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23:33
● 13. 한국최초의 여자 목사 장립
그 당시 총회장인 강상은 목사가 여자에게 목사 주는 것이 아니라, 최덕지 선생에게 준다. 승리의 종이니 앞으로 50년 후 1백년 후에 이런 인물이 나면 몰라도…하면서 그때 목사의 명칭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중앙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재건교회 남한지방회가 되고 보니 다시 안수문제를 거론하게 되었다. 이에 강 목사는 최덕지 목사 같은 이가 기독교 역사상 또는 성경인물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 줄 수 있다고 말할 때 최덕지 목사 자신이 기립하여 이렇게 분명히 말했다.
오늘 이 총회 석상에서 나 일개인 최덕지에게 목사 안수한다면 안 받겠습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성직을 줄 수 있는 것이 성경적으로 진리냐 아니냐, 줄 수 있느냐 줄수 없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발언하여 그때 여러 사람들의 찬반토론 끝에 결론이 여성들도 성경적으로 줄 수 있다고 내려졌기 때문에 총회와 성경을 순종하여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이 결정과 여자 목사 장립이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또한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대서특필할 사건이요, 공헌인 줄 안다.
그리하여 우리 헌법을 만들 필요가 있어 그 자리에서 헌법기초 위원으로 강상은, 최덕지, 김영숙, 주상수, 최종규, 박성규, 최일규 제씨가 위촉된 것이다. 총회에서 위촉받은 헌법위원은 그 조직에 있어서 위원장에 강상은 목사, 서기에 최종규 전도사를 선정했다.
헌법위원 모임을 부산은 최덕지 목사댁에서 마산은 정학진 집사댁에서 가졌다. 주로 범죄하기 전 장로교 헌법(1934년 수정함)을 모법으로 기준하고 신조, 성경요리문답, 예배모범, 권징조례를 그대로 채택하고 다만 정치 부문에만 수정키로 방침을 정하고 무려 5, 6차나 모여 연구수정 하였다.
주로 수정된 부분은 제직회를 교직회로 당회를 장회로 고쳤으며, 정치 제5장 치리장로 제3조 장로의 자격 27세 이상을 30세 이상으로, 입교 5년 이후 무흠 1년으로 수정되고 남자 중하는 남자를 삭제하고 남녀 다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동시에 정치 제6장 집사 제1조 집사의 직은 무흠한 남자교인으로 되어 있는데 남자를 삭제, 남녀 모두에게 집사 안수 임직하도록 했다.
제4조 여집사 (1)항 중 임직함에 안수식은 없나니라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 안수식을 삭제하였다.
이상을 수정하고 먼저 헌법수정위원회에서 수정안에 대하여 투표한 결과 7인중 반대표가 1표요, 찬성표가 6표로 결정된 것이다. 그 반대표를 던진 이가 최일구 목사이다.(당시 전도사)
사상이야 어찌할 수 없는 것. 자기 소신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6대 1이었으니 우리 재건교회는 여성직을 확인하고 조직된 것을 알아야 한다.
헌법통과와 여권확립
1954년 3월 9일 예수재건교회 남한지방회 제3회 정기총회가 부산교회에서 회집되었다. 특히 11일에는 전기 헌법기초위원들이 장기간 연구한 것을 헌법기초위원회 서기인 최종규 전도사가 헌법토안을 본회에 상정, 보고함에 축조통과 채용키로 가결하였다. 이리하여 전기 정치 남녀성직에 종전에는 남자에 한한 것을 여성직(여집사, 여장로, 여목사)을 허락한 것이다.
은혜속에 첫 성찬식 베풀고
이 헌법의 통과로서 재건교회에서는 성직자 남녀 동등권이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재건교회 남한지방회 총회 산하 동부지방부(부산지방)회장 최덕지 목사, 서부지방회(마산지방)회장 강상은 목사로 감독 지도하게 되었다. 더욱이 3월 11일 밤은 해방 이후의 자숙도 마치고 6․25사변도 마무리 지어졌고 헌법도 제정되었음을 감사하기 위하여 감격에 넘치는 첫 성찬식이 강상은 목사 집례로 거행되었다.
1956년 1월 27일은 최덕지 목사가 창설하고 가르친 성경학교 제1회 졸업식날이었다. 영광에 빛난 졸업생은 구태옥(남), 김혜수(여, 최 목사 따님), 박현숙(여, 당시 여전도사), 황보 일생(여, 집사) 등이었다.
이때 최덕지 교장의 훈사는 감명적이었다. 여러분은 재건성경학교 제1회 졸업생이라는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연구나 배움엔 졸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학교에서 배운 방법으로 한 평생 학도로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각오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은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배울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을 생명삼아 바른 생활이 필요합니다. 즉 성경말씀대로 사는 삶이 바로 배운 목적입니다. 우리 학교가 좋은 학교, 빛나느 학교가 되느냐, 또 발전하고 번영하는 학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바로 여러분의 활동과 생활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성삼위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시기를 빕니다.
부산교회에서 거행된 졸업식장에서 많은 방청객 그리고 졸업생, 졸업생을 보내는 재학생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편 1956년 2월 23일은 재건교회에서 최초로 장로 장립을 가진 날로서 의의가 깊은 날이다. 이날 예수교 재건창원교회 염재로 조사가 장로 장립을 받았다. 이를 위시하여 부산교회에서는 박열순, 박부준 두 집사의 장로 장립이 있었다.
새벽예배 출석을 못하고
1956년 3월에 접어들면서 최덕지 목사는 차츰 몸이 불편하게 되었다.
초순부터 새벽예배 출석을 못하고 자리에 눕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56년 3월 22일에 당시 예수교 재건 부산교회 최덕지 목사 밑에 시무하던 최종규 목사를 자택으로 불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훈과 해명과 유언을 남겼다.
첫째 자신의 병에 대한 말이 있었다. 배를 다쳤던 일을 말하고는 병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 치료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니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지금까지 기도로서 다 치료되었다고 말하였다.
많은 아픔을 참는 것이 보기 민망하여 병원에 가 보기를 권면했으나, 내가 만일 기도로서 병이 치료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가실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하였다.
둘째는 금식 등에 대한 해명이다. 옥중에서의 금식은 주로 진리투쟁과 신앙파수를 위한 것이나 해방 후 계속 금식에 대한 그 하나의 동기는 자기 시동생 되는 김정실씨(전 국회위원 당시 단국대학장)가 자기를 만나러 왔다가 성일을 범하고 상경한 것이 마음 아파 그 시동생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교회와 한민족의 죄악을 사함 받기 위해서라고 했다.
몸이 너무나 쇠잔하였으나 금식은 항상 계속되어(다음 그의 신앙사상과 생활에서 금식을 다시 밝히겠음) 해금을 권했더니, 이제 얼마 안 가 영원히 해금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영원한 나라로의 부르심을 의미한 것이다.
셋째는 나에게 준 유언이었다. 굳게 서기를 원했다. 모든 사람이 다 물러가도 부산교회를 떠나지 말고 재건제단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동안 나에게 여러 가지 난관과 시련 속에 오늘까지 재건교회를 지키게 된 것은 이 유언에 힘입고 영향받은 바 컷음을 이 기회에 밝혀둔다.
넷째는 성경학교를 자신의 후계로 계속 맡아줄 것과 목사장립은 신학과를 모두 이수하여 장립받으라고 권면해 주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계승해 많은 재건인물 양성을 부탁하였다.
다섯째는 재건진리를 서울에 널리 외치고 국회와 대통령에게 증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러한 유언을 남길 때 옆에는 부산교회 조복희 전도사와 마산교회 김야모 집사(출옥성도. 현 장로)가 지켜 보았다.
1956년 3월 26일에는 재건교회 제7회 남한지방회 정기총회가 부산교회에서 회집되고 아울러 재건교회 창설 1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 식장에도 최 목사는 출석하지 못했다. 그가 늘 소원하던 부산전역에 재건전도지 5만매가 살포되었고 전도대원에 의한 전도강연이 실시되었다. 이 보고를 듣고 기뻐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4월이 되자 대지엔 봄의 생기가 넘치고 만물이 소생하여 푸름이 짙어갔으나 최 목사의 병세는 더하여 점점 쇠잔해 갔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위문하는 성도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고 따라서 최 목사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기 위해 금식기도를 하는 성도들의 수효가 날로 늘어갔다.
최 목사 측근에서 봉사하던 종들은 황보 일생 집사, 최혜경 씨(현 창원교회 집사), 박덕봉 집사(작고), 이말선 집사, 박정순 집사(현 부산교회 권사) 조춘희 집사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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