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숙 41. 소련군과 주영하

2016.01.09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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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련군과 주영하

  선지자선교회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그 세 사람을 보고 나는 크게 놀랐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참 잘 차려 입은 남자는 분명히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에 주기철 목사와 한 감방에 있던 주영하라고 하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이 온 두 여자 중에 한사람은 러시아 여자인 모양이다.

 

여기 안이숙 선생 계시지요?”

 

나는 닫아 놓은 문을 열고 그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방으로 청해 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영하는 눈부신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무척 반가운 모양으로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유치장 당시의 생각이 나서 반갑긴 했어도 상대가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 끝끝내 주 목사의 전도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도 물론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아 참 감개 무량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다시 뵙게 되니까요. 어찌나 바쁘던지 진작 찾아뵙는 건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는 같이 온 두 여자를 간단한 말로 소개했다.

이분은 소련군 중령 00올시다.”

 

그는 정중하게 소개했는데, 그 여자 중령은 멋진 군복 차림에 가슴에다 빛나는 훈장을 여러 개나 달고 있었다. 그 중령이라는 소련 여인은 웃는 얼굴로 퍽 반갑다는 감정을 악수로 표시하려고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주영하는 러시아 말에도 능한 것같이 보였다. 그리고 또 같이 온 한국 여자를 소개하면서

안 선생님도 잘 아시는 박정애 여사입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박정애는 내가 형무소에 있을 때에 얼마 동안 한 감방에서 지낸 일도 있는 여자 공산당원으로서 그때는 옹기장수 아주머니같이 보였으나 그 눈동자만은 속일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도 달리 꾸미고 딴 사람이 되어 왔다. 그는 그때 감방에서 나를 보고 여걸, 여장부라고 말한 일이 있었으나 나는 그때도 다만 신앙심만을 지키려는 것뿐이라고 누누이 설명했던 일을 기억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는 우수한 배우가 12역을 한 것같이 그렇게도 완전히 딴 사람같이 보이게 하고 나타났으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선생님은 죽은 후에 가는 천국만 아시는 분이니 살아 있는 산 천국을 제가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모스크바로 모시고 가서 산 천국을 똑똑히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또 가서 배울 것도 많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입에서 거의 튀어나오려는 말을 의식적으로 급하게 억제하면서

너희 자신이 천국을 누리기 위해서 민족과 나라를 팔아서 무서운 구렁텅이에 처넣고 너희만 위한 천국이 모스크바냐? 천국인 줄 알고 지옥 모스크바에 가서 가슴을 치고 영원히 후회하는 곳에 간 후에는 다시 기회가 없단다. 이 공산 매국노들아!”

 

아닌게아니라 안 선생님은 특별 대우를 해서 특별 장교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가시도록 하겠어요. 사실 선생님이 모스크바를 보시면 기절하실 거예요. 참 기가 막히게 훌륭하답니다.”

 

나는 윤원삼 장로 댁을 기억하고 그쪽 방향을 향해서 자꾸만 달음질했다. 숨이 차서 금방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나는 쉬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눈에는 불이 뿜는 것 같은데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님이 내 곁에서 나와 같이 뛰고 계신 것을 느꼈다. 윤 장로댁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큰 숨을 내쉬며

 

주여, 감사합니다!”

하고 나를 여기까지 무사히 오게 하신 주님 앞에 감사했다. 주님이 용기를 주셔서 그곳을 벗어나 달아나게 해주신 것을 나는 참 감사했다.

 

그날 밤 윤 장로는 사람을 시켜서 청년들을 소집했다. 누구든지 나를 서울까지 데려다 줄 사람은 없는가고 물었더니 청년 열 사람이 자진해서 우리를 서울까지 모셔다 드린다고 단번에 나섰다. 그리고 언니의 사위도 이남에서 우리를 찾아왔는데 이번 기회에 자기 집인 대전으로 가는 길에 같이 내려가기로 했다. 또 윤 장로의 둘째 며느리도 남편이 있는 서울로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우리 일행 14명은 비상한 각오를 하고 긴장 속에 가지고 갈 수 있는 행구를 꾸려 가지고 나섰다. 청년들은 하마터면 모스크바로 납치되어 갔을 나를 보고 몹시도 기뻐해 주었다. 그래서 38선을 넘다가 자기들이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와 나의 어머니를 지켜 주겠다고 모두 울면서 기도를 했다. 그 중에는 몸이 장대하여 권투도 하고, 태권도도 하고, 또 싸움을 잘해 별명이 황소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자였지만 일본이 패망하는 것을 보고서야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열성 예수인이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젊은이고, 그의 형도 기어코 가겠다고 해서 형제가 다 나서게 되었다. 모두 용감하고 씩씩해 보였다.

 

이 많은 군중 속에는 38선을 넘나들며 장사를 해서 재미를 보는 사람이 쫴 많이 있다는 것도 알아냈는데 그런 사람들은 길을 환히 알고 있어서 황소 청년은 그들에게 얻은 지식으로도 우리를 안심시켰다. 청년들은 걸음이 몹시 빨랐지만 늙은 어머니와 감옥 생활에 곯아빠진 나는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참 가다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두 우리 보따리를 한 개씩 짊어지고 앞으로 뒤로 그들은 꾸준히 충성스럽게 우리 모녀를 지켜주어서 어머니와 나는 이 심상치 않은 일에 겁이 나고 질려 떨면서도 참 신기하게도 길을 잘 걸었다. 황소 청년은 밤이 되어 캄캄해질 때 달구지를 하나 빌렸다. 청년들은 걷고 여자들은 달구지를 탔다.

 

하늘을 쳐다보니 초생달이 하늘에 걸려서 그 연한 빛을 통해 구름이 보였다. 아롱진 구름은 내 앞에 들이닥친 위험을 예고해 주는 것같이 느껴져서 내 가슴을 무한히 외롭게 했다. 나는 눈을 들어 높이 계신 하나님의 그 도우시던 옛날 감옥의 가지가지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요한복음 14장을 서글프게 외우고, 또 시편 16편을 외우고, 또 애원하는 찬송가를 조용히 달구지 끄는 소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불렀다. 어머니는 계속 기도만 했다. 밤새도록 가고 가던 달구지꾼이

 

이보다 더 갈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38선인데 소련군이 지키고 있다가 무턱대고 총을 쏘니까요.”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돈을 치르고 모두 다시 길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걷는 소리도 못 내고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숨도 크게 쉬면 죽는 판국이 되어서 우리는 힘을 다해서 가만가만히 걸었다. 한참 걷고 있는데 소낙비가 쏟아졌다. 우레 소리가 천지를 울리고 쏟아지는 비는 사정없이 막 퍼부어 내렸다. 우리는 모두 검은 옷을 입었고 보따리도 검은 빛이라 번갯불이 번쩍여도 얼른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있었다. 우레 소리와 함께 비는 계속해서 억수로 쏟아지는 고로 우리는 전신이 물에 빠진 생쥐같이 되어 버렸다. 빗물은 속옷까지 스며들고 비는 얼굴에 막 퍼부어서 눈을 감고 그저 발이 움직이는 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캄캄한 밤길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고 가고 또 가노라니 어디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퍼부을 때는 빗소리뿐이더니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우리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전진 또 전진만 했다. 아무 말 한마디 없이 자꾸만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동녘 하늘이 터지기 시작하고 비는 멎어 간다. 동쪽 하늘의 구름이 갈라지더니 다정한 아침 햇빛이 우리를 환영하듯이 비쳐 왔다.

할렐루야!”

 

우리는 한소리로 다같이 감격의 함성을 울렸다. 우리는 모두 기쁨에 넘쳐서 춤을 출 듯했다. 산비탈로 올라오는 해는 웅장하고 화려한 광선을 검은 구름 사이로 활짝 펴고 그 큰 팔 같은 광채를 벌리면서 우리를 반겨 맞아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소리를 높여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음악가인 언니 사위 조광혁 선생은 높은 테너로 또 다른 청년들도 모두 힘껏 소리를 내어서 화음을 맞춰 불렀다. 38선은 벌써 지나온 것이다. 소낙비가 쏟아지던 지대가 바로 38선이었다고 동행해 온 장사꾼이 설명해주었다. 38선을 넘을 때 주님은 소나기로 우리를 감싸주신 것을 알고 모두 감격하고 감사했다. , 이로써 그 못된 러시아 군과 공산당을 영원히 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