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01
■ 이인재 목사님 전기
밀양 마산교회 담임 박시영목사 저
밀양 신문 연재기사(2005년 7월-2006년 4월)
● 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가? (1)
◆ 신도, 신사란 무엇인가?
신도(神道)란 일본의 토착적인 원시종교이다 이것은 다신론적이며 자연숭배적인 일본 고래의 종교인셈인데, 여기에다 일본은 국조신(國祖神)이라고 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과 그 이후의 종신(宗神)들을 섬기며, 또 천황(天皇)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는 민족종교(民族宗敎)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도의 신을 제사 지내는 곳이`신사(神祠)이다. 일본 곳곳에는 현재 8만여 개의 신사가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가 아세아 주변 여러국가들이 반대하는데도 굳이 신사참배를 2001년 취임이후 4차례나 강행했던 곳과 최근 국민적 가수인 조영남씨가 방문해서 참배했던 곳인야스쿠니(靖國) 신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을 모셔 놓은 곳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에 있는 여러 신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아주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일본 천황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즉, 일본 천황을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죽은 군인들을 위한 곳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을 애도하고, 다시는 전쟁이 있어선 안 될 것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왜냐하면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뿐 아니라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의 위패도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도조히데키 등 2차대전을 일으킨 전쟁 책임자인 A급 전범 14명을 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인 것이다.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일본은 겉으로는 안 그런척하지만 틈만 있으면 과거 전쟁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왔다. 일본 사람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극우(極右) 세력들이 특히 그렇다. 이들은 옛날을 그리워하며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의 힘을 키우는 수단으로 오로지 군사력을 기르고 전쟁 준비에 힘을 쏟는 주의)가 되살아나길 꾼다.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는 결국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되기에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들인 대다수 아시아 국가들이 발끈하는 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 신사참배 강행은 크게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이 강한나라가 되길 꿈꾸는 총리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하고, 세계 여러 나라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총리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 강요
우리가 신사참배를 생각할 때 빼놓지 않고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할 부분은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신사참배 강요이다.
1930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조선통치 말기에 소위대륙 병참화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등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 정책의 거점을신사에 두고 일면일신사주의(一面一神社主義)를 강행하여 전국요소요소에신사(神祠)를 건립했다. 원래 이 신도(神道)는 원시적 자연숭배 종교로서 민족적 성격을 띤 국교화된 종교였다. 그런데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에 의해 새로 성립한 정권은 천황제 국가로서 신도를 기념이념으로 하였다.그리고 신도를 국가적 종교로 전 국민에게 참배토록 하기 위해 신사는 종교가아니고 국가에 보은하는 국민도덕이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매우 기만적인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국가적 의식으로 강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비종교화(非宗敎化)한 것이다. 이것은 대외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명국가임을 보여주고, 대내적으로는 신도이념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일본의 조치였다. 이 신사제도가 천황제국가와 결합하여 신사참배는 강요되었고, 이것이 전쟁정책과 결부되면서 조선에서도 1930년대부터 강요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군국주의 체제로 소위 대동아권 형성을 꿈꾸면서 신사에 대한참배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이것은 신도라는 일본종교를 가지고 천황중심주의의 이념적통일을 꾀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신사에 대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본천황-일황(日皇)이라 칭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도록 요구하는 동방요배, 일본국기 게양 요구, 황국신민서라는 일본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문의 제창등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일을 통해서 일제가 표면화 시킨 정책은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실제로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인 셈이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요람지
일제하 조선의 정치인, 기업인, 지식인, 종교인들이 신사참배에 대다수 굴복하였다. 하지만
기독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끝까지 저항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도 그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일제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일부의 기독교인들이 끝까지 거부하면서 실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때 신사참배를 반대한 200여 교회가 파괴되었고 2,000여명이 투옥되었으며 그중에 50여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박해사건이었고, 한국교회의 큰 수난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 밀양에서도 상남면 마산리에 있는 마산교회(1896년 교회설립)는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를 중심으로 해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운동의 요람지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특히 이인재 전도사의 활약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기에 밀양신문의 본란을 통해서 역사의 뒤안길에서 그를 생각해 보고 자랑스런 밀양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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