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3:33
● 12. 6․25와 신앙활동
6․25사변은 이 민족에게 처참한 상처를 안겨준 전란이다. 이로 인해 이 민족이 입은 인명의 손실이나 물질의 피해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이요, 무신론과 유신론의 싸움이다. 따라서 유물론과 유심론의 싸움이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동시 이북에서는 기독교가 새로운 적을 만나 수난을 당했다. 신사참배로 인한 수난 성도가 다시 공산세계에서 순교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월남하여 신앙의 자유세계에서 주 섬기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일제 때 신앙지조를 판 자는 공산치하나 미군정하에서도 아첨 치부한 자가 많다.
6․25. 이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회개하도록 일깨우기 위한 민족적 시련인 줄 안다. 이로서 신앙의 진위가 나타났다. 교회를 지키고 순교한 자도 있고 환난과 재난으로 참혹하게 된 사람도 많았다.
최덕지 목사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승리하였다.
당시 최덕지 목사는 서울 충무로 교회에 머물고 있었다. 2층은 교회, 아래층은 박 선생이 주택으로 사용했다. 교회 건너편이 괴뢰군 내무서였다. 매일같이 드리는 예배를 괴뢰군은 못마땅해 했다.
주일날 아침 예배시간이었다. 총을 가진 괴뢰군 3명이 2층 교회로 올라왔다. 교회당으로 신을 신고 들어오는 것이다. 목사는 급히 나가서 두 팔을 벌리고 막았다.
이 곳은 예배당입니다. 예배시간입니다. 방해하면 벌 받습니다.
그들은 웃으며, 그러면 왜 주일에 미국 비행기가 날아오는가. 기도하면 못 오게 할 수 있습니다. 최 목사는 확신 있게 대답했다.
이렇게 최 목사와 괴뢰군이 다투는 동안에도 교회 안에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괴뢰군은 총부리를 치켜들고 찬송 부르는 아가씨 목에 대고, 지금 찬송 부르면 쏜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 아가씨의 찬송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괴뢰군이 쏘지 못한 것이다. 그 아가씨는 지금 서울 대방동교회에 시무하는 김복명 조사의 따님 백금자이며 그 후 결혼하여 해운대교회 이정덕 집사의 부인이 되었다. 한참동안 무거운 시간이 흐른 후 괴뢰군은 최 목사에게, 그럼 미국 비행기 다음 주일 못 오게 하시오. 만일 비행기 한 대라도 오면 그 때는 여러분 모조리 총살입니다하고 물러갔다.
최덕지 목사는 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을 가지 못하게 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옛날 여호수아의 기도는 태양도 머물게 했습니다.
공산주의와 신앙의 대결
공산주의가 이기느냐, 우리 믿음이 승리하느냐 대결전이었다. 최 목사는 금식하고 기도했다. 괴뢰군은 내무서에 가 보고했다.
다음 일요일에는 총알 좀 준비해야겠군했다. 신을 믿지 않는 그들은 매일 오는 비행기가 왜 다음 일요일엔 안 온단 말이냐하고 예수쟁이 죽일 구실이 생겨 기뻐했던 것이다. 드디어 죽느냐 사느냐, 최 목사의 승리냐 북괴 내무서의 승리냐를 판가름하는 결단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성도들 중에도 최 목사님이 그런 약속은 왜 하실까, 옥중에서 지키신 하나님의 종, 아마 지켜 주실 거야 반신반의 조바심이 가슴을 울렁이고 있었다. 새벽부터 한시간 한시간 시간이 흘렀다.
오전 예배 드리고 오후 예배 드리고 저녁 예배 드리기까지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밤이 다 가도록 종시 나타나지 아니했다. 내부서 괴뢰군들도. 하나님은 있는가 봐했다. 왠걸 이제 비행기는 안 날아 오는가 했더니 월요일에는 전보다 배나 많이 날아와 서울을 폭격했다. 이 폭격에 견디지 못하고 괴뢰군은 후퇴했다. 교회 주변에 불을 질렀다. 다시 교회는 위기를 당했다. 최 목사가 또 간절히 기도했더니 교회를 향해 다가오는 불길이 멈추어 다른 방향으로 타 들어갔다. 재건교회는 공산주의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이다.
괴뢰군이 남한 대부분을 침투했으나 마산과 부산만은 짓밟지 못한 것은 재건교회 본부가 있었던 까닭이요, 주의 사자가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1951년에 최덕지 선생님은 최덕지 목사님으로 세움을 받았다.(목사님 칭호에 앞서 보모 때는 보모, 신학생 때는 학생, 전도사, 때로는 최덕지 전도사 등을 사용했다. 다소 혼돈이 있음을 양해하기 바람)
1951년 9월에는 예수재건교회 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고, 강상은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강 목사는 평양신학교 졸, 옥중 성도, 재건교회 총회장이 됨)
중앙위원회에서 남한지방회로
이 땅에 신앙재건 진리운동이 일어난 후 회개 자숙 기간으로 3년이 지났다. 예수교 재건 중앙위원회를 두어 본격적인 신앙재건의 회개운동을 하여 오던 바 경남 일원의 국한된 운동이 그 후 전남, 경기, 경북, 강원 등지에 재건교회가 세워지게 되자 드디어 1952년 5월 13일 중앙위원회 만 4년, 재건활동 시작 후로 따지면 만 7년 만에 부산시 수정동 예수교 재건부산교회당에서 전국 각지 50여 교회대표 70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예수교재건중앙위원회는 발전적 해산을 하게 되고 역사적인 예수교재건교회 남한지방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이로서 질서 있는 유법적 행동통일을 본 한 단체가 조직된 것이다. 이때 명칭을 남한지방회라 한 것은 이북 재건교회와 앞으로 완전한 총회를 형성하기까지 잠정적 명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때 최덕지 목사는 강상은 목사에 의해 안수를 받고 명예 목사에서 장립목사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때의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 두고자 한다. 최덕지 선생을 최 목사로 허락한 것은 1951년 4월 3일 예수교재건교회 중앙위원회 제6회 정기총회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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