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만두 장사하던 아버지(손문준 목사에 따름)

  선지자선교회

아버지는 190263일 경남 함안에서 부친 손종일과 모친 김은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 났다. 할아버지의 불같은 뜨거운 신앙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믿음의 일꾼으로 키워졌다. 지혜롭되 냉정하지 않고 온유하되 허약하지 않은 소년이었다

 

물 맑고 경치 좋고, 인심 좋은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집안 분위기나 할아버지의 열성에 힘입어 일찌감치 기독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11살 되던 해, 1913년에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은 동방요배(東方遙拜)라 하여 그들의 임금인 천황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의 의기(意氣)를 지키며 살아가기 힘든 때였다.

 

더구나 아버지가 다니던 학교 교장은 일본인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인근의 다른 소학교는 동방요배의 규칙이 없는데 유독 그 학교만 동방요배를 철저히 시키고 있었다. 그 일본 교장은 마음이 강팍했고,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기독교라면 이것저것 따져 묻기도 전에 우선 반대부터 하고 보는 인물이었다. 아버지에겐 그 학교에 입학한 것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아침 조회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동방요배의 순서가 있었다. 그 시간이면 다른 아이들은 별 거북함 없이 다들 절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싫은 느낌을 갖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감시의 눈과 체벌이 두려워서 형식적인 절을 하는 것이었다. 약소민족의 설음은 어린 학생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수없이 들어 온 십계명에 기록된 우상 숭배 금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다른 학생들이 고개를 숙일 때 꼿곳이 쳐들고 있었다.

 

완악한 일본 교장이 그런 아버지를 가만둘 리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경고와 위협을 되풀이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동방요배를 거부하자 교장은 직접 아버지를 불렀다.

 

네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천황께 절하기를 거부하는데, 예수 믿는 것은 너희 자유이나 국법을 어기는 것은 죄다. 내 말을 알겠느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인즉 아버지가 예수 믿는 다는 사실이 더 못 마땅했던 것이다. 진작부터 아버지를 혼내 주겠다고 벼르던 그인지라 목소리 뿐 아니라 얼굴 표정마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린 나이지만 침착하고 담대했다.

 

저도 국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중하고 경한 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법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천황에게 직접 절을 하는 것이라면 웃어른에게 대한 경의에 대한 표시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무턱대고 동족을 향해 절을 하라 하니 이는 명백한 우상 숭배입니다.

 

나이가 어려도 아버지의 대답에는 조리가 있고 함부로 꺾을 수 없는 결연함이 있었다.

예끼, 발칙한 놈, 네가 믿는 하나님은 중하고 민족의 태양이신 천황 폐하는 경하단 말이냐?

 

하나님은 온 우주에 오직 한 분뿐인 유일신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교장은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몇 마디 더 회유와 위협의 말을 늘어놓았지만, 어린 소년의 굳은 신앙의 절개를 꺾지는 못했다. 그의 말은 이치가 맞지 않는 괴변이었고, 아버지의 대꾸는 유일한 진리인 성경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힘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일본인 교장이다. 흥분한 교장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이 붓도록 거푸 따귀를 때렸다. 아버지의 코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못된 놈, 오늘로 당장 너를 퇴학시키고 말겠다.

교장은 제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른과 아이요, 선생과 제자의 관계이지만 참 어이없는 엄포가 아닐 수 없었다.

 

볼이 퉁퉁 부어 학교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위해 할아버지는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주님, 이 부족한 것의 미천한 아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일꾼 되기 위해 제 아들을 더 큰 망치로, 더 강한 힘으로 두드려 주옵소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꾼이 될 때까지 망치질을 아끼지 말아주옵소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면서 그까짓 학교 안 다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교장의 엄포 따위는 애초부터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인데 무엇이 두렵고 어느 누가 겁나겠는가?

 

나중에 그 일본인 교장은 아버지를 퇴학시키지도 못하고 자신이 먼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를 먼저 쫓아낸 것이다.

 

아버지는 무사히 보통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17세 때 할아버지가 세운 칠원교회에서 맹호은 선교사님께 세례를 받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바로 중학교에 들어 갈 수 없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농사꾼에 불과했던 할아버지는 아들을 공부시키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공부에 대한 갈망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앞으로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편이 안 된다고 해서 그냥 주저 앉아버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배워야했다.

 

궁리 끝에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 스스로 돈을 벌며 학교를 다니기로 결심했다. 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낮에는 학교에 가고 밤에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추위와 싸우며 만두를 사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주로 안국동 네거리에서 창덕궁 쪽으로 반달음질 치며 만두를 팔았다. 힘들고 처량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육신의 고달픔이나 혼자라는 외로움 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조소였다. 어디에나 기독교에 대한 몰이해와 핍박이 있었다.

 

어쩌다 남보다 만두를 적게 팔고 온 날이면 주인아저씨와 동료로부터 악의에 찬 조롱을 들어야 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하더니 그까짓 만두도 다 못 팔게 하더냐? 위대한 하나님이 만두 장사 안 한다고 해서 너 하나 못 먹여 살리겠냐? 등등의 야유가 이어졌다. 그러나 정말로 견디기 힘든 것은 야유와 조소보다 주일에 장사를 강요당하는 것이었다. 주일에는 다른 날 보다 매상이 많이 오르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기 위해 장사를 쉬려는 아버지를 주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갖은 방법으로 아버지를 회유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혹은 공부를 위해 주일을 지키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굶어도, 못 배워도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앙이었다. 그 대신 아버지는 항상 남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구석구석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해 놓고 주인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다.

 

주인은 결국 아버지의 믿음을 꺾는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믿음을 용납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를 꺾지 못한 대신 너는 다 좋은데 단 한 가지 예수 믿는 게 나쁘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를 내쫓고 말았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갈 곳 없는 아버지는 주인에게 하루만 더 여유를 달라고 사정했으나 허사였다.

 

쫓겨난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이 친구 저 친구 집에 찾아가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사정 이야기를 했으나 모두들 불신자인지라 이해할 수 없다며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고 주인에게 다시 빌고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그런 생각으로 고학을 하려면 서울 장안에서는 아무데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간 모아 둔 돈도 다 써 버리고 삼일을 굶어야 했다.

 

막다른 골목에 선 아버지는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 70전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 돈은 십일조다. 굶으면 굶었지 , 십일조 도둑은 안 돼 하며 그 당시 아버지가 다니던 안국동교회에 바쳤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어떤 집에 고용되더라도 주일을 성수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일자리를 얻기란 참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곳 저 곳을 전전하며 학업을 계속했다.

 

주일에 일을 시키면 그 곳에서 나와 다른 일자리를 찾았고, 그 일자리도 주일에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미련 없이 그만 두었다.

 

아버지는 부득이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도우며 1년 정도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못 다한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작정했다. 일본스가모 중학 야간부에 입학을 했다. 역시 고학이었다. 낮에는 신문 배달과 우유 배달을 해서 학비를 충당했다. 서울중동중학교에 다닐 때 보다 훨씬 더 힘이 들었지만 묵묵히 참아 내고 오직 공부에만 매진했다.

 

물론 일본 땅이라 해서 아버지의 신앙심이 약해질 리가 없었다. 주일이면 신문 배달도 중단하고, 동경선교회에서 하는 노방전도에 동참하여 북을 매고 거리를 돌아다니곤 했다.

 

마음이 무겁고 심란하면 고요한 숲 속이나 공동묘지 같은 곳으로 찾아가 소리 내어 기도를 종종 드렸다. 왕 모기들이 우굴 거리는 곳으로 유명한 갈대밭에 나가 밤 기도를 하곤 했는데 이는 졸음을 쫓기 위해서다. 깜박 잠이라도 들면 왕모기가 물어뜯어 잠을 쫓아 주곤 했다.

 

또한 늘 성경을 지니고 다니며 성경 읽기에 열중했다. 불현듯 고향이 그리워지면 정성껏 식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고향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하루라도 빨리 내 조국 내 땅에 돌아가 복음 전파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조급해 하던 아버지는 동경 쓰가모 중학을 졸업하고(1923) 결국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전도자가 되기 위해 귀국했다. 할아버지가 늘 기도해온 대로 황무지 같은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할아버지 앞에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아버님, 저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이 땅을 밝게 비추는 등불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사람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로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울컥 기쁨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

하먼! 참말로 잘했데이, 내 진작부터 기도하고 또 짐작은 했다 만은 네 결심을 직접 들어니가네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구나. 이 애비도 죽을 때까지 널 기도해 주꾸마.

 

그 당시만 해도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부모나 친지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듯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길이 워낙 힘든 가시밭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경우는 달랐다. 반대는커녕 오히려 격려와 기대 속에 출발하게 되었으니 이 역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곧 바로 진주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했다.(19263). 이 학교에서 주기철 목사를 만났다. 주 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바로 은혜의 부흥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주 목사에게서 순교의 정신의 맥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또 주기철 목사는 아버지를 향해 손군,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지만 위대한 인물이 날 터이니 위인전을 많이 읽어서 위대한 인물이 되도록 준비하라!고 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성경 66권의 오묘한 진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역시 고학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훌륭한 후원자였다. 이제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맏아들을 하나님의 사도로 만들기 위해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불같은 신앙이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더 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다. 할아버지의 추모식 때 내가 읽었던 구절인데, 그 말씀은 아버지가 애양원에서 일경들에게 잡혀가던 1940925, 할아버지가 흡사 유언처럼 남긴 말씀이다. 할아버지는 형사들 앞이라 긴 말씀 안하고 잡혀가는 아버지 등에 대고 담담하게 말했다.

 

애비야, 누가복음 962절과 마태복음1037절을 마음에 깊이 새기레이.

당시 어린 소녀였던 나는 할아버지의 추모식장에서 그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마구 울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62)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를 십자가에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7-39)

 

이것은 실로 위대한 유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를 향한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었다.