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3:31
● 7. 경남 여성경학교 시절
성경 강의
그는 미순회 여전도사로 재직하면서 경남 여성경학교 교사에 임명됐다. 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선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시초는 평양신학교에서 부터이다. 신학생 장홍련이 김일선(평북노회장.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의 기념식수를 벌목한 데서부터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 교수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선교사들 간에도 의견의 일치가 없었고 연전학교는 오히려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최덕지 전도사는 1936년 4월부터 진주에서 경남 각 지역으로부터 모여든 여성경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 2, 3년 간은 성경 말씀 자체에 대한 강의에 열중하였다.
여학생들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계시는 3가지가 있다. 첫째가 양심계시다. 양심은 사람마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양심에 따라 살 때 실수가 적다. 둘째는 자연계시다. 곧 천연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천지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셋째는 성문계시다. 곧 성경말씀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 성경으로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심을 안다.
또 성경은 인류의 죄와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사탄의 유혹으로 배신하고 타락하고 만다. 하나님의 의는 곧 예수님이시다. 범죄한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여기 믿음이 필요하다. 곧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것에 대한 예언이요 준비다. 신약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 오심과 그의 가르치심과 생활의 기록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다. 곧 팔레스틴(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복음이 지리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석권한 역사다. 또한 당시 지식의 그리시아를 정복하고 힘의 로마를 복음이 정복한 역사다. 편지서들은 기독교의 해석이요 설명이다. 중심 인물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 바울이다. 그 중에 바울이 대표적이다. 그에 있어 기독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사실이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종교를 능히 구원하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이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이 있다. 이는 인류의 구원과 회복, 모든 완성을 다룬다.
이와 같이 성경은 구약이 39권이요 신약이 27권, 모두 66권이다. 기록한 연대로 보아서 약 2천년에 미친다. 또 기록한 사람은 44인이란 다수다. 이 모든 것이 한 성경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 감동에 의해서 기록된 사실이다. 인간의 기록이 아니라 저자는 한 기자인 것이다. 지금도 성경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참조 사람이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 베드로후서 1장 12절) 또한 성경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승리의 힘을 가지고 있다. 성경처럼 많은 핍박과 공격을 받은 책은 없다. 많은 사람이 이를 없애버리려고 했다. 많은 나라에서 불태우고 보는 자를 죽이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없어지지 아니했다. 그 사람을 정복하고 그 나라를 지배했다.
위자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은 불행한 사람이 많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롭고 압제당하고 소외당하고 멸시당하고 범죄한 자들이 방황하고 슬퍼하고 있다. 이들에게 성경은 새로운 소망과 용기와 기쁨과 위자를 주고 있다. 감동과 변화케 하는 힘이 있다. 사람 잡아먹는 미개인이 성경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해적국이 성경으로 문명국가가 된 영국을 보라. 실망의 나라 덴마크가 성경과 믿음으로 이상국이 된 것을 보라. 로마를 보라. 미국을 보라. 스위스를 보라. 오늘도 어제 탕아가 오늘 성자가 된다. 지금도 신약과 구약만 먹으면 산다. 이 약을 먹으면 참 지혜자가 된다. 성경은 신앙의 표준이 된다. 어떤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믿느냐 그 표준이 성경이다. 인간과 우주의 원리가 있다. 여기 신관, 인생관, 죄악관, 그리스도관, 종말관까지 다 밝혀주고 있다.
성경은 실행의 표준이 된다. 우리가 실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적 원리 뿐 아니라 교육․정치․경제․사회․법률까지 향상케 할 원리와 표준이다. 칼빈 신학은 4대주권을 말씀했다.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권, 생활에 있어서 성경의 주권, 성경해석에 있어서 양심의 주권이다. 최덕지 교수는 자기가 이렇게 믿고, 기초를 성령과 신앙에서 철저히 가르쳤다. 당시 성경학교는 일년 일차 4월 개학하여 5월까지 2개월 계속하였다.
우상에 대한 계명을 증거하고
1938년 9월 10일 총회적으로 범죄한 후에 성경학교는 양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학문을 중심한 수업이 반대 투쟁장으로 변모했다. 신사참배, 이는 하나님 앞에 제일 큰 죄됨을 인식시켰다. 십계명 1, 2계명을 위반함을 말했다. 성경의 우상에 대한 계명을 증거해 주었다.
1.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장 4절) 2. 타신에게 경배치 말라(출 20장 5절) 3. 우상숭배는 멸한다(신 4장 26절) 4. 우상을 네게 두지 말라(신 5장 7절) 5. 자손에게까지 책벌하신다(신 4장 25절) 6.우상제물 먹지말라(행 15장 29절) 7. 우상숭배에 불참할 것(고후 6장 16절)
우리는 하나님만 공경하자. 계명을 지키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나같은 죄인을 택하신 하나님 사랑. 나의 죄를 위해서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지신 예수의 사랑. 어려울 때 나를 도와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성령의 사랑.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 14장 21절). 나와 여러분은 예수 위해 목숨을 바칩시다. 나의 목숨보다도 부모보다 세상부귀 영화보다도 주를 사랑합시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킵시다. 증거하는 교수도 비장했고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밤에는 뒷산으로 올랐다. 비봉산이었다. 기도하기 위해서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했다. 알지 못하고 신사에 굴복한 자는 회개의 기도를 했다. 범죄한 한국교회를 위해 울었다. 우상국 일본이 진노받을 것에 마음이 아팠다. 끝까지 승리하도록 힘달라고 매달렸다. 신앙만능 기도만능을 체험시키고자 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기도할 때 침략한 불레셋을 하나님은 물리쳤다.
아랍군대가 엘리사와 그 제자를 포위했을 때 기도로써 불병거와 불말로 지켜 주었다. 영호사반의 기도 때 모압․암몬․세일을 물리쳐 주었다.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앗수르 군대를 정복시켜 주었다. 박관준 장로는 믿음과 기도로 일본갈 때 도항증 없이 가서 일본의회에 진정서를 투척하지 않았는가. 그럼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어떤 조직망을 가지고 어떻게 활동했는가 잠간 살펴보기로 하자. 최덕지 전도사는 개인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이 조직과 함께 협력하여 보조를 같이했고, 자기 신앙과 사상을 굴하지 않고 더 굳세게 철저하게 지키며 싸웠다. 신사 불참배운동 분포지역 및 지도자는 이러하다.
(1)평안북도 주도 인물 이기선 목사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자기가 목회하던 교회(의주 북하동교회 8년)를 사면하고 1939년 4월 평양 채정민 목사와 더불어 신사참배 결사반대 동지를 규합토록 했다. 동지를 확보하면 전국적으로 신사불참배 교회를 설립할 것을 다짐했다. 다음 김의창 목사와 함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일대를 순방하며 동지를 얻었다. 신의주에는 김화준 전도사 이광록 집사 김창인, 영변에는 박관준 장로(다음 평양으로 나옴), 박천에는 안이숙 선생(후에 평양으로 옮김), 강계에는 고흥봉 목사, 서정환 전도사, 장두희 집사, 선천에는 김인희 전도사, 김의홍 전도사, 박신근 집사, 정주에는 김영악 등이 활동하였다.
1940년 월 중순경 이기선, 김영악, 박의흠, 계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창인, 김화준, 심일철 등이 모여 다음과 같이 기본방안을 결정했다.
1. 신사참배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 것. 2. 신사불참배 운동을 일으켜서 현실교회를 약체화 내지 해체시킬 것. 3. 신사불참배 신도를 규합하여 가정예배를 가지며 그것을 육성하여 교회를 신설할 것.
(2)평안남도 평양을 중심 : 주기철 목사 주도
신사불참배 운동의 본거지는 바로 평양 산정현교회요, 주동 인물이 주기철 목사이다. 주 목사는 1938년 2월에 1차검속, 1938년 8월에 2차검속, 1939년 8월 20일에 3차검속, 1940년 5월 4차검속 당하고 1944년 4월 25일 순교를 당하였다.
(3)경상남도 :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부산에는 한상동 목사, 조수옥 전도사, 손명복 전도사, 배학수 선생 등이고 마산에는 최덕지 전도사, 태매시 선교사, 염애나 전도사 등.
거창에는 주남선 목사, 함안에는 이현속 전도사, 남해에는 최상림 목사(옥중 순교), 진주에는 최덕지 전도사, 통영에는 최덕지 전도사, 김영숙 전도사, 고성에는 최덕지 전도사, 전라남도에는 손양원 목사, 만주에는 한부선 선교사, 봉천에는 박의흠 전도사(순교), 안동에는 김영악 전도사, 최용삼, 계성수, 김성심, 무순에는 박연지 집사, 할빈에는 김윤섭 집사.
(4)경남에서 최덕지 전도사의 활동사항
1939년 12월에 밀양 출신 이인재 전도사가(당시 평양에 있었음) 평북 평남 신사불참배운동 현황을 자기가 시무하던 밀양교회에 임시로 시무하는 한상동 목사에게 보고하였다. 두 사람은 마산의 최덕지 전도사를 만나 경남 신사불참배 운동 방법을 의논키로 하였다.
신앙 동지 한상동 목사가 찾아와
1940년 1월 1일(일본인의 신정을 택한 것) 마산 제비산 소재 태매시 선교사 방에 있는 최덕지 전도사를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가 방문하여 다음 사항을 합의결정했다.
1. 신사참배한 현 노회는 해체토록 한다.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는다. 3.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산노회를 조직한다. 4.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원조를 도모한다. 5. 신사불참배 그룹 예배를 드리고 동지획득에 주력한다.
최덕지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에게 신앙 동지로서 협력하고 따라서 자신은 경남 일원의 부인, 동지 획득에 노력할 것을 승낙하였다.
1940년 3월 초순에 한상동 목사가 최덕지 전도사를 방문했을 때 각각 그간 활동을 피차 보고했다. 이때 최전도사는 일금 50원을 원조하였다.
1940년 3월 5일엔 경남부인 전도회가 부산 항서교회에서 회집됐다. 새 임원을 선출한 것이었다. 만일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자가 선출되면 경남부인 전도회는 죽고만다. 신사불참배자가 임원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이 싸움을 위해 최덕지 전도사는 다음과 같은 전략활동을 폈다. 동년 3월 1일 진영 거주 염애나 전도사를 방문했다. 한상동 목사님도 오게 하셨다. 경남노회 산하인 부인전도회 임원선거가 중대함을 설명했다. 각 회원을 설득키로 했다. 진주, 부산 방면은 한상동, 김해 방면은 염애나, 마산 방면은 최덕지. 이렇게 분담했다.
최덕지 전도사는 3월 3일 마산 문창교회 여신도를 모았다. 박겸순, 박덕실, 이삼순, 김두식, 김영숙, 이계진, 태매시 등 중심되는 집사, 전도사, 선교사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자기의 신앙사상을 피력했다. 3월 5일 여전도회가 모이면 애국적 행사라고 동방요배를 할 것이다. 신사참배는 물론 못하거니와 동방요배나 궁성요배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많은 지도자(목사, 선교사)가 신사참배는 못할 것이라고 반대하면서도 동방요배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멀리 계시는 산 임금에게 절하는 것이니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 전도사는 일본의 국체는 산 임금이나 사람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라비도가미 즉 신이라 했다. 사람이라도 신이라고 하여 섬기면 분명히 성경에 위배된다. 계명을 범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국기 배례도 성경위반이다.
절한다는 것은 산 인격을 의미함이다. 고로 존경의 대상이나 종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순국령의 묵도도 못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복 빌수 없다. 이것도 다 성경위반이다. 다음 경남여전도회 임원선거는 전원 불참배자로 뽑아야 함을 역설했다. 마귀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보여주자고 호소했다. 여성도들의 가슴은 뛰었다. 얼굴에는 결의가 엿보인다. 드디어 3월 5일이 왔다. 애국행사도 예배 전에는 못했다. 임원선거가 시작되었다. 최덕지 씨가 회장에 당선되었다. 총무 기타 간부 모두 불참배자가 당선되었다. 하나님은 진리의 편이시다.
기도하기를 더욱 열심히 하니
최덕지 전도사는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그의 강철같은 믿음이나 중인을 앞서는 영지는 기도에서 얻어진 것이다. 한번은 동지 김영숙, 박경애, 태매시 등과 비밀기도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 한상동 목사, 이인재 전도사로 방문했다. 평양 산정현교회를 중심한 운동의보고를 이 전도사가 했다.
그리고 우리도 일치단결하여 조선의 파수병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다. 그때 평양측이나 한상동 목사 등의 신앙노선은 궁성요배는 죄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해방 이후에는 긍정했다). 이는 민족적 감정으로 고집하면 순수한 신앙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최전도사는 다시 한번 궁성요배를 토의하고 반대할 것을 권면했다. 궁성요배 반대에 대한 그 이유와 설명은 전술한 바와 같다.
여기(평양 지방법원 예심종결서) 31명중 14호(최덕지) 6항에는 한상동 목사에게 죄된다고 토의하고 이로써 천황폐화의 존엄을 모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책 말이 전재함).
최덕지 전도사는 한 목사를 존중히 여겼으며 궁성요배도 바로 깨닫도록 기도하였다. 그뿐 아니라 계속 적극적으로 한상동 목사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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