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재 1940년 2~3월 평양에서 (9)

2016.01.0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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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2~3월 평양에서 (9)

이 땅의 모든 등불이 꺼져갈 때, 역사의 흐름이 강자(强者)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때, 희망의 그루터기가 있었다. 일제말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조선민족의 말살을 꾀하던 일제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다들 숨을 죽이고 자신의 생존만을 확인하며 살아갔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어려운 때에도 역사의 파숫군으로 잠든 시대를 일깨우며 민족의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리 민족의 살 길을 찾아나섰던 이인재 전도사는 그야말로 귀한 선각자(先覺者)가 아닐 수 없다. 반딧불은 미력한 존재이지만 생명력이 있기에 어둠을 밝히듯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도 역사의 어둠이 짙을 때에 그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1. 19402, 평양에서...

  선지자선교회

24.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 남신리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남신리 교회에는 약 80명 정도의 신도들이 모여있었다. 이날 이인재 전도사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배우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향, 친척의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백세에 얻은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였을 때 그는 거절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사는 우상입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입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무서운 죄입니다. 절대로 신사참배를 하여서는 안됩니다.

 

그의 설교에는 힘이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성도들은 이인재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결단코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다.

 

27, 수요일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이광록 집사(李光祿, 평북 의주 태생, 39,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와 함께 평양 주기철 목사의 사택으로 오정모 집사(주기철 목사 부인, 193511월에 주기철 목사와 결혼, 1947127일 별세)를 찾아갔다. 주 목사는 이미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산정현 교회에는 담임 목사가 공석(空席)인 상태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오정모 집사에게 말하였다.

사모님, 지금 평양노회가 산정현 교회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산정현 교회가 크기 때문에 많은 부담금을 요구하고 있는데 결코 노회부담금을 내면 안됩니다. 노회 임원들이 모두 친일파 목사들이고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이라하여 시행케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노회를 도와야 합니까?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산정현 교회는 노회에 부담금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켜서 승리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때의 일이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을 계기로 당시 주기철 목사를 파면하고 산정현 교회에 수습위원을 파송해서 교회를 접수하려는 평양노회에 대한 산정현교회의 부담금 납입 거부운동 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9391229일에 밀양에서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등이 합의한 신사참배 반대운동 5개 조항 중 1, 2항에 해당하는 노회불복종운동의 실천이었다.

 

218, 이 주일부터 이인재 전도사는 평남 강서군 초리면에 있는 이노리 교회에서 임시교역자로 섬기게 되었다. 이노리 교회는 그동안 교역자가 없는 상태였고 계속 전도사를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인재 전도사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신학생이고 신앙이 좋은 전도사임을 알게 된 이노리 교회에서는 이인재 전도사를 시무교역자로 청빙한 것이었다. 교인은 약 80명 정도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부임 첫 주일 설교에

 

신사(神祠)는 우상입니다. 조선교회는 벧엘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모두가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들로 신사참배는 명백히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조선교회가 우상화되는 것을 우리는 막아야 합니다.

 

225, 주일 예배를 마치고 이인재 전도사는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때 한일웅(韓一雄) 집사가 이 전도사에게

전도사님, 오늘 우리 집에서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집으로 오세요.

감사합니다.

이전도사는 반갑게 말하였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대화를 나누는데 벽에 걸어둔 시계가 두 시를 치는 것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아무런 생각없이 소리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시계가 걸려있는 벽 구석 쪽에 신궁대마(神宮大麻: 가미다나에 넣어두는 일종의 신주 내지 부적, 일본 총독부가 신사를 만들어 참배케 하는 것도 부족해서 각 학교에는 호안덴, 奉安殿을 세워 참배케 하였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라는 가정 신단(神壇)을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이인재 전도사는 한집사에게 물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당황한 한집사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 , 그것이 일본 귀신패 아닙니까?

왜 저런 것을 벽에다 붙여 놓았습니까?

, ... 반장이 무서워서 그대로 붙여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절하거나 빌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우상을 붙여 놓고 하나님께 어찌 기도할 수 있습니까? 반장이 하나님보다도 두렵단 말입니까? 기독신자가 저런 것을 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는 일입니다. 당장에 떼어 버리세요. 저런걸 담대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저게 무슨 망령된 짓입니까?

이인재 전도사는 무척 화난 소리로 말하였다.

한집사는 일어나 그것을 떼어버렸다. 한집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2. 19403, 평양에서...

 

35, 이인재 전도사는 자신의 방에서 이광록과 함께 김지성, 최성봉 목사를 만나고 경남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황을 설명하며 다 함께 향후 더욱 힘써 평양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쳐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3, 어느 주일 밤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산정현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날 밤 설교제목은 벧엘로 가지말라였다. 그는 이날 밤 설교에서 신사참배 불참에 대하여 강하게 말하였다.

이날 밤, 그 예배 자리에는 평양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부장 황씨가 앉아 있었다.

예배 후 황부장은 이인재 전도사를 만나 충고하였다.

재미없어! 두고봐. 앞으로는 설교도 할 수 없을거야.

 

38, 평양부에 거주하는 미국인 선교사 함일돈 선교사(咸日暾, Floyd E. Hamilton)의 집을 방문하였다. 함일돈 선교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 자금으로 일백원을 건네 주었다.

 

315, 이인재 전도사는 이광록과 함께 경창리에 있던 안이숙(安利淑)의 방을 방문하였다. 당시 안이숙의 방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가들의 주요 집회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선천 보성여학교 교사 출신인 안이숙은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19391월 학교를 사직하고 평양으로 거처를 옮겨 지하교회 활동에 참여했다. 거기서 이인재 전도사는 경남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사정을 알리고 이들과 함께 운동자금 모금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안이숙으로부터 19391, 박관준 장로(朴寬俊, 1875. 4. 13~1945. 3.13, 평북 영변 태생,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그는 한국의 엘리야로 불리운다)와 함께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본 각료와 위정자들과 군인들을 만나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항의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 망한다고 경고한 일, 193925, 전임 조선총독 우카키와 문무대신 아라키(?) 등을 방문해서 신사참배를 강요의 부당성 등에 대해 항변한 일 등을 들을 수 있었다.

 

317, 이인재 전도사는 이노리교회에서 시무사면을 당하였다. 평양 종로경찰서에서 강제 추방을 한 것이었다.

 

321, 봄이 오고 있었다. 혹독하게 춥던 그해 겨울의 두꺼운 껍질들이 벗겨지고 있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다시 밀양으로 내려갔다. 상남면 마산리로 가서 한상동 목사를 만났다. 이날 밤 이인재는 한목사에게 만주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황을 보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