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04
●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 전도사(6)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남북교회의 가교역할(1)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빛나는 법, 역사의 어두움이 짙었던 일제말엽에 역사의 샛별처럼 나타났던 귀한 인물, 이인재를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살펴보고 있다. 태양신과 맞서 싸웠던 귀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선택과 힘겨운 싸움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 그가 걸어갔던 길에 함께 했던 귀한 인물들도 만나게 된다.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반대운동 전개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사상 통
일을 이루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신사에 대한 참배를 정책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강요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물론 교육계였다. 일제는 신사, 신도를 국민적 애국교육정책의 기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충성과 애국심을 기르기 위한 훈련의 일관으로 재학 중인 모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학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이에 대한 거부항쟁이 기독교를 믿는 학생들과 교사,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후 신사참배가 교회와 노회, 총회까지 강요당하게 되자 목사들과 일반 교인들의 거부항쟁이 시작되고, 항쟁자들끼리 연대를 맺어가며 이에 대처하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면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의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하는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이요, 둘째는 일제의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하는 신사참배 반대 권유운동이었다. 우리가 현재 살펴보고 있는 이인재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은 후자의 경우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하는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 중심인물로는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한상동, 이인재, 주남선, 전라남도의 손양원 등으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으며, 만주지역에서도 박의흠, 헌트(B.F.Hunt, 韓富善)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교회와 개인의 인적 지역적 연대를 가지고 활약하였으나 점차 지역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경남지역, 서북지역, 만주봉천 지역간 교류가 있었다.
특히 이인재는 당시 경상도와 평안도를 연결하는 남북가교자(南北架橋者)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가능하게 하였다.
2. 한상동 목사와의 만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 못지 않게 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는 한상동 목사(韓尙東,
1901~1976)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죽어간 개혁주의 신학
을 다시 부활시키며 보수 신앙의 밑거름이 된 한상동 목사는 침묵의 성자이다. 큰 나무는 바람도 센 법, 그러나 그는 어떤 바람에도 요동치 않았다. 한목사는 1934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졸업, 1938년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하였다. 이때는 벌써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하여 소위 시국강연회라는 것을 개최하여 교회 지도자들에게 참배를 유도하고 있을 때였다. 한목사는 1938년 10월 24일 현 정부는 정의 및 신의(神意)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 참배해서는 안 된다라고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청빙 하였기에 문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문창교회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 하다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 후임(後任)으로 한목사를 청빙 한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의 설교는 은혜가 충만하였고, 교회 또한 늘 평온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도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가 공공연히 밀려왔다. 1938년 3월 6일 3대 탄식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선의(善意)로 창조한 만물을 국가가 악의(惡意)로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탄식한다고 설교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루는 경찰에서 와달라는 통지를 받았다. 일경이 한목사에게 신사참배를 못할 이유를 물었을 때 십계명에 위배되는 점 등 6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참배에 응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 일로 한목사는 교회를 사면(赦免)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고, 문창교회에 더 이상 시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를 사면하고 나온 한목사는 이때부터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나섰다.
이인재 전도사는 밀양 예림교회를 시무하는 윤술용 목사를 자주 만났다. 윤목사도 강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신앙의 교제를 나누며 피차 권면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윤술용 목사와 함께 신앙의 선배인 한상동 목사를 만났다. 이 어려운 시기에 닥쳐오는 큰 시련을 어떻게 이겨 낼까를 의논하다가 결국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고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 사람은 김해 무척산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셋은 무척산에서 며칠동안 흩어져 기도하였다.
하루는 한상동 목사가 말하였다. 앞으로 신사참배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죽어갈 것 같은데 이대로 기도만 하고 있어서는 될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힘을 합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에 그냥 있을 것이 아니라 기도 장소를 수영 해수욕장으로 옮기도록 합시다. 그 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반대 운동을 구체적으로 펼쳐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상동 목사의 말은 옳았다.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았다. 이인재 전도사와 윤술용 목사는 한목사의 말에 동의하였다.
3. 수영 해수욕장의 기도회
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경 셋은 무척산에서 내려왔다. 수영 해수욕장으로 갔다. 밤
에 후미진 곳에서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소식을 듣고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조수옥 전도사가 백영옥, 박인순을 비롯한 십 여명을 데리고 찾아왔다. 기도회는 여름 백사장만큼 뜨거워졌다.
한상동 목사는 함께 한 그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우리가 지금까지는 숨어 지내며 음성적으로 신사참배 반대를 하여 왔지만 이 이후로는 기본적인 방안을 세워 적극적으로 대처합시다. 이인재 전도사가 대답하였다. 어떤 방안이 있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적극 따르겠습니다. 좋아요.그러면서 제시한 것이 4가지 방안이었다.
① 신사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말 것.
② 신사참배하는 목사가 집례하는 성례전에 참여하지 말 것.
③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연보를 내지 말 것.(대신 연보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일과 교회재건운동에 쓸 것).
④ 신사참배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할 것.(특히 가정예배에 힘쓸 것)
참석한 모두는 그 안에 동의하였다. 이 방법을 전국에 알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상동 목사를 중심하여 경남전역에 번져가게 되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밀양으로 돌아와 각 교회에 이 결의문을 전하고 그렇게 시행하도록 독려하였다.
밀양 마산교회에서는 박수민 장로가 활발히 이 일에 가담(加擔)하였다. 한편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문창교회에서 사면을 당하고 목회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래서 한상동 목사를 만나 이렇게 말하였다. 한 목사님, 내가 시무하는 밀양 마산교회로 오십시오. 우리 교회는 비록 농촌교회요, 작지만 신앙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장로님으로부터 모든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전도사는 어떻게 하려고? 한상동 목사가 물었다. 나는 평양으로 가겠습니다.신학교가 폐교되었는데 평양에는 무엇하러 가겠다는 것이요? 언제 다시 문이 열릴지 기다려 보는 것이지요. 비밀리에 평양신학교 교수를 만나 개인교습으로 신학공부도 보충해야 하고, 그리고 자녀들 교육 문제 때문이기도 합니다자녀들 교육이야 여기서도 시킬 수 있지 않겠소, 아직 초등학교 학생들일 터인데... 예,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학교에서 강요하니, 안되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께 아이들 문제를 상의하였더니 그 곳엔 빈민학원이 있는데 애국지사 자녀들과 신사참배 반대하는 교역자들 자녀들이 비밀리에 공부하고 있답니다. 주목사님 아들도 그 곳에 다닌다고 하니 우리 아이들도 그 학원에 넣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밀양 마산교회에 가면 좋지만 이 전도사는 고생이 많겠어요.
시대가 그런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리하여 한상동 목사는 밀양 마산교회로 오게 되었고(제9대 담임교역자로 부임)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실 일경의 간악한 사술(邪術)로 인해 마산 문창교회를 사임한 한상동 목사를 밀양마산교회 목사로 모셔온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할 모험이었다. 그러나 박수민 장로와 이인재 전도사는 당당히 이일을 추진하였고 이후 밀양마산교회는 신사참배반대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또한 숱한 핍박(逼迫)과 박해(迫害)도 뒤따르게 되었다.
4. 평양에서의 생활
1939년 9월. 이인재 전도사는 큰 딸 이정희(李廷喜, 당시 초등 4년생)와 아들 이정빈(李
廷彬, 당시 초등 1년생)을 데리고 평양으로 갔다. 당시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신학교 교수님
께 개인 교수를 받기 위해였고(당시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 됨), 딸과 아들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학교가 평양에 있다 하여 평양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부인과 둘째 딸 이수옥(李秀玉, 당시 미취학 어린이)이 뒤따라 평양에 가게 되었다.
변두리에 방을 얻어 살게 되었다. 아이들은 신사참배하지 않는 대동학원(大同學院)이라는 빈
민학원에 들어 갔다. 학원은 그야말로 빈민굴과 같았다. 가마니를 깔고 앉아야 했다. 교실이
라 하지만 이름이 교실이지 움막과 다를 바 없었다. 낡은 칠판 한 개가 전부였다. 1학년
부터 4학년까지 합동 수업을 하는데 교장겸 교사 1명이 모든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하였다.
그것도 글은 아예 가르치지 않고 잡담으로 시간을 때워서 1개월도 되지 않아 큰딸 이정희와
동생 이정빈은 대동학원을 그만 두게 되었다.
이인재는 다시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은 주로? 여기에 모여 들었다. 이 곳에서 안이숙, 김지성, 이광록, 김홍전, 이동수 등과 같은 좋은 민족의 지도자들
을 만났다.
당시 평양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신사참배로 인한 시험에 넘어져 있었다.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서 이기선 목사 등이 굳게 서 있었다.
어느 날 최봉석 목사가 이인재 전도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을 찾아왔다. 최봉석 목사는 권능이 많다하여 최권능 목사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일본 형사들이 최봉석 목사를 취조해서 때릴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최목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이전도사, 나와 함께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자구요. 이때는 환란의 때이기 때문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 격려해야 힘을 얻는다구요.
예, 감사합니다. 따라 다니겠습니다.
그리하여 이인재는 최봉석 복사와 함께 신앙동지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하였다.믿음에 굳게 서라구요.최목사는 같은 말을 만나는 사람마다 반복하였다.
하루는 최목사가 이인재 전도사에게마두원 선교사 알지?이인재 전도사는 만나보지는 못하였지만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마두원 선교사는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음악가였다. 그는 음악으로 이름을 날리고 출세할 수 있었지만 세상 음악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한국에 선교사로 온 사람이었다.예, 잘 알고 있습니다.이인재는 놀라면서 말하였다.오늘 마두원 선교사집으로 가자구요.
......마두원 선교사집은 지하교회나 마찬가지지요. 그 곳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동지들이 수시로 모여 기도회를 갖지요. 특히 새벽기도회를 매일 갖는다구.
최봉석 목사를 따라 마두원 선교사 집에 들어간 이인재는 놀랐다. 그 곳에는 신앙을 지키려고 고향을 버리고 가정을 떠나 모여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회 시간에 마두원 선교사의 레위기서 강의가 있었다. 마두원 선교사가 영어로 강의하였고, 김홍전 박사가 통역을 하였다.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이인재는 집으로 돌아와 혼자 생각하였다.
평양에 오기를 잘하였다. 신앙의 동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평양에 훨씬 많구나.'
그런던 어느날 박의흠 전도사가 김인희 전도사와 함께 이인재 집으로 찾아왔다. 박의흠 전도사는 신의주에서 전도사 일을 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에서 사면 당하고 만주와 평양을 넘나들며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열렬히 펼쳤던 사람이었다. 뒷날 신의주 자택에서 머물다가 고등계 형사에게 잡혀가 순교를 당한 분이기도 하다.
함께 동행한 김인희 전도사는 평북 선천 출신의 사람이다. 18세때 평북 선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게 된다. 거기서 고학의 길을 찾았지만 폐결핵을 앓게 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던 중 예수를 믿게 되고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김인희 전도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말하였다.이전도사, 용기를 내어요. 지금 평북에서는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열렬히 전개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전도사는 경상도 사람이니까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경남쪽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어요.지금 경남에서도 잘하고 있어요. 한상동 목사는 부산, 마산을 중심으로 운동하고, 서부 경남쪽은 주남선 목사가, 남해쪽은 최상림 목사가, 진주 사천쪽은 이현속 전도사가, 통영쪽은 최덕지 전도사가 앞장서서 열심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박의흠 전도사가 말하였다.
나는 신의주에서 활동하다가 만주 봉천쪽을 돌아보고 왔어요. 그곳에서도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여러 신앙동지들이 뭉쳐 있어요. 세 사람의 신앙동지들은 이날 기도회를 가지며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히는 기회를 가졌다.
이인재 전도사는 가족들과 함께 지하교회를 시작하였다. 교회당으로 나가지 않고 가정에서
모여 예배하였다. 주변의 신자들을 불러모았다. 이인재 전도사는 시국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럴수록 복음을 전하여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믿는 성도들을 규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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