서 삼십리 떨어진 곳에 웅양교회 배수윤 전도사가 찾아와 그 날 밤을 함께 지냈다. 배 전도사는 그때의 주 목사의 따뜻한 사랑과 권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주 목사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말씀은 생명력 있는 말씀이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죽어 주셨는데, 우리도 주님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날 오후였다. 가정 예배를 보고 있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고 나를 친히 거느리네
나를 항상 거느리고 나를 친히 거느리네?
괴뢰군 장교가 찬송 소리를 듣고 들어 왔다.
?이게 웬 소리요, 엉??
권총을 맨 붉은 가죽띠가 유독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뭐 하는거요??
괴뢰군 장교는 얼굴을 찡그리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주 목사는 마루에서 내려섰다. 마루가 몹시 높았다. 신을 신고 괴뢰군 장교 앞에 나선 주 목사는,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하고 그를 맞아 들였다.
마루에서는 여전히 사모님과 어린 자녀들과 배수윤 전도사가 계속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지금 무엇하고 있는거요??
괴뢰군 장교는 다구쳐 물었다.
?우리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 목사의 음성은 침착하였다. 괴뢰군 자욕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까만 눈을 똑바로 쳐들더니 오른 손으로 권총을 잡아 뽑았다.
권총을 뽑아 든 괴뢰군 장교는 총구를 주 목사 가슴에 밀어대면서,
?지금이 어느 땐 줄 알고 야소를 믿고 있소? 동무는 정신 나간거 아니요??하고 윽박질렀다.
?맑은 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예배하는 일입니다.?
너무나 태연한 주 목사의 얼굴엔 권총의 위협보다 더 무서운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루에서는 여전히 찬송소리가 계속되었다.
괴뢰군 장교는 자신이 이상한 세계에 있는 듯, 어리둥절하여 흥분된 자기를 수습하였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이상한 노인에게 권총을 쏜들 탄환이 들어 갈 것 같지 않는 위엄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공포에 질린 것은 상대방이 아니고 권총을 쥐고 있는 자신이었다. 괴뢰군의 얼굴이 무섭도록 새파래졌다.
배수윤 전도사는 뜰에서 되어진 광경을 바라보면서 찬송을 계속 불렀다.
?올라가십시다. 같이 예배를 드립시다.?
주 목사는 괴뢰군 장교의 가련한 영혼을 진정 사랑하는 뜻에서 권면을 하였다. 장교는 스르르 권총을 총집에 집어넣었다.
마루에서는 찬송이 끝나고 주기도문을 암송함으로 예배를 끝내고 있었다.
?동무들은 야소 믿는 일 분수에 넘치오. 예배하는 것 합당하지 않아 권면하러 왔는데 결국 동무들은 동무들 할 일 다하고 말았으니 이래서 되갔소??
불안한 표정을 지우면서 말을 뱉았다.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장교의 눈이 번뜩 빛을 내었다.
?나 이 앞에 다리 놓는 일 맡은 감독이오. 일 하러 나오시오!?
장교는 돌아섰다.
?종종 오십시오.?
주 목사는 나가는 괴뢰군 장교를 향하여 말을 던졌다. 교량 작업에 나오라고 온갖 성화를 부렸지만 주 목사는 결코 나가지 않았다.
주 목사는 교인들 심방하는 일에 더욱 분주하였고 기도하고 성 경읽는 일에만 주력하였다.
6. 거절한 기독교 연맹조직
하루는 내무서에서 인민군들이 주 목사와 남영환 전도사를 호출하였다. 주 목사는 남 전도사와 함께 내무서로 갔다.
책상 앞에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인민군 장교가 주 목사와 남 전도사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오서 오십시오. 반갑수다, 목사 동무!?
주 목사와 남 전도사는 장교의 오만에 찬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 오늘 오시라구 한 것은 긴요한 의논이 있어서 그랬수다.?
그는 말의 서두를 장황히 장식하려 했는데 잘 안 되는지 초조의 빛을 얼굴에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 연맹을 조직해 달라 이 말입니다.?
주 목사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서 인민군 장교의 눈을 피하여 옆 창문을 쳐다보았다.
?우리 북조선 인민공화국에서는 기독교 교직자들이 다 기독교 연맹에 가입되었수다. 이 거창에서도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정치를 따라야 하므로 반드시 이 일에 협조해야 하겠수다.?
주 목사는 어떤 문제가 부닥치면 침묵하는 버릇이 있다. 주 목사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에다 두었던 시선을 장교의 얼굴쪽으로 돌렸다.
?말을 해 보우.?
장교는 눈을 부라리고 책상을 꽝 쳤다.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하겠오, 아니하겠오, 말을 하시오!?
주 목사는 간단히 대답했다.
?못합니다.?
?뭐라고? 썅, 이 영감쟁이 맛 좀 봐야 알간??
장교는 눈에 살의를 띄우고 역정을 냈다.
?할 수 없으니까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썅, 그냥 죽음을 맛 보관??
전류를 느끼게 하는 음성이었다.
장교의 얼굴엔 살기가 돌았다.
남영환 전도사가 장교 앞에 나섰다.
?여보세요, 선생님. 우리는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협조를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협조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협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못한다는 것 아닙니까??
남 전도사의 말은 또박또박 철성음으로 내무서 안을 흘렀다.
?그래, 이승만에게는 협조하면서 우리에게는 협조할 수 없다 이말이디??
?내 말을 자세히 들어 보십시오.?
남 전도사는 침착성을 잃지 않고, 흥분되는 어조를 조절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여기 계신 이 어른은 일제 시대에도 신사참배 반대를 하시다가 투옥되어 수없이 고문을 당하시고 역경을 겪으셨습니다. 평양 형무소에서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수난을 당하시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위해 제헌국회의원 출마를 거창 시민들이 권유했지만 굳이 거절하셨습니다. 못견 딜 정도로 무투표 당선으로 출마를 요구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거창 시민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종교는 정치와 구별됩니다. 목사나 전도사가 정치에 가담하라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연맹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자유 아닙니까?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의 종교 자유입니다.?
인민군 장교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남 전도사의 말이 끝나자 장교는 부드러운 말로,
?아 그렇습니까? 일제 압박 하에 수고가 많았습니다.?
하고 말을 씹는 것이었다.
?무슨 교파입니까??
?장로교입니다.?
?그렇습니까? 실은 나도 함경도 있을 때 장로교에 한 삼 년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그 교회 권사였지요.?
좀 전의 살벌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미풍이 일 듯 내무서 안은 시원하였다.
?사실은 목사가 정치운동에 가담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사님, 한 가지만 청을 들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장교의 얼굴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무엇 말입니까??
주 목사는 궁금한 듯 물었다.
?교인들의 명단을 하나 적어 주시라우요.?
?안됩니다.?
그러나 주 목사의 거절에 장교는 전처럼 역정을 내지 않고 조용히,
?왜 안 된다는 거죠??
하고 질문하였다.
?우리 손으로 어떻게 교인들의 명단을 적어 준단 말입니까? 교역자가 교인을 파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신자라 하지만 내일 신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전일에 한 삼 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신자가 아니시지요. 그와 같습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수긍이 가는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장교는 주 목사를 한 번 더 흘깃 바라보더니,
?가 보시오.?
하고 정중히 말했다.
주 목사는 나오면서 한 마디 던졌다.
?전일에 예수님을 믿으셨다니 계속 믿으십시오.?
그 이후, 인민군들은 주 목사와 남 전도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교회에 대하여 별반 간섭을 하지 않았다.
7. 모든 것 주께 맡기고
1950년 9월 1일. 더위는 아직 대지 위에 남아 머물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열기를 안고 쏟아졌다.
주 목사는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로 들어섰다. 지방 순회를 위해서였다. 안의를 둘러서 개평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고 저녁 노을이 타고 있었다.
개평 교회 사택은 이미 인민군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무넹 윗 동리로 올라갔다. 정팔현 장로 집으로 들어갔다. 추교경, 이종대 전도사도 그곳에 와 있었다.
정 장로는 의사 일을 보았기에 생활이 촌에서는 좀 나은 편에 속했다. 인사를 나누고 교인들의 동태에 대해서 들었다.
당시엔 삼군(함양?거창?합천)에서 목사는 주 목사 한 분뿐이었기에 주 목사의 일은 벅찼다. 당회장 시찰장 모두를 겸하고 있었다.
식사 후, 교인들과 개평 교회 제직들이 모여 왔다.
주 목사는 앉은자리에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마태복음 24장을 봉독하고 그 내용을 설교를 시작하였다.
?환란 때 신앙을 대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주 목사는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말씀을 전했다.
?주님의 재림 전은 환란의 때입니다. 그때는 불법이 성한 때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도처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환란 때를 신앙으로 잘 이겨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 국가는 결국 망합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독일이 그러했습니다. 일본이 망했습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등잔 불빛을 보고 날벌레들이 모여들었다. 모기만이 잔인한 소리로 신경을 날카롭게 일으켰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졸거나 딴 생각으로 얼굴을 옆으로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주 목사를 향하여 앉은 성도들의 동공은 초롱초롱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 한 명이 열심히 주 목사의 설교를 필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불빛 속에서 눈을 아래로 깔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주 목사는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여전히 힘있게 설교를 계속하였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난 짐승이 권세를 가지고 성도를 해합니다. 이 짐승은 나라를 얻고 백성을 다스립니다. 이 짐승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심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짐승은 자기를 경배하게 합니다. 자기를 경배하지 아니하면 죽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은 결코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합니다. 죽음을 당할찌언정 짐승에게 경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주 목사의 눈빛은 등잔 불빛에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지금은 어둠의 시대입니다. 짐승이 권세를 얻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신앙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만일 신앙을 바로 가지지 못하고 넘어지면 망합니다. 멸망합니다. 기도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환란 때에 끝까지 참고 견디며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으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주 목사의 얼굴가엔 백전노장의 여유가 역력히 피어나고 있었다.
예배가 끝났다. 교인들과 일부 제직자들은 다 가고, 의사 정 장로와 이종대, 추교경 전도사와 주 목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칠은 구두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험상궂은 사나이 몇이 불쑥 들어닥쳤다.
?동무들, 같이 좀 가 줘야 하겠소!?
느닷없이 말을 뱉고 어깨를 내미는 사람은 정씨 청년이었다. 정씨는 좌익계 치안대원으로 같은 대원 몇과 정 장로댁에 나타난 것이다.
이 정씨 청년은 허순길 박사(현 고려신학대학 교수)의 국민학교 한 해 선배 격인 토박이 개평 사람이었다. 정씨는 그 형제들이 모두 좌익계 인물들로 당시 개평에서는 악명 높은 자였다.
그의 동생은 소년단 단장으로 못된 짓을 많이 저질렀다. 자기 집 사랑채를 소년단 본부로 삼고 개평 지방 소년들을 강제로 대원을 만들어 좌익계 일을 도우도록 하였다.
당시 허순길 박사도 그들에게 욕을 보았다. 소년단에 가입하지 않으려 할 때, 정신적 육체적 탄압을 가해 온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사이요, 사상 문제가 없었을 때는 함께 놀던 골목 친구들이었지만, 동란이 일어나자 완전히 딴 사람으로 행사했다.
그의 부친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었다. 그러니 그의 형제들은 원한 관계도 있고 해서 직독히 굴었다.
정씨는 주 목사를 향하여,
?당신이 목사요??
하고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내가 목사입니다.?
?같이 갑시다.?
주 목사는 일어나 신을 신었다.
?당신들도 같이 갑시다.?
정 장로와 두 전도사도 따라 일어났다. 정씨는 함께 온 치안대원들이 그들을 둘러섰다.
정씨가 앞장서고, 주 목사가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정 장로와 두 전도사가 서고 치안대원들이 뒤에 걸어갔다. 무더운 밤이었다.
정 장로댁에서 내무서 까지는 오릿길이었다. 오릿길을 그들은 걸어서 갔다. 내무서에 들어선 정씨는 기세가 등등하였다.
?목사 동무! 무슨 설교했오??
?성경에 있는 내용을 설교했지요.?
?짐승 설교 했다며??
?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했습니다.?
?재미없는 줄 아시오!?지나치게 분개하는 어조로 말을 뱉았다. 정 장로와 추, 이 전도사도 개별적으로 심문했다.
?욕을 좀 볼 줄 알앗!?
찌릉 찌릉 소리치더니 정씨는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휭 나가 버렸다. 내무서 안이 조용하였다. 심한 공포가 이 장로와 추, 이 두 전도사와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자가 나가면서 던진 말은 기분 나쁜 말이었다.
?욕을 좀 볼 줄 알앗!?
욕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때는 법이 없었다. 총이 법이고, 치안대원 그들의 행동이 정의였다. 그러한 때이므로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목숨이 가차없이 짓뭉개지는 공산주의 치하였다.
이 날 주 목사 일행이 연행되어 온 것은 정 장로 댁에서 예배드릴 때,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설교를 필기하던 그 젊은 여인의 고발로 인해서였다.
그 젊은 여인은 내무서 비밀직원이었다. 그 여인은 주 목사의 설교를 시종 다 필기하여 치안대에 보고했던 것이다.
내무서에 구금된 그들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불의한 세대가 오면 언제고 이런 변을 당하기 마련인 것이 기독신자이다.
주 목사의 얼굴엔 하등의 공포나 초조의 빛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주 목사는 정 장로와 두 전도사를 바라보았다. 주 목사는 두려움에 쌓인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편이십니다. 우리가 순교 할 때면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것이고, 아직 때가 멀었으면 또 살아나게 됩니다. 염려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감사할 것뿐이지요.?
주 목사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용기가 솟아 난 것이다. 주 목사는 음석을 낮추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되지 않더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인가??
주 목사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때가 왔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비스듬이 누었다. 주 목사는 눕는가 싶더니 이내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는 절박한 순간에 잠이 오다니 도저히 속인들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 가자!?
하는 소리만 들리면 끝나는 것이다.
죽는 것이었다. 세상과 관계없는 영인이 되는 것이었다. 육체는 나무 둥치처럼 길 가에 뒹굴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시간을 기다리는 초조한 그 순간에 잠을 자다니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태평스럽게 잠자는 사람이 있다. 주남선 목사 바로 그 분이었다. 정 장로와 추, 이 두 전도사는 깊이 잠든 주 목사가 한없이 부러웠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시던 주 목사는 과연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있었다.
초조와 긴장 속에 시간은 흘렀다.
?삑-?
하고 신경질을 짓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 장로와 두 전도사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 목사는 여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일어나시오!?
치안대원의 날카로운 금속성 음성이 울렸다. 주 목사가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그 때였다.
?아니 목사님 아니십니까??
뒷 쪽에서 긴 가죽 장화를 신은 사나이가 주 목사 앞에 나섰다.
?목사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그는 치안대 대장이었다.
?누구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주 목사는 치안대장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러실 것입니다. 전 전에 개평 교회에서 목사님께 학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주 목사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감돌았다.
?목사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까지 오시게 했는지????? 죄송합니다. 돌아가십시오. 제가 있는 한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고맙소!?
주 목사와 정 장로와 두 전도사는 치안대장의 호의로 정 장로 댁으로 다시 돌아왔다. 주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것인가?
다음 날 아침, 교인들이 늦게야 소문을 듣고 인사하러 정 장로 댁으로 왔다.
점심 때였다. 할머니 집사 한 분이 점심밥을 해왔다. 쌀밥이었다. 이 비상시에 쌀밥을 지어 세 그릇이나 담고, 칼치를 구워왔다. 주 목사는 놀란 눈으로 밥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리밥도 못 먹는데, 쌀밥이 웬 일이십니까?"
할머니 집사는 굽은 허리를 가볍게 펴면서,
?우리 목사님 대접하려고 정성드려 차린 것 아닌교. 목사님 대접 안하고 누굴 대접해야 하는교? 쌀밥 먹을 가치도 없는 인간들은 쌀밥에 고기반찬에 양 볼이 미여지도록 먹는데, 진작 쌀밥을 먹어야 할 어른들은 고생을 하고 굶주리니 이놈의 세상 빨리 끝장이 났으면 좋겠다.?
할머니 집사는 이마에 송알송알 솟아오른 땀을 주먹손으로 문질렀다. 주 목사의 입에서 찬송이 나왔다.
?구주여 해변서 떡덩이를 떼시어
인민을 먹였으니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그같이 나누어 주옵소서.?
8. 형님이 별세하던 날
9월 2일, 토요일이었다. 주 목사는 개평에서 주일을 본 교회에서 지키기 위해 거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읍으로 들어서는 살목의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길이 너무 비탈져 미끄러웠다.
더위가 전신을 감고 있었다. 발에는 먼지가 뿌옇다. 땀이 이마를 타고 언저리를 돌다가 눈가장자리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손수건을 내어 땀을 닦으며 길을 걸었다.
그 때, 발목이 삐걱 하면서 굽혀져 주 목사는 비탈길에 그냥 주저 않고 말았다. 발목에서 통증이 왔다. 다시 일어나 걸으려고 했으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한다.
발목을 삔 것이다. 비탈길에 앉은 채 얼마를 있었다. 전신에 비지땀이 솟는다. 거창 시내 하늘을 몇 차례 미 전투기가 날고 폭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는 이날 교인들 집을 심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주 목사 사택을 들렀다. 주 목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백씨 주남재씨가 마루에 앉아 사과를 먹고 있었다.
주남재씨도 애국지사이다. 그는 초대 거창 군수를 지낸 바 있어 거창에서는 상당한 덕망을 얻고 있었다. 유독 주 목사는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 목사는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급한 일이 없으면 꼭꼭 형님 댁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갔다.
죽전 사람들은 주 목사의 이 예의 있고 사랑이 깊은 모습을 보고,
?참, 세상에 형제간 치고 저렇게 사이좋은 형제간은 처음 보았어!?
모두들 칭송이 자자했다.
?주 목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라구. 형을 어떻게 부모 섬기듯 할 수 있냐 말이야. 만사에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구???????
남영환 전도사가 들어가니 마루에 안장 사과를 먹고 있던 주 남재씨가 반색을 하면서,
?남 조사, 더운데 수고가 많소, 자 사과나 한 개 먹어요.?
사과를 한 알 내밀었다. 남 전도사는 반갑게 사과를 받아 깎았다. 막 사과를 입에 넣어 한 입 깨물려는 순간,
?우르르 꽝!?
하고 폭탄이 떨어진 것이었다. 폭탄은 사택 사랑채 위에 떨어졌다. 폭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폭격이 끝나고 조용해지자 남 전도사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주남재씨가 보이지 않았다. 방공호 속으로 함께 들어간 줄 알았는데 들어가지 않았는가 보았다.
밖으로 나와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혹시나 해서 집으로 찾아가 봤지만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인이 어디 갔을까??
모두들 걱정을 했다. 길가나 둑 쪽에 시체가 많이 누어 있었다. 주로 인민군들의 시체였다.
주 목사는 이날 어두워질 무렵에 겨우 발을 절면서 들어왔다. 얼마간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치고 피로에 쌓인 그의 육신을 휴식하기 위하여 발목을 다치게 하신 것인지 모른다.
주 목사는 백씨의 행방불명 소식을 듣고 무척 염려하였다.
삼일 후였다. 죽전 삼거리 모퉁이 집에서 주남재씨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폭격에 쓸어 진 집을 일으키는데 시체가 깔려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주 목사는 형님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다. 자신도 발목을 다치지 않고 줄곧 왔더라면 어떤 변을 당하였을는지 몰랐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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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선지자 | 2015.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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