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20:03
● 제 1 장 고난의 바람이 불기 전
와다나베: 조원장님 저는 한국에 대한 일본, 특히 기독교의 죄책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일본 기독교회의 죄책이란, 일본 기독교회의 지도자가 1938년에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하기 위하여 조선을 방문하여, 장로교회의 총회와 그리고 각지에서 ‘신사참배는 국민으로서의 의례이기 때문에 신앙에 저촉되지 않는다’라고 결의하도록 압박한 사건, 바로 여기에 문제가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못한 것이었고, 둘째는 이웃 아니, 그리스도의 띠로 묶여진 한 형제자매라고 해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무거운 짐을 같이 지고자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우월자가 되어 이들을 지도하려고 했던 교만과, 세 번째로 그러한 무책임한 일들을 해오면서도 자기 자신을 속이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한 죄가 있습니다.
조수옥: 저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저는 함께 형무소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또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아주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더욱이 목사님들처럼 어떤 활동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사실 목숨을 내어놓고 신사참배 운동에 앞장서신 목사님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1941년 8월, 평양 형무소에 감금된 이후로, ‘카네다’라는 예심 판사에게 조사를 받고, 광복 3개월 전인 5월 18일에 ‘평양지방법원 재판부에 회부’라는 결정이 내려짐으로써, 같이 있던 21명의 죄상과 함께 기록한 결정서를 받게 되었습니다(본서 제2부 참조). 전부가 94페이지로 기록되었는데, 제 것이 가장 짧은 것으로 한 페이지하고 석 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결정서에는 있지도 않았던 일들을 기록하기도 했으니 그런 것들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와타나베: 한국에는 ‘출옥성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무소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사참배 거부로 말미암아 투옥되어, 일본의 패전과 함께 평양 형무소로부터 출옥한 17분이 그러한 이름 하에서 감동적으로 미담화 되어, 성인과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조수옥: 그러나, 급기야 일본은 우리들로부터 하나님을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사참배 강요는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일본이 결국엔 하나님께 대항한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때는 우리들도 더 이상 무저항으로만 인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일본의 이러한 악독한 처사들을 지금까지 지켜보아 오셨지만, 결국에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저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일본에서 목사님이 찾아 오셔서 너무도 간곡히 부탁하시기에 일본을 방문하여 신사참배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반대함으로서 형무소에 붙잡혀 간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일본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일본 교회 자체는 아주 약하지만 저는 그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일본을 위해서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일본 기독교인들과의 교제가 계속 깊어지면서, 생각이 점차 바뀌었습니다. 제가 교제하는 분들은 모두 ‘야스쿠니’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이 싸워온 것보다 더 큰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들은 조선인으로서 일본과 싸웠지만, 그들은 일본인으로서 일본과 투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꼭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와타나베: 강월남 씨는 조 원장님과 함께 1914년 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에 조 원장님과 함께 유치원에 다녔다. 성장하여 그는 하동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교회 생활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1936년 8월 10일, 인생에 풍랑이 찾아온 것이다. 그날 밤,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 3명이 교회에서 일본정부에 의하여 학교가 폐쇄 당한 사실을 증거하는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사실 숭실학교는 그 당시 막킨 교장의 신사참배에 대한 타협을 거부함으로서 폐교가 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크리스천들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동에는 그 전년도에 신사가 세워졌다.
조수옥: 다음해, 1월경에 병원에 사표를 내고 양재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마산으로 갔습니다. 양재사로서 생활하려고 다짐한 것이죠. 저는 마산에서는 문창교회를 다녔습니다. 아주 큰 교회였고, 기도가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주기철 목사님이 계셨지만, 그 해 6월에 평양으로 옮겨가셨지요 그분이 그곳에 계시는 동안 저는 그분의 설교를 계속 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지금 고난의 시기가 옵니다. 우리들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라고 자주 말씀하셨죠.
와타나베: 다른 교파들은 비교적 온순히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장로교는 1938년 평양 신학교의 폐쇄와 그해 9월 총회에 이르기까지 저항하였죠?
한국장로교회의 신사참배투쟁은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1936년 선교사 막킨씨의 저항과 그것에 수반되는 숭실학교 폐쇄로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입니다. 즉, 선교사들의 지도와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진주 성경학교에 있던 선교사들은 그러한 지도를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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