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동 목사와 고려신학교

    

심 군 식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무, 전기작자)

  선지자선교회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가 그 일을 다 끝내었을 때 세상을 떠나게 된다. 문제는 그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 일이 큰 일일 수도 있고, 형편없이 작은 일일 수도 있다. 그 일의 완성을 위하여 소질이라는 것이 따르고 취미라는 것이 붙는다. 이 소질과 취미가 그 일을 완성시켜 놓는다.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이 학교가 자리를 잡고 목적한 인재양성의 기틀이 마련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씨를 뿌리고 열매까지 따먹고 떠나간 것이다. 보통의 경우는 씨앗만 뿌리는 사람이 있고, 꽃을 피우는 사람이 있고, 열매는 다른 사람이 따먹는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의 경우는 이 모두를 다 한 사람이다. 특이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신학교는 1946920일 개교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가 개교되기 까지는 많은 준비의 과정이 있었다.

 

. 한상동 목사의 출생과 성장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모세가 바로 앞에 선 날부터 시작하려 하면 안된다. 훨씬 더 앞의 부분을 서술하여야 한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를 것이나 그렇게 하면 이야기가 지루할 것 같아 간단히 예언적인 면만을 따 올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모세의 출생과 성장에서부터 시작하여야 올바른 설명이 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운동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세상에 보내시고 어려운 난국에 그를 애굽 궁전에서 성장하게 하셨다. 그리고 많은 훈련을 시키시고 연단의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 출애굽운동의 선봉자로 세우신 것이다.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성장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그 역사적 고찰을 세밀히 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면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그것은 한상동 목사의 출생과 성장과정이 고려신학교 태동과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상동 목사는 1901730일 경남 김해군 명지면 명지에서 한치명씨와 배봉애씨 사이의 넷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슬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여섯 살 때인 19063월 오촌당숙인 한금출씨의 양자로 보내졌다. 다대포에서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양부는 당시로서는 부자였기 때문에 생활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일곱 살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하였고, 3년의 기초를 닦은 후 1910년 신식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다대실용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국인 교사 김성권의 애국애족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대실용학교 6년 과정을 졸업한 한상동은 1916220일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의 동래고보는 명문학교였다. 그곳에서 공부하면서도 그것이 부족하여 일본 유학의 길을 찾았다. 부모의 반대로 몰래 현해탄을 건넜지만 집요한 양부(養父)의 추적으로 발견되어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19183월 한상동은 그의 모교인 다대실용학교 교원이 되었다. 이 때부터 교사로서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생활의 안정을 찾은 그는 1921531일 김차숙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실용학교 교사로서의 나날을 보내었다. 그에게 변화의 시기가 찾아온 것은 1924년 봄이었다.

 

다대포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박창근 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면서 그의 신앙심은 날로 뜨거워지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25년에 세례를 받고 교회생활에 전념하였다. 1926년 한상동은 한씨종친회에서 파양선고를 받고, 19279월 진주 광림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복음전도의 불길이 타올라 1년 후인 19289월 광림학교 교사직을 사면하고 경성 피어선 고등성경학교로 갔다.

 

한상동은 19293월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에서 개척전도를 시작하였다. 경남 여전도회 연합회 후원으로 개척전도를 시작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31년 고성에서 삼랑진으로 나와서 또 다시 개척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홍수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겼다가 그해 11월 경남 하동군 진교에 가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진교교회 개척을 위하여 산기도중에 큰 은혜를 받고 성령충만한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큰 성공을 본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항상동은 신학공부를 결심하고 1933년 봄 평양으로 떠났다. 1936년 졸업을 하고 4월에 부산 초량교회 임시교역자로 부름을 받아 일하다가,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1937년 마산 문창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문창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1938년 봄 경남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 신사참배 반대운동

 

한상동 목사는 문창교회에서 은혜로운 목회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신사참배강요로 더 이상 문창교회를 이끌고 나갈 수 없었다. 1938910일 제 27회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이므로 할 수 있다고 결의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는 교회에서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한상동 목사는 19393월 마산경찰서에 계속 불려 다녔고, 일제의 압력에 의하여 문창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무임목사로 부산에 도착한 한상동 목사는 이때부터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19398월 수영해수욕장에서 비밀리에 이인재, 윤용술, 조수옥, 김현수 등과 만나 본격적인 신사참배반대 요강을 만들고 일을 시작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부산과 마산, 진주, 거창 , 각 지역을 돌면서 뜻을 같이 하는 목사전도사평신도들을 만나서 격려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910월 경 밀양 마산교회에 시무하면서 본격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과 북쪽의 신사참배 반대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고 연락을 취해주었다.

 

194073일 한상동 목사는 경찰서에 체포되어 경남도경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1년 동안 유치장 감방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1711일 평양으로 이송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갔다가 그날 밤에 주기철 목사와 극적인 상봉을 하고 다음 날 대동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여기에서 1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41825일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날 신사참배 반대로 유치장에 구금된 모든 주의 종들이 다 같이 평양 형무소로 옮겨진 것이다.

 

 

. 옥중에서의 신학교 설립계획

 

19389월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할 수 있다고 가결함으로써 평양장로교 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신사참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문을 열 수 없다고 폐교선언을 한 것이다. 그 해 10월 조선신학교 (현재 한신학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과 진보적 성향을 나타낸 신학교였다.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별로 심각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1943년 제 32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해산이 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다. 1945720일에는 장로교는 없어지고 모든 교파가 하나로 통일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되었다. 밖에서는 기독교 단체가 이렇게 이름을 바꾸며 급진적으로 속화되어 가고 있을 때 투옥된 주의 신실한 종들은 사선을 넘고 있었다.

 

1944421일 주기철 목사는 순교하였다. 나흘 후인 425예수천당으로 잘 알려진 최봉석 목사가 순교하였으며, 이 무렵 한상동 목사는 폐결핵이 재발되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었다.

 

한상동 목사는 주님, 나의 영혼을 거두소서.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나이다.”는 최후의 기도를 올렸다. 추위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던 그날 밤에 상동아!”하는 영음이 들렸다. 그가 형무소에 들어온 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수인번호 ‘287으로 통했던 것이다. 언제나 간수들은 그를 부를 때 수인번호로만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상동아!”하는 이름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는 가깝게 들렸고 몹시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그 때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는 살아서 나갈 것이니라. 네가 하여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 다.”

 

한상동 목사는, 그 순간 온몸에 새로운 힘이 솟았고, 구미가 당겼고 형무소의 주먹밥을 맛있게 먹었다. 생기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가 살아서 출옥하게 된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 나가서 할 일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그 일은 수양관을 세우는 일과 신학교의 설립이었다.

 

수양관을 세우는 것은 일제하에서 신앙의 지조를 버린 교역자들의 회개운동과 영적인 재무장을 위한 기도처를 삼고자 함이었다. 신학교의 설립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생명으로 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요람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평양신학교가 일제하의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신학교가 등장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음을 그는 밖에 있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한상동 목사는 조선식학교에 한국교회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학의 정통과 보수를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신학교 문제를 놓고 옥중에서부터 기도하게 되었으며,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하였다.

 

1945815일 일제는 연합군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항복하였다. 사실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를 숭상하던 그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항복한 것이었다. 해방이 되던 그 해 817일 한상동 목사는 이기선, 주남선 목사 등과 함께 출옥하게 되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2개월간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집회가 계속되었다.

 

이 무렵 주기철 목사의 순교 이후 산정현 교회는 후임 교역자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출옥한 교역자 중에서 택하여야 했다. 결국 산정현 교회 당회는 한상동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청빙을 받은 한상동 목사는 거절하지 않고 응하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신학교를 평양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 평양에서의 신학교 개교 시도

 

1945919, 아직 산정현 교회에서 집회가 계속되고 있을 무렵에 박형룡 박사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만주에서 도착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박형룡 박사를 만나자 신학교에 대한 열기가 치솟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일제치하에서도 만주 봉천에서 신학교를 운영해 오고 있었다. 박형룡 박사는 봉천신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고, 한상동 목사는 박박사에게 평양에서 신학교를 다시 시작 합시다라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박박사는 해방을 맞아 봉천신학교가 활기를 띠고 있는데 두고 온다는 것이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였지만 한목사는 집요하게 간청하였다. 그날은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산정현교회의 위임 목사로 자리를 정하였다. 평양에는 평양신학교 폐교이후 개혁주의 노선의 신학교가 없었다. 한목사는 신학교 문제를 계속 생각하고 설립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만주 봉천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농촌에 김응도 전도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있었다. 김전도사는 어느 날 한목사에게 부흥집회 인도를 요청해 왔다. 한목사는 이를 허락하였다. 한목사는 그 교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한 후 봉천에 있는 박형룡 박사를 찾아가 만났다. 다시 신학교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박박사는 그가 평양으로 가면 봉천신학교는 문을 닫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를 얻기 위하여 하나를 잃어야 하는 미련 때문에 쉽게 응하지 못하였다.

평양에 큰 신학교 하면 되지 않습니까? 만주는 우리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 어떤 변동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지금까지 지켜온 봉천신학교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쉽사리 한목사의 제의를 수락하지 않았다. 한목사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신학자가 있어야 신학교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문제였다.

 

19462월 중순경 조선 공산당 북조선 본국 당원들이 한목사를 찾아와 31절 기념행사 주역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한목사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한목사는 공산주의를 싫어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정치에 가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하여 한목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경계의 인물이 되었고 제거대상이 되었다. 한목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시달리면서 고통을 당하였다. 그 무렵 모친상의 비보를 듣게 되었고 아내와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1주일 후 돌아갈 것을 약속하였지만 38선 경계로 인해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 교려신학교의 개교

 

한상동 목사가 모친 별세 소식을 듣고 부산 신평 본가로 찾아갔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얼마 후의 일이었다. 그는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모친 산소를 돌아보고 왔다. 부산에 머물면서 한국교회의 형편을 알아보았다. 말이 아니었다. 신사참배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회개 없이 교권을 쥐려고 하였다.

 

신학교는 조선식학교 뿐이었고 보수 신학의 요람이 될 신학교가 없었다. 한목사는 평양에 신학교 설립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다시 월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평양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마침 초량교회에서 한상동 목사의 월북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알고 청빙하였다. 한목사는 신학교를 갓 졸업한 후 얼마간 전도사로 시무하였던 경력도 있고 해서 교회의 중요인물들을 잘 아는 형편이었다. 그는 초량교회 청빙을 수락하였다. 생활의 근거를 부산에서 잡게 되었다.

 

신학교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을 때 놀라운 환상을 보았다. 어느 새벽 기도하는 중에 그의 눈앞에 한반도의 지도가 나타나고 송도에서 한 줄기 빛이 발하여 전국을 비추다가 세계로 뻗어가는 것이었다. 이 환상은 옛날 박관중 장로도 보았고, 주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여사도 본 동일한 것이었다. 한목사는 부산에 신학교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마음에 받아들였다.

 

뒷날 총회에서 꾸준히 수도권에 신학교를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한목사의 음성적 반대 때문이었던 것으로 필자는 풀이하고 있다. 그는 부산 송도에 나타난 한 줄기 빛의 환상을 상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주에 있던 박윤선 목사가 815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 머물다가 서울로 왔다. 공산주의자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어서 남하하였다. 그것이 19463월의 일이었다. 한목사는 박목사보다 앞서 남하하였고, 박목사는 적산 집한 칸을 얻어서 머물고 있었다.

 

한상동 목사는 19464월 어느 날 상경하여 박윤선 목사를 만나 신학교 계획을 이야기 하였다. 박목사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어서 한목사는 520일 신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신학자 박윤선 목사 였다. 623일 진해 하사관 훈련 수양관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하기 신학강좌로 개설하기로 하고 광고지를 돌렸다.

서울에서는 612일 제 32회 총회가 열렸다. 38선 차단으로 국토가 양단되어 전국적인 총회가 되지 못하고 이남 만의 남부 총회가 개최되었다. 서울 승동 교회에서 모임을 가졌다. 총회장에 배은희 목사가 당선되고 중요 결의로는 제 27회 총회가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그것이 범죄였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출옥 성도들이 제시한 자숙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신학교를 총회가 받아들여 직영하기로 가결하였다.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총회가 선택한 것이었다. 총회의 소식을 들은 한목사는 더욱 신학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1946623일 하기 신학강좌는 60여명의 청강생들이 모여들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남선 목사는 경남 노회 노회장으로 사전에 임원회를 소집하여 경남노회가 후원하기로 결의 한 바 있다. 7월 말경에 경남 노회는 제 47회 임시노회를 소집하였다. 이 노회에서 한 목사로부터 신학교 설립취지를 듣고, 노회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결의 하였다.

 

1947920일 부산 일신여학교 (현재 금성중고교) 강당에서 신학교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신학교 명칭은 <고려신학교>였다. 학교의 명칭을 고려신학교로 정한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 째는 지역명을 붙이면 결국 지역신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라명을 따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는데 나라이름은 조선신학교가 먼저 차지하였기 때문에 옛 국명을 딸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분리된 국명이고,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국명이<고려>라고 할 수 있으므로 <고려신학교>라고 정하였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영어표기가 우리나라를 코리아라고 하였으므로 <고려>라고 하였다. 고려는 우리나라의 영어표기이기 때문에 신학교 명칭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고려신학교는 보수적인 명칭임에 틀림없었다. 한목사의 사회로 개교식이 엄숙히 진행되었는데, 설교는 김치선 박사가 맡았다. 이날 발표된 신학교의 교수진과 학제는, 설립자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교수 박윤선 목사, 이상근 성생, 한상동 목사, 한명동 목사였으며, 학제는 본과 3, 예과 2, 별과 3, 여교역자 양성과 3년이었다. 11월에는 한부선 선교사가 내한하여 고려신학교 교수로 강의를 맡게 되어JT. 고려신학교는 이렇게 개교하여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갔다.

 

 

. 박형룡 박사의 등장

 

한상동 목사는 박형룡 박사를 초빙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당시로서는 보수신학계 학자로는 박형룡 박사와 방균선 목사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박박사가 고려신학교에 오면 천군만마의 군사를 얻은 듯 어떤 신학교가 생겨난다 해도 한국에서는 고려신학교를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94681일 남영환 전도사를 만주로 보내게 되었다. 남영환 전도사는 만주 봉천에서 신학을 하다가 63일 봉천을 출발하여 71일 진해 신학강좌에 참석하였다. 남영환을 만난 한상동 목사는 박박사 생각이 나서 다시 만주로 가서 모셔오라고 하였다. 남영환 전도사는 서울로 올라가 백천까지 갔다가 미군에게 발각되어 되돌아오게 되었다. 개성에서 다시 산을 넘어 월북하려다가 경비병에 의하여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끈질기게 월북을 시도하다가 호열자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19475월 다시 송상석 목사가 만주로 가게 되었다. ‘영구행 배를 타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만주로 가서 4개월 만에 박형룡 박사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까지 온 박박사는 부산에 올 것을 거절하므로 한목사가 상경하여 모tu 왔다. 19741014일 부산중앙교회당에서 교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역사적인 취임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박박사는 겨우 7개월이 못되어 19485월 총회가 직영하는 큰 신학교로 가겠다고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서울로 떠나고 말았다. 이 일로 한목사는 몹시 마음이 상하여 병을 얻게 되었고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를 모시고 온 것이 잘못이었다. 그가 만주에 그대로 있었다면 고려신학교는 더욱 빛을 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유일의 보수신학교로 그 자리를 굳힐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합동을 하고, 환원을 해야 하는 악순환을 거듭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고려신학교를 더욱 성장시키고 한국 굴지의 신학교를 만들겠다는 웅지는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므로 깨어지고 말았다.

 

 

. 박윤선 목사의 활동기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를 제 2대 교장으로 세웠다. 한목사는 박목사에게 고려신학교를 맡겼다. 박목사는 신앙과 학문을 겸비한 귀한 주의 종이었다. 고려신학교는 뜨거운 신학교로 자리를 잡아갔다. 경건회 시간마다 회개와 통회의 자리가 되었다. 박목사의 설교는 충실한 내용에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있었다. 경견회 시간은 은혜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 충만한 은혜는 총회 산하의 모든 교회로 파급되었고 교회의 성장과 전도의 불길은 뜨겁게 번져갔다.

 

고려신학교 졸업식 날은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소속된 교회는 교역자는 물론이가 일반 평신도들까지 학교에 모여들었다. 고려신학교 졸업식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 행사날을 방불케 하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다.

 

1949419일 제 35회 총회는 박형룡 박사가 시작한 서울의 장로회신학교를 직영 신학교로 가결하였다. 조선신학교는 김재준 교수의 강의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학생들이 계속적인 탄원이 제기되므로 총회는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문제의 수습에 나섰다.

 

고려신학교는 총회가 계속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노회에서 추천을 거절하였다.

 

1950421일 고려신학교 문제로 경남노회가 사분오열되고 총대문제로 제 36회 총회가 진행되지 못하고 정회되었다. 1951525일 총회가 속개되었지만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조선신학교><장로회신학교>도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가 직영하는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1952429일 제 37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과 그 관계자들은 총회와 관계없음을 선언하므로 그해 911일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은 따로 나와서 제 1회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고신교단이다. 고신교단은 결국 고려신학교 중심으로 생겨난 교단이다. 한목사가 끝까지 고려신학교를 사수한 것은 고려신학교를 살리는 일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195448일 국제기독교 연합회(I.C.C.C) 초청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대회에서 이약신 목사, 한상동 목사, 박윤선 목사, 박손혁 목사 등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 때에 한목사와 박목사는 훼이스신학교로부터 명예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38일 부산 서구 암남동 34번지 대지 14천평 위에 594평의 고려신학교 교사가 신축되었다. 이 건물은 주한 미군사 원조단 (A.F.A.K) 의 물자원조와 고신교단 전국교회의 연보로 마련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보따리 신학교의 별명을 씻고 고려신학교는 안정된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이다.

 

그해 419일 제 4회 총노회가 부산남교회당에서 모여 고려신학교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4년제 예과 대학을 세우기로 하였다. 인문계 대학으로 교명은 <칼빈대학>으로 명명하였다. 초대학장은 한명동 목사가 맡았다. 부산시 사하구 감천동 영국군이 사용하던 건물을 임대 계약하여 칼빈대학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고려신학교는 대학까지 갖춘 신학교가 되었다. 교수진도 강화되었다. 총무에 안용준 목사, 교수에 김철헌, 김진호, 장인석, 조용석, 김도환 등이었고, 서무에는 정홍석 목사였다.

 

1960년 여름 고려신학교에 큰 시험이 닥쳐왔다. 그것은 박윤선 목사가 주일에 스푸너(Spooner)선교사 전송을 나갔다가 시간이 지연되어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노회 문제가 되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총회에서 거명되었고 총회 후 이사회에서 다시 거론되어 교장직 사임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박목사는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고려신학교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신학교의 위기

 

박윤선 목사는 고려신하교만 떠난 것이 아니고 교단도 벗어나게 되었다. 이런 형편에 교단 지도자들은 기존 총회가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갈라진 것을 기회로 보수를 주장하는 승동측과 합동을 추진하였다. 19601213일 승동교회당에서 합동총회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619월에는 홍반식 오병세 목사가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에서 교수하게 되었다.

 

그해 1228일 합동신학교 이사회는 고려신학교를 서울 총회신학교와 단일화 하기로 결의 하였다. 서울에서 연합 교수회를 갖게 하고 교장은 교수회장으로 하고 교수 중에서 윤번제로 교수회장을 맡도록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고려신학교는 없어지고 부산에 총회신학교 분교가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새해부터는 부산 분교에서는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게 되고 졸업반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재학생들은 점진적으로 서울로 가도록 하였다. 교수들도 모두 서울로 옮기도록 조치하였다.

 

당시의 교수회장은 박형룡 박사, 부산 분교장은 박손혁 목사가 맡고 안용준, 오병준 교수는 새해부터 서울에서 교수하고 이상근, 홍반식 목사는 부산에서 교수하게 되었다. 한상동 목사는 서울과 부산에서 교수하도록 하였다.

 

196210월 경 한상동 목사는 총회의 움직임을 보고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1017일 한목사는 전 고려신학교 이사들을 소집하였다. 아무래도 고려신학교를 살려야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사들은 한목사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한목사는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였다. 그 당시 부산 분교에서 공부하던 학생은 65 명이었는데, 그중에서 53명이 고려신학교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수학하던 졸업반 학생 중에서 5명이 부산에 내려와 고려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고 1218일 부산에서 졸업식을 가졌다.

 

1963225일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는 고려신학교에서 함께 교수하기로 하였다. 고려신학교가 복교됨에 따라 각 노회들이 고신으로 환원하기 시작하였다. 8월에 부산노회를 선두로 하여 전라노회, 경북노회, 경기노회, 경남노회가 환원하게 되었다. 917일 부산 남교회당에서 제 12회 환원총회가 모이게 되었다.

 

고려신학교는 합동으로 인하여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고 교단도 환원되었다. 고신 교단은 고려신학교와 함께 시작되었고, 고려신학교와 함께 존재하며 발전되어 갔다.

 

 

. 사립 신학교로서의 한계성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를 총회에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쥐고 있었다. 그 이유는 혹시나 그가 손을 떼면 신학교가 좌경화 될까봐서 지나치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회가 합동되었다가 다시 환원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고심하였다. 이제는 고신계 사람들로서 총회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립으로 학교를 이끌어 가야할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한목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1964922일 제 14회 총회시에 고려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하도록 내어 놓았고 총회는 이를 받아들여 신학교의 직영을 가결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려신학교는 설립된 지 18년 만에 총회 직영 신학교가 되었다.

 

196596일 총회 유지재단이 구성되어 인가를 얻고 1967327일 한목사는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96일 고려신학교는 교육당국으로부터 대학 동등학력을 인정을 받는 학교가 되었다. 19701230일 고려신학교는 고려신학대학의 인가를 받았고, 197132일 한상동 목사가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였다.

 

 

. 고려신학대학 신축

 

1972317일 한목사는 화란 캄펜신학교 초청으로 화란을 방문하여 신학대학 건축기금을 모금하였다. 귀국하여 국내 총회 산하 교회들을 순방하며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1974812일 부산 송도에 22천만원의 예산으로 지하 1, 지상 4층의 신학대학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1975815일 준공되어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날 한목사는 감격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평양 형무소에서 그의 생이 끝날 뻔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셨고 살아서 출옥하였다. 감옥에서 신학교를 세울 계획을 한 대로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세웠다.

 

고려신학교는 신학대학이 되고 대학원 과정을 두게 되어 실력 있고 영력 있는 지도자를 양성 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건물도 짓고 안심하고 인재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을 끝 낸지 15개월 후인 197616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할 일은 이 땅에 고려신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왔고, 그 일이 완성되어 열매를 맺게 되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목회에도 성공을 한 분이다. 부흥사로도 크게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려신학교를 세워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앞으로도 양성 할 수 있게 한 일이다.

 

 

. 한국교회에 끼친 고려신학교의 영향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나간 목회자들과 고려신학교 예과과정인 칼빈대학과 고신대학을 거쳐 간 수많은 인재들이 한국교회와 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고신교단이 아닌 타 교단에 가서 활동하는 분들도 있지만 고신의 정신과 신학 노선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개혁주의 교회 중에서 큰 교회를 맡아 목회하다가 은퇴한 분들도 있고, 신학교에서 교수로 명성을 나타낸 분들도 많다. 고려신학교가 있었기에 오늘의 그들이 있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에 보수신학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진보와 자유주의가 기를 펴지 못하는 원인은 고려신학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신학교는 그만큼 한국 교회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한목사는 학문적으로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거나 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분은 아니었지만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 체험과 천부적인 인간애를 바탕으로 학생들 앞에 섰다. 그가 목회학을 가르칠 때 학적인 이론을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회경험담과 몸에서 풍겨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학생들을 감동시켰다.

 

, 주님이시여!”하고 기도를 시작할 때 학생들은 영계의 깊은 계곡으로 잠식되어 가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기도의 깊은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그 순간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에게서 감동을 받는 학생들은 주님과의 관계가 두터워 지고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목회의 재미를 맛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목회학 강의시간 시간은 부흥회 시간이었고, 신앙의 힘을 얻는 산교육의 시간이었다.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더욱 뜨겁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었다.

 

고려신학교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일은 한상동 목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 학교를 든든히 세우기 위하여 많은 수고와 어려움을 겪었다. 오해와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을 하지 않으면 비난이 오해를 받을 필요조차 없지만 일을 하기 때문에 받게 되는 그런 일을 개의치 않았다. 오해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단단한 생각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일을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 오직 말씀이었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거나 비난 하는 소리는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산 사람이었다. 그는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가 그 학교의 운영이 반석위에 세워졌을 때 이 땅을 떠났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다. 세상에 자기가 수고한 일을 자신이 다 거두는 일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그런데 한목사는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자신이 마음껏 맛보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목사가 설립한 고려신학교는 고려신학대학이 되고, 고려신학대학은 고신대학교와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되었다. 고신대학교와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있는 한 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이 땅에서 떠났지만 그의 신앙과 사상과 정신은 고신대학교와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속데 영원히 남아서 숨 쉬고 있다.

 

 

 

출처: 고신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