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05
● 1940년, 경남지방 순회와 평양에서의 신사참 (8)
올해는 우리나라가 해방 60주년, 을사조약 100주년, 강제병합 9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욱이 가해자인 일본이 무자비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잘못된 과거사를 정당화하면서 급속히 우경화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과거 우리에게 행한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새로운 역사인식을 가지도록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제잔재청산을 위한 각종 시도는 바람직한 역사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명록 발간이라든지 시민단체나 대학 학생회 등이 일제잔재청산위원회를 발족하고 청산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점 등은 너무도 바람직한 역사작업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어 있었다. 과거는 하찮은 것, 또는 현실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굴절되는 일도 많았다. 물론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올바른 현실을 만드는 일은 최초의 원인부터 밝혀내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특히 과거의 것들이 고쳐지지 않고 현실에 남아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밀양신문을 통하여 일제말 기독교를 중심으로 펼쳤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한 고찰은 무척 유익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여덟 번 째 기고문이다.
1. 1939년 12월, 밀양으로... 부산으로...
1939년 12월 28일.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고 삼랑진에 내려 밀양으로 갔다. 거기서 한상동 목사(韓相東, 1901.밀양 마산리교회 목사)를 만났다(12월 29일, 오후). 이인재 전도사는 평북지방 성도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소개해주고 5개의 표준을 세워서 신사참배 불참 운동을 전개하며 그것에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밀양 마산리교회도 고등계 형사들이 찾아와 수시로 괴롭히기 때문에 평안한 안식처가 되지는 못하였다.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그리고 윤술용 목사(尹述龍, 밀양 마산리교회 제7대 담임 교역자, 1935년~1938년 시무, 1939년 12월 당시는 밀양 예림리교회 목사였다)는 이날 저녁 부산 동래로 가서 동래 온천에 있는 화성여관에서 하루를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30일, 셋은 부산 초읍리에 있는 조수옥 전도사(趙壽玉, 경남 하동 태생, 당 32세,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에서 옥고 치룸, 해방 후 고아들을 돌보며 한평생을 살았서 그녀를 고아의 어머니라 부름)와 백영옥 전도사(白英玉, 밀양마산교회 제6대 담임교역자(1933년)였던 차재선 전도사의 부인임, 차재선 전도사는 1933년 10월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다. 이후 백영옥 사모는 신학(神學)을 하게 되고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다)를 만났다. 함께 예배를 드린 후에 윤술용 목사는 집으로 돌아가고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는 선교사들 집을 찾아갔다.
부산부 좌천정에 살고 있는 데이지 호킹 선교사(호주선교회 소속 영국인 여선교사, 허데시(許大是))와 추루징거 선교사(M. Trudinger, 秋瑪田, 호주선교부 소속 영국인 선교사, 쓰루징가 혹은 트루딩거라고도 불리움), 를 방문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의 소식을 전하고 힘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2월 31일, 부산 초량에서 박신출 집사(朴新出)와 초량교회 서영수 집사(徐永守)를 만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도록 권면 하였다.
2. 1940년 1월, 칠일간 경남지방 순회
1940년 1월 1일. 일본 사람들은 이날을 설날로 지내기 때문에 이 날의 거리는 한산했다. 집집마다 일장기(日章旗)가 휘날렸다.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를 따라 마산으로 갔다. 마산 제비산에 소재해 있는 태매시 선교사(원래 이름은 테이트이다. 한국명은 태매시(太邁是)이며 지트 혹은 지도라고도 불리웠다)의 댁을 방문하였다. 태매시 선교사는 영국 선교사였다. 여성으로 조선 교회 여성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준 귀한 믿음의 선교사였다. 태매시 선교사댁에는 최덕지 전도사(崔德支, 1901.6.25~1956.5.13, 경남 통영 태생,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네 번에 걸친 구속과 많은 고문을 받았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후 해방과 함께 출옥됨, 후에 재건교회를 창설했고 증경총회장을 지낸 인물임)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최전도사는 통영지방에서 신사참배 불참운동을 하고 있는 굳은 믿음의 여전도사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를 이들에게 소개시키고 평북에서의 신사참배 불참운동의 목적과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태매시 선교사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최덕지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전도사님, 우리는 신앙의 동지를 많이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바쳐지는 머릿돌이 되어야 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인재 전도사는 최덕지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최 전도사님, 경남 일원에 산재한 부인동지들을 설득시켜 신사참배 불참운동에 협조하도록 힘써 주십시오. 경남 여전도회가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1월 2일.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진주로 갔다. 먼저 찾아간 곳은 서덕기(스탓기로도 불리운다. 한국명으로 徐德基이다. 진주 봉래정에 거주하고 있었음) 선교사댁이었다. 그는 영국인 선교사였다. 그에게도 평북지방의 상황을 설명하고 경남에서의 반대운동 전개를 촉구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선교사님, 경남에도 조직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해나가야 합니다. 금번에 이인재 전도사가 평양에서 왔기로 나도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해야 하기에 경남 지역 일대를 지금 순회하고 있습니다. 부산과 마산을 돌아 진주에 왔습니다. 거창에도 갈 것입니다.
수고가 많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서덕기 선교사는 기도해주며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는 서덕기 선교사댁에서 나와 봉래정에 있는 김주학(金株鶴)의 집을 찾아갔다. 김주학은 미순회 서기였다.
마침 거기에는 최상림 목사(崔尙林,, ?~1945.6, 경남 동래 태생, 남해에서 목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심)가 와 있었다. 최상림 목사는 한상동 목사보다 선배로 한목사가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를 최상림 목사에게 소개하고 신사참배 불참운동의 목적과 상황을 설명하고 협력방침을 요망하였다. 이렇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신앙의 동지들이 서로 만나 피차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1월 3일. 이인재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봉래정에 있는 황원택 집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이현속 전도사(李鉉續, 1896.12.12~1945.5.23. 경남 함안 태생, 당 46세, 하동, 사천, 진주에서 목회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교했다)를 만났다. 이현속 전도사는 장로였지만 진주 베돈 병원의 서기 겸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베돈 병원은 호주 선교부에서 운명하는 병원이었다.
황원택과 이현속 전도사에게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동향을 설명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함께 보조를 맞추자고 권면하였다.
그날 오후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는 거창으로 갔다. 거창은 진주에서 먼 거리였다.
거창교회에서 주남선 목사(朱南善, 1888.9.14~1951.3.23, 경남 거창 태생, 당 58세, 거창에서 목회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함)를 만나 하룻밤을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이인재 전도사가 함께 보내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에 이야기하였다.
현재 우리 조선교회는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용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가 부패되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온다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그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여야 하겠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하기로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신사참배의 우상숭배에 넘어가지 않도록 투쟁합시다.
주남선 목사는 조용히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고난의 언덕을 넘어선듯 초롱초롱 빛이 났다.
1월 4일. 이인재 전도사는 거창을 떠나면서 주남선 목사에게 금 일백원을 건네주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비로 사용하십시오. 이인재 전도사는 주남선 목사의 손을 굳게 잡았다.
주의 신실한 세 종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찬바람이 거창 시내를 쌩쌩거리며 지나 다녔다.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밀양 예림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이틀을 지내고 1월 7일, 평양으로 향하였다.
3. 평양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1940년 1월 7일, 밀양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하면서 이인재 전도사는 계속 기도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부 장별리에 있는 채정민 목사(蔡廷敏, 1872.4.28~1953.3.31. 평북 개천 태생, 당 74세, 곡산, 수안, 중화에서 목회함,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서 옥고를 치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채정민 목사와 최봉석 목사, 김의창 목사를 만나 경남지방에서 있었던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향후 활동방침 등에 대해서 깊은 협의를 하였다.
경남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직접 찾아다니며 비밀 연락을 하고, 또한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신사참배가 어떤 죄인가를 깨우쳐 줘야 합니다
이인재 전도사의 말에 채정민 목사는 옳아요.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월 9일, 평양의 기후는 몹시도 차가웠다. 입김마저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옷을 겹겹이 겹쳐 입고 길을 나섰다. 이광록 집사(李光祿, 평북 의주 태생, 당 39세,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광록 집사는 평북 의주사람으로 유년시절 서당에서 3년간 한학을 수학하고 농사에 종사하다가 청년시절부터 매약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17살 때, 폐결핵을 앓아 어려움을 겪던 중 복음을 받아 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의 신앙은 성경적이었고 건전하였다. 신사참배 문제가 생겨나자 극히 반대하는 입장에서 열렬하였다.
이집사님,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신앙의 동지들에게 서로 연락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적극 펼쳐나가야 합니다.
이광록 집사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야지요.
갑시다. 안이숙 선생을 만나 봅시다. 그도 우리와 뜻이 같은 사람이니 서로 힘을 합하여야 하겠어요.
이인재와 이광록은 평양부 상수리에 살고 있는 안이숙(安利淑, 1908.6.24.~1997. 10.19, 평북 박천 태생, 신사참배 거부로 6년 옥고를 치른 후 8.15 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살아있는 순교자로 불리운다)의 집을 찾아갔다.
안선생, 열심을 내시오. 경남과 평북 지방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되고 있습니다.
안이숙은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나서서 힘껏 반대운동을 펼쳐나가도록 합시다.
이인재는 한상동 목사에게서 받아온 돈 삼백원을 운동비로 사용하라고 내어 주었다.
1월 20일. 이인재 전도사는 혼자서 방계성 전도사(方啓聖, 경남 부산 태생, 당 58세,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를 찾아갔다. 방계성 전도사를 만나 경남과 이북의 각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 상황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이 두 사람은 그날 밤 늦게까지 평양지방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1월 26일. 다시 이광록 집사를 만났다. 둘은 함께 평양 시내에 살고 있는 차용서(車用瑞)의 집을 찾아갔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힘이 되기를 약속하였다.
1월 28일. 이인재 전도사는 평남 대동군에 있는 가현교회에 갔다. 이날 이 교회에는 교인 50여명이 성도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곳에 이인재 전도사가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신부였다.
신부가 정조를 지키기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정결한 여성으로 한 남편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기독신자들은 신앙의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요, 영적 신랑되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마귀에게 정조를 빼앗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신앙의 정조를 깨뜨리지 않고 지킬 수 있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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