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16
● 영광의 출옥 (19)
1. 귀향한 가족들
1939년 가을,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갔던 장녀 이정희와 장남 이정빈, 그리고 차녀 이수옥과 아내 신을라는 3년간 평양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밀양 상남면 마산리로 귀향하게 되었다. 이인재가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어 있었으니 그 가족들의 고생이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평양서 낳은 딸인 이수자는 밀양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병으로 그만 죽고 말았다.
1944년, 장남 이정빈은 상남초등학교 4학년에 전학(轉學)하게 되었다. 교사들이 이정빈이 신사참배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슬며시 눈감아 주면서 그의 전학을 허락해 준 것이다. 숨막히는 시절, 너무도 답답한 일들이 많았던 때였지만 그래도 고마운 분들이 더러 있었다.
1945년,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이정빈이 선교사님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학교 친구들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다. 사이판에서 왜놈들이 전멸했다더라. 왜놈들이 망해야만 우리 조선이 속히 해방될 수 있대. 그때 마을에서 부자로 통하던 강씨네 아들이 부동자세를 하면서 대뜸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고노야로!! 그러면서 정빈이 한 말을 일본 순사들에게 일러준다는 것이었다.
이정빈은 아버지인 이인재 전도사로 인해 일본 순사들로부터 너무도 많은 감시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기 때문에 일본 순사라는 말만 나와도 바지에 바로 오줌을 살 정도였다. 그 날 정빈은 이 강씨 아들에게 얼마나 많이 얻어맞았는지 모른다. 그 후로 이정빈과 그 가족들은 숨을 죽인 채 일본의 패망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다.
2. 1945년 8월 15일
1945년 8월 15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원자탄의 위력을 알지 못하는 일본인들에게 미국은 미리 피신할 것을 알렸고 아주 작은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그 위력은 대단하였다. 원자탄이 떨어지는 순간 번쩍하는 강한 빛살이 눈을 부시게 하더니 버섯구름이 치솟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녹아 내렸다. 생물이고 광물체이든 간에 그냥 허물어지듯 녹아내려 버린 것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한 후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히로시마에 실험용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이 놀라운 위력을 보고도 항복하지 않을 경우 다시 다른 장소에 원자탄을 투하하겠다.그러나 일본은 그 무서운 원자탄의 위력을 보고서도 항복을 하지 않았다.
미국은 두 번째 원자탄을 나가사끼에 투하하였다. 미국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B29 8백대를 일본 상공에 날렸다. 엄청난 폭격이 가해졌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궁정 방공호 속에서 각료들을 불러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었다. 그리고 8월 15일 정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고 조선은 일본의 손에서 해방되었다. 조선 천지에 만세 소리가 메아리쳤다.
3. 1945년 8월 17일, 출옥
그러나 평양 형무소 내에서는 아무런 낌새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간수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에 이틀이 지난 후 8월 17일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해방의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고 출옥준비가 진행되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간수의 지시대로 형무소 사무실로 나갔다. 함께 투옥되었던 여러 신앙의 동지들이 앞서 나와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이기선 목사, 손명복 목사 등등. 서로 껴안으며 반가워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한 목사를 부축하여 맡겨진 짐들을 챙겼다. 옥문 밖으로 나섰다. 옥문 밖에는 밤 11시가 되었는데 출옥 소식을 듣고서 많은 성도들과 가족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성도들이 마련해 온 인력거를 타고 실려 평양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늦은 밤 성도들의 찬송소리가 온 평양 하늘에 울려 퍼졌다. 출옥성도들은 안이숙 선생 모친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기선 목사의 인도로 감사예배를 드렸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출옥성도와 함께 한 성도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감격에 젖어 있었다.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엷어진 창자가 그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새벽이 오기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새벽 4시경 모두 산정현 교회로 갔다. 그리고 산정현 교회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냥 감격과 감사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집회는 2개월 간 계속되었다.
4. 가마다 판사의 고백
이인재 전도사는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생각에 잠겨 들었다.5년 4개월 간 평양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어려움을 참으며 투쟁하여 왔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예심재판을 받으면서 가마다 판사가 일본 천조대신을 일본국조로 인정하는가?라고 묻는 말에 엉겁결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 부분이었다.
이인재는 이날 이후부터 왜 내가 그럴 수 없다고 부인하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를 종종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인재는 1945년 8월말, 예심판사였던 가마다를 찾아갔다. 한 때는 당당한 권세를 업고 날아가는 새라도 떨어뜨릴 위엄을 가졌던 가마다 판사였다. 그의 말 한 마디면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이 패망하였고 그는 패전국의 국민으로 풀이 죽어 있었다. 곧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신세였고, 혹 돌아가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피살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였기에 그는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가마다상 있습니까?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누구십니까?하인인 듯한 사람이 문도 열지 않은 채 되물었다.나는 구니모토(國本)라는 사람인데 가마다상을 만나고 싶어서 왔습니다.잠깐 기다려 주십시오.안으로 되돌아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와 말했다. 이 문은 철폐하였으니 저쪽 뒷문으로 오십시오.이인재 전도사는 언덕으로 올라가 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더위를 식혔다.
얼마 후 뒷문이 열리면서 하인이 나와 손짓을 하였다. 그를 따라 이인재는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안내되어 잠시 기다렸다. 가마다는 자리에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나왔다. 재판 할 때의 위엄은 사라지고 평범한 보통사람의 미소로 그를 맞아 주었다.아 구니모도상 얼굴이 훤해 보이시니 참 좋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지요? 본의 아니게 많은 고통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함께 고생하셨던 친구분들 다들 안녕하십니까? 아, 인사가 늦었네요. 구니모도상 귀국의 독립을 축하드립니다.판사로서 또 죄인으로 그렇게 만났던 그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말씨가 겸허하긴 하나 힘이 없었다.가마다를 만나러 온 것은 지난날의 잘못이나 억울한 일을 따지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구구한 인사나 또 자나간 일들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용건만 이야기하고 떠나고 싶었다. 기회가 없을까봐 서둘러 찾아 온 것이었다. 저, 말씀 드릴게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이인재 전도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가마다는 꼭 죄수가 법관 앞에 선듯 겸손히 머리를 숙인 채 말하였다. 완전히 바뀐 형편이었다.몇 주 전만 하더라도 가마다는 대일본 제국의 판사였다. 이인재를 재판할 때 위협도 하고 언성도 높이며 언제나 당당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다른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심문(審問)을 하면서 천조대신을 일본국조로 인정하는가? 하고 물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엉겁결에 네,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돌아와서는 왜 그럴 수 없다고 부인을 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불려가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천조대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재판정에 불려가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이 일본으로 가기 전에 당신 앞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천조대신은 신이 아닙니다. 일본이 조작해 낸 것에 불과합니다.이인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가마다 판사는 고개를 들면서 몇 차례 절을 하였다.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잘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런 걸 물어본 내가 잘못하였습니다.그렇지 않습니다. 가마다상 당신은 일본 사람이니 일본의 풍습과 관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로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당신에게 오히려 전도를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습니다.당신은 참으로 훌륭하신 신앙인이십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가마다는 계속 절을 하면서 이인재에게 사과의 뜻을 표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늦게나마 늘 마음에 꺼림직하게 여겼던 것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가벼워졌다. 마치 목에 걸려있던 가시를 뽑아 버린 듯 상쾌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가마다에게 인사로 이런 말을 했다.일본이 일억국민을 총동원해가며 전쟁에 승리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패전으로 결말을 짓게 되어서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되었네요. 한 쪽이 좋으면 한 쪽이 나쁘게 되고 한 쪽이 나쁘면 한 쪽이 좋아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가 속담에 음지(陰地)가 양지(陽地)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맞는 말인 것 같군요.그 때 가마다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구니모도상, 당신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겼습니다. 당신의 신은 참신이십니다. 나는 사실 당신들을 접촉하면서 당신들이 진실 된 신앙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많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사실 당신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들을 오래 구금시켜둔 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었습니다.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경찰 당국에서 너무 가혹하게 취조를 해가며 기소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예, 잘 알고 있습니다.가마다 판사는 한참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구니모도상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천조대신은 가상(假想) 신이었어요. 아니, 신도 아니지요. 처음부터 천조대신은 없는 것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정말 부질없는 일을 한 셈이지요. 당신들이 섬긴 여호와는 참 신이십니다.
우리는 12월 이내로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는 나도 당신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될련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너무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지금 내 심정 같으면 당신들 같은 위대한 기독신자가 있는 이 나라 국민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올해 안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가야만 합니다.이인재 전도사는 가마다의 말을 들으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그는 일어나 가마다의 손을 잡고 작별의 인사를 하며 권면하였다.아무쪼록 무사히 귀국하시기를 바라며 꼭 하나님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이인재 전도사는 가마다 판사의 관사를 나와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벌써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고노야로는 일본말로서 너, 이 자식!! 이란 욕설이다.
이인재 전도사의 장남인 이정빈은 이후에 연세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우리나라가 최초로 교육부가 발령한 계명대학교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계명대학교에서 부총장으로 재직을 했으며 정년퇴직 후 현재 대구에서 살고 있다. 이정빈 교수는 그 날 이후 지금까지 경찰만 보면 왠지 모르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고백한다.
- 신사참배반대운동가 출옥성도 이인재편은 이번 기고문을 마지막으로 그 연재를 마치게 되었다. 이인재 전도사의 해방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밀양신문 기고문들을 모아서 출간될 신앙의 투사, 이인재라는 책자에 담아볼 계획이다.
그동안 본란을 통해서 이글을 읽어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역사의 뒤안길에서 살펴본 자랑스런 밀양인인 이인재 전도사를 통해서 필자 자신은 밀양인으로서 크나큰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그런 동일한 감동이 있었으리라 믿는다. 바라기는 더 많은 자랑스런 밀양인들이 이 지면을 통해서 알려졌으면 한다. 기회를 주신 모든 밀양신문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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