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07
● 주기철 목사의 석방과 이인재 전도사의 체포 (11)
1.주기철 목사의 석방
1940년 4월 20일경, 주기철 목사(1897~1944)가 가석방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주목사의 석방은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에게는 큰 기쁨의 소식이었다. 시급히 연락이 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다.
경남 밀양 마산리에 있던 한상동 목사가 올라오고, 채정민 목사, 최봉석 목사, 오윤선 전도사, 김인희 전도사, 김지성, 김의창 목사 등 기존의 평양의 지도자들 외에 만주지방에서 온 안동의 김형락 영수와 봉천의 박의흠 전도사, 평북 선천의 김인희 전도사 등 평양에 거주하면서 평북과 만주지역 신사참배 반대 운동 세력과 연결을 맺고 있던 반대 운동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즉 평양과 평북, 경남과 만주 지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지휘하는 지도급 인사들의 회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4월 20일-21일. 이틀동안 장소를 바꿔가며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모임을 가졌다.
4월 20일. 먼저 김지성의 방에서 이인재, 최봉석, 김의창, 박관준이 모여 박관준 장로의 반대운동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인재 전도사의 방에서 최봉석, 채정민, 오윤선, 박관준, 김지성이 모였는데, 여기서는 채정민 목사가 설교를 하였고, 그 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침과 방법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관준 장로는 현 정부는 기독교에 대한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멀지 않아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다. 작년은 흉년이 들었다. 이와 같은 행위를 감행하는 한 흉년 혹은 불상사가 폭발할 것이다. 우리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배격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4월 21일, 이날도 두 차례나 장소를 바꿔가며 회합을 가졌었다. 낮에는 채정민 목사의 집에서 최봉석, 한상동, 오윤선, 이인재, 김지성, 김의창이 함께 모였다. 이 자리에서 한상동 목사가 설교를 하였다. 한목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제목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일제로부터 어떠한 박해를 받더라도 끝까지 잘 참고, 신앙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설교를 하였다.
이날 밤에는 이인재 전도사의 방에서 한상동, 김형락, 박의흠, 김인희, 이인재가 모여서로 자신들이 살고있는 지방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상황과 일제의 검속 가운데 수감자 현황을 점검하고 향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4월 22일, 평양 장별리에 있는 채정민 목사 집에서 주기철 목사 위문을 명분으로 한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의 회합이 이루어졌다. 이날 여기에 모인 사람은 다음과 같다. 주기철 목사, 오정모 사모, 채정민 목사, 최봉석 목사, 한상동 목사, 오윤선 전도사, 방계성 전도사, 안이숙 선생, 이인재 전도사, 김의창 목사, 이광록 집사, 김인희 전도사, 박의흠 전도사, 김형락 영수 등이었다. 이들은 각 지역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현황을 점검한 후 반대운동 방향과 내용을 논의하였는데, 이 때 한상동 목사가 경남지역의 운동을 예로 들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와 신도들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즉 신사참배를 수용한 노회의 지시에 불복하고 노회 상납금을 거부하는 관계 단절의 수준을 넘어 신사참배 거부 노선을 추구하는 대항노회를 조직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자는 제안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말하였다. 현 정부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습니다. 작년은 흉년으로 벼를 많이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정부가 이런 망령된 일을 강요하는 한 흉년 뿐만 아니라 갖가지 불상사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배격하여야 합니다. 참석한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하였다.
한목사는 다시 말하였다. 이제는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되 전국적으로 실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들끼리 노회를 조직하여 교회를 살펴야 합니다.
이 때 주기철목사가 나섰다. 그것은 안 됩니다. 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실시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면 피해가 막심하게 됩니다. 많은 희생자를 내어야 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반대하는 것으로 끝내고 전국적으로는 반대운동을 확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노회조직도 불가한 것이 앞으로 반대하는 지도자는 다 검거되고 환난을 당할 것인데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주목사의 말도 타당성은 있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주목사의 말이 너무 소극적인 것 같아 반대의견을 강하게 내세웠다. 아닙니다. 반대운동을 전개하여야 합니다. 이미 반대운동은 실시되고 있습니다. 중단할 수 없습니다. 박의흠 전도사가 한목사의 말에 동의하였다. 이미 우리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시작된 반대운동을 더 힘차게 전개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옥중에서 많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나온다 해도 결코 일제가 탄압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일으켰을 때 아무런 성과는 없이 희생만 클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지금 이 정도의 반대 운동에도 심하게 탄압을 가하는데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친다면 그 희생만 많아집니다. 우리 지도자들이 묵묵히 신사참배에 불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반대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지금 평양이나 평북지방에 대대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경남지방도 저와 이인재 전도사가 순회해 보니 호응이 좋았습니다. 이것을 전국적 조직으로 펼쳐나가야 합니다. 한상동 목사가 열을 올리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활성화를 강조하였다.
이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쳐나가는 데는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가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주목사는 조선교회의 희생을 최소한 막아보자는 것이었고, 전국적 조직망으로 전개할 때 일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을 모조리 잡아들이면 그 희생은 실로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 목사는 이렇게 염려하였다. 무엇보다 우리 지도자들이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시험에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별 수 없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담대히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지도자들의 신앙문제입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고 질(質)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마귀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면 조선교회는 삽니다. 비록 합의된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날 모임은 남북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의 첫 회합이었다는 점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을 어용 노회 해산과 신 노회 결성을 목표로 한 동지 규합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1940년 4월 23일, 주기철 목사의 석방을 기하여 평양 채정민 목사의 집에서 회합하였던 신사참배 반대 운동 지도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새 노회 건설을 목표로 신앙 동지를 포섭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각 지역 대표자들은 흩어지기 전에 다시 한 번 모여 운동 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병희 집사 집에서 가진 이날 모임에서 한상동 목사, 이인재 전도사, 김형락 영수, 박의흠 전도사, 김인희 전도사 등은 궁성요배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김인희 전도사와 박의흠 전도사, 그리고 김형락 영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궁성요배는 우리들 같은 인간인 천황폐하를 고의로 신으로 경배하는 결과밖에 안되는 것이요 또한 성경이 금하는 우상숭배인고로 결단코 행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을 내림으로 이날 이후 신사참배와 함께 궁성요배도 거부 대상이 되었다.
1940년 4월 24일, 이인재 전도사는 김인희 전도사를 만났다. 김인희 전도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2백원의 돈을 내밀었다. 이것을 신사참배 반대운동 기금에 사용하도록 한상동 목사님께 전하여 주시오.감사합니다. 이인재는 그 돈을 받아 간직하고 있다가 4월 27일 한상동 목사가 부산으로 내려가기 위해 평양역에 나왔을 때 역구내에서 그것을 전달하였다. 목사님, 몸조심하시고 뜻을 펴십시오. 그래요. 이 전도사님은 여기 남아 계속 반대운동에 힘쓰시오. 그러나 이 정부가 우리를 그냥 둘 것 같지 않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마음에 집히는 것이 있는 듯 딴 곳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리고 부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2. 이인재 전도사의 체포
이인재 전도사는 폐교되어 있는 평양신학교 기숙사에 거처하고 있었다. 1940년 5월 13일, 광주에서 올라온 강순명 목사를 기숙사에서 만났다. 그리고 신사참배 불참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평양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둘이 나타났다. 한 사람은 낯이 익은 유(兪)부장이었다.
유부장은 이인재를 보자 대뜸 손에 포승을 채웠다. 많이 찾아 다녔지, 구니모도(國本)상, 오늘은 어쩔 수 없이 함께 가야 하겠소! 구니모도는 이인재 전도사의 일본말 성씨명이었다. 그는 유부장에게 말하였다. 어인 일이십니까? 몰라서 물어? 당신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자로서 죄목은 불온언행혐의죄야. 유부장은 책상위에 진열된 책들을 뒤졌다. 그 곳에서 일기장을 찾아내었다. 일기장에는 그가 남북을 오가며 활동했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돈을 건네준 돈의 액수까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좋았어! 이것이면 충분해! 유부장은 쾌재(快哉)를 불렀다. 이인재 전도사는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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